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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4


전도사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가을이 되어 교회에서 경로관광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60세 이상 되신 분들을 모시고 단풍 구경을 시켜드리는 행사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권사님이 자기는 빠지겠다고 하셨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셔서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다니시는 분이셨는데, 아마도 남에게 폐가 될까봐 걱정이 되셨던 모양입니다.

그 권사님을 두고 하신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경로관광을 앞두고 그 직전 주일에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다음에 우리가 천국에 가면, 열심히 기도만 하다가 온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책망을 하신데요. 무슨 책망인지 아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주신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책망이랍니다. 왜 너는 내가 만든 내장산 단풍구경도 못하고 왔느냐? 뭐가 바빠서 그렇게 살았느냐? 네가 내 솜씨를 보지 못해서 찬양하지 않은 것이 나는 섭섭하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으셨는지, 그 권사님은 경로관광을 떠나는 아침에 해맑은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좋은 구경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마음을 결심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거센 풍랑의 시기를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에게서도 이상한 여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광야로 도피생활을 하던 다윗은 하늘의 해와 달을 보며 찬양하였고, 다니엘은 왕의 포고령을 알면서도 창문을 활짝 열고 기도하였으며, 예수님께서도 바쁜 사역의 틈틈이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린 바처럼, 일은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습니다. 일을 모두 마치고 여유를 갖겠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여유를 포기한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여유를 찾아야 하고, 그 여유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선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들을 하나씩 느끼고 곱씹으며 찬양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살찌우는 습관입니다. 그래서 정서적으로 메마른 사람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풍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푸른 초목에 화려한 단풍이 들어갈 계절입니다. 태풍이 지나가더니 오늘은 하늘이 얼마나 쾌청합니까? 오늘도 건강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동경에서도 교회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감사로 마음을 채우십시오. 잃어버린 감동을 되찾으십시오. 하나님을 향하여 서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선하십니다. 내 생각과 그분의 생각이 다를 때에라도 나보다 그분이 선하시고 지혜로우십니다. 나무 한 그루를 키워 보아도 그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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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7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육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바울은 말했습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성숙하다는 의미이고, 예수님을 닮았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육적이라는 것은 미숙하다는 의미이고, 예수님과 닮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제대로 묵상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닮아야할 주님의 모습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성경 속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성숙에 가장 필수적이며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말씀’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없으면 신자의 영혼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저절로 육적이게 됩니다. 초보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시험에 시달리고 실패를 반복하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가장 바쁘고 힘겨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많이 늘어났지만 반대로 개인의 행복을 누리고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경제적인 활동에 사용하고, 나머지 시간도 그 노동의 결과로 소모된 자신을 다시 충전하고 회복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목표는 ‘빵’으로 대변되는 물질이 초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왜 삽니까?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삶이 어떤 삶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라면 당신의 현실에서 어떤 것을 최우선으로 하셨을 것 같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삼켜버리는 물질의 바다에서 헤엄을 쳐야 합니다. 아니,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그 거친 바다 위를 걸었던 베드로를 본받아 우리도 세상의 바다 위를 용감하게 걸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삶에서 초점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스스로 성장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십시오. 바쁘다는 것을 핑계하지 마십시오. 바쁘기 때문에 숨 안 쉬는 사람이 없듯이 그리스도인은 바쁘더라도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기본을 잃어버린 신자는 표류합니다. 환경을 핑계하고 다른 사람을 핑계합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묻고 대답해 보십시오. 정말 다른 사람 때문에 내 신앙의 상태가 이처럼 유치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보지 말고 주님을 봐야 한다는 것, 하나님을 먼저 섬겨야 한다는 것, 말씀이 내 인생길에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그 길은 다른 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 말씀을 통하여 하루하루의 삶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와 교제하는 성도는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바로 그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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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0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입니다. 성경책은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제대로 읽고 묵상하는 성도가 적고, 설교는 많지만 깨닫고 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언제인가부터 지적 유희(柳僖)가 거룩한 교회를 오염시켰고, 신자들은 더 이상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말로 듣거나 농담으로 여깁니다. 때문에 오해가 무성하고 말씀이 역사하는 경건의 삶은 우리에게 희귀한 것이 되었으니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라고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의 삶에 말씀의 은혜는 샘과 같습니다. 샘이 마르면 나무가 시들고 생명이 사라집니다. 가뭄이 심각한 아프리카의 소식을 들어 보십시오. 마른 샘가에는 동물의 사체가 즐비하고, 갈라진 땅에 간신히 서 있는 나무는 뿌리까지 말라 선 채로 장작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신자의 영혼이 이와 같습니다. 찬양의 꽃은 시들고, 감사의 열매는 떨어집니다. 감격이 없는 메마른 영혼은 정죄하기 쉽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쉽게 받으며, 한 번 받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여 오래 동안 가슴앓이 하게 됩니다.

