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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한국에 들어갔을 때에, 나름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수재를 당한 이재민의 모습이 너무 비참했고, 안전을 이유로 흩어진 우리 성도들을 데리고 가야 할 앞날이 깜깜했다. 절망 앞에 선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그러면서도 내 앞에 교회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며칠이나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막상 그 많은 교회들이 있는 조국에서 나의 절박한 목소리를 외칠 방법이 없었다. 부모님을 따라 주일 예배를 드리러 갔던 교회에서는 마침 일본을 위한 헌금을 광고하고 있었지만, 목사님과의 면담은 서먹하기만 했다. 

선교지에서는 늘상 '거지본성'으로 도움만을 바란다는 듯한 느낌이 어금니 물고 견디며 복음의 종으로 살려고 몸부림쳤던 나의 자존감을 상하게 했다. 

목사는 누구의 종(노예)도 될 수 있지만 거지는 될 수 없다. 거지가 되는 순간, 목사 자신이 추락하는 것뿐 아니라 그의 복음도 추락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의 몰락이다. 몰랐던 현실의 경험은, 어떤 면에서는 대지진 못지 않게 나에게 내적인 충격을 주었다...


어려울 때에 친구가 나타난다고 했던가... 바로 그 때에 내 친구 김태윤 목사(장자교회)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이상했다. 선교지에 나와 너무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음에도 우리는 마치 어제처럼 젊은 시절 얘기를 나누고, 말이 통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난 장자교회의 강단에 섰고, 거기서 내 목소리를 힘껏 외쳤다. 그 이후로 장자교회의 성도들과는 지금까지 마치 내 교회의 성도들 같은 사귐과 교제가 이어지고 있다.


선교지에는 온갖 절박한 사연들과 목소리가 존재한다. 교회가 조금만 여유를 나누면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고통, 닦아줄 수 있는 눈물, 위로할 수 있는 한숨들이 많다. 복음은 그 '나눔'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복음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너무 잡음이 많다. 목사들의 인맥을 통해 성도들의 귀한 헌금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 들어가고, 그 덕분에 현장의 절박한 목소리는 오히려 멀어져 들리지도 않는다.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들이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다. 자기 학교 출신, 같은 교단, 자기교회를 거쳐간 사람들이 아니면 악수도 서먹하다. 그 좁은 시야를 깨뜨리고 현장을 깊이 보려고 하는 노력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선교지에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소통이다. 의외로 선교지에 있으면 축복 받은 한국교회의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광야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걸 나눌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물질과 신앙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서로 건강해지는 은혜가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방적으로 돕는 관계가 아니라, 나누고 격려하고 함께 걸어가는 관계로 한국교회와 선교지가 새롭게 묶여지면 좋겠다.


# 장자교회는 김포에 있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메시지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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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와서 외부의 교회를 다니다 보니, 교회마다 반듯해 보이는 성도들이 있다. 

그런 성도들을 보는 것은 기쁨이고 감사이다. 또한 나의 마음에 부러움도 슬쩍 일어난다. 왜 우리 교회에는 저런 성도가 없을까? 하는 생각에 슬퍼지기까지 한다.

목사에게 성도는 그야말로 애증의 대상이다. 깊이 사랑하지만 끊임없이 아파하게 되는 이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그것과 비슷하다. 잘 되면 계속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불안하고, 못 되면 그 못 되는 것이 자기 탓인 것만 같아서 아프다.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마음에는 늘 뭔가 아쉬움이 끓어 넘치는 것도 사실이다.


‘엄친아’라는 말이 있지 않나. 엄마의 친구 아들은 슈퍼맨이란다. 

공부도 잘 하고 말도 잘 듣고 거기다가 잘 생기고 운동도 잘한다. 심지어는 돈도 잘 벌고 결혼도 잘 한다. 

물론 엄마의 모든 친구의 아들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항상 자기 아들을 비교하는 대상으로 여러 사람 중에서 최상의 장점들만을 가져오기 때문에 생겨나는 모순이다. 

모든 것을 잘하고 모든 면에서 탁월한 사람은 있을 수 없는데, 자기 자식에게는 그 불가능한 소망조차 무모하게 품는 것이 부모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부모 마음에는 자식이 흰 머리가 생겨도 항상 ‘어린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곧잘 하는 성도라도 목양하는 목사의 눈에는 부족함이 보인다. 

