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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5


겨울의 마지막 문턱을 넘어 봄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기온을 보면, 마치 다시 겨울이 시작되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하지만 계절이란 하나님의 신실하심 가운데 바뀌는 것이라 아무리 추위가 발버둥을 쳐도 기어코 봄은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마지막 추위를 한국에서는 ‘꽃샘추위’라고 합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겨울을 보냈던 나무들이 봄을 맞아 화려한 꽃을 피우는 것을 시샘해서 겨울이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추위라는 뜻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 추위만 넘어서면 곧바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들판에는 아지랑이가 생기며, 개나리와 벚꽃이 봉우리를 터뜨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에도 계절이 있음을 아십니까?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겨울이 있으면 봄도 있습니다. 항상 좋은 날만 계속되는 인생도 없고, 항상 힘든 날만 계속되는 인생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가운데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그 흐름 가운데 자취를 남깁니다.

목회를 하는 동안 사람들의 인생을 보는 안목이 조금씩 철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편안한 지체를 보면 바람 부는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고, 모진 시련 속에 힘겨워 하는 지체를 보면, 조금만 참으면 봄바람이 불어올 것이라고 격려하게 됩니다. 

그분의 섭리는 항상 신실해서 이 모든 날들을 통하여 우리가 그분을 알고 겸손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체들의 모진 날들이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힘들지만, 그러나 지내고나면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될 때가 많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는 중에도 현실이 힘들고 어렵다면 그것을 여러분의 삶에 찾아온 ‘꽃샘추위’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을 죽이기 위한 바람이 아니라, 꽃을 피우고 강건하게 하기 위한 바람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여러분의 인격은 성숙되고, 신앙은 깊어지며, 삶은 지혜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용기를 가지고 기도와 말씀으로 인내하십시오.

이선경 권찰이 직장을 구했습니다. 목사에게는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 오랜 기도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잔치를 합시다. 모두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도록 합시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이 주셔야만 하는 봄소식은 우리에게 아직 많습니다. 지혜의 건강도, 김선연 권찰의 직장도(차라리 이참에 시집을 보내 버릴까요^^), 교회의 빈자리가 가득 차는 것도, 예배의 부흥도... 하지만 그간에 참고 견뎌온 모진 추위가 많았기에 이번 봄에는 분명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모두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기도의 골방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찬양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인생에 봄이 온다고 하여도 결코 자만하지 않으며 오히려 성실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노력을 다하는 신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이번 봄에는 함께 감탄할 벚꽃이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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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8


올해는 아무래도 눈을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눈길에 목숨을 걸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새벽예배를 가기 위하여 집을 나서면 밤사이 내린 눈이 온통 얼어서 길이 스케이트장처럼 됐었거든요. 보통의 출근길이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되겠지만, 눈 왔다고 새벽예배를 포기할 수는 없고, 그래서 엉금엉금 기어서 교회로 가던 길이 생각이 납니다.

집을 나서면 몰아치는 찬바람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눈길에서는 가끔 넘어지는 것도 꽤 재미가 있지요. 밤사이 차가 얼어서 핸들을 잡으면 손이 시려와 입김을 불어가며 운전을 하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이 모든 것이 힘든 일상이었지만, 이제 일본에 와서 되돌아보니 모두가 소중한 추억처럼 느껴집니다. 폭설, 칼날 같은 바람, 빙판길, 눈싸움, 겨울산행... 이런 것들이 말입니다.

저는 아들을 보면서 혼자 웃을 때가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면 너무도 빨리 자라버린 아이들이 야속하기까지 하거든요. 밤새워 기저귀를 갈아주고, 젖병에 우유를 먹이던 그 때는 밤잠을 설치게 하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힘겨웠는데, 이제는 간혹 너무 징그럽게(?) 커버린 아들들을 보면서 예전의 그 아담하던 때를 그리워할 때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은 전체가 소중한 것입니다. 현재의 모든 것들, 심지어 내가 힘들어하고 고민하는 그 모든 것까지 사실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의 바탕 위에 있는 것임을 가만히 묵상해 보십시오.

고통이 없는 날만이 축복이 아닙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생명, 고통 속에서도 살아갈 희망, 고통 중의 위로가 소중하다면, 그 모든 것을 돋보이게 하는 고통 또한 소중한 은혜의 방편은 아닐까요?

언젠가는 지금 이 시절을 그리워하겠지요. 한 달 한 달을 간신히 버티던 지금, 한치 앞도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용감하게 한 걸음씩 전진하던 날을 언젠가는 분명히 그리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손자들을 향하여 내가 했던 고생을 말해 주겠지요. 대부분의 할아버지처럼, 내가 했던 고생을 곱씹고 또 곱씹어 아이에게 들려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한숨이 아니라, 그 모진 세월을 뚫고 살아남았다는 뿌듯함으로 아이에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 엄청난 발자국을 찍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요. 하지만 저는 사는 것이 모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부가 화목 하는 것, 아이를 키우는 것, 직장에서 버티는 것, 교회를 섬기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정말 대단한 일 아닙니까?

