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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친남을 아십니까? ]


'엄친아'는 '엄마 친구 아들'의 줄임말이다. 

이 녀석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잘 생기기까지 했다.

그래서 엄친아 때문에 세상의 아들들은 힘들고 불행하다.


그런데 요즘 엄친아를 추월하는 새로운 사람이 등장했다.

이름하여 '와친남'이다. 

이게 뭐냐고? ㅋㅋ 시대에 뒤떨어지셨군. 이것도 모르다니...

'와친남'는 '와이프 친구 남편'의 줄임말이다.

이 사람은 돈도 잘 벌고, 가사노동도 잘 도와주며, 성격도 좋고, 얼굴도 잘 생기고, 심지어 몸매가 섹시하기까지 하다.

엄친아가 그래도 미성년의 불완전체라면, 와친남은 그야말로 사람으로서는 더이상을 상상할 수 없는 완전체이다. 말하자면 성자이고, 슈퍼맨이며, 도민준이다.

세상의 모든 남편들은 이 와친남 때문에 시달린다. 심지어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며, 부부가 파경에 이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엄친아와 와친남은 모두 '비교'라는 부조리한 의식의 산물이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속담처럼, 다른 사람의 가정은 더 행복해 보이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인생은 왜소하게 여겨지는, 극단적 비교의식에서 생겨나는 부정적 자기 비하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하신 일은 실수가 없으시다. 모든 것은 가장 적당하며, 그 안에 숨겨진 고유한 가치와 목적이 있다. 나의 아들도 나에게 가장 적당하고, 나의 남편도 나에게 가장 적당하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면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한 번 뿐인 인생을 어찌 허비하려 드는가? 남과 비교하고, 스스로 좌절하고, 자기 식구를 비하하는 자학을 계속할 필요가 무에 그리 있겠는가... 엄친아보다 내 아들을 귀히 여기고, 와친남보다 내 남편을 귀히 여기며 사는 것이 더 행복할뿐 아니라 옳은 길이 아니겠는가. 


은혜는 단지 종교적 열심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더 격이 높은 차원으로 성장하게 하는 생명이다. 은혜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황금이 아니라 내 안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행복의 원인이다. 은혜는 자부심이며, 담대함이고, 아름다움이다. 그러니 어찌 이 은혜를 우리가 사모하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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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다 ]


종교개혁자들의 이 말은, 교회가 건전한 신학과 신앙으로 신자들을 훈육하여 자라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하고 실현하는 주요한 수단이며 은혜의 통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교회가 불완전하고 수많은 약함을 가진 경우에도 그러할까? 

교회를 통해 건전한 신앙의 훈육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의 상처가 늘어나며,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커져간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교회를 떠나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하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는 현실을 단지 잘못된 선택이라고만 매도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사람'이 필요하듯이, 교회를 통해 생겨난 신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역시 다른 무엇이 아니라 좋은 '교회'가 필요하다. 

건강한 교회만이 왜곡된 신앙의 물줄기를 바로잡고 신자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어머니가 아닌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아닌 교회들이 많아진 현실이다. 비유를 하자면 도박에 찌들고, 술에 인박히고, 심지어 집을 나간 어머니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결손가정'을 체험하고 있다.

시대적인 비극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고 헌신해야 할 사명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목사가 중요하다. 목사는 교회의 어른[長]이 아니라, 교회의 문지기다. 교회의 파수꾼이다. 교회의 건전함을 위해 부름 받은 종[slave]이다. 그래서 교회의 문제와 목사는 절대로 다른 몸일 수가 없다. 

설사 교회가 '암'에 걸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목사의 암이다. 남의 일처럼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가나안 성도'는 들어봤어도 '가나안 목사'는 들어봤는가? 

말 자체가 모순이고 코미디다. 가끔 목사라는 감투를 좋아해서, 도피와 세탁을 위해 '목사'가 되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야 그야말로 별종이고,  목사는 교회와 함께 태어나고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크고 부유한 교회가 아니라, '좋은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목적으로 하는 교회들이 함께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래야 이 땅에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래야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영광이 회복될 것이고, 교회의 주인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춤 추실 것이다. 그 사명을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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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평을 불평하다 ]


'불평'이라는 말은 아니불(不), 평평할 평(平)을 쓴다.

