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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3 목양칼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다고 하여서 보기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선포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바라시는 일이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단지 몇 시간 사이에 재앙이 닥쳤습니다. 평화롭던 오후, 따뜻한 봄볕이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중에, 재앙은 야수(野獸)처럼 덮쳤습니다. 이미 천 명이 넘는 희생자가 확인되고 있고, 아마도 그 수치는 더욱 커질 것이 확실합니다.

어제까지 우리와 함께 이 땅을 밟고 살아가던 그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잃고 목숨까지 잃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잃습니다. 지구상에서 자연재해에 대하여 가장 대비가 잘 되어 있다는 나라에서 이처럼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한 것을 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그토록 경고하고 있었던 바로 그 일이 지금 우리의 목전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안전하다 할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이를 수 있고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짐을 두고서 순식간에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하여 깊이 마음에 새겨 배우기를 원합니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재앙을 딛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재앙이 끝난 것인가를 가늠하기 위하여 조금 더 지켜봐야 하고, 이미 생겨난 불을 꺼야 하며, 무엇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번 기회에 결코 방관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로 전도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손해를 감수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이 재앙을 통해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목숨과 모든 소유의 주권자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 지음을 받았고,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소유권을 주장하고 세상에서 왕이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그분의 나라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이 땅의 것을 버리면 오히려 더 영원한 것을 예수님의 품 안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이 곧 기회입니다. 평상시에는 결코 열 수 없었던 일본의 마음을 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땅의 치유를 위해 구경꾼이 되지 말고 앞으로 나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동경드림교회에 용기와 결단력을 주시기를 구합니다.

마라나타!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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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6 목양칼럼


삶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최선(最善, The best)을 다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의 태도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확장하고 더 가치 있고 탁월한 사람이 되도록 인도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주위를 살펴 보니, ‘최선’이라는 것이 유동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제의 최선과 오늘의 최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성장하고 변하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가 처한 현실도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습관에 안주하기를 잘 합니다. 늘 하던 만큼의 범주 안에서 그것을 자기의 최선이라고 착각하고 더 노력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우리의 가능성을 죽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와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데도 자신을 낮게 평가하고 더 노력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런 자신의 삶을 ‘최선’이라고 힘주어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목회자의 눈으로도 이런 모습이 안타까운데, 하물며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심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원형을 다른 피조물에서 취하지 않으시고 바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원한다면 사람은 평생을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항상 겸손한 태도로 배우려고 하십시오.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 자기의 것으로 삼고자 하십시오. 자기를 어떻게 하면 더 훌륭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갈 수 있을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현실 속에서 그런 생각이 구체적인 행동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삶의 대부분은 습관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습관은 무서운 것입니다. 습관은 어느 정도 타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으려고 저항하며, 언제나 편안 하려고만 하는 욕망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방치하면 사람은 게으르게 되기 쉽습니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물론 쉬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적당한 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를 분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쉬고 싶은 욕구와 무언가를 해야 하는 필요가 서로 충돌할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최선’입니다. 

‘최선’은 할 수 있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좋고 나쁨의 감정과 상관 없이, 내가 가진 현재의 한계를 깨뜨리고 그 너머의 미지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한 번도 그렇게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장은 낯설고 힘겨울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최선’을 경험하고 나면, 비로소 자기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고 기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의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개척해 가는 사람을 프론티어(frontier)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바로 영적 프론티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나는 이런저런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나약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 한계는 깨뜨려지기 위해 있는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 분명히 깨뜨려질 수 있습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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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7 목양칼럼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 갈수록 꿈은 사라져 간다고 말을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만만하지 않은 세상에 직면하며 자신감은 사라지고 꿈은 시들어 갑니다. 그렇습니다. 평생 가슴속에 꿈을 간직하고 살기에는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래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세상을 건너고 있지만, 나이를 먹어도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간절한 열망으로 피어나는 꿈이 내 가슴에는 있습니다.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연기 피어나는 포기의 순간, 이제는 모든 것이 끝이 났구나 하고 생각을 해도, 다시 가슴 깊은 곳에서 불꽃처럼 일어나 나를 전율하게 하는 꿈이 내게는 있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모순입니다. 말한 것을 다 지키지도 못하고, 자기중심의 허울을 다 벗지도 못했습니다. 나는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합니다. 때로는 희망을 말하면서도 절망하고, 믿음을 외치면서도 불안에 떱니다. 자기를 변명하는 덧칠을 해대기도 하고, 나를 편들어 달라고 엄살을 떨기도 합니다.

그 모든 진실이 새벽마다 뼈아프지만, 나의 실체가 내가 미치고 싶은 꿈과 너무 멀어서 절망하고 또 절망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꿈이 내 가슴에는 있습니다.

