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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0


안나 로버트슨은 농장에서 고용되어 일을 하던 젊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일하던 농장에서 건실한 젊은이를 만나 결혼을 했는데, 그의 이름은 탐 모세스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열심히 일을 해서 마침내 자기 농장을 마련하였으며 슬하에는 10남매를 두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었습니다.

그녀의 나이가 80세쯤 되었을 때에, 그녀의 손에는 심한 관절염이 찾아왔습니다. 손이 아파 잠을 잘 이루지 못했으며, 점점 감각도 둔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점점 둔감해지는 손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삶의 풍경을 그대로 화폭에 옮겼습니다. 농장, 들판, 사람들과 가축, 노을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의 어떤 것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선물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뉴욕의 유명한 미술 수집상이 그 마을을 지나가다 한 상점에 들렀습니다. 거기에는 안나의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그는 첫눈에 그 그림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간곡한 요청과 도움으로 안나는 화가로 데뷔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모세스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미국의 역사에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라고 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80의 나이에 화가로 데뷔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500여점의 그림을 세상에 남겼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머니가 그렇게 엄청난 작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녀의 관절염과 외로움이 그 이유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남겨진 외로움과 밤마다 찾아오는 손가락의 통증을 잊기 위하여 그림에 집중하고 매달렸던 것입니다.

고통을 없애 달라고요? 좋습니다. 그러나 편안하면 과연 열심과 집중력이 생겨날 수 있을까요? 모든 일이 형통한데도 하나님을 향하여 계속해서 간절하게 매달리는 사람은 정말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찾고, 주님의 뜻을 깨닫곤 합니다.

때문에 고통 자체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의 에너지를 승화시킬 위대한 목적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프기만 하고 인생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함이 진정한 고통의 정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모질게 상처받음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더 큰 은혜와 능력으로 그 상처를 덮으셔서 위대하게 하십니다. 고통의 에너지가 은혜로 승화되어서 평범한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소중한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니 삶을 사십시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십시오. 고통에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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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3


큰 아들 준혁이가 드디어 엄마보다 키가 컸습니다. 작년 겨울방학까지만 해도 엄마와 팔씨름을 하면 엄마가 이겼는데, 얼마 전부터는 막상막하(莫上莫下)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전에도 둘이 팔씨름이 붙었습니다.

지는 사람은 서로 1시간 동안 부하가 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엄마는 별로 좋을 것 없는 이 경기를 피하려고 했지만 옆에서 아빠가 부추기는 바람에 어떻게 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결과를 말씀드리면 거의 압도적으로 준혁이가 이겼습니다. 서로 손을 맞잡을 때부터 이제는 준혁이의 손이 더 컸고, 힘을 주는 방법도 남자다와 엄마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준혁이는 기세 등등! 엄마는 뭔가 좋으면서도 섭섭한 표정...

그 때 엄마가 준혁이게 한 마디 했습니다.

“대장님, 그 좋은 힘으로 나가서 설거지나 하시죠?”

비록 한 판의 팔씨름으로 대장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엄마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찬혁이와 아빠는 배꼽을 잡았고, 준혁이는 “뭐야, 이게! 대장이 되도 하나도 좋은 거가 없잖아...”하며 같이 웃었습니다.

그러더니 반격을 했습니다.

“나보다 키도 작은 게... 나보다 힘도 없는 게...”

물론 엄마를 깔보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엄마의 표정은 싱글벙글하기만 합니다. 전혀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고 말입니다.

준혁이는 아직 모를 것입니다. 자기보다 커지고 힘세진 아들을 보는 부모의 심정을 말입니다. 섭섭한 마음보다 기쁨이 크다는 것을, 그렇게 되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준혁이가 태어났을 때, 아내는 젖이 별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먹성이 좋았던 준혁이는 유난히도 엄마의 젖을 빨았습니다. 부족한 젖을 빨다보니 젖꼭지가 갈라지고 피가 났습니다. 아내는 약도 바르지 못할 정도로 아파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가 젖을 찾으면 그 입에 젖을 물리고 자기는 울었습니다. 그렇게 준혁이가 컸습니다.

