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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15


삼국지에 보면,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고사가 나옵니다. 

때는 삼국시대의 초엽, 촉(蜀)나라 건흥(建興) 5년(227) 3월, 제갈량(諸葛亮)은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됩니다. 이 때 조조는 제갈량을 막기 위하여 사마의(司馬懿, 자는 中達, 179∼251)에게 20만 대군을 주어서 그 앞길을 막게 하였습니다. 제갈량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전술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으나, 이에 중요한 요건 중의 하나가 바로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을 때에 마속(馬謖:190-228)이 이 일을 자원하였습니다. 그는 제갈량과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은 명 참모 마량(馬良)의 동생으로, 평소 제갈량이 아끼는 재기 발랄한 장수였습니다. 제갈량은 노련한 사마의에 비하여 그가 너무 젊고 미숙하다는 사실을 염려하였으나, 마속이 간청하는 바람에 이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군령의 지엄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만약 임무에 실패한다면 목을 내놓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역시 마속은 사마의에게 적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제갈량의 안배를 따르지 않고 전승에 욕심을 부리다가 그는 위나라의 명장 장합(張稷)에게 패배하고 간신히 목숨만을 건져 돌아왔습니다. 이로 인하여 제갈량은 전군(全軍)을 한중(韓中)으로 후퇴시켜야 했습니다.

이듬해(228) 5월, 마침내 마속을 처형하는 날이 이르렀습니다. 마침 연락관으로 와 있던 장완은 제갈량에게 간청하기를 “마속과 같이 유능한 장수를 죽이는 것은 나라의 큰 손해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제갈량이 대답하기를, “마속은 정말 아까운 장수이지만, 사사로운 정 때문에 군율을 저버리는 것은 더 큰 죄가 됩니다. 아끼는 사람일수록 가차 없이 처벌하여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는 법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마속은 처형장으로 끌려 나갔고, 제갈량은 소매로 얼굴을 가린 뒤에 마루에 엎드려 울었다고 합니다.

교회의 중심에 서는 사람은 특별히 자기를 관리해야 합니다. 대의(大義,하나님의 뜻)를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의 리더십은 말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으로 갈수록 포용력 있게, 그러나 중심으로 갈수록 엄정하게... 그래야 건강한 교회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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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01


새해가 밝았습니다. 또 하나 세월의 마디를 뒤로하며 많은 회한을 가슴에서 정리해 봅니다. 옛 어른들이 세월이 유수와 같다고 하시더니 정작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 것이 세월이고, 인생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제자촌교회에 부임한 이후, 혼자의 시간을 많이 주신 것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볼 수 없는 것이 외롭고 쓸쓸하기도 하지만, 그 추운 혼자의 밤을 보내며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인생과 신앙을 정리할 수 있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아마도 제가 이 동경에서 새로운 인생, 새로운 사역을 열어가기를 기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일본땅의 목회자로 나를 헌신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져본 일이 없었는데, 역시 나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은 이처럼 확연히 달랐던 것인가 봅니다.

하지만 막상 이 곳에 와 보니, 주님이 저를 이곳에 보내시기 위하여 참 세밀하게 준비시켜 왔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닫곤 합니다. 지난 과거를 통하여 저에게 주셨던 성공과 실패,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이 새로운 목회의 장을 여시기 위한 주님의 훈련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계획보다 더 크고 놀라운 계획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길 원하십니다. 저는 주님이 앞으로 이 작은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 나가실 큰 역사를 기대하는 마음에 가슴이 부풀어 오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픈 일도 감사로, 속상한 일도 감사로 묻어버립시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 아픈 일과 속상한 사건으로부터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지는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맺힌 것을 푸십시오. 응어리를 풀어야 영혼이 삽니다. 용서하고 관용하십시오. 그리고 새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십시오. 과거가 미래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이제는 우리 모두 새로운 날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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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7 목양칼럼