나는 교회를 세우고 싶습니다. 실체가 언어로 변해버린 시대에서, 다시 말씀을 실체로 바꾸는 교회를 세우고 싶습니다.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믿음을 통해 진실한 하나의 가족이 되는 교회, 신앙이 소유보다 중요해서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교회, 겸손과 온유함이 자라가는 교회,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는 교회,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교회, 시대를 생각하고 미래를 제시하는 교회, 아이들의 꿈을 소중하게 가꾸고 자라게 하는 교회, 성경에 나오는 신앙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외치는 교회… 바로 이런 교회를 이 땅에 세우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소박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분이 내게 주신 이 꿈이 얼마나 창대하고 버거운 것인가를 실감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꿈이며, 또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꿈입니다. 어쩌면 불가능한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 손이 닿지 않는다고 하여서 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니, 지금 내 손이 닿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갈망하는 몸짓으로 다가가려 합니다.

나는 자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교회를 말로만 외치지 않고, 나의 인생부터 그 든든한 주초가 되게 하기 위해 더 크고, 깊은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상처에서 꽃을 피우고, 역경에서 지혜를 배울 것입니다. 더 낮아지고 가난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해서, 마침내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시는 예수를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이 내게 그런 교회를 보게 한다면, 나는 춤추고 또 울다가 홀연히 그분의 나라로 옮겨갈 것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꿈을 이해하지 못하면 나의 가족도, 친구도 될 수 없습니다. 꿈은 내 생명입니다. 내 마음의 불꽃이며, 나의 이유입니다.

당신에게도 어떤 꿈이 있습니까?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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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0 목양칼럼

 

부모의 사랑은 아이들이 더우면 걷어차고, 필요할 때는 언제나 끌어당겨 덮을 수 있는 이불 같은 것이어야 한다. 얼마 전에 별세한 작가 박완서의 고언(古言)이다.

돌이켜보면, 거절과 실망을 넉넉하게 감수하는 사랑은 멀기만 하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는 즉시로 실망감을 드러내거나 상처를 안긴다. 너그러움은 노력해도 쉽게 생겨나지 못하고, 옹졸함은 언제나 마음에 스며들어 나를 놀라게 한다.

언젠가 어머니와 나란히 걸으며 물은 적이 있다. 당시의 나는 아이들의 버릇 없는 행동과 집안에서의 잦은 마찰로 고민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하셨다. 아이들을 너무 어른으로 보지 말라고. 아직 아이이기 때문에 버릇도 없고, 고집도 부리는 것이라고. 참아주고 기다리면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결국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내가 우려했던 것들을 대부분 극복했다.

성장하면서 더 어려운 고민들이 생겨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보다는 자신들이 경험하고 깨달으며 배워나가는 것이 대부분이 아닐까 한다.

부모란 그 성장과정에서 든든한 우군이요, 동행자가 되어주는 역할이 아닐까? 아무리 실수하고 어리석은 짓을 하더라도 항상 같은 자리에서 조용하게 지켜보며 모든 것을 내어주는, 아낌 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나이를 먹어가도, 어머니의 음식은 항상 같은 맛이고, 아버지의 손은 항상 그렇게 따뜻했으면 한다. 그 손이 아이들을 끌어주고, 때로는 어깨를 다독거리며, 모진 세상에 위로가 되고, 쉼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유명하고 유력한 부모 보다는 평생을 따뜻한 부모일 수 있기를 원한다. 걷어차도 결코 떠나지 않는 이불 같은 존재로서 말이다.

목사의 일도 같은 일이지 싶다.

열정적인 모습과 몇 마디의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도 사람의 바탕은 쉽게 감출 수 없다. 결국에는 드러나는 것이 사람의 바탕이다. 그리고 그 바탕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아이가 자라듯이 신앙이 자라는 과정도 세월을 필요로 한다. 그 과정 동안에 믿어주고, 사랑하고, 기다려주는 것이 목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누군가 말하기를, 아이들은 밥이 아니라 부모의 시간을 먹고 자란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소중하다. 자기를 위해 가장 쓰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시간일 것이다. 그런데 자식은 그 부모의 시간을 대부분 차지한다. 그 숭고한 헌신이 없이는,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결코 자라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나는 지금 모험을 하고 있다. 내 아이들과 양떼를 위해. 그렇다고 무엇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자기들 편이라는 것만은 알았으면 좋겠다. 비록 부족하지만, 그래도 항상 사랑하려고,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아버지요, 목사라는 사실만은 알았으면 좋겠다.

그것만 알아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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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3 목양칼럼

 

사람의 심리적 약점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이기심이 아닐까 한다.

이기심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게 한다. 그래서 이기심에 정복당한 사람은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만이 피해자라고 느끼지만, 실상은 옳지 않으며 오히려 가해자인 경우도 있다.