직역을 하면 평평하지 않다는 뜻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사전에서는 세 가지 뜻을 찾아볼 수 있다.


「1」마음에 들지 아니하여 못마땅하게 여김. 또는 못마땅한 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냄.

「2」마음이 편하지 아니함.

「3」병으로 몸이 불편함


결국 평평하지 않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소리다. 그 소리가 표정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이 불평이다. 그래서 그 불평의 뿌리는 환경이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결국 자기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평은 미숙함의 열매이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미성숙의 결과다. 그래서 사람이 책임감이 없고, 사려가 깊지 못하며, 남의 탓을 잘 하는 '어린' 수준에서 불평은 흔하게 발현된다.

반대로 자기 감정을 잘 갈무리하고 깊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불평을 사라지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한글 성경에는 '불평'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개역개정판에서 6회 등장하는데(아직 원어로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 3번이 시편37편이다. 그리고 그 세 번 모두가 "악한 자(의 형통)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시 37:1, 개정)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시 37:7, 개정)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 37:8, 개정)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의인은 의인의 길을 소신껏 걸어가면 그뿐인데, 그러지 못하고 자꾸 눈을 돌려 악인의 형통과 자기를 비교할 때에, 그만 연약한 마음의 올무에 걸려서 스스로 비참하게 되고, 그 병든 심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불평'의 정체인 셈이다.

결국 불평하는 자신을 불평해야 마땅하다. 누구라도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불평할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상황에서도 성숙한 사람은 불평하지 않고 감사를 꽃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불평'이 흔한 것은 그만큼 조급하고 저열한 신앙의 수준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더 깊은 인격과 신앙으로 자라가려는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나이를 먹고 머리털이 희어져도 불평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불평에 대한 진지한 불평이 필요해 보인다. 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기도할 제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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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정적 경건은 오히려 위험하다 ]

입에 은혜로운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말을 하든지 "할렐루야" "주여" "아버지" "성령님"을 연발한다. 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이런 사람들의 실체도 과연 경건할까?

말이 화려한 사람들일수록 '난독증'이 흔하다. 우선 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 잘 읽지 않는다는 말은, 성경을 읽어도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자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흔하여서 전혀 경건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한 신앙에 도움이 되는 도서와 글을 읽는 것에도 게으르다. 어쩌면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교만함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말을 많이 하는 사람 치고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논리의 모순을 간파하지 못한다. 이미 스스로 그 논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극이 필요하다. 독서와 묵상은 가장 훌륭한 자극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착각'을 일으키지 않도록 우리는 이런 자극을 지속적으로 필요로 한다.

불행한 사실은, 자기모순에 빠진 사람일수록 이런 자극을 멀리 한다는 사실이다. 거의 맹목적인 신념은 그렇게 탄생한다. 그리고 그 신념 속에서 신앙을 말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ego)'의 포장일 뿐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고, 시냇가의 심은 나무가 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듣기 좋은 말로 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고전 4:20, 개정)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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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에서 자유하기 ]


실패는 엄연히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은 실패를 통해 더 완성되고 성숙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두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실패하면 고생해야 하니까, 또한 남들이 무시하는 시선으로 볼까 봐, 그리고 한 번의 실패가 거듭 반복되어 인생 자체를 망가뜨리게 될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도 무시할 내용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인생을 살고 불행에 빠지는 사람들도 현실에는 적지 않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은 이익보다 손해가 많습니다.

인생을 소극적이게 하고,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행복은 성공의 마지막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의 과정 속에서도 마땅히 찾아져야 하는 것인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그 과정을 행복하지 못하게 흔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의 한 구석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면, 나중에는 아무 것에도 도전하지 못하는 무력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제일 불행한 인생은 실패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한 채 끝나는 사람의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도전하고 실험을 반복하고, 자기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 자기를 바꾸고 목표에 이를 수 있다면, 실패 또한 아름다운 과정의 한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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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내낼 수 없는 것들 ]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가 있다.