기도가 될 리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형식에 그칩니다. 예배는 습관이 되고, 삶은 불신자의 그것과 구별됨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만의 얘기가 아니라, 성경이 미리 말씀하신 예고된 역사의 전부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저는 제가 스무 살 무렵에 했던 설교의 녹음을 다시 듣곤 합니다. 그 시절에 열정은 넘쳐으나 제 인식의 수준은 미천했고 때문에 설교 곳곳에서 허점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많이 보완되고 은혜로 채워졌으나,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자로서 제 자신이 얼마나 모자르고 부족한 사람인지를 날마다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제가 강단에 서서 설교할 때마다 제가 증거하는 메시지에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이 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여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함에도 사람을 쓰십니다.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부족함을 주목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농담과 거짓말로 들려졌던 것입니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대하고 들으려는 순전한 성도들의 열심,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어린 아이 같은 심령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누구보다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신자 자신의 손해요, 문제입니다.

조금 더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말씀으로부터 기도, 찬양, 감사의 삶을 회복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이 시대에는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다고 저는 간절히 말씀을 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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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3


그렇게 무덥던 날씨가 벌써 아침저녁으로 시원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계절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느껴집니다. 

일본에서 처음 겪는 여름을 보내며 새롭게 배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겨울에는 그리도 추위가 뼈에 사무치더니, 여름은 또 그렇게 열기와 습도로 인하여 힘들었습니다. 금새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 같아서 겸연쩍어 하다가도 생각해보니, 이처럼 약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환경을 진화론자들은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그 까다로운 조건들이 한 해도 아니고 수 천 년의 세월동안 질서정연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우연’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온 우주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다윗처럼 하늘, 달, 별을 보며 하나님의 임재를 음미해 보십시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오는 날 동안 겪었던 많은 사연들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섬길 수 있었던 것이 정녕 우리 자신의 의지 때문이겠습니까? 계절만큼이나 변함없는 섭리와 은혜 가운데서 우리를 이끌고 붙잡아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불평에 강하고 감사에 약한지요. 항상 주신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없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큰 죄라도 저지르신 것처럼 따지고 항변하기를 잘합니다.

저부터 반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무감각했던 나, 감사보다는 불평이 앞서 있었던 나, 미련하고 약한 나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묻는 것에 부족했던 나를 반성합니다. 그리고 이런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사 조건 없는 사랑으로 용납하여 주시는 주님,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으로 나를 붙잡아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제자촌교회 가족 여러분, 무덥던 여름의 기억과 함께 우리의 모든 게으름과 불평도 같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제는 정말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을 섬길 때가 아니겠습니까?

신앙은 내면의 문제입니다. 때문에 아무도 강제할 수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깨어나야 합니다. 내가 내 문제에 정직하게 대면해야 하며, 또한 그것을 주님과 함께 경영하기로 작정해야만 합니다. 결단은 우리의 몫이고, 그 다음은 주님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는 가을에는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게 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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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7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전쟁의 불길이 치솟았던 베이루트에서 한국인의 특별한 사명감이 사람들을 감동케 하였습니다. 지난 7월12일, 이스라엘의 공격이 시작된 이후에 ‘중동의 파리’라고 불리던 베이루트의 시내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의 외국인은 도피했고, 시민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한국인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베이루트의 시민들을 위하여 봉사한 것입니다.