요셉을 이집트에 노예로 팔았던 요셉의 형들도 그러했다. 요셉이 아버지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고자질 한다는 이유가 그들을 흥분시켰다. 그들의 눈에 요셉은 죽어 마땅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에게는 4명의 아내가 있었고, 요셉의 어머니는 요셉과 베냐민만을 출산했다. 결과적으로 요셉이 어린 시절부터 형제들 사이에서 소외를 경험했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특별히 더 신경을 썼을 것이고, 그 특별한 보호가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화(禍)를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요셉의 형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셉은 처음부터 배반자요, 아첨꾼이었다. 요셉으로 인해 그들만이 손해를 보고 있었다. 이런 일방적인 생각이 마침내 살인을 모의하고, 열 명이 힘을 합하여 한 명을 테러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목회자의 입장이 되니, 항상 ‘편들기’의 오해를 경험한다. 물론 사람이 아무리 중심을 잡아도 가끔은 기울고, 공정하지 못하다. 그러나 결코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더구나 때로는 마치 요셉과 같이 특별한 도움이나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사정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할 수도 없다. 결과적으로 오해를 불러올 만한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오해할 만한 경우가 생기더라도, 기본적인 신뢰가 목회자와 신자 사이에 있다면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사람은 이기적이다. 앞에서 말한 요셉의 형들처럼, 자기 입장만 있고 상대의 입장에 대하여는 무지한 경향이 오해를 키우고, 신뢰를 흔든다. 객관적인 사실은 확인도 해보지 않고, 자기 생각의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오해와 상처를 키우는 미련한 양떼들이 현실에는 적지 않게 있는 것이다.

흥분하지 말고 조용히 골방에 앉아 기도해 보라. 내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 대하여 생각하라. 이기심의 비늘을 눈에서 걷어내고, 상대만이 아니라 나도 함께 보려고 노력하라. 

사람은 상대적이다. 뭔가 불편한 것이 있다면 분명히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나에 대하여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기심을 경계해야 한다. 자기 중심적인 경향은 하나님의 은혜를 막아 버린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치고 은혜를 지속적으로 경험하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기독교의 신앙에서 ‘사랑’을 빼면 남는 것은 위선뿐이다. 이기심은 그 위선의 씨앗이다. 가장 중요한 것들 중에서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신앙의 모든 가치 있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항상 조심할 일이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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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6 목양칼럼


성경을 알아갈수록 성경에 대한 경외심을 품게 된다.

고대에는 성경과 같은 방대한 저작이 다시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출판이 편리해지면서 성경보다 더 다양한 스토리와 많은 분량을 가진 책들이 넘쳐난다. 그러니 성경이 과거에 비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덜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이 성경을 연구한 역사가 이미 2천 년에 이르고 있다.

때문에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성경은 연구되었다. 고고학에 바탕을 둔 문화?역사적 해석, 다양한 철학의 방법을 동원한 철학적 해석, 그리고 성경을 문학작품으로 다루는 문학적 해석, 심지어 성경에 나타나는 숫자들의 상징성에 대해서까지 이미 다 꼼꼼하게 연구되었다.

더구나 20세기 말에는 본문비평과 같은 방식들이 ‘성경’을 거룩한 하나님의 계시에서 인류의 문화유산 정도로 格下(격하)하고, 아예 아무런 경외심 없이 성경을 난도질 하였다. 결과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편지에서 인간의 책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은 인류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책이다. 자유주의 학자들이 아무리 성경은 허구라고 떠들어도,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엄숙한 고백을 선언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에도 끊이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20년을 넘게 성경을 연구했다. 처음 신학을 시작할 때에는 10년 정도이면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보니, 오히려 나는 바닷가에서 한 바가지에 물을 들고 서 있는 소년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은 바다와 같고, 내가 아는 지식은 한 바가지의 물에 불과하다.

성경은 열려진 책(Opened Book)이다. 그 풍부한 비유와 상징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지혜와 지식을 얻는 만큼 성경은 보이고 드러난다.

우주의 기원과 자연의 법칙과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원리들을 발견하고 성경을 보면, 성경은 이미 그것들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늘 읽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것은 우리가 몰랐기 때문이지, 성경이 엉뚱한 대답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성경을 비과학적이라고 몰아가는 비방이야말로 무지한 폭언(暴言)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편지이다. 그 안에는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이지 엄청난 진리들이 아직도 빛나고 있다. 마치 시시한 가로등 밑에서는 찬란한 별빛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가 이미 다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교만으로 인해 성경이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경드림교회에서 순수과학을 전공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목사로서 그들에게 간절하게 권한다. 성경을 보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살피면, 분명히 인류의 역사에 기여할 탁월한 발견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을 깊은 신비로 인도할 영감과 자극들이 성경 속에는 무수하게 숨겨져 있다…

무엇보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도한다. 이 한 가지 만으로도 성경은 세상에 비할 것이 다시 없는 소중한 보배이다. 성경을 많은 책 중의 하나, 혹은 재미 없고 딱딱한 遺物(유물)로 취급하지 말라. 이 보다 더 바보 같은 짓은 없기 때문이다.