이 부분만 좀 고치고 달라지면 참 좋겠다는 소망이 있다. 이것이 목사의 욕심이라면 욕심이고, 소망이라면 소망이다.

이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성도에게 참 유익하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성도를 망치는 이유가 된다. 목사의 기대를 통해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심하고, 분노하고, 망가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참 어려운 것이 목회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만 하는 것이 목회자의 처신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이미 알거니와, 모든 그리스도인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살다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게 되어 있다. 밖에 있는 성도들이 매너 좋고 훌륭해 보여도 막상 같이 한 두 해 신앙생활을 해보면 성깔 죽은 사람이 드물고, 언행에 모순이 없는 사람이 없다. 그것은 목사들도 마찬가지다. 가끔 보는 관계 속에서는 다 멋지고 훌륭해 보이지만, 겉옷을 벗고 속살을 마주하면 인간은 다 특유의 자기 냄새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한 가지 결론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옳으시다. 그분이 만나게 하신 섭리에 실수가 없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부족함이 없는 법이다. 당장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그 사람도, 내게 보내시지 않고 거기 두신 것은 거기가 가장 적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지금 만족하지 못하는 그 사람들이라도, 그들을 내게 보내신 것은 그들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야기는 성경으로만 들려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가장 확실한 은혜의 통로인 것은 확실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온 세상에 가득 차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환경과 만남을 통해서도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고 골방에서 신비한 체험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주신 현실을 지혜롭게 잘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면 거기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 감히 말하건데, 정말 늘 그러하다.


하나님을 믿어드린 후에, 내게는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조차 답답해 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이해하려고 안달하는 것조차 잊어가고 있다. 

어차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과 뜻은 내 적은 머리와 마음으로 다 담을 수 없다. 그분은 광대하시다. 그뿐만 아니라 선하시다. 나보다 훨씬 나를 잘 아시는 그분이 선하시다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선한 것이다. 그것은 이해의 차원에서 나오는 결론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에서 나오는 결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러울 것도 없고, 안타까울 것도 없다. 안 주신 것에도 이유가 있고, 주실 것이라면 반드시 때에 적절하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기다림이라는 것이 그렇다. 기다린다고 마음을 먹고 기다리면 너무 지루하고 힘들다. 제일 잘 기다리는 방법은 기다린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마음 한편에 갈무리하고 다른 일에 우선 몰두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기다림의 시간에 제일 적당한 선물이 고난이다. 고난을 만나면 사람은 기다림을 잊는다. 고난과 싸우는 것에 몰두하여 세월을 훌쩍 보낸다. 

그러는 동안에 약속과 소망을 잊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잊어도 잊지 않는 분이 계시다.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약속은 신실하며 언제나 적당하다. 가장 빛나는 타이밍에 가장 선한 방법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고난은 놀라운 은총이다. 하나는 기다림을 채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시간을 통해 내적인 성장을 돕는 것이다. 하여,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저주가 아님이 분명하다.


남의 인생을, 남의 목회를, 남의 형편을 부러워하지 말라. 

가까이 보면 다 거기서 거기에 불과하다. 소망의 대상은 환경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오직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만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신다.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고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다른 모든 것은 부수적이다. 

그래서 시편기자의 이 외침은 우리를 뭉클하게 한다...


(시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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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고통을 몰아내주지 못한다면
철학은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

-- 에피쿠로스의 경구 --


꼭 실용적인 입장이 아니라도, 실용성에서 완전히 이탈된 지식이란 그 가치를 인정하기 힘든 법이다.
성경에서 '알다(know)'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심지어 '성관계'를 암시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만큼 지식과 체험은 그 경계를 명확하게 단정하기 힘든 공통의 무엇이다.

선지자가 '하나님을 알자!'라고 외쳤을 때에, 그것은 당연히 머리와 지식의 권면만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옳다. 그것은 다분히 경험적이다.


신앙이 현실을 지배하고 해결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것이 한 가지 이유라고 감히 주장한다. 그것은 신앙이 가지는 변곡점, 그러니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경험하는 것의 전환점을 지나지 못한 까닭이다.

물론 이렇게 신앙의 차원이 달라진다고 하여서 항상 기적이 일어나고 바라는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램프의 요정, 지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곡점을 지나서 하나님을 경험한 신앙은, 적어도 무력하지 않다.
일단 이 전과 후로 사람이 변한다. 옛날의 소원이 더이상 소원이 아닌 것이 되고, 옛날에는 결코 바란 적이 없는 것을 너무도 간절히 바라는 변화가 생겨난다.

