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쉬운 길로 가지 마라! makarios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896)
목회 (632)
목양칼럼 (474)
설교 (132)
교육 (19)
자료보관 (0)
시편묵상 (7)
인생 (179)
동경in일본 (35)
혼자말 (50)
추천 (0)
11-24 21:19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4.1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2006-04-02


정서적으로 풍성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남자보다 여자가 더 감성적으로 풍부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지만, 세밀하게 가족들의 필요를 챙기고 돌봐주는 어머니의 역할로부터 생겨나는 열매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화초를 돌보거나, 동물을 키우는 것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나치게 비싼 것을 수집하는 ‘욕심’이 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당한 시간을 들여, 적당한 관계를 가지는 것은 사람의 사람다움을 회복하고 가꾸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나의 돌봄을 통해 살아가는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보게 하고, 또한 삶의 의지를 가지게 하는 귀한 이유입니다.

지난 3월 초에 화분 몇 개를 사왔습니다. 봄을 봄답게 꽃으로 장식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이런 거 몇 개를 돌봄으로 소일하는 것이 저에게도 개인적으로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꽃이라는 것은 까다로워서 빛, 수분, 온도, 양분 중에 하나만 맞지 않아도 금새 지고 맙니다. 특히 교회는 일조시간이 짧았습니다. 밖에 내놓자니 아직은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날씨가 걱정되었고, 안에다 두자니 햇볕이 모자라 점점 힘을 잃어갔습니다.

거의 꽃이 다 떨어질 무렵, 이제는 3월도 끝나가니 온도도 견딜만 할 것이라고 여겨져서 시들은 화분을 바깥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힘을 얻는가 하더니 며칠 지나서 보자 전부 쓰러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새벽 무렵의 찬 공기가 버거웠던지, 아니면 갑자기 늘어난 일조량을 견딜 수 없었던지... 

생명은 무리하지 않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많이 먹인다고 다 키로 가고, 꽃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많이 먹인 것이 오히려 화가 되어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저는 화초를 통해서 목회의 원리, 양육의 원리를 많이 생각합니다. 성도나, 자식이나 목회자의 욕심대로만 몰아부쳐서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도 적당히 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받아들일 만큼 헤아려서 돌볼 때에 그 돌봄은 ‘욕심’이 아닌 ‘섬김’이 되기 때문입니다. 화초는 죽으면 새로 사다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좋습니다만, 어떤 대상은 그렇지 않으니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목회 > 목양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6-04-16 부활의 소망  (0) 2014.04.29
2006-04-09 자족하기를 배우라  (0) 2014.04.29
2006-03-26 신앙을 추구하는 올바른 방법  (0) 2014.04.29
2006-03-19 한국인의 힘  (0) 2014.04.29
2006-03-12 내 침대 밑의 악어  (0) 2014.04.29
Posted by makarios
, |

2006-03-26


마호메트의 일화입니다.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사람들을 이끌고 그는 큰 산 앞에 섰습니다. 산을 가까이 불러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는 아침부터 하루 종일 산을 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해질녘이 되어 말했습니다.

“오늘은 산이 움직이길 원치 않으니 내일 다시 오십시오.”

모여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내일은 꼭 기적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다음날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마호메트는 같은 말을 했습니다. 사흘째 날이 저물어갈 때에, 사람들은 이미 많이 흩어지고 소수의 사람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산을 응시하던 마호메트가 드디어 말을 했습니다.

“산이 내게 오지 않으니 내가 산에게 가야겠구나!”

그리고 그는 산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고 합니다.

하나의 해프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 자체가 함축적인 마호메트의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산이 자기에게 오기만을 바라고 스스로 산을 향하여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스스로 자기를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호메트는 산을 향하여 걸어가는 실천을 통하여 구도자의 바른 자세를, 신앙을 추구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먼저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르심 이후의 삶에 대하여도 우리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대하곤 합니다. 