한국전력이 베이루트의 두 발전소를 위탁경영하기로 계약한 것은 올해 2월부터라고 합니다. 현지법인을 만들어 즉시 위탁경영에 들어갔는데, 그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처럼 전쟁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때문에 현장에 근무하던 9명의 한국인 직원 중에서 7명은 귀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지법인장 이선민(49세)씨와 부장 이종원(45세)씨는 귀국을 포기하고 자기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 법인장은 "우리마저 철수하면 레바논이 암흑 속에 빠질 것 같아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부장은 "회사의 신용을 지키는 것은 물론 전란에 시달리는 레바논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베이루트에 남아서 생산하는 전력은 전체의 60%에 해당하는 전력이라고 합니다. 언제 발전소에 폭격이 가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현장을 오고가며, 오히려 도망하려는 현지 기사들에게 사명감을 가지도록 독려하여 발전소를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베이루트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암흑을 면할 수 있었고, 시민들은 빛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을 곁에서 지켜본 현지 직원들은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현대판 영웅이 아니겠느냐?”며 진심어린 감동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사명감이 무엇인지, 충성이란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40대의 나이에 목숨을 걸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붙들 수 있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입니다. 더욱이 그들이 그 ‘일’을 통하여 자기와 피부색이 다르고, 말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고 한다는 점이 더욱 감동스럽습니다.

이익에 따라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세상의 풍조 속에서도 신앙인은 그러한 세상의 방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바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이러한 헌신의 모습을 통하여 세상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명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어려움이 바로 소중한 열매로 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충성한다면, 진정으로 그분이 주신 사명에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에겐 반드시 그분의 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주님께 상 받기를 소망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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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0


퇴임을 앞둔 고이즈미 일본총리가 8.15 종전 기념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였습니다. 우려했던 바와 같이 한국과 중국은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당분간 외교적으로 관계가 경색되는 것은 피할 수 없어 보입니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일본의 교육제도는 ‘국사(일본사)’가 선택과목으로 되어 있어서 많은 학생들이 오히려 세계사를 공부하고 국사를 공부하지 않아서 자기들의 역사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현재의 상황만을 가지고 이해하니, 한국과 중국, 대만 등의 반응이 ‘내정간섭’과 같은 기쁜 나쁜 시비로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주변국들이 더 강력하게 항의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것이 일본의 내부적으로는 극우파들의 주장에 힘을 더 실어주는 역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 되었든 지금 일본 땅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입니다. 과거를 빌미로 일본을 정죄하는 것보다는 진실을 밝히고 ‘화해’를 모색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보다 더 명백한 입장을 취하고 토론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역사에 대하여 깊이 있는 이해를 가져야 하고, 일본인들이 알지 못하는 일본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그야말로 개미처럼 일하는 근대를 살아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 속에서 유별난 근면함으로 경제를 일으켰고 오늘날의 부국을 이룬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는 나라와 회사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고 자기를 희생한 순진한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본이 나쁘다’는 주변의 목소리는 그들에게 있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때문에 일본의 우익화는 교묘하게 조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실상 철저하게 자기를 억누르며 나라와 집단을 위하여 헌신해온 사람들의 마지막 선택-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기가 헌신했던 ‘그것’을 지키려는-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인과 일본인의 역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 바탕 위에서 진심으로 그들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비전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의 대통령이나 외교부 장관의 말보다 바로 여러분이 이 일본의 사회 속에서 지혜롭게 던지는 한 마디가 오히려 일본을 움직이고 일깨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먼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원수였던 일본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크리스천인 우리의 사명입니다.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말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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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3