샬롬~


Japanese Version


聖書は深く埋もれた宝だ

2010-02-06-牧羊コラム

 

聖書について知るほど聖書に対する尊敬心を持つようになる。古代に聖書のような莫大な著書は存在しなかった。だが今日に至って出版が便利になり聖書よりもっと多様なストーリーや分量を持った本が溢れている。聖書が過去に比べ人々の視線を集めないのは当然のことだ。その上聖書を研究した歴史がもう二千年に達している。だから人間ができる全ての方法で聖書は研究された。こう工学に背景をおいた文化、歴史的解析、多様な哲学の方法を駆使した哲学的解析、また聖書を文学的作品として扱う文学的解析、そのうえ聖書に表れる数字が持つ象徴性についてまでもう全て細かく研究された。また二十世紀末には本文批評のような方法で「聖書」を聖なる神様の神託から人類の文化遺産程度に格下げし、何の尊敬心もなく聖書を侮辱した。結果的に聖書は神様の手紙から人間の本に転落する受難を受けた。なのにも関わらず、今もまだ聖書は人類に一番影響力を及ぼしている本だ。自由主義学者たちがどんなに聖書は空虚なものと声を上げても、聖書の中で神様を経験したという厳粛な告白を宣言する人々はこの時代にも途絶えていない個人的にも私は今まで二十年ほど聖書を研究した。最初神学を始めるときは十年程度だったら聖書全体を理解できると思っていた。だが今に至ってみると、逆に海辺の前でいっぱいの水を持っている少年のようだと感じる。聖書は海のようで、私の知識はいっぱいの水に過ぎない。

聖書は開かれた本(opened Book)だ。その豊富な比喩よ象徴がそれを可能にする。私たちが知恵や知識を得るほど聖書は見え開かれる。宇宙の起源や自然の法則や物理学、化学、生物学の原理を発見し聖書を見ると、聖書はもうそれらの事を語っている。私たちがいつも読んでも知れなかったのは私たちが知らなかったからであって、聖書が間違った答えをしたからではないということだ。その点で私は、聖書を非科学的だという誹謗こそ無知な暴言だと思う。

聖書は神様の手紙だ。その中で私たちが知ることができないだけであってまだ膨大な真理が光り輝いている。言ってみればつまらない街灯のの下では輝く星の光が消えるように、私たちが全て分かったという傲慢さのせいで聖書がどんどんもっと見えなくなっているのである。東京ドリーム協会で純粋科学を専攻する青年たちがたくさん出ることを願う。そして牧師として彼らに切実に願う。聖書を見て下さい!神様を敬う心で聖書をみてみると、絶対に人類の歴史に残る卓絶した発見をできる。あなたたちを深い神秘に導かれる霊感や刺激たちは聖書には無数に隠されている。

何より聖書は私たちを神様の心に導く。このひとつを持っても聖書はほかの物と比べることのできない重要な宝だ。聖書をたくさんの本の中の一つ、またはつまらなく固い遺物として扱ってはいけない。これより馬鹿な行為はないからだ。

シャローム~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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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0 목양칼럼

 

신앙은 영원을 사모하는 일이다. 만약 사람이 태어나고, 살고,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고 믿는다면, 신앙의 모든 일은 부질 없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도 우리가 존재한다면, 신앙은 그 영원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성경은 사람이 죽은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말한다. 창조주요, 생명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았는가를 되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가르침이 맘에 든다. 만약 이런 일(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세상의 부조리들, 사람들이 살며 저지르는 수많은 과오와 잘못들에 대하여 어떻게 정의를 세울 것인가? 

악하고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막대한 권력과 재물을 소유해서 죽을 때까지 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죽은 이후에 역사의 심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죽어서 이미 흙이 되어버린 사람을 비판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단지 그것뿐이라면 과연 악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을 심판을 두려워나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시다. 그분이 죽음 너머에서 모든 사람을 기다리며, 각자 자기의 삶에 대하여 책임지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악한 사람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 받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시편1:5)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이외에는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도, 의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낙심하지 않는 방법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단지 우연의 산물(産物)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행복이 최상의 가치가 되고, 나의 행복을 위해 못할 일이 없다. 

실제로 역사 속에는 그런 가치관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남을 짓밟고 죽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조차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기 행복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덕이나 양심, 희생과 헌신의 삶은 위선이며 이해될 수 없는 바보짓이다. 본능이 전부이며, 그 본능적인 인생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람은 살고, 죽고, 그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삶에 대하여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 자리에서 진정한 승자와 패자가 갈릴 것이다. 영광의 면류관을 차지하는 사람도 있고, 부끄러움을 당하는 사람도 있으며, 영원한 저주와 형벌에 처해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심판을 통해 정의가 실현될 것이다. 세상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러니 신자들이여,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말라.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고 조급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보시고 있다. 지금이 아니라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갚아주실 것이다. 그분의 정의는 쇠하지 않는다. 실수하지 않으신다. 사람은 누구나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 이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아멘!