그리고 소원의 변화는 응답과 직결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소원을 가지는 자는, 간단하게 말해 하나님의 동업자이다. 하나님과 동업하는 자의 사업이 망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라는 자의 소원이 실패할 수 있겠는가?


많은 경우에 있어, 신앙의 문제는 교활함이다.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그 실체는 자기의 욕망에 뿌리 내려 있는 소원이 사람을 주장할 때에, 강렬한 소원이 심지어 하나님마저 압도하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거룩해 보이는 소원과 상관 없이 그 사람의 내면은 전혀 변화하지 않으며, 변하고 성장해야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저 자기의 소원이 거룩하기 때문에 자기도 거룩하고, 그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맹목적인 주장이 신앙의 모든 과정을 집어 삼키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소원을 가졌다고 그 사람의 실체가 거룩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런 신앙의 당연한 결과는, 아무 것도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우상'이라는 말의 어원은 '헛되고 허무하다'라는 의미이다. 없는 신을 향해 빌고 정성을 드렸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없는 것이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모양은 거룩하지만 전혀 거룩함이 없는 소원이 심지어 신앙과 하나님을 지나쳐서 질주했을 때에, 그 결과가 유의미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주여', '거룩', '교회', '사명' 등의 이름을 가진 우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 하나의 '철학'은 될 수 있어도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아닌 것이다.


참된 신앙은 다르다. 하나님을 경험한 신앙은 현실의 변화 이전에 자신의 변화를 겪으며, 또한 변화된 자신을 통해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것이 반드시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밖에 없는 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사람의 소원은 실로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원인이며, 이미 잉태된 미래이다. 어떤 역경과 방해가 있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이는 하나님의 열정이 바로 그것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언할 수 있다. 무력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사람과 현실 사이에 상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반드시 현실로 나타나는 '능력'으로 신앙은 증명되게 되어 있다. 잔잔한 수면에 돌이 떨어지면서 파장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늘의 신앙이 현실에 들어오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무력한 신앙, 변화 없는 신앙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열렬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을 때에, 그 원인을 고요히 말씀 속에서 진단하고 자기를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 마땅한데,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이미 무력한 신앙에 길들여져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수용은 절대로 믿음이 아니다. 물론 어떤 소원은 포기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신앙이 우리로 소원을 포기하게 할 때에는 오히려 더 열렬한 감동을 준다. 하나님께서 '포기'를 인도하실 때에, 그 포기의 과정은 더 깊은 깨달음과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케 한다. 냉소적이고 무력해지는 결과는 절대로 은혜가 아니다.


신앙을 오해하고, 오해한 신앙에 길들여진 신자들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들은 정말 우상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긴다. 열정은 간혹 보지만, 감동도 없고 보람도 없다. 왜 그렇게 믿는지 모르겠다. 나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신데...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오해하는 일이 너무 화나고 때로는 슬프다.

익숙한 광고카피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무엇을 기대하였든지간에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정말 우리의 신앙에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고 기대하였든지간에, 하나님은 언제나 그 이상이시다. 그분이 주는 위로와 평강, 은혜는 말로 형언할 수 없고, 그분 안에 있는 응답은 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한다. 때문에 신앙은 현실이다. 경험이다. 능력이다. 
이것에 아직 동의할 수 없다면, 이제라도 신앙을 찾아 나서시라. 진실로 열심을 가져 보시라. 진심으로 하나님께 묻고 대답을 기대해 보시라. 마음의 밑바닥부터 신앙을 다시 시작해 보시라. 무엇보다 성경을 진심으로 펴고 민낯으로 말씀 앞에 서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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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에르치노 /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왕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만....

성령의 감동이 일시적일 때에, 그것은 전혀 신앙의 성숙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속담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삼상 10:12) 사울 왕이 한 때는 성령의 감동으로 가득 차서 선지자들처럼 예언을 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충만함을 순종과 경건으로 지속하지 못했고, 결국 과거의 경험만 붙들고 살아가는, '나도 한 때는 그랬었지'라는 추억의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성경이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것은, 심지어 그는 악신(惡神)이 들려 고뇌하며 정상을 벗어나는 반미치광이로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제 정신이었을 때는 너무나 인격적이고, 따뜻하고, 신실한 것 같았던 그는, 악신의 충동과 지배 하에서는 폭력적이고, 비열하며, 교만한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입니다.