성경을 살피면 이런 우리의 기대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건 없이 우리를 선택하고 불러주신 하나님은 이후의 삶에 대하여는 우리가 스스로 신앙적인 결정을 내리고 힘써 영적 성숙을 이루어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영적인 열심 없이 살며 하나님의 은혜만 강조하는 것은 분명 신앙의 잘못입니다. 기도생활, 말씀생활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게으름이고, 교만입니다. 자신의 무능을 안다면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목회 > 목양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6-04-09 자족하기를 배우라  (0) 2014.04.29
2006-04-02 과유불급(過猶不及)  (0) 2014.04.29
2006-03-19 한국인의 힘  (0) 2014.04.29
2006-03-12 내 침대 밑의 악어  (0) 2014.04.29
2006-03-05 고생(苦生)은 없다!  (0) 2014.04.29
Posted by makarios
, |

2006-03-19


WBC대회에서 한국이 선전하여 야구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을 꺾고, 일본을 연속하여 이기는 결과를 내어서 온 국민이 흥분하고 있습니다. 마치 월드컵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더욱이 이치로라는 일본의 메이저 선수가 일본 야구를 아시아의 정상으로 자부하며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야구가 적어도 30년은 따라올 수 없다는 오만한 발언을 했었기에 이 승리에 대한 국민적 성원이 더욱 커진 것 같습니다.

이번 대회를 통하여 선수들의 선전도 선전이지만, 김인식 감독이라는 명장의 지휘도 큰 화제(話題)가 되고 있습니다. 기업에서는 벌써 김인식 감독의 리더십을 벤치마킹 하자는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노장(老壯)의 리더십은 소위 ‘인간적 리더십’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김인식 감독은 명령보다는 조언을 하는 감독이라고 합니다. 선수의 부족한 부분이 발견되었을 때에 “다 좋은데, 이건 이렇게 하면 어떨까?”라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는 일본을 연속으로 이긴 후에도 결코 한국 야구가 일본을 앞선 것은 아니라는 겸손한 인터뷰를 한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감독의 영향 때문일까요. 한국 대표팀의 요즘 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박찬호 선수는 사비를 들여 동료 가족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기도 하고, 팀이 승리한 후에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답니다. 이종범과 구대성 같은 선배들이 정말 헌신적이고 한국적인(!) 역할로 경기를 살리고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띄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대회를 지켜보며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히딩크 감독에서도 느꼈던 바이지만, ‘리더’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재발견입니다. 그 한 사람이 팀의 색깔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리더’란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른 하나는, 역시 한국 사람의 파워는 한국적인 분위기 속에서 폭발한다는 것입니다. 사비를 털어 동료들의 가족을 먹이고, 스스로 신이 나서 그 일에 매진할 때 한국 사람의 피 속에는 분명히 폭발하는 어떤 능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건 한국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 즐겨야 합니다. 소위 ‘신나는’ 한국적 정서가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구성원 하나하나가 신앙생활 가운데 기쁨을 체험하고 '신이 나서' 스스로 열심을 내는 교회가 되어 한국사람으로서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들이 주님의 일을 위하여 전폭적으로 발휘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06-03-12


스페인 작가, 마리아순 란다의 책 중에 「내 침대 밑의 악어」라는 글이 있습니다. 주인공 JJ는 평범한 회사원의 독신남입니다. 매일 힘든 일과를 마치고 아파트에 돌아오면 넥타이를 풀며 신발을 침대 밑으로 차 넣었다가 아침에는 그 신발을 다시 찾아 신고 출근을 합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신발을 꺼내기 위하여 엎드렸다가 자기 침대 밑에 커다란 악어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악어를 배고프게 하지 않기 위하여 매일 싸구려 신발을 사다가 침대 밑에 던져 줍니다. 그리고 자신은 침대를 버리고 거실의 소파에서 새우잠을 잡니다. 이상한 것은 이 악어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정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의사를 찾아갑니다. 

의사는 그의 정직한 고백을 듣자마자 그에게 크로커다일 알약과 물약, 그리고 연고를 처방합니다. 말 많은 약사의 말을 빌리면 그는 ‘크로커다일병’에 걸린 것입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하여 현대인의 가장 큰 병이 바로 ‘고독’이라고 진단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눈에만 보이는 침대 밑의 악어처럼 우리는 남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는, 그렇게 하면 비웃음을 당하거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황당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더욱 외롭게 하며 지치게 합니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서 지혜로운 엘레나가 JJ의 병을 순식간에 고치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레나는 JJ가 직장에서 오랫동안 짝사랑 하던 동료인데 그녀가 그의 독신 아파트로 병문안을 온 것입니다.