Japanese Version



神様の正義 を信頼しなさい

2011-01-30


信仰とは永遠に思望することだ。たとえば人が生まれて、人生を生きて、死ぬことですべてが終わると信じるのなら、信仰の全てはことはおろかな行為に過ぎない。だが死んだ後にも私たちが存在するのなら、その永遠を準備する過程が信仰である。

聖書は人が死んだ後は神様の審判を受けるといっている。創造主であり、生命の父になる神様の前で神様がくださった生命を持ってなんのためにどうやって生きたかを振り返るということになるということだ。私はこの教えが心に響く。万が一神様の審判がないのならこの世の中の矛盾や、人々が犯す数々の過誤や間違いに対してどうやって正義を貫くというのか?

極悪で非人間的なことを起こしてるのにも関わらず莫大な権力や財産を所有し死ぬまで栄華に浸る人々がいる。彼らが死んだ以後、歴史の審判を受ける事もあるが、これだけでは不足である。もう死んで土に返った人を批判するという事に何の意義があるだろうか?ただそれだけなら本当に極悪な人々が自分達が受ける審判について恐れるだろうか?

だが私たちには神様がいる。神様は死後の世界で全ての人々を待ち構え、各自自分の人生について責任をとるようにするだろう。だから極悪な人が審判に耐えることはできず、罪人が善人と認定されることも決してない。(詩篇1:5)

神様を信頼すること以外正義を実現する方法も、善人として生きていくことに落胆しない方法もないと思う。神様がいないと考えたとき、私たちは単に偶然の産物である。だから個人的な幸福が最上の価値になり、自分の幸福のためにはできない事がない。

実際に歴史の中でそのような価値観で生きてきた人々はたくさんいる。彼らは自分の既得権を得るために他人を踏みにじり、殺すことに躊躇しなかった。それなのに自分の心はなんともない。なぜなら自分の幸福のために生きていくことは当然だと考えているからだ。道徳や良心、犠牲や献身は人生の偽善であり理解できない愚かなことだ。本能が全てで、その本能的な人生以後には何もないと信じている。だがそうではない。人は生き、死に、その以後神様の審判を受ける。私たちは各自自分の人生を振り返るようになる。そしてその場で真の勝者や敗者がわかれるようになる。栄光の王冠を与えられる人もいれば、辱めを受ける人もいて、永遠ののろいや刑罰にさらされる人もいるだろう。この審判を通して正義が実現される。この世は偶然の産物ではなく、神様の統治の中にあるということが確実に表れるだろう。だから信者達よ、善を行っていて落心するな。他人が認めてくれないからといって悲しむな。今すぐに実が実らないといって焦るな。神様が見ている。今ではなく永遠の神様の国で応酬を下さるだろう。神様の正義は錆びることがない。失敗することがない。人は誰もが働いただけ応酬を受けるだろう。この事実を信じて生きていく人には福があるだろう。

(ガラテヤ6:9) 「わたしたちは、善を行うことに、うみ疲れてはならない。たゆまないでいると、時が来れば刈り取るようになる。」アー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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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3 목양칼럼

 


척박한 삶의 행복이란 기적과 같다. 행복을 사소하게 생각하고 뭔가 거창한 비전과 목적을 따로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이런 의견에 반대한다. 한 사람의 행복은 충분히 존중 받아 마땅하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스스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더 풍성한 생명, 이것이 바로 ‘행복’이다. 예수님은 단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실현하고, 만족을 누리며, 기뻐하는 생명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행복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사명적이다. 그 말은 우리가 삶에서 실현해야 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표현하는 여러 표현 중의 하나이다. 이를테면, 거룩한 그리스도인이나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 좋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과 행복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결과적으로는 하나라는 말이다.

행복은 이상한 기적(strange miracle)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도 스스로 불행에 빠지는 사람이 있고, 정말 척박하고 열악(劣惡)한 상황에서도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행복의 실현은 외적인 것에서 보다는 내적인 것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은 충분히 행복하지 못하다. 

성공한 가수가, 유명한 영화배우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정치인이, 대기업의 오너가 불행을 이유로 자살하는 사건들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지 않던가?

반대로 저소득층에 속하고, 고단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심각한 불행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나아진 현실을 감사하고 ‘행복’이라는 말로 자기를 표현하는 긍정적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행복은 마음의 문제이고, 마음은 신앙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올바른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 믿음은 환경을 바꾸기 이전에 우리 마음을 변화시킬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지금 당장 한 사람의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불행하게 느끼는 마음과 싸우라. 불행은 어쩔 수 없는 감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극복해야 하는 감정이다. 불안, 두려움, 미움과 같은 독소들 중의 하나이다. 때문에 불행하게 느끼는 마음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미소를 보여주라. 자주 소리 내어 웃으라. 가라앉는 감정을 조심하라. 우울한 느낌으로 주님의 일을 하지 말라. 할 수 있는 건강과 재능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지금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섬길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라. 