두 엄마가 비슷한 시기에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아기가 죽고 말았다. 두 엄마는 서로 살아있는 아기가 자신의 아기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난감한 이 사건은 결국 솔로몬의 재판장에까지 이르렀다.

왕은 고민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판결을 내렸다. 즉시로 아기를 둘로 갈라서 두 엄마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라는 것이다. 병사는 칼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두 엄마가 각각 뛰어나오며 외쳤다.


“제가 포기하겠습니다. 아기를 살려 주세요.”

“아닙니다. 왕의 현명하신 판결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엄마’와 ‘엄마노릇’은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르다.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도 있고, 품에 안아 잠을 재울 수도 있다. 더한 것도 흉내는 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다. 사랑은 결코 흉내로 되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 가지 영원한 것을 찬양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세 가지는 늘 의심의 구름에 덮여 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 가지를 흉내 내며 자기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비루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무례하며 폭력적인가? 또한 소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욕망은 우리 가운데 얼마나 흔한가? 믿음이라고 주장되는 미신과 독선은 이미 바닷가의 모래처럼 세상에 가득하다.


그렇다고 가짜가 진짜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솔로몬의 재판을 통해 보여지는 바와 같이, 진짜와 가짜는 결정적 순간의 선택을 통하여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흉내로 되지 않는 것이다.

대충 비슷하게 모양이나 흉내 내면서 살다가는 언젠가 반드시 큰 코 다칠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무는 그 열매로 자기를 증명하는 법이다. 믿음을 말하고, 소망을 설계하고, 사랑을 주장할 수 있어도 그런 것만으로 열매는 결실하지 못한다.


나는 내가 궁금하다. 나는 과연 진짜일까? 하나님의 재판장에 올라갔을 때에, 나는 과연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내 열매는 비슷한 것이 아니라 진짜일 수 있을까?

무수한 말들 속에서 고민한다. 주장과 지식이 실체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 속에서 깊은 갈등을 반복한다. 내가 바라보았던 것을 과연 손에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진실로 내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발견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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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너무 막연합니다. 


사람들마다 각자 자기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창고를 더 좋아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능력을 더 사모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뒷방 늙은이처럼 가만히 계신 분으로 믿는다 하고, 어떤 이는 주차부터 쇼핑까지 모든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도우미'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 모두가 자기의 믿음을 확신합니다. 결코 자신을 믿음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은 자기 편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망하는 순간에도, 믿음은 있었는데 때가 아직 아니라서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저는 평생을 신앙 안에 살았고, 사역자로 25년을 지났으며, 목사가 된 지도 어언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믿는다'는 말이 무척이나 생소하고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야말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판정해 주시는 단어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지요. 그 바라는 것이 과연 내 욕망과 같은 이름일까요?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지요. 내가 욕망하는 것은 얼마든지 내가 마음에 그리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바라는 것이 생겼을 때에, 그것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가 전혀 추측도, 짐작도, 어림도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생소하고 이질감이 느껴지는 소원의 실증적인 증거가 바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철저하게 하늘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주장하고, 확신하고, 공부하고, 의식하는 것과 상관 없습니다. 믿음은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스스로 믿음 있었다 하는 사람들이 주님과 쟁론할 것입니다. 내가 왜 믿음이 없냐고? 내 믿음이 왜 인정받지 못하냐고? 따지는 소리로 시끄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는 일입니다. 그분의 판단은 절대적이고 공의롭기 때문입니다. 

믿음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평생 헌신하고, 주의 일을 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었다 해도, 그것이 믿음 자체는 아닙니다. 지위와 거룩한 이름의 명찰은 더더욱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 믿음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묵상하십시오.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내게 있는가? 나는 무엇으로 나의 믿음을 확증하고 있는가? 나의 믿음을 과연 하나님께서도 인정해 주실까? 나는 믿는가? 정말 믿는가?