지난 2일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은 흥미로운 조사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각 나라의 자녀들이 부모와 보내는 시간을 조사한 것이었는데, 특별히 아빠와 자녀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하루에 얼마나 되는가가 초점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가장 시간이 적은 나라는 한국으로 2.8시간, 그리고 그 다음이 일본으로 3.1시간이었고, 미국과 스웨덴 등은 4.6시간, 태국은 5.9시간을 자녀들이 아빠와 보내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자녀들이 아빠를 빼앗긴 이유는 장시간에 걸친 노동, 즉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 주간에 무려 60시간 이상을 일에 할애하는 아빠들이 보편적인 현실에서 아이들은 아빠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제대로 가지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기사를 대하면서,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살아가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과 일본, 양편이 다 좋은 역할모델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이라면, 점점 더 자녀와 아빠의 건강한 관계형성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앞섭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아바’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유년 시절에 아버지와 건강하고 친근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 건강한 신앙의 형성을 위해서도 얼마나 소중한 자산이 되는가를 말해 줍니다. 아빠를 잃어버린 이 시대는, 어쩌면 그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하나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자녀들을 위한 윤택하고 좋은 조건들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영양가 있는 식생활, 최상의 교육, 정서적인 안정, 친구 등... 한 사람을 건강하게 양육하기 위한 요인들은 다양하고 긴밀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우선하여 하나님은 ‘가정’이라는 소중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때문에 가정이 바로 서면, 다른 조건들이 아무리 부실하더라도 자녀는 올곧게 양육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른 조건들이 아무리 충분하더라도 가정이 흔들리면 자녀는 불안과 방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현대를 살아가며, 때때로 어쩔 수 없는 분주함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1달, 6개월, 1년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돌아가야 합니다. 아니, 되도록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엄마는 엄마의 자리로, 아빠는 아빠의 자리로 돌아가서 아이들과 인격과 신앙의 유대를 깊이 해야 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녀는 그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다른 것을 얻어도 내 아이가 건강한 신앙과 인격으로 자라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 자라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내야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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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6


光が丘公園(히까리가오까코엔)에서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まつり(마츠리, 지역축제)를 합니다. 궁금한 마음에 아이들과 아내가 구경을 나갔는데, 꼬치와 뽑기 등의 노점상만 있고 한국의 장터와 별로 다를 바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더위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서 오후까지 공부를 하던 아이들이 바람을 좀 쏘이고 오겠다고 해서 허락을 했습니다. 한 시간 즈음 집을 나갔던 아이들이 돌아왔을 때, 큰 아이는 힘이 나 있었고 작은 아이는 맥이 빠져 있었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둘이 나가서 500엔씩 내어 뽑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큰 아이가 먼저 했는데, 제법 그럴듯한 권총과 다트를 뽑아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자 작은 녀석이 자기도 그렇게 뽑기가 나올 줄로 알고 했다가 그만 꽝이 나와서 카드 몇 장만 받아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구두쇠 짓을 해서 모았던 용돈을 어이없이 날렸다는 생각에 작은 녀석이 눈물까지 핑 돌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뽑기를 했다는 사실을 나무라지도 못하고 우선은 오히려 위로를 해야 했습니다.

제가 나중에 두 아들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그 아줌마는 장사를 하는 거란다. 세상에 이익이 남지 않는 장사를 누가 하겠니? 더구나 이 더운 날에 말이다. 물론 준혁이만 생각하면 아줌마가 손해를 보는 것이 되겠지만, 준혁이를 보고 찬혁이가 뽑기를 해서 꽝을 뽑았으니 결국 아줌마가 이익을 남겼구나. 애초부터 돈은 적게 내고 물건은 좋은 것을 가지려고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찬혁이가 낭패를 본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니지만, 다음에 또 같은 일을 한다면 준혁이도 낭패를 볼 것이고...”

아이들을 타이르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최소의 노력으로 최고의 이익을 남겨야 한다는 자본주의 논리는 우리의 내면 깊숙이 뿌리내려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뽑기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의 길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로또를 매주 사기도 하고, 공부는 별로 안 하고 성적이 잘 나오기를 기대하기도 하며, 심지어 뿌린 것도 없이 거두려는 방식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평하신 하나님 앞에서 결국 모든 인생은 자기가 심고 뿌린 것을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공짜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땀 흘린 만큼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이고, 이 원리대로 살 때에 사람은 심신이 건강하게 됩니다. 불로소득(不勞所得)을 경계하십시오. 당장에는 입에 달지만, 실상 그것은 우리의 영성을 망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득은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깨끗한 것이어야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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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30


장마가 끝났다고 합니다. 이번 장마 동안에 한국에서는 기록을 갱신하는 큰 비로 인하여 곳곳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더러는 소중한 인명이 상하기도 하였고, 막대한 재산의 피해를 입은 곳도 많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런 어려움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더욱 힘겨운 것 같습니다.