우리의 마음은 분명히 키를 가지고 있다. 방향이 정해지면 정말로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모든 것을 그 방향에 맞추어 해석한다. 때문에 행복한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실존의 문제이다. 그러니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샬롬~


Japanese Version


幸福なクリスチャン

2011-01-23 牧羊コラム


寂寞な人生に幸福とは奇跡のようなものです。幸福を粗末に考え、何かもっと大きなビジョンや目的を持たなければいけないと考える人たちも居ますが、私はこのような意見に対して反対です。一人の幸福は充分に尊重されるに等しいと思います。ヨハネによるイエス・キリストの福音にイエス様は自らをこう仰られます。

「盗人の目的は、羊を盗んだり、殺すことですが、私の目的は羊に命を与え、しかも豊かに与えることです。すなわち、人に本当の命を与え、それによって豊かな生活を送らせることです。」

(ヨハンの福音10:10)

豊かな命、これこそがまさに「幸福」です。イエス様はただ存在するだけではなく、価値を実現し、満足感を味わい、楽しむ命について仰られているのです。

なので「幸福なクリスチャン」という言葉は使命的です。その言葉は私たちが人生で実現するべき究極的な目標を表現する多くの表現の一つなのです。言ってみれば、神聖なクリスチャン、イエス様に似たクリスチャン、善いクリスチャンといった表現が結果的には幸福なクリスチャン一つだというのです。

幸福は不思議な奇跡(strange miracle)です。どんなに良い環境でも自ら不幸に落ちる人も居れば、本当に寂寞で劣悪な状況でも幸福を味わう人も居るからです。結果的に言えば、幸福の実現は外部的なものより内面的なものでその道を探すべきだと考えています。多くの人たちが幸せだろうと考える大部分の人たちは本当は充分に幸せではありません。

人気歌手や有名な俳優、最高の権力を持つ政治家、大企業のオーナー不幸を理由に自殺をするなどの事件は私たちに大きな衝撃を与えたではありませんか?

逆に低所得層に属し、苦難な職業を持ち、深刻な不幸を経験したにも関わらず少しでも良くなった現実に感謝し「幸福」という言葉で自分を表現する前向きな人達も居ることには驚きを隠せません。

結局幸福は心の問題であり、心は信仰の問題に帰結される。クリスチャンの心に正しい信仰心があれば、それは環境を変える以前に私達の心を変化させるに違いありません。そうしたら今、ここで一人の幸福なクリスチャンが誕生します。

全てにおいて不幸と感じる心と戦ってください。不幸はどうしようもない感情ではなくクリスチャンが克服するべき感情です。不安、恐怖、憎しみなどの毒の中の一つなのです。なので不幸と感じるのは決して自然な物ではないのです。

微笑を浮かべましょう。常に声を出し笑ってください。沈んでしまう感情を警戒してください。悲しい感情で神様の仕事に仕えないで下さい。仕事をすることが出来る健康と才能を下さった神様を称えましょう。今、自分が主の名前を背負い誰かのために何か出来るという事実に幸福を覚えてください。

私たちの心の中には舵(handle)を持っています。方向が定まったら実際にそう感じ考えるようになります。全てをその方向にあわせ解釈します。だから幸福なクリスチャンは徹底して実存の問題なのです。

だから今日の幸福を後回しにしないように! シャロー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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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6 목양칼럼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을 만들며, 행동은 인격으로 굳어진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하다. 그의 생각이 부실하면 재능과 기회가 있어도 소용이 없고, 그의 생각이 강인하고 바르면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마침내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야 마는 것이다. 

이 점은 성경이 무릇 지킬 만한 모든 것보다 더욱 ‘마음’을 잘 지키라고 충고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마음은 생각의 바탕이며, 생각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2011년을 시작하며, 무슨 생각을 품었는가? 물론 365일의 시간은 다른 해와 동일하겠지만, 그 시간을 살아갈 우리의 마음은 결코 과거와 동일하지 말아야 한다.

기대와 소망을 품고 목표를 생각하는 사람은 벌써 언어부터 변화가 엿보인다. 

뭔가 긍정적인 힘이 충만해 있고, 눈빛이 설렘으로 반짝거리고 있다. 

미리 속단하는 것은 경솔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목회자로서 이런 사람들을 기대한다. 그의 생각과 말이 변했다는 것은, 그의 행동과 인격에도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이 나무와 같다고 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 말은 변화된 사람만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서는 눈속임을 유발하고, 가끔 나쁜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행세하기도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우주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이 불꽃 같은 시선으로 모든 것을 보시기 때문에 결국에는 심은 대로 거두고야 만다. 

그러니 신앙 안에서의 좋은 열매는 사람이 변해야만 맺을 수 있다. 내 인격이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지 않고서는 성경이 말하는 목표에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다.

피상적인 신앙생활, 그러니까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으면서도 알맹이가 빠져버린 신앙생활을 조심하라. 말라기 선지자는 이런 신앙의 사람들을 성전의 마당만 밟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구체적인 변화가 따르지 않는 신앙생활은 그 만큼 허무하다.