의심과 회의로서가 아니라, 겸손과 의뢰함으로 믿음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고민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있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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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한국에 들어갔을 때에, 나름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수재를 당한 이재민의 모습이 너무 비참했고, 안전을 이유로 흩어진 우리 성도들을 데리고 가야 할 앞날이 깜깜했다. 절망 앞에 선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그러면서도 내 앞에 교회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며칠이나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막상 그 많은 교회들이 있는 조국에서 나의 절박한 목소리를 외칠 방법이 없었다. 부모님을 따라 주일 예배를 드리러 갔던 교회에서는 마침 일본을 위한 헌금을 광고하고 있었지만, 목사님과의 면담은 서먹하기만 했다. 

선교지에서는 늘상 '거지본성'으로 도움만을 바란다는 듯한 느낌이 어금니 물고 견디며 복음의 종으로 살려고 몸부림쳤던 나의 자존감을 상하게 했다. 

목사는 누구의 종(노예)도 될 수 있지만 거지는 될 수 없다. 거지가 되는 순간, 목사 자신이 추락하는 것뿐 아니라 그의 복음도 추락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의 몰락이다. 몰랐던 현실의 경험은, 어떤 면에서는 대지진 못지 않게 나에게 내적인 충격을 주었다...


어려울 때에 친구가 나타난다고 했던가... 바로 그 때에 내 친구 김태윤 목사(장자교회)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이상했다. 선교지에 나와 너무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음에도 우리는 마치 어제처럼 젊은 시절 얘기를 나누고, 말이 통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난 장자교회의 강단에 섰고, 거기서 내 목소리를 힘껏 외쳤다. 그 이후로 장자교회의 성도들과는 지금까지 마치 내 교회의 성도들 같은 사귐과 교제가 이어지고 있다.


선교지에는 온갖 절박한 사연들과 목소리가 존재한다. 교회가 조금만 여유를 나누면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고통, 닦아줄 수 있는 눈물, 위로할 수 있는 한숨들이 많다. 복음은 그 '나눔'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복음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너무 잡음이 많다. 목사들의 인맥을 통해 성도들의 귀한 헌금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 들어가고, 그 덕분에 현장의 절박한 목소리는 오히려 멀어져 들리지도 않는다.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들이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다. 자기 학교 출신, 같은 교단, 자기교회를 거쳐간 사람들이 아니면 악수도 서먹하다. 그 좁은 시야를 깨뜨리고 현장을 깊이 보려고 하는 노력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선교지에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소통이다. 의외로 선교지에 있으면 축복 받은 한국교회의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광야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걸 나눌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물질과 신앙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서로 건강해지는 은혜가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방적으로 돕는 관계가 아니라, 나누고 격려하고 함께 걸어가는 관계로 한국교회와 선교지가 새롭게 묶여지면 좋겠다.


# 장자교회는 김포에 있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메시지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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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와서 외부의 교회를 다니다 보니, 교회마다 반듯해 보이는 성도들이 있다. 

그런 성도들을 보는 것은 기쁨이고 감사이다. 또한 나의 마음에 부러움도 슬쩍 일어난다. 왜 우리 교회에는 저런 성도가 없을까? 하는 생각에 슬퍼지기까지 한다.

목사에게 성도는 그야말로 애증의 대상이다. 깊이 사랑하지만 끊임없이 아파하게 되는 이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그것과 비슷하다. 잘 되면 계속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불안하고, 못 되면 그 못 되는 것이 자기 탓인 것만 같아서 아프다.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마음에는 늘 뭔가 아쉬움이 끓어 넘치는 것도 사실이다.


‘엄친아’라는 말이 있지 않나. 엄마의 친구 아들은 슈퍼맨이란다. 

공부도 잘 하고 말도 잘 듣고 거기다가 잘 생기고 운동도 잘한다. 심지어는 돈도 잘 벌고 결혼도 잘 한다. 

물론 엄마의 모든 친구의 아들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항상 자기 아들을 비교하는 대상으로 여러 사람 중에서 최상의 장점들만을 가져오기 때문에 생겨나는 모순이다. 

모든 것을 잘하고 모든 면에서 탁월한 사람은 있을 수 없는데, 자기 자식에게는 그 불가능한 소망조차 무모하게 품는 것이 부모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부모 마음에는 자식이 흰 머리가 생겨도 항상 ‘어린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곧잘 하는 성도라도 목양하는 목사의 눈에는 부족함이 보인다. 