세계적인 설교가 제임스 E. 화이트는 그의 책 <하나님과 친절한 사귐>에서 다음과 같은 그의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러시아에서 한 교회의 주일 아침 예배 설교를 부탁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가 나뿐 아니라 여러 명이었습니다. 예배는 거의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친 뒤 나는 그 교회 목사님과 잠깐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예배가 긴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교인들의 열의에 더욱 놀랐던 것입니다. 3시간 내내 그들은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았고 지루한 기색도 없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도 집에 돌아갈 마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운을 떼었습니다. “미국에서는요, 예배가 한 시간이 넘으면 여기저기서 시계가 삑삑거립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신앙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게 허용되지 않았고, 발각되면 모두 감옥에 들어갔지요. 지금 이런 일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질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저 행복한 겁니다. 그리고 어떤 앞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매주일이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혼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예배를 너무 건성으로, 느긋하게, 습관적으로 드렸던 게 아닌가? 이 사람들은 예배가 무엇인지를 안다. 그렇기 때문에 고초를 당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다시 감내할 의지가 있는 것이다. 예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갈 의지가 있는 것이다. 죽을 의지가 있는 것이다. 한평생 살면서 예배만큼 귀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건강을 잃기 전에는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고, 친구를 잃기 전에는 친구의 아쉬움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잃고서야 그것의 귀중한 가치를 안다면 이 또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매주일, 우리에게 소중한 교회가 있다는 것과 아름다운 지체들이 있다는 것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추구하는 간절한 신앙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다른 것들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예배가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예배의 부흥으로부터 영적인 성숙과 전도와 삶의 활력이 생겨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소중하게 지켜져야 하며, 또한 최선을 다해 드려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동경드림교회 지체들에게 권합니다. 예배를 삶의 중심에 두십시오. 그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 소중한 기회를 소홀함으로 잃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샬롬~



2010-11-07牧羊コラム


世界的な牧師「ジェ-ムズE.ホワイト」は彼が著書した本<神様との親切な付き合い>で次のような彼の経験を語ります。

ロシアである教会の日曜日、朝の礼拝の説教を頼まれたことがありました。だけど説教者は私だけではなく数名でした。礼拝は三時間近くまで続きました。礼拝を終えた後、私はその教会の牧師さんと少し話をしました。礼拝が長いことにも驚きましたが、聖徒たちの熱意にもっと驚かされたのです。三時間の間ずっと彼らは席を立たず退屈した様子も伺えませんでした。礼拝が終わった後にも家に帰る気がないように見えました。私が話を切り出しました。「アメリカでは、礼拝が一時間を越えるとあっちこっちで時計が鳴り始めますよ。」その牧師さんはこのように言いました。「何年か前までは信仰共同体として一緒に集まり礼拝を捧げるのが許されなかったし、見つかったら監獄にいれられましたよ。今、礼拝を公開的に捧げることができるのがいまだに信じられませんよ。だから私たちは ただただ嬉しいのですよ。あと、これからどんなことが私たちを待ち構えているか知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から、毎週このように自由に礼拝を捧げることができる最後の日だという心で礼拝をしているのですから礼拝を中断しようとは思わないのですよ。」その話を聞き私は一人でこんな事を考えました。これまで私は礼拝を適当に、ダラダラと、習慣的に捧げたのではないか。この人たちは礼拝が何かを知っているのです。だから苦難があってもそれに耐えることができる意志をもっているのです。礼拝をして監獄に入れられるなら入る意志があるのです。死んでも良いという意志があるのです。今までを生きてきて礼拝より大事なものはないという事をこの人たちは知っているのです。


健康を失う前は健康の大事さを知ることができず、友人を失う前は友人の大事さをしることができないと言われます。だが失ってからその価値に気づいてしまってはもったいないことです。私たちは毎週、私たちに大事な教会があるという事、周りの人たちに恵まれているという事、礼拝を通じて神様を求める切実な信仰があるという事に感謝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教会は礼拝共同体です。違うことも重要ですが礼拝が一番根本的な事です。礼拝の復興から、霊的な成熟と伝道の生活の活力が生まれます。だから礼拝は大事に守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し、最善を尽く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愛する東京ドリ-ム教会のみなさんに勧告します。礼拝を生活の中心においてください。そしてその礼拝を通じて神様に会うことを思慕してください。その貴重な機会を失わないでください。それがわたしの願望です。

シャロー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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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친남을 아십니까? ]


'엄친아'는 '엄마 친구 아들'의 줄임말이다. 