그런 준혁이가 이제는 의젓한 청소년이 되어가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에게 지는 것이 왜 기분 나쁜 일이 되겠습니까?

아마도 준혁이가 고등학생 즈음이 되면 팔씨름으로 아빠도 이기지 않을까 합니다. 어쩌면 더 일찍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아빠에게 준혁이는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소중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아무리 아빠보다 커져도 아빠가 안아주고, 돌봐주고, 사랑하고 싶은 ‘아들’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주 안에서 부모를 향하여 최선을 다해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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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6


예전에 제가 가르쳤던 청년이 하루는 같이 주일을 준비하던 중에 이런 푸념을 했습니다. 

“요즘 데이트를 하는데, 아휴~ 돈이 너무 많이 들어요. 돈 없으면 사랑도 못하겠어요...”

그 당시에는 ‘좋다’는 의미로 받고 피식 웃으며 넘겼지만, 점점 시대가 그러한 부담감을 웃어넘길 수 없게 만드는 정서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였는데, 이제는 능력으로 비교되고 못해줘서 죄스러운 아버지가 많습니다. 어머니는 그냥 어머니였는데, 요즘은 교양과 졸업장 때문에 자식 앞에 부끄러워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정서는 그리스도인다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세상의 방식과는 다릅니다. 세상은 있어야 줄 수 있고 주어야 사랑이 되지만,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비록 내게 없을지라도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양 중에 이런 가사가 있지 않습니까?

‘나의 힘으론 당신을 사랑할 수 없네. 나의 가진 모든 것으로 당신을 축복할 수 없지만, 주님이 주신 크고도 놀라우신 그 사랑으로 당신을 축복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참된 사랑이란 지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도의 자리에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동경드림교회가 가족과 같은 교제와 섬김으로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먹을 때만 힘을 합하고 보일 때만 친절하게 대하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허울이며, 가식일 뿐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러한 사랑을 말과 혀의 사랑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말만 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하고, 서로의 입장에서 서로를 생각하며, 주일의 사랑을 일주일의 삶으로 확대해야 합니다. 더욱 깊이 사귀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아직도 우리 교회가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좋은데, 아직 그 사랑을 경건과 거룩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저력이 부족합니다. 인간성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신앙에서 나오는 사랑이 되기에는 아직도 많은 세월의 기도와 목양을 필요로 합니다.

나의 한계 속에서 사랑하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실망을 안겨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다, 사랑하다 어느 한계를 넘으면 그 사랑이 전부 미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경드림교회 지체들이 보다 큰 사랑에 눈 뜨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며 사랑합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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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2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런던 대공습 기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아버지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폭탄 맞은 건물에서 달려 나왔습니다. 

마당 앞에는 며칠 전 투하된 포탄 때문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져 있었습니다. 가능한 빨리 은신처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버지는 그 구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손을 들고 딸에게 따라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주위의 폭발에 겁을 먹은 데다 어두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소녀는 “아빠, 아빠가 안 보여!”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늘은 백색 예광탄 불빛으로 환했고 불타는 건물 때문에 사방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고개를 든 아버지는 구덩이 바로 앞에 선 딸의 윤곽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네가 보여. 그러니까 뛰어!” 