이 부분만 좀 고치고 달라지면 참 좋겠다는 소망이 있다. 이것이 목사의 욕심이라면 욕심이고, 소망이라면 소망이다.

이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성도에게 참 유익하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성도를 망치는 이유가 된다. 목사의 기대를 통해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심하고, 분노하고, 망가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참 어려운 것이 목회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만 하는 것이 목회자의 처신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이미 알거니와, 모든 그리스도인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살다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게 되어 있다. 밖에 있는 성도들이 매너 좋고 훌륭해 보여도 막상 같이 한 두 해 신앙생활을 해보면 성깔 죽은 사람이 드물고, 언행에 모순이 없는 사람이 없다. 그것은 목사들도 마찬가지다. 가끔 보는 관계 속에서는 다 멋지고 훌륭해 보이지만, 겉옷을 벗고 속살을 마주하면 인간은 다 특유의 자기 냄새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한 가지 결론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옳으시다. 그분이 만나게 하신 섭리에 실수가 없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부족함이 없는 법이다. 당장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그 사람도, 내게 보내시지 않고 거기 두신 것은 거기가 가장 적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지금 만족하지 못하는 그 사람들이라도, 그들을 내게 보내신 것은 그들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야기는 성경으로만 들려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가장 확실한 은혜의 통로인 것은 확실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온 세상에 가득 차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환경과 만남을 통해서도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고 골방에서 신비한 체험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주신 현실을 지혜롭게 잘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면 거기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 감히 말하건데, 정말 늘 그러하다.


하나님을 믿어드린 후에, 내게는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조차 답답해 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이해하려고 안달하는 것조차 잊어가고 있다. 

어차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과 뜻은 내 적은 머리와 마음으로 다 담을 수 없다. 그분은 광대하시다. 그뿐만 아니라 선하시다. 나보다 훨씬 나를 잘 아시는 그분이 선하시다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선한 것이다. 그것은 이해의 차원에서 나오는 결론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에서 나오는 결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러울 것도 없고, 안타까울 것도 없다. 안 주신 것에도 이유가 있고, 주실 것이라면 반드시 때에 적절하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기다림이라는 것이 그렇다. 기다린다고 마음을 먹고 기다리면 너무 지루하고 힘들다. 제일 잘 기다리는 방법은 기다린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마음 한편에 갈무리하고 다른 일에 우선 몰두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기다림의 시간에 제일 적당한 선물이 고난이다. 고난을 만나면 사람은 기다림을 잊는다. 고난과 싸우는 것에 몰두하여 세월을 훌쩍 보낸다. 

그러는 동안에 약속과 소망을 잊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잊어도 잊지 않는 분이 계시다.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약속은 신실하며 언제나 적당하다. 가장 빛나는 타이밍에 가장 선한 방법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고난은 놀라운 은총이다. 하나는 기다림을 채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시간을 통해 내적인 성장을 돕는 것이다. 하여,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저주가 아님이 분명하다.


남의 인생을, 남의 목회를, 남의 형편을 부러워하지 말라. 

가까이 보면 다 거기서 거기에 불과하다. 소망의 대상은 환경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오직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만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신다.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고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다른 모든 것은 부수적이다. 

그래서 시편기자의 이 외침은 우리를 뭉클하게 한다...


(시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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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고통을 몰아내주지 못한다면
철학은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

-- 에피쿠로스의 경구 --


꼭 실용적인 입장이 아니라도, 실용성에서 완전히 이탈된 지식이란 그 가치를 인정하기 힘든 법이다.
성경에서 '알다(know)'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심지어 '성관계'를 암시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만큼 지식과 체험은 그 경계를 명확하게 단정하기 힘든 공통의 무엇이다.

선지자가 '하나님을 알자!'라고 외쳤을 때에, 그것은 당연히 머리와 지식의 권면만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옳다. 그것은 다분히 경험적이다.


신앙이 현실을 지배하고 해결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것이 한 가지 이유라고 감히 주장한다. 그것은 신앙이 가지는 변곡점, 그러니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경험하는 것의 전환점을 지나지 못한 까닭이다.