이 녀석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잘 생기기까지 했다.

그래서 엄친아 때문에 세상의 아들들은 힘들고 불행하다.


그런데 요즘 엄친아를 추월하는 새로운 사람이 등장했다.

이름하여 '와친남'이다. 

이게 뭐냐고? ㅋㅋ 시대에 뒤떨어지셨군. 이것도 모르다니...

'와친남'는 '와이프 친구 남편'의 줄임말이다.

이 사람은 돈도 잘 벌고, 가사노동도 잘 도와주며, 성격도 좋고, 얼굴도 잘 생기고, 심지어 몸매가 섹시하기까지 하다.

엄친아가 그래도 미성년의 불완전체라면, 와친남은 그야말로 사람으로서는 더이상을 상상할 수 없는 완전체이다. 말하자면 성자이고, 슈퍼맨이며, 도민준이다.

세상의 모든 남편들은 이 와친남 때문에 시달린다. 심지어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며, 부부가 파경에 이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엄친아와 와친남은 모두 '비교'라는 부조리한 의식의 산물이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속담처럼, 다른 사람의 가정은 더 행복해 보이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인생은 왜소하게 여겨지는, 극단적 비교의식에서 생겨나는 부정적 자기 비하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하신 일은 실수가 없으시다. 모든 것은 가장 적당하며, 그 안에 숨겨진 고유한 가치와 목적이 있다. 나의 아들도 나에게 가장 적당하고, 나의 남편도 나에게 가장 적당하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면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한 번 뿐인 인생을 어찌 허비하려 드는가? 남과 비교하고, 스스로 좌절하고, 자기 식구를 비하하는 자학을 계속할 필요가 무에 그리 있겠는가... 엄친아보다 내 아들을 귀히 여기고, 와친남보다 내 남편을 귀히 여기며 사는 것이 더 행복할뿐 아니라 옳은 길이 아니겠는가. 


은혜는 단지 종교적 열심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더 격이 높은 차원으로 성장하게 하는 생명이다. 은혜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황금이 아니라 내 안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행복의 원인이다. 은혜는 자부심이며, 담대함이고, 아름다움이다. 그러니 어찌 이 은혜를 우리가 사모하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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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다 ]


종교개혁자들의 이 말은, 교회가 건전한 신학과 신앙으로 신자들을 훈육하여 자라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하고 실현하는 주요한 수단이며 은혜의 통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교회가 불완전하고 수많은 약함을 가진 경우에도 그러할까? 

교회를 통해 건전한 신앙의 훈육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의 상처가 늘어나며,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커져간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교회를 떠나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하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는 현실을 단지 잘못된 선택이라고만 매도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사람'이 필요하듯이, 교회를 통해 생겨난 신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역시 다른 무엇이 아니라 좋은 '교회'가 필요하다. 

건강한 교회만이 왜곡된 신앙의 물줄기를 바로잡고 신자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어머니가 아닌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아닌 교회들이 많아진 현실이다. 비유를 하자면 도박에 찌들고, 술에 인박히고, 심지어 집을 나간 어머니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결손가정'을 체험하고 있다.

시대적인 비극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고 헌신해야 할 사명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목사가 중요하다. 목사는 교회의 어른[長]이 아니라, 교회의 문지기다. 교회의 파수꾼이다. 교회의 건전함을 위해 부름 받은 종[slave]이다. 그래서 교회의 문제와 목사는 절대로 다른 몸일 수가 없다. 

설사 교회가 '암'에 걸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목사의 암이다. 남의 일처럼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가나안 성도'는 들어봤어도 '가나안 목사'는 들어봤는가? 