꼬마 소녀는 펄쩍 뛰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보여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을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린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결정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차지 않거나 혹은 너무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나의 견해로는 그것이 결코 유익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에라도 우리가 믿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바로 내 영혼의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러한 신뢰를 가지도록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11)


맘에 들지 않는 것과 나쁜 것은 다릅니다. 나쁜 것은 우리의 영혼을 시들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수렁에서 건져 주시고, 보다 견고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 주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틀림이 없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진심으로 기도하는 신자라면, 이제는 자기 삶의 주권이 아버지의 손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삶 속에서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의심도, 두려움도 없이 받으십시오. 어둔 구덩이처럼 보일지라도 아버지께서 그곳으로 인도하신다면 주저하지 말고 믿고 가십시오. 확신하건데, 그곳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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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9


세계적인 설교가 제임스 E. 화이트는 그의 책 <하나님과 친절한 사귐>에서 다음과 같은 그의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러시아에서 한 교회의 주일 아침 예배 설교를 부탁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가 나뿐 아니라 여러 명이었습니다. 예배는 거의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친 뒤 나는 그 교회 목사님과 잠깐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예배가 긴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교인들의 열의에 더욱 놀랐던 것입니다. 3시간 내내 그들은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았고 지루한 기색도 없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도 집에 돌아갈 마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운을 떼었습니다. “미국에서는요, 예배가 한 시간이 넘으면 여기저기서 시계가 삑삑거립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신앙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게 허용되지 않았고, 발각되면 모두 감옥에 들어갔지요. 지금 이런 일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질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저 행복한 겁니다. 그리고 어떤 앞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매주일이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혼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예배를 너무 건성으로, 느긋하게, 습관적으로 드렸던 게 아닌가? 이 사람들은 예배가 무엇인지를 안다. 그렇기 때문에 고초를 당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다시 감내할 의지가 있는 것이다. 예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갈 의지가 있는 것이다. 죽을 의지가 있는 것이다. 한평생 살면서 예배만큼 귀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건강을 잃기 전에는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고, 친구를 잃기 전에는 친구의 아쉬움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잃고서야 그것의 귀중한 가치를 안다면 이 또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매주일, 우리에게 소중한 교회가 있다는 것과 아름다운 지체들이 있다는 것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추구하는 간절한 신앙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다른 것들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예배가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예배의 부흥으로부터 영적인 성숙과 전도와 삶의 활력이 생겨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소중하게 지켜져야 하며, 또한 최선을 다해 드려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동경드림교회 지체들에게 권합니다. 예배를 삶의 중심에 두십시오. 그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 소중한 기회를 소홀함으로 잃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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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5


하나님은 참 은혜로우십니다. 그분의 성품을 이야기할 때에 성경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자비’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작으면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나만큼 똑똑하지 못하거나 민첩하지 못한 사람,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답답해하고 면박을 줍니다. 물론 그 사람에게도 모자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해보면 ‘그 사람조차 용납하지 못할 만큼’ 내 마음의 넓이와 깊이가 작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면박을 주신다면, 우리 중에서 견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하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시고, 부족함을 하나님의 넉넉함으로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고, 그분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찬송가 중에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라는 가사를 참 좋아합니다. 높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내가 연약할수록 오히려 더 사랑해주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를 섬기다보면, 이런저런 지체들의 부족함 때문에 마음 상하기도 하고, 혹은 은연중에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사실 우리의 본성이 악해서, 눈치가 없거나 폐를 끼치는 사람에게는 나도 막 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목사도 그렇답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태도를 가지고 적절히 자기의 마음을 방어하며 사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래서 남의 약점을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수용하는 태도를 배워야만 합니다.

연약할수록 귀히 여깁시다. 말 한 마디라도 함부로 하지 말고, 공손하게 대하는 사람이 됩시다. 눈높이를 맞추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함께 본받아 연습하도록 합시다.

동경드림교회는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시키는 리더십이 아니라 모범을 보이는 리더십을 가집시다. 그것이 더딘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단호하게 명령하면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움직이지만, 모범을 보이고 감동을 주어 사람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섬김의 리더십이야말로 오랜 여운을 남기며 사람을 진심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지체들이 목사를 무서워하기 보다는 목사를 사랑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동인이 되어서 함께 순종하고 움직이는 교회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목사부터 섬기고 용납하는 모범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비전을 마음에 새기고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드리는 헌신을 함께 훈련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우리의 은혜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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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1


한 교회에서 선교위원회가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선교문제’에 대한 심각한 논의를 하고 있는데, 그 곁에서 선교위원장인 장로님을 따라온 손녀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놀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성경에 ‘문제’라는 말이 있나요?”