그리고 JJ가 자신의 침대 밑 악어에 대하여 털어놓았을 때에 그녀는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위로하여 자신도 이미 오래 전에 그렇게 악어와 동거한 적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녀의 위로 속에 용기를 낸 JJ가 그녀와 함께 자신의 악어를 보기 위해 침대 밑으로 엎드렸을 때에, JJ의 악어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수북히 쌓인 구두만이 보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침대 밑에도 악어가 있습니까? 그 악어를 함께 볼 수 있는 사랑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크로커다일 병도 고침 받을 것입니다. 벚꽃의 도시 동경에서 올봄에는 여러분의 옆에 좋은 동행이 생기기를 기도합니다. 전도하기 힘들다면 결혼이라도 합시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06-03-05


다니엘 웹스터(D. Webster 1782~1812 미국의 정치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사였다. 그가 하루는 시골길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반대편에서 허름한 차림의 소년이 다가왔다. 그러자 그는 정중하게 보자를 벗고 소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것을 지켜보고 곁에 있던 동행이 물었다.

“선생님, 저런 코흘리개에게 그렇게 정중한 인사를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혹시 잘 아시는 소년입니까?”

웹스터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저 소년 안에 숨어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네. 그가 장차 성장하여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인지를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 것이라네.”

사람과 짐승의 소중한 차이점 중에 하나는 사람에게만 미래를 보는 희망의 시야가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짐승은 현재의 배부름을 위하여 실컷 먹고 내일은 굶어죽지만, 인간은 오늘의 배고픔을 참고 견디면서도 내일의 추수를 위하여 땅에 곡식을 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희망의 고통은 인간만의 특권이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라는 말의 의미는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다’라는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무조건 잘 참는 것이 인내가 아니라, 참는 과정을 통하여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성경적인 ‘인내’의 의미인 것이다.

미래를 보는 시야가 열려 있는가? 왜 지금 고생하는가? 

나는 목회자로 헌신하는 동안에 낙심하지 않는 법을 배웠는데, 그것은 내가 섬기는 사람들의 현재만 보지 말고 그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될 모습, 미래의 모습을 그려가며 기대하는 맘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러한 밑그림이 있을 때에 현재의 고통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참아야만 하는 인내의 목적을 확실히 인식하게 된다.

무조건 참지 말라. 그것은 비겁함이지 인내가 아니다. 인내란 미래를 잉태한 자의 품성이다. 움츠리지 말라. 지금의 고생은 그야말로 과정이지 종착역이 아니지 않는가! 나 자신의 가능성을 꿈꾸고 곁에 있는 지체들의 가능성을 꿈꾸라. 교회의 미래를 꿈꾸고, 내게 주실 하나님의 축복을 꿈꾸라! 우리 하나님은 꿈이 있는 자를 소중히 여기시는 ‘꿈의 공급자’이시기 때문이다. 꿈이 있는가? 그렇다면 고생(苦生)은 없다! 



Posted by makarios
, |

2006-02-26


프랑스의 화가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1875)는 노르망디의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는 지붕에 구멍이 많이 뚫린 집에서 살았는데 건강이 나빴고, 땔나무도 없었다. 그가 얼마나 어렵게 살았던지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고도 갈 여비가 없어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용기를 내었으며, 이 모든 가난의 환경을 그의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씨 뿌리는 사람>, <추수하는 사람>, <이삭 줍기>, <만종> 등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그의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다. 가난하지만 양심적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석양의 무렵에 조용히 일하던 손을 멈추고 잠시 기도하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따뜻하게 할뿐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지 않는가?