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12: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 본문을 가지고, 귀신론에 입각하여 귀신의 성품을 논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본래 초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45절에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악한 세대'의 결론에 대한 예고입니다. 여기서 세대는 곧 '사람'입니다.


밥을 하다 실패하면 삼층밥이 됩니다. 밑에는 타고, 중간은 익고, 위는 설익거나 생쌀이 그대로 있는 것이 삼층밥입니다. 쌀도 아니고 밥도 아닌 이것은, 먹자니 탈이 나고 버리자니 아까운 '무엇'입니다. 소위 계륵(鷄肋)이라고나 할까요...


신앙도 삼층밥 신자, 혹은 계륵신자가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울왕입니다. 그는 믿었으나 믿다가 말았습니다. 성령을 경험했지만, 악신도 경험했습니다. 

말하자면, 성령의 감동 속에서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죄를 멀리하며, 신랑을 위해 준비하는 신부처럼 살아야 할 신자가 악한 충동에 넘어져서 자기의 포악한 성질을 내지르고 욕망을 좇았을 때에, 악한 사탄은 그 기회를 틈타 그의 마음과 인격을 지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그릇된 신앙생활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의 특징은, 가책은 있으나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런 날들이 더 오래 지속되면, 바리새인들처럼 양심마저 굳어져서 그 '가책'마저도 사라지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며 거짓을 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던 산헤드린 회의이고, 대제사장이고,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던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가장 신앙적인 외양 속에 가장 추악한 죄가 역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정거장이 아니라 집입니다.

'벧엘(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이 그런 의미이고,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로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 '보헤사(위로자, 돕는 분)'을 보내신 것은, 사울 왕처럼 잠시 신비로운 경험을 가지게 하심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중심은 역시, 방언도 아니고 병 고치는 은사도 아니고, 경건의 지식도 아니고, 오랜 경륜은 더더욱 아닙니다. 

신앙의 중심은 냉혹하게도 '현실'입니다.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느냐? 하는 바로 그 질문과 대답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살피고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모르는 신앙인이 너무 많습니다. 큰일입니다. 여전히 자기가 살아서 활어(活魚)처럼 퍼득거리면서, 심지어 자신이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까지 합니다. 

돈도 좋고 하나님도 좋습니다. 그럴 수 없다고 분명하게 못 박은 예수님의 말씀 쯤은 들리지도 않습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말씀도 들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화내는 것은 '정의'이며, 당연한 것이며,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약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말씀 앞에 굴복하지 않는 이런 신자의 모습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미신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호와 축복을 빨아 먹으려는 '진딧물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하는 것은, 가족의 개념이 아니라 기생(寄生)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항상 하나님이 불편하고, 섭섭하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병든 신앙에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의 가족이 되십시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마음의 분노를 성령의 지배 아래 굴복시키십시오. 사랑을 좇아 행하고, 자기를 돌아보아 겸손하십시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마음을 버리지 마십시오. 가난한 마음이 복된 마음입니다. 신앙은 자기에 대한 연민과 갈망이 없어지면 쉽게 타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눈물이 마른 신자는 건강한 신자가 절대로 아닙니다. 

기도의 골방에서 자기를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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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9 :: 목양칼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복음서가 예수님의 일생을 다 기록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복음서는 철저하게 변증적인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이유’가 숨어있고 그 이유에 대한 설명과 변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흐른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간파하지 못하면 복음서를 바르게 해석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개의 복음서에는 공통적인 핵심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다. 이 십자가를 설명하는 것에 있어 복음서의 저자들은, 그야말로 전력을 다한다. 대체적으로 복음서의 분량에서 절반 정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마치, 예수님은 죽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처럼 사셨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절망이 아니라, 준비하고 성취해야 하는 고귀한 사명으로 이해 되었다. 이런 ‘복음’을 기록하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고귀한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며 결코 죽음을 비관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늘 우리에게는, 사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아울러 죽음에 대한 묵상이 필요한 것 같다.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그 마지막 처리(?)조차 깔끔해진 요즘에는 좀처럼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먼 미래의 일, 자기에게는 찾아오지 않을 손님처럼 막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잘 사는 것은 반드시 잘 죽는 것으로 완성되어야 하고, 죽음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설사 그 일이 먼 미래의 일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오늘을 제대로 사는 것에 큰 도움을 준다.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 사실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라. 그 너머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아라. 하루는 그냥 또 하루가 아니라, 내 인생을 완성해가는 벽돌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나중에는 마지막 한 장이 아쉽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아낄 수 있다면 아껴 사용하라.