2011년에 소망을 품으라. 바라는 것들을 다 수첩에 적으라. 어린 아이 같은 유치한 소원이라도 좋다.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소원이 있는 것이 건강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소원과 함께 격에 맞는 자신을 꿈꾸라. 변화된 자신을 디자인 하라.

성공을 꿈꾸는 사람은 실패에 저항한다. 행복을 꿈꾸는 사람은 불행에 면역이 생긴다. 성장을 꿈꾸는 사람은 노력하게 된다. 실력을 꿈꾸는 사람은 연습한다. 부흥을 꿈꾸는 사람은 전심으로 예배하고 기도한다.

꿈이 죽으면 사람의 생각이 죽는다. 죽은 생각은 죽은 말을 쏟아내고, 그 말은 제일 먼저 자신을 죽인다. 자살을 실천하지 않아도 이런 사람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 없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하여 주변의 사람들까지 죽어간다.

변하라. 변해야 산다. 변해야 우리가 바라는 교회를 세울 수 있다. 변해야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지금이 바로 변화를 위해 나설 때이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변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샬롬!



Japanese Version [日本語]


夢を見ているか?変われ!


2010-01-16 牧羊コラム

考えが言葉になり、言葉は行動を作り、行動は人格として確立します。だから人がどんな考えを持って生きているかが重要です。人の考えが浅はかなものだったら才能や機会があってもどうしようもなく、人の考えが強靭で正しければ苦難と逆境の中でも結果的に実を結びます。この点は聖書が「守らなくてはならないすべての物より自分の心をもっとよく守れ」と忠告したことにもよく表れています。それは心は考えの背景であり、考えの根本であるからです。2011年を迎えて、どんな考えを持ちましたか?もちろん365日という時間は他の年と同じでありますが、その時間を生きていく私たちの心は決して同一であってはなりません。期待と願望を持ち目標を考えている人は言葉から変化が見られます。何か肯定的な力で満ち溢れていて、眼差しは期待で輝いています。早く即断してしまうことは軽率かもしれませんが、私は牧会者としてこんな人たちに期待します。その人の考えと言葉が変わったということは、その人の行動や人格にも変化が始まっているという意味だからです。聖書は人を木に例えました、「いい樹木が悪い実を結ぶことはなく、悪い樹木がいい実を結ぶこともない。」この言葉は変化された人だけが神様が期待する肯定的な結果をもたらすという意味です。この世には人の目を欺き、時に悪人が善人のように振る舞いますが、信仰の中では有り得ないことです。宇宙の創造主である神様が炎のような視線で全てを見渡していて結局は全て自分の身に帰ってきます。だから信仰の中でいい実は人が変わらなくては結ぶ事はできません。自分の人格がイエス様の人格に似ていかなくては聖書がいう目標には絶対に到達できません。悲傷的な信仰生活、外から見れば何の問題もないが実のない信仰生活を気をつけなくてはなりません。マラキ伝道者はこのような信仰の人々は聖殿の庭だけを踏む人と表現しました。具体的な変化が伴わない信仰生活はそれくらい虚無なものであるのです。2011年には願望を持ってください。願うことを全部手帳に書いてください。子供のような幼稚な願望でも良いです。それでもないよりは願望があった方が健康的です。そしてその願望と格の合う自分を夢見てください。変化された自分をデザインしてください。成功を夢見る人は失敗に抵抗します。幸福を夢見る人には不幸に免疫ができます。成長を夢見る人は努力するようになります。実力を夢見る人は練習するようになります。復興を夢見る人は全身で礼拝し祈るようになります。嫁が死ねば人の考えも死にます。死んだ考えは死んだ言葉を生み出し、その言葉は一番最初に自分を殺します。自殺を行わないといってもそんな人はもう死んだの同然です。それだけではなく、それによって周りの人も死んでいきます。変化しなさい。変化しなければ生きれません。変化すれば私たちが望む教会を建てることができます。変化すればあなたに対しての神様の意思が行われます。今がまさに変化する時です。今でなければ一生変れないかもしれません。

シャロー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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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즐거움

2011-01-09 목양칼럼

 

내가 어린 시절, 교육은 항상 엄중(嚴重)했다. 선생님은 언제나 손에 매를 들고 다녔고, 이런저런 이유로 벌을 세우거나 매를 때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멀리서라도 선생님을 보면, 몸을 숨기거나 도망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솔직히 만나봐야 좋을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시절이 변했다. 체벌을 금지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교육 자체에 대한 시선이 변했다는 느낌이 든다. 말하자면, 엄중한 교육에서 재미있는 교육으로 교육의 전략이 변했다는 것이다.

물론 교육의 근본적인 목표는 인격(人格)의 실현이다. 여기에 그가 속한 사회와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고, 나아가 사회에 이바지 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목표가 더해진다.