효율적인 교육과 빠른 변화로 인하여 세상이 점점 젊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40대가 사회를 주관했고, 20대는 ‘철없는 아이’로 일컬어졌는데, 이제는 소비의 중심이 10대가 되었으며, 유망한 기업들의 동력은 20대에서 나오고 있다. 그래서 인류의 발전을 이끄는 인물들에게 수여되는 노벨상의 수상자를 보아도, 모든 분야의 수상자들이 점점 젊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유독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상관없는 분야가 있단다. 바로 노벨 문학상이다. 다른 모든 업적의 분야에서는 젊은이의 약진이 두드러지지만, 아무래도 문학만큼은 연배와 경험을 넘어설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미래가 그리 절망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기근과 자연의 재해를 극복하고 서서히 더 부유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바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과연 물질적 환경의 풍요가 인간의 정서적 공허함까지 채워줄 수 있을까? 성경을 빌려와 증언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이미 보고 있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참으로 밝은 미래, 풍요로운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사람다운 사람에게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고난을 이겨낸 강인한 정신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밀레 같은 화가가, 베토벤 같은 음악가가,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문학가가 인류의 정서적 공허함을 채우고 정신을 먹여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신앙을 그림으로, 음악으로, 문학으로, 연극으로, 영화로, 뮤지컬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젊은이를 만나고 싶다. 그게 정말 신앙이다!



Posted by makarios
, |

2006-02-05


지난 화요일에 고국의 집에 갔었습니다. 아내와의 12년 결혼생활 중에 한 달 보름을 떨어져 있었던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아이들에게도 아빠가 그렇게 오래 집을 비운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식구들이 어떠한지 무척이나 궁금하고 염려되는 마음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저렴한 비행기표를 구하다보니, 저녁 8시반 비행기를 타게 되었고, 그래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니 밤 11시10분이었습니다. 서둘러 마지막 버스를 타고 잠실까지 나오니, 새벽1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마중을 나온 이모님을 만나 그 차편으로 집으로 향했습니다. 보슬보슬 밤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래서 길이 참 멀고 힘겹게 느껴졌습니다. 아무튼 남양주의 집에 도착하니 새벽2시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두 아들과 아내가 아파트 앞 현관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벽 2시가 되도록 아빠가 오면 같이 먹겠다고 저녁 식사도 마다하고 배고픈 배를 참고 또 참으며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녀석들을 가슴에 안았을 때, 얼마나 뿌듯하고 벅차던지... 온 세상이 내 품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은 참 빨리 자랍니다. 제가 없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부쩍 자라 있었습니다. 아내가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있어 아이들은 주섬주섬 일본어를 말하고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그럭저럭 읽어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대견하고 감사했습니다.

다음날은 아내와 함께 여기저기 볼 일을 보러 다녔습니다. 구입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교회물품도 준비하고, 비자발급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서류들도 준비했습니다. 아내는 그 와중에도 나를 위해 옷을 사 주고, 반찬을 준비했습니다. 나는 빈손으로 집에 들어갔고, 아내와 아이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그런 무심한 남편과 아비를 원망하기는커녕 더 이해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에 잔잔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가정은 천국의 출장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평안과 쉼을 경험하고 사랑을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가정이 없이 어찌 좋은 신앙생활이 가능하겠습니까?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아담해야 하고, 향기를 발해야 하며, 덕을 세워야 합니다. 목회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도 여러분 모두의 가정이 그러해야 합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06-01-29



한 여인이 낡은 바이올린을 들고 중고 악기점에 들어섰습니다. 그녀는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러니 이 바이올린을 제발 사 주세요!” 악기점 주인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녀의 바이올린을 보지도 않고 5달러에 사 주었습니다. 

그녀가 기쁜 표정으로 가게를 나선 후에, 주인은 먼지가 뽀얗게 앉고 때 묻은 바이올린을 켜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예상 외로 아주 청아하고 좋은 소리가 납니다. 놀란 주인은 이 바이올린의 정체를 알기 위하여 소리통의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는 작은 글씨로 ‘아토니오 스트라디바리 1704’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려 200년이 넘도록 모든 악기상들과 음악가들이 찾았던 스트라디바리의 작품으로 적어도 10만 달러가 넘는 바이올린이었던 것입니다. 가게의 주인은 놀라서 뛰어나가 여인을 찾아보았지만, 그 낯선 여인은 이 명품을 단돈 5달러에 팔고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습니다.