오늘이 마지막 주일이다. 2013년이 추억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그 마지막을 예배와 함께 말씀 속에서 마무리 짓고 있다면 좋은 마무리이다. 수고 많으셨다. 그리고 함께 걸어와서 기쁘고 감사했다. 

하지만 일년의 끝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끝도 묵상해야 한다. 언젠가는 우리 인생 자체에서 유종지미(有終之美)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때에도 여전히 신앙 안에서, 말씀 안에서 굳건히 서 있는 여러분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아직도 그럴 자신이 없다면 부디 다시 시작하시라... 

새로 맞이하는 해가 여러분 모두에게 꼭 의미 있는 해가 되기를 축복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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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2 목양칼럼 :: 사랑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먼저 사랑했으니 너희도 서로 이렇게 사랑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사랑 없는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시고 배반과 멸시와 조롱과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하게 하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사람은 실망을 줍니다. 배반을 합니다. 사랑한 것에 대하여 가장 보람이 없는 대상이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꽃도 나무도 서너 계절이 지나기 전에 결과가 있고, 동물도 수 년을 키우면 반드시 주인을 아는데, 사람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좋은 것으로 주고 못된 것으로 거두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한국 속담에 ‘머리털 검은 짐승은 키울 것이 못 된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사람’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기를 망설이지 말아야 합니다. 실망하면서도 주고, 배반 당하면서도 사랑하고, 보람이 없음에도 섬기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때에,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또한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사랑해주는 사람을 누가 사랑하지 못합니까? 진실하고, 매너 좋고, 인품이 훌륭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을 하고서는 상(賞)을 바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의 사랑이 원수를 감동시키고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약속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면, 그것은 특별한 사랑이며,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상을 주시고 가까이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탄절이 목전에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 앞에 회개부터 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사랑 없음을 회개합시다. 당연한 사랑만 하고, 특별한 사랑을 하지 못한 것을 회개합시다. 사랑하라는 말씀을 배우고도, 우리에게 사랑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고집 부리고 외면하며 내 계산과 생각으로 살아온 것을 회개합시다. 

그리고 사랑합시다. 내 감정과 의지가 부족할 때는 기도 하면서 사랑합시다. 보통 기도로 버거우면, 금식 하면서라도 사랑합시다. 나를 쳐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켜서 사랑합시다. 

사랑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것을 잊지 맙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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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5 목양칼럼 


성탄을 통하여 우리가 기념해야 하는 것은, 동방박사나 목자들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의 자리가, 따뜻한 여관방에 앉아 가난한 나그네와 임산부를 말구유간으로 보낸 무정한 사람들이 아닌지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남의 아픔은 늘 관념의 무엇이 되기 쉽습니다. 생각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과 내가 가진 기득권을 버려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쌍히 여기는 생각만으로 스스로 선량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을 가지셨다”고 묘사했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비웠다’는 표현은 모든 영광을 내려놓았다는 뜻입니다. 얼만큼 남기고 타협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면, 무력하고 작은 ‘아기’가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성탄절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의 모든 약함을 대신 지실 수도 없었을 것이고, 십자가에 달려 구주가 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과 삶을 본받아 우리의 인생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탄절을 그냥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왜 오셨고, 어떻게 오셨고, 무엇으로 사셨는지 알아야 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바야흐로 시대는 점점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이기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거센 바람 앞에 촛불처럼, 그리스도인의 희생적인 삶은 점점 어려움에 처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뿐더러, 비웃음을 사기까지 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는,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나셔도 역시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며 다시 또 십자가에 달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유태인 제사장이 아니라 교회 목사들의 손에 의하여 그리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시대만 탓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도 신앙의 빛은 찬란하게 빛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누구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성탄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오.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내 삶에 실천할 것인지 기도해 보십시오. 다 내려놓고 오신 아기 예수님 앞에 여러분의 보배합을 열어 경배하십시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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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8 목양칼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인간의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고, 거두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우리가 추구하고 살아야 하는 실제적인 나라라는 사실을 우리로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은혜와 진리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곧 성탄절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습니다. 성탄 트리를 장식하고 캐롤을 듣고 카드를 사고 선물을 준비하는 일은 이제 하나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화 속에서 우리는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찾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탄절이 루돌프와 산타 클로스에게 점령 당했다고 분개합니다. 그래서 이제 성탄절을 예수님께 다시 찾아 드려야 한다며, 모든 루돌프와 산타의 장식을 버리고 말구유간의 아기를 기념합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그림이 바뀌고 장식이 달라졌을 뿐이지, 과연 우리들의 성탄절에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 가지 점에서 성탄을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오셨으니, 우리는 성탄절을 준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그 안에서 예수님을 찾는 절기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둘째, 인간에게 오셨으니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성탄절은 막힌 관계를 열고, 내가 먼저 낮아져서 상대방을 섬기는 평화가 이루어져야 할 절기입니다. 나뿐 아니라 바로 ‘저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변의 사람들을 챙기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하여 오셨으니,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를 배우고 실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현실을 지배하는 현장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분의 뜻을 순종할 때에, 바로 그 자리가 어디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 학교… 그리고 교회에서 진정한 성탄절이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의 문제는 노래 가사나 장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내용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빼앗긴 것은,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라 그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은혜로운 성탄절을 빕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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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1 목양칼럼 :: 