물론 이렇게 신앙의 차원이 달라진다고 하여서 항상 기적이 일어나고 바라는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램프의 요정, 지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곡점을 지나서 하나님을 경험한 신앙은, 적어도 무력하지 않다.
일단 이 전과 후로 사람이 변한다. 옛날의 소원이 더이상 소원이 아닌 것이 되고, 옛날에는 결코 바란 적이 없는 것을 너무도 간절히 바라는 변화가 생겨난다.

그리고 소원의 변화는 응답과 직결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소원을 가지는 자는, 간단하게 말해 하나님의 동업자이다. 하나님과 동업하는 자의 사업이 망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라는 자의 소원이 실패할 수 있겠는가?


많은 경우에 있어, 신앙의 문제는 교활함이다.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그 실체는 자기의 욕망에 뿌리 내려 있는 소원이 사람을 주장할 때에, 강렬한 소원이 심지어 하나님마저 압도하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거룩해 보이는 소원과 상관 없이 그 사람의 내면은 전혀 변화하지 않으며, 변하고 성장해야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저 자기의 소원이 거룩하기 때문에 자기도 거룩하고, 그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맹목적인 주장이 신앙의 모든 과정을 집어 삼키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소원을 가졌다고 그 사람의 실체가 거룩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런 신앙의 당연한 결과는, 아무 것도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우상'이라는 말의 어원은 '헛되고 허무하다'라는 의미이다. 없는 신을 향해 빌고 정성을 드렸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없는 것이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모양은 거룩하지만 전혀 거룩함이 없는 소원이 심지어 신앙과 하나님을 지나쳐서 질주했을 때에, 그 결과가 유의미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주여', '거룩', '교회', '사명' 등의 이름을 가진 우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 하나의 '철학'은 될 수 있어도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아닌 것이다.


참된 신앙은 다르다. 하나님을 경험한 신앙은 현실의 변화 이전에 자신의 변화를 겪으며, 또한 변화된 자신을 통해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것이 반드시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밖에 없는 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사람의 소원은 실로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원인이며, 이미 잉태된 미래이다. 어떤 역경과 방해가 있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이는 하나님의 열정이 바로 그것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언할 수 있다. 무력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사람과 현실 사이에 상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반드시 현실로 나타나는 '능력'으로 신앙은 증명되게 되어 있다. 잔잔한 수면에 돌이 떨어지면서 파장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늘의 신앙이 현실에 들어오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무력한 신앙, 변화 없는 신앙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열렬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을 때에, 그 원인을 고요히 말씀 속에서 진단하고 자기를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 마땅한데,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이미 무력한 신앙에 길들여져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수용은 절대로 믿음이 아니다. 물론 어떤 소원은 포기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신앙이 우리로 소원을 포기하게 할 때에는 오히려 더 열렬한 감동을 준다. 하나님께서 '포기'를 인도하실 때에, 그 포기의 과정은 더 깊은 깨달음과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케 한다. 냉소적이고 무력해지는 결과는 절대로 은혜가 아니다.


신앙을 오해하고, 오해한 신앙에 길들여진 신자들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들은 정말 우상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긴다. 열정은 간혹 보지만, 감동도 없고 보람도 없다. 왜 그렇게 믿는지 모르겠다. 나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신데...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오해하는 일이 너무 화나고 때로는 슬프다.

익숙한 광고카피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무엇을 기대하였든지간에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정말 우리의 신앙에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고 기대하였든지간에, 하나님은 언제나 그 이상이시다. 그분이 주는 위로와 평강, 은혜는 말로 형언할 수 없고, 그분 안에 있는 응답은 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한다. 때문에 신앙은 현실이다. 경험이다. 능력이다. 
이것에 아직 동의할 수 없다면, 이제라도 신앙을 찾아 나서시라. 진실로 열심을 가져 보시라. 진심으로 하나님께 묻고 대답을 기대해 보시라. 마음의 밑바닥부터 신앙을 다시 시작해 보시라. 무엇보다 성경을 진심으로 펴고 민낯으로 말씀 앞에 서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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