주님은 비유하시기를, 천국은 밭에서 보물을 발견하고 그 밭을 사기 위하여 자신의 전 재산을 판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천국은 허상이요, 먹을 수 없는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믿음을 쉽게 버리고, 신앙생활의 기회를 낭비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인생에나 3번의 기회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희망의 말이지만, 동시에 ‘기회(幾回)’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평생에 3번 밖에 없는 기회이기 때문에 기회를 맞고서도 그것을 잡지 못하면 쓰라린 후회가 되고, 평생의 한이 되는 것입니다.

자, 지금이 바로 기회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성숙할 기회이며, 허술한 인생을 팔아 감추어진 영적 보배를 살 기회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여러분은 5달러 짜리 골동품 고물 바이올린이 아니라 진짜 스트라디바리입니다. 제대로 된 연주가, 안목이 있는 주인을 만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손에 여러분이 붙잡히는 순간, 세계는 놀라게 될 것입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06-01-22


‘머피의 법칙’이라는 말은 계속해서 불운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1949년에 미국 공군에서 근무하던 머피대위가 발견한 인생의 법칙으로 ‘잘못될 여지가 있는 일은 반드시 잘못된다(If something can go wrong, it will.)’라는 법칙입니다. 

이를테면 아이들은 항상 병원이 문 닫은 시간에 아프고, 차선은 항상 내 옆에서만 잘 빠지고, 내가 만원 버스에 간신히 올라 보니 바로 뒤에 빈 버스가 오고, 에스컬레이터에서 전철 티켙을 떨어뜨리면 꼭 기계 틈새로 들어가고, 잔뜩 비축식량을 쇼핑해서 집에 들어오니 정전으로 냉장고가 들어오지 않는 것과 같은 일들입니다. 그래서 이를 ‘설상가상(雪上加霜)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반대로 ‘샐리의 법칙’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는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유래한 것으로 모든 것이 결국은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법칙입니다. 면접 전날 읽었던 신문에서 면접질문이 출제되고, 공부하기 싫은 참에 정전이 되고, 마당을 쓸었더니 돈을 줍고, 책을 빌렸더니 책갈피에 비상금이 끼워져 있는 것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면 ‘샐리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기의 인생이 어떤 법칙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바울은 아마도 ‘샐리의 법칙’을 자신의 인생에 적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교인들을 향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설상가상의 현장에서 해피앤딩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아침에 꿈이 불길해서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는 것은 이방인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이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으니 기도하고 조심하면 오히려 복된 하루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원래가 화(禍)가 변하여 복(福)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습니까?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06-01-08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의 글을 읽다보니, 신자의 회심은 돈지갑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말이 참 실망스러웠습니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니 종교개혁자들도 역시 경제적인 면에서는 어쩔 수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 앞에서 빈부와 귀천이 있을 수 없고, 그래서 거룩한 신자의 회심을 ‘돈지갑’과 같은 세속적인 이미지와 연관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이러한 저의 생각에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공허한 말의 헌신에 머물러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무능력한 신자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입에는 천국이 있지만, 그들의 손과 발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교회의 부정적인 측면들만을 골라내어 말하고 또 말하며 근심하는 것이 그들이 가진 신앙의 전부였습니다.

재물은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적어도 매우 중요한 사랑의 대상 중에 하나인 것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십일조의 계명을 주신 것이나, 예수님이 부자청년에게 모든 재산을 사회로 환원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이나, 웨슬리가 회심의 시작을 돈지갑에서 찾은 것은 거의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말뿐인 신앙, 공허한 관념의 신앙에서 깨어나 구체적인 헌신과 실천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까운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 말장난인지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2006년에는 조금 더 노력합시다. 성도들의 힘든 일을 서로 돌아보고, 빠지지 맙시다. 예배에 빠지지 않는 성도는 잘하는 성도가 아니라 ‘기본’을 하는 성도일 뿐입니다. 잘하는 성도는 돈지갑을 열어야 하고, 손과 발을 부지런히 놀려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샬롬~


[약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Posted by makario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