장로님이 웃으며 대답을 합니다. 

“글쎄다. 내가 알기로는 성경에서 그런 단어를 못 본 것 같구나.”

“그래요? 그런데 왜 성경에 나오지도 않는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오래도록 의논을 하지요. 하나님이 별로 중요하게 여기시지 않기 때문에 성경에서 빠뜨린 것이 아닌가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성도는 그 몸이라고 했습니다.

팔이나 다리가 두통을 앓지 않지요. 오직 두통은 머리만이 할 자격이 있습니다. 팔과 다리는 머리가 내린 결정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으로 그 본연의 역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염려와 걱정으로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은 주님을 머리로 인정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것은 마치 팔과 다리가 머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머리예요. 그 증거로 내가 두통을 앓고 있잖아요. 두통은 머리만 가질 수 있는 것인데, 내가 두통을 느끼는 것을 보면, 분명히 내가 머리인 것이 틀림없어요!”

애굽의 10가지 재앙을 체험하고,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목격했으며, 시내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다녀온 10명의 정탐꾼이 들려준 부정적 목소리에 넉 다운 되었습니다. 그들은 적을 만나기도 전에 미리 겁부터 먹었습니다. 살 길이 없다고, 모든 것은 틀렸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태도는 객관적인 이성으로는 이해가 갑니다.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보다 가나안의 거주민들은 강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크게 실망하셨습니다. 그들의 아우성은 하나님을 슬프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름기둥 아래에서 스스로 ‘머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해답’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향한 순종과 신뢰는 문제를 문제없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머리도 나쁘면서 왜 자꾸만 고민을 합니까? 염려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러면 차라리 기도를 하십시오. 기도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주님 앞에 어린 아이가 되십시오.

우리가 빠져있는 수렁의 대부분은 우리가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노력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방향도 없으면서 노력만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머리되신 주님이 우리에게 방향을 가르쳐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기다릴 때에는 낙심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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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5


조지 뮬러가 우리에게는 기도응답의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그를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의 기도가 우리와는 다른 그 어떤 탁월한 비결을 가지고 있어서 특별히 더 많은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의 삶이 바로 ‘고아들의 아버지’로 자기를 헌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삶이었고, 또한 그 길을 걸으며 그만큼 절박했기에 그런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5만 번의 기도에 응답을 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까닭은, 역설적으로 그가 5만 번이나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 살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직 기도의 힘으로 많은 고아들을 돌보는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일기에 이렇게 적은 적도 있었습니다.

‘기금이 바닥났다. 예비로 남겨두었던 것들까지 모두 팔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는 이 문제를 붙들고 동역자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나흘이 지난 후에, 갑자기 고아원을 방문한 한 여인이 많은 기부금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녀는 이미 나흘 전에 이 근처에 도착하였지만, 먼저 여행을 조금 하다가 늦었다고 했습니다. 조지 뮬러는 다시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돈이 나흘 전부터 이미 고아원 근처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를 도우실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조지 뮬러는 전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그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도와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난에는 두 얼굴이 있습니다. 고난을 기도의 손으로 받으면 고난은 향기가 나고, 감사가 되며,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깊이 있게 합니다. 그래서 고난은 ‘변장한 축복’이라는 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기도하지 않는 맨손으로 받을 때에는 절망이 되고, 불평이 나며, 사람을 그늘지게 합니다. 그래서 고난에는 ‘수렁’이라는 또 다른 얼굴이 있습니다.

어렵게 이어지는 현실에서 싸우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에서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 원하시고 이미 돕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도움은 단지 우리를 빵의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기 위하여, 고난과 기도의 적절한 배합을 사용하십니다. 