말 자체가 모순이고 코미디다. 가끔 목사라는 감투를 좋아해서, 도피와 세탁을 위해 '목사'가 되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야 그야말로 별종이고,  목사는 교회와 함께 태어나고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크고 부유한 교회가 아니라, '좋은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목적으로 하는 교회들이 함께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래야 이 땅에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래야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영광이 회복될 것이고, 교회의 주인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춤 추실 것이다. 그 사명을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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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평을 불평하다 ]


'불평'이라는 말은 아니불(不), 평평할 평(平)을 쓴다.

직역을 하면 평평하지 않다는 뜻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사전에서는 세 가지 뜻을 찾아볼 수 있다.


「1」마음에 들지 아니하여 못마땅하게 여김. 또는 못마땅한 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냄.

「2」마음이 편하지 아니함.

「3」병으로 몸이 불편함


결국 평평하지 않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소리다. 그 소리가 표정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이 불평이다. 그래서 그 불평의 뿌리는 환경이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결국 자기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평은 미숙함의 열매이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미성숙의 결과다. 그래서 사람이 책임감이 없고, 사려가 깊지 못하며, 남의 탓을 잘 하는 '어린' 수준에서 불평은 흔하게 발현된다.

반대로 자기 감정을 잘 갈무리하고 깊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불평을 사라지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한글 성경에는 '불평'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개역개정판에서 6회 등장하는데(아직 원어로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 3번이 시편37편이다. 그리고 그 세 번 모두가 "악한 자(의 형통)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시 37:1, 개정)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시 37:7, 개정)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 37:8, 개정)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의인은 의인의 길을 소신껏 걸어가면 그뿐인데, 그러지 못하고 자꾸 눈을 돌려 악인의 형통과 자기를 비교할 때에, 그만 연약한 마음의 올무에 걸려서 스스로 비참하게 되고, 그 병든 심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불평'의 정체인 셈이다.

결국 불평하는 자신을 불평해야 마땅하다. 누구라도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불평할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상황에서도 성숙한 사람은 불평하지 않고 감사를 꽃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불평'이 흔한 것은 그만큼 조급하고 저열한 신앙의 수준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더 깊은 인격과 신앙으로 자라가려는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나이를 먹고 머리털이 희어져도 불평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불평에 대한 진지한 불평이 필요해 보인다. 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기도할 제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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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정적 경건은 오히려 위험하다 ]

입에 은혜로운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말을 하든지 "할렐루야" "주여" "아버지" "성령님"을 연발한다. 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이런 사람들의 실체도 과연 경건할까?

말이 화려한 사람들일수록 '난독증'이 흔하다. 우선 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 잘 읽지 않는다는 말은, 성경을 읽어도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자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흔하여서 전혀 경건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한 신앙에 도움이 되는 도서와 글을 읽는 것에도 게으르다. 어쩌면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교만함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말을 많이 하는 사람 치고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논리의 모순을 간파하지 못한다. 이미 스스로 그 논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극이 필요하다. 독서와 묵상은 가장 훌륭한 자극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착각'을 일으키지 않도록 우리는 이런 자극을 지속적으로 필요로 한다.

불행한 사실은, 자기모순에 빠진 사람일수록 이런 자극을 멀리 한다는 사실이다. 거의 맹목적인 신념은 그렇게 탄생한다. 그리고 그 신념 속에서 신앙을 말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ego)'의 포장일 뿐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고, 시냇가의 심은 나무가 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듣기 좋은 말로 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고전 4:20, 개정)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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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에서 자유하기 ]


실패는 엄연히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은 실패를 통해 더 완성되고 성숙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두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실패하면 고생해야 하니까, 또한 남들이 무시하는 시선으로 볼까 봐, 그리고 한 번의 실패가 거듭 반복되어 인생 자체를 망가뜨리게 될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도 무시할 내용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인생을 살고 불행에 빠지는 사람들도 현실에는 적지 않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은 이익보다 손해가 많습니다.

인생을 소극적이게 하고,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행복은 성공의 마지막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의 과정 속에서도 마땅히 찾아져야 하는 것인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그 과정을 행복하지 못하게 흔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의 한 구석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면, 나중에는 아무 것에도 도전하지 못하는 무력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제일 불행한 인생은 실패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한 채 끝나는 사람의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도전하고 실험을 반복하고, 자기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 자기를 바꾸고 목표에 이를 수 있다면, 실패 또한 아름다운 과정의 한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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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내낼 수 없는 것들 ]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가 있다.