마침내 오고야 말았습니다.

2013년의 마지막 달력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제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 우리 인생의 역사로 흘러갈 것입니다. 먼 훗날에 이 시간을 보면서 반성도 하고, 그리워도 하겠지요. 적어도 우리가 주님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분명히 더 자세하고 꼼꼼하게 이 시간들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 흘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남겨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경건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한 시도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과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는 회한이 복잡하게 엇갈립니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은 필요합니다. 삶에 대하여 괴로워하는 아픔이 없다면 보다 나은 미래를 어떻게 갈망할 수 있겠습니까? 

현실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이라는 황금을 땅에 묻어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산다고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이를 먹어가며, 자식을 보며, 흰 머리가 생기며,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어떻게 가고 있습니까? 남의 인생을 평가하고, 자식에게 잘 살라고 말하기 전에, 과연 당신의 인생은 안전합니까? 행복합니까?

12월은 일년의 끝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끝을 연습하기에 좋은 한 달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마무리해도 괜찮을까? 이렇게 지나가도 좋은 것인가? 곰곰이, 달리는 차창에 기대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국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모든 것들이 헛되고 헛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항해에서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 것은 정말 믿음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믿고 따르는 것, 그것이 가장 행복한 길입니다.

부수적인 조건들과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가장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십시오. 내가 과연 믿는지? 믿는 대로 생각하고 사는지? 바로 그것이 우리 인생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만약 이 질문에서 자유롭다면 그는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서 문제를 발견한다면, 그는 지금 이 시기를 잘 사용해야만 할 것입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남겨진 달력도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다음에 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인생을 믿음 앞에서 정리해 보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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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4 목양칼럼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간단하고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일도 결코 간단하지 않은 것입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럴 수가 없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 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고 넘어서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에 스스로 묶인 사람들은, 이런 차이를 넘어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지닌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만날 때까지 늘 비판과 불평을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만 옳고 주변의 사람들은 다들 너무하거나 모자란 사람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고독감이 찾아옵니다.

이런 사람에게도 물론 친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친구가 아니라 그의 친구일 뿐입니다. 그가 포용력이 있고 친화력이 깊어 나와 친구가 된 것이지 내가 잘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 묶인 사람들은 이 점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항상 우주의 중심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제일 중요한 역량은 ‘공감’입니다. 

공감이 있어야 소통이 일어납니다. 소통이 되어야 비로소 사귀고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감이란, 상대방의 기분과 느낌, 더 나아가서는 그 가치관을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텔레파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과 관찰이 근간이 되고, 그 위에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깊이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내가 말하는 동안, 상대방의 눈빛을 살피고 그 기분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그는 눈치만 없는 것이 아니라 배려심도 없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내가 한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실례가 되거나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대범한 것이 아니라 사려 깊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태도들이 지나친 고뇌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들을 다 불편하게 해놓고 자기 뱃속만 편한 ‘아이’가 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사람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적당한 선을 배워가게 되고, 그 배움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수용하고 사귀는 자기만의 길을 여는 것입니다.

사람을 조심해서 다루십시오. 자기가 괜찮다고 그도 괜찮을 것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언제나 되도록 상대방에게 맞추려고 노력하십시오. 그 노력 만큼 바로 여러분의 능력이 자라날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자보다 섬기는 자가 복된 이유입니다...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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