특히 전북 장수군에서는 한 어머니가 기막힌 일을 당했습니다. 20년 전에 일곱 살짜리였던 큰 아들을 잃었던 하천에서, 이번에는 정신지체3급의 막내아들(이상길, 24세)을 또 잃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울 힘도 잃었고, 3형제 중 유일하게 남겨진 둘째는 그저 무심한 하늘만 바라보며 한탄을 했습니다. 

목회자로 제일 난감할 때가 바로 이와 같은 일들에 대하여 질문을 받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이 생기도록 허락하시는가? ……

사람들은 이런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기도 하지만, 또한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인생의 부조리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해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욥기를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욥이 사탄의 시험으로 고난을 당하고, 그 고난의 이유를 궁리하게 됩니다. 이 때 나타난 욥의 세 친구는 욥의 시련이 분명히 그의 잘못으로부터 왔을 것이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그러나 경건에 최선을 다했던 욥은 이런 조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욥과 세 친구의 긴 논쟁이 끝나갈 무렵 그들 앞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욥이 당한 시련을 빌미로 욥을 책망하려고 했던 세 친구에게 오히려 하나님이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고난의 이유를 찾았던 욥에게는 오히려 이렇게 질문하심으로 욥의 항복을 받아내십니다. (욥 38:1~4)

38:1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38:2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8: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기를 보면, 하나님은 끝까지 욥의 고난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그에게 설명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쉽게 알지만, 아마도 욥은 천국에 가서야 자기 고난의 이유를 알았을 것입니다. 

인생은 모르는 중에 살아갑니다. 땅의 기초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그 땅 위를 밟고 사는 존재입니다. 자기 시련의 이유도 알지 못하면서 더구나 남의 시련에 대하여 함부로 해석하고 판단해서야 되겠습니까?

겸손히 자기를 살피고 지혜를 구할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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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3


기독교 신앙의 정수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신령한 체험과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 몸을 내어주는 헌신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nothing)’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또한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진정한 사랑이 없는 신자는 결코 빛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1장의 말씀을 참고로 할 때, 이 빛은 바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신자가 사랑의 정서 없이 존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우리가 가장 많이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또한 가장 많이 회개해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업적과 공로를 중시하고 정의를 강조하는 환경 가운데 살아갑니다. 정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이것이 침해될 때에 우리는 친구에서 적이 되며, 함께 손잡기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세상의 원칙을 초월하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몸소 사랑의 실천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의지에 의하여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는 예수님의 방식으로 예수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체입니다. 때문에 이 공동체의 가장 강력한 특징은 ‘사랑’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잊곤 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온갖 일은 행하지만 정작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랑에는 대단히 고갈된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결국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은 교회가 실현해야 하는 주님의 꿈을 퇴색하게 합니다. 거대한 군중과 화려한 건물이 만들어지고 하나의 단체가 오랜 세월동안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 무엇일 뿐입니다.

저는 말라기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탄식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적질한 십일조와 제물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이웃을 향한 신자의 사랑이 고갈되었음을 드러내는 상징인 것입니다. 때문에 말라기서는 하나님이 양과 소의 피에 굶주려 탄식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의 사랑 없음에 대하여 탄식하신 것입니다.

연보(헌금)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신자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때문에 오늘날 연보만으로 자기의 헌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뒤로 물러서는 신자들이 많다는 것은 대단히 슬프고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게 과연 그리스도의 사랑이 역사하는지에 대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하고, 그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회개하며 은혜를 갈망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교회다워지고, 신자는 신자다워질 수 있습니다. 사랑 없는 신자는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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