두 엄마가 비슷한 시기에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아기가 죽고 말았다. 두 엄마는 서로 살아있는 아기가 자신의 아기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난감한 이 사건은 결국 솔로몬의 재판장에까지 이르렀다.

왕은 고민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판결을 내렸다. 즉시로 아기를 둘로 갈라서 두 엄마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라는 것이다. 병사는 칼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두 엄마가 각각 뛰어나오며 외쳤다.


“제가 포기하겠습니다. 아기를 살려 주세요.”

“아닙니다. 왕의 현명하신 판결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엄마’와 ‘엄마노릇’은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르다.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도 있고, 품에 안아 잠을 재울 수도 있다. 더한 것도 흉내는 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다. 사랑은 결코 흉내로 되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 가지 영원한 것을 찬양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세 가지는 늘 의심의 구름에 덮여 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 가지를 흉내 내며 자기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비루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무례하며 폭력적인가? 또한 소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욕망은 우리 가운데 얼마나 흔한가? 믿음이라고 주장되는 미신과 독선은 이미 바닷가의 모래처럼 세상에 가득하다.


그렇다고 가짜가 진짜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솔로몬의 재판을 통해 보여지는 바와 같이, 진짜와 가짜는 결정적 순간의 선택을 통하여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흉내로 되지 않는 것이다.

대충 비슷하게 모양이나 흉내 내면서 살다가는 언젠가 반드시 큰 코 다칠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무는 그 열매로 자기를 증명하는 법이다. 믿음을 말하고, 소망을 설계하고, 사랑을 주장할 수 있어도 그런 것만으로 열매는 결실하지 못한다.


나는 내가 궁금하다. 나는 과연 진짜일까? 하나님의 재판장에 올라갔을 때에, 나는 과연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내 열매는 비슷한 것이 아니라 진짜일 수 있을까?

무수한 말들 속에서 고민한다. 주장과 지식이 실체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 속에서 깊은 갈등을 반복한다. 내가 바라보았던 것을 과연 손에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진실로 내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발견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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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너무 막연합니다. 


사람들마다 각자 자기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창고를 더 좋아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능력을 더 사모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뒷방 늙은이처럼 가만히 계신 분으로 믿는다 하고, 어떤 이는 주차부터 쇼핑까지 모든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도우미'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 모두가 자기의 믿음을 확신합니다. 결코 자신을 믿음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은 자기 편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망하는 순간에도, 믿음은 있었는데 때가 아직 아니라서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저는 평생을 신앙 안에 살았고, 사역자로 25년을 지났으며, 목사가 된 지도 어언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믿는다'는 말이 무척이나 생소하고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야말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판정해 주시는 단어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지요. 그 바라는 것이 과연 내 욕망과 같은 이름일까요?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지요. 내가 욕망하는 것은 얼마든지 내가 마음에 그리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바라는 것이 생겼을 때에, 그것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가 전혀 추측도, 짐작도, 어림도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생소하고 이질감이 느껴지는 소원의 실증적인 증거가 바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철저하게 하늘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주장하고, 확신하고, 공부하고, 의식하는 것과 상관 없습니다. 믿음은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스스로 믿음 있었다 하는 사람들이 주님과 쟁론할 것입니다. 내가 왜 믿음이 없냐고? 내 믿음이 왜 인정받지 못하냐고? 따지는 소리로 시끄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는 일입니다. 그분의 판단은 절대적이고 공의롭기 때문입니다. 

믿음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평생 헌신하고, 주의 일을 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었다 해도, 그것이 믿음 자체는 아닙니다. 지위와 거룩한 이름의 명찰은 더더욱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 믿음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묵상하십시오.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내게 있는가? 나는 무엇으로 나의 믿음을 확증하고 있는가? 나의 믿음을 과연 하나님께서도 인정해 주실까? 나는 믿는가? 정말 믿는가?

의심과 회의로서가 아니라, 겸손과 의뢰함으로 믿음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고민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있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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