인격의 실현이라는 근간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시대마다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래서 교육도 그 전략을 수정하고 다양한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 테면, 조선시대의 교육을 생각해 보자. 대표적인 교과서가 사서삼경(四書三經)이었다. 어렵고 심오한 책이지만, 이 책이 어린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텍스트가 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 비하여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일본에 와서 생활하면서 경험하니, 한자의 극복이라는 것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생활언어 이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교육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멈추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그야말로 평생교육의 시대이다.

금융과 IT관련 기업들이 전체 사원들에게 공짜로 아이폰을 지급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밖에서 보기에는 좋아만 보이겠지만, 과연 그럴까? 그 회사에도 분명히 40~60대의 사원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이폰이나,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모두 공부의 대상일 뿐이다.

솔직히 그냥 핸드폰이 핸드폰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사회는 사회의 변화에 적응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필요로 한다. 이 과정을 담당하는 것이 교육이다. 그래서 교육은 필연적으로 계속적인(ING) 교육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요즘의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죄를 짓다’와 비슷하게 느끼는 것도 이런 사회적 암시가 사람들의 무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압박감만 주는 것은 부작용이 많다. 오히려 자포자기(自暴自棄)하게 하거나, 도무지 효율이 없는 교육을 계속하게 만든다. 그래서 오래 공부를 지속시키면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았을 때, 놀랍게도 공부와는 완전히 반대라고 생각했던 ‘놀이’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공부, 이것이 새로운 교육의 화두(話頭)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공부라는 것은 한 번 시작하면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효율적으로 따라가야 한다. 폭발하듯이 팽창하는 과학과 인문학의 지식들을 되도록 자연스럽게 흡수하는 과정을 교육이 ‘재미’를 통해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두려움을 버리고, 재미를 느껴라.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공부에 다가갈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지금은 재미있게 공부해야 하는 때이다. 샬롬~


Japanese Version [日本語]


勉強の楽しさ

2011-01-09 牧羊コラム

 

私が幼いころ、教育はいつの時も厳重なものでありました。先生は常に手に鞭を持ち様々な理由で子供に体罰を与える人でした 。なので、先生がやってくると、隠れたり逃げる生徒もいるほどでした。会ってもいい事なんてなかったから...

ですが、今は世代が変わりました。体罰を禁止する社会的雰囲気のせいでもありますが、ある意味では教育自体に対する視線が変わったという気もします。言ってみれば、厳重な教育から楽しい教育へと教育の戦略が変わったとも言えます。

もちろん教育の根本的な目標は人格の実現であります。ここにその人が属する社会との関係を円滑にし、進んでは「社会を支える人を養成すること」という目標が足されます。

人格の実現とはその根本は変わらないのですが、人間が生きていく社会は時代に沿って素早く変わっています。だから、教育もその戦略も修正し様々な試みをやりかねないのです。

例えば、朝鮮時代(14世紀~19世紀)の教育を考えてみましょう。代表的な教科書は「四書三経」という本でした。この本はとても難しく深悟なものでしたが、子供から老人にかけて基本的な教科書となっていたという点は、今の時代に比較してみるととても単純でした。日本に来て生活しながら経験してみると、漢字を克服 するということも容易ではありません。ですが、生活言語以上のもの必要とする人はごく少数に過ぎません。結局、大半の人はある程度の教育を受けたら自然と止まってしまうのです。

ですが、今の時代は一生教育の時代です。

金融とIT関連企業が社員全体にi-phoneを無償で支給したという記事を目にしました。外部で見るにはとても羨ましい様に見えますが、果たしてそうでしょうか?その会社の40~60代の社員にとってはi-phone、ツイッター、フェイスブックなどがすべて勉強の対象になります。

正直、携帯電話は電話であればいいという考え方をする人もかなりいることでしょう。

社会は社会の変化に適応する事ができる人を持続的に必要とします。この過程を担当するのが教育です。だから教育は必然的に継続的な教育を指向しかねません。最近の多数の人達が「勉強をしない」ということを「罪を犯す」と似ているように感じるのもこういった社会的な暗示が人を無意識に支配しているからなのかも知れません。

ですが、圧迫だけを掛けることには副作用も多く自暴自棄にしてしまったり、まったく効率の無い教育を続けさせてしまう事があります。だから、長く勉強を持続させ一番効率よく勉強探した時、まったく違うと考えられた「遊び」という方法を発見したのです。

楽しい勉強、これこそが新しい教育の話頭です。何故かというと、今の時代の勉強は一度始めたら死ぬまで続けなければいけない物だからです、しかもとても効率的に...爆発的に膨張する科学と人文学の知識をできるだけ自然と吸収する過程を教育が「楽しさ」を通じて追及しているのです。

勉強が出来るようになりたいですか?そしたら怖がらず楽しんでください。どうすれば楽しく勉強に近づけるか考えてください。今こそ楽しく勉強をする時なのです。シャロー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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