응답의 사람이 됩시다. 그렇다면 먼저 문제가 하나쯤 필요하겠군요... 다행히도 우리에겐 모두 문제가 하나 이상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기도하면 됩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자라고, 영혼은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진리입니다. 실천만 한다면 말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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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8


우리는 흔히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중보’라는 말은 그의 입장에 스스로 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라는 것은 내 입장에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입장에서 그를 이해하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아무도 진정한 ‘중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이해력의 한계가, 사랑의 한계가, 능력의 한계가 우리 기도를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중보는 우리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을 사용하고, 또한 좋아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계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처럼 남을 이해하고 위하여 기도하고 싶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내 지체의 아픔을 나의 가슴 깊이로 느끼고, 그를 위하여 내가 눈물로 탄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영성에도 비할 수 없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기도를 받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중보의 기도를 받는다고 하여도 그것이 우리 자신의 기도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기도의 부탁을 참 많이 받습니다. 목사라는 ‘직업’이 어떤 의미에서는 설교보다 기도에 더 많은 의무를 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지체들은 그렇게 기도를 부탁하고 나서 정작 자신은 기도하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본인에게 소원은 있으나 그 소원을 위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성실하게 기도할 믿음은 없는가 봅니다.

이런 지체를 위한 중보의 기도는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본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데, 주변에서 아무리 많이 기도해 주고 그를 위하여 눈물 흘릴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결정적인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강제로 은혜를 주시고, 강제로 구원을 주시고, 강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분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몸소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기도의 응답이 있기까지 최선을 다해 기도하려 하지만 사실 우리의 연약함은 성실한 기도생활을 방해합니다. 언제나 마지막 고비에서 2%를 채우지 못해서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이르지 못하는 지체들이 많습니다.

중보는 그 결정적인 2%를 채우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였으나 믿음과 인내가 조금 부족할 때, 누군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그 기도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스스로 기도하지 않는 분들은 저에게 ‘중보’의 기도를 부탁하지 마십시오. 하지도 않을 기도 약속은 피차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됩니다. 신앙인이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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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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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4


모든 진흙덩이가 그렇듯이 질그릇으로 최고의 작품이 되어서 왕궁의 식탁이나 부잣집의 장식장에 올라가는 것이 내가 가진 최고의 꿈이었다. 다행인 것은 우리들의 토기장이가 이 나라 최고의 장인(匠人)이란 것이었다. 그가 만든 그릇들은 거의 다 왕궁이나 부잣집으로 팔려나갔다.

어느 날. 토기장이가 내 앞에 앉아서 나를 반죽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작품으로 태어날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토기장이가 빚는 나의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주둥이에 유난히도 넓은 손잡이.

나를 지켜보는 다른 진흙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난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를 이런 흉측한 모습으로 빚은 토기장이의 손길이 밉고 또 미웠다.

마지막으로 불가마에서 나온 내 모습은 정말 절망적이었다.

토기장이가 날 왜 이런 모습으로 빚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토기장이는 내가 완성되자마자 나를 품에 앉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이었다.

아무리 나를, 이렇게 가난한 농부에게 팔려고 했어도 이런 모양으로 만든 토기장이가 나는 생각할수록 미웠다. 차라리 바닥에 떨어져 내가 깨져 없어지기를 바랄뿐이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농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난 너무 놀라고 말았다.

그 농부는 농사일을 하다가 두 손이 잘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하게 생긴 그릇을 사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토기장이는 이 사실을 알고 이 농부를 위해 손이 아닌 팔로 사용할 수 있는 나처럼 생긴 그릇을 만들었던 것이다.

나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농부에게 토기장이가 말했다.

“더 고마운 것은 나요.

  내가 질그릇을 만들면서 이렇게 기뻤던 적은 처음이요.

  이 그릇은 나의 최고의 작품이요!”


토기장이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 나라는 사실을 난 그 때야 깨달았다.

그리고 나를 빚던 토기장이의 그 따스한 손길을 그제야 새로이 느낄 수가 있었다...


당신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상처, 약점, 아픔도 영원히 당신을 구속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작품입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당당한 자존감을 가지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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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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