생명을 즐기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날들을 기쁨과 감동으로 채우도록 합시다. 향락이 아니라 소중한 일상에서 즐깁시다. 세금도 없는 말 한 마디로 격려하고, 눈길 한 번에도 웃음을 싣고, 내게 주어진 환경이 결국은 잘 될 것이라고 믿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삽시다.

우리는 잘 될 수밖에 없는 크리스찬이 아닙니까? 우리는 잘 될 수밖에 없는 동경드림교회가 아닙니까? 믿으십니까? ^^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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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1


미국 시카고에는 휘튼 칼리지(Wheaton College)라고 하는 명문 기독교 대학이 있습니다. 그 대학에는 브랭카드 홀(Blanchard Hall)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 2층에는 그 학교가 배출한 선교사들의 명단과 사진이 붙어 있습니다. 몇 사람의 사진에는 십자가가 붙어 있는데, 그것은 선교사의 삶을 살다가 순교를 하였다는 표시입니다. 

그 학교 출신으로 선교지에서 순교한 선교사 중에 짐 엘리엇(Jim Elliot)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남미 에콰도르의 이오카 인디언 부족에게 선교하다가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한 기독교 잡지사 기자가 엘리엇 선교사의 부인에게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때 부인은 "말씀을 삼가해 주십시오. 비극이라니요? 제 남편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그 곳에 갔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드리기 위하여 그 땅에 갔던 것입니다." 하고 대답을 하면서 남편이 휘튼 대학에 다닐 때 썼던 큐티노트 한 부분을 공개했습니다.


"결국은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결코 놓칠 수 없는 것도 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그 무엇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을 바치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젊음은 지나가는 것이다. 명성도, 자기만족도, 쾌락도, 그리고 물질도 결국은 붙들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을 버리고 포기하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오 하나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제 삶이 쓰임받기를 소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태워 주옵소서!" 


후에 그 부인은 남편인 짐 엘리엇과 그와 함께 순교한 네 사람의 이야기를 <영광의 문>이라는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의 감동으로 후에 더 많은 젊은이들이 기꺼이 헌신하였고, 그들을 순교하게 했던 이오카 인디언들에게는 결국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척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우리에게 편하고 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짐 엘리엇의 말처럼 끝까지 붙들 수 없는 것들을 붙들고 있으려는 어리석은 욕망에 의해서 결국 놓칠 수 없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겪는 것은 결코 비극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위한 고난을 피해만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결국은 비극이 될 것입니다. 헌신 할 수 있을 때에 잘 합시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결정하고, 그 결정대로 행동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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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4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개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일컬어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청합니다. 이것은 결코 회심한 직후의 고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많은 핍박을 감수하며 목숨을 내어놓는 헌신을 다한 이후, 곧 그의 죽음이 임박하여 했던 고백이라는 점에서 우리를 더욱 숙연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처럼 작은 ‘바울’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빌립보서에서 ‘나도 육체를 자랑할 만하다’고 말합니다(3장). 또한 그의 사도됨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향하여는 자신이 주님의 사도됨에 대한 강한 주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두 개의 얼굴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정한 흐름 속에서 조화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이 은혜 안의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섬겨 말할 때에는 언제나 자신을 가장 낮은 자리에 두고자 했으며, 반대로 세상을 향하여는 그 무엇에도 자신을 굽히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하여는 사자(獅子)같지만, 하나님을 향하여는 어린 아이처럼 연약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는 항상 목마른 사슴이 되고, 세상을 향하여는 항상 골리앗을 압도하는 영적 거인(spiritual giant)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무가치한 존재를 향하여 거룩하게 낭비되는 사랑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조건 없이 사랑이 부어질 때에, 그것을 우리가 은혜라고 합니다. 하지만 은혜가 부어지면, 그 대상은 더 이상 가치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어진 ‘은혜’만큼의 가치가 그 존재를 덮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보면, 꼭 반대로 행하는 신자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교회를 향하여는 사자처럼 용맹한데, 막상 세상의 돈과 명예 앞에서는 한없이 연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수치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눈물을 흘리려거든 기도의 골방에서 흘리십시오. 거기서는 온갖 신음을 다 쏟아도 됩니다. 걱정도 좋고, 푸념도 좋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잠잠하십시오. 그분의 전능하심 앞에, 초라한 자기를 충분히 내어놓고 거룩한 학대로 한없이 망가지는 경험을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더 아름답게 재탄생하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눈물 흘리지 마십시오.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없음’이 아니라 ‘열등감’일 뿐입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주시지 않는 것은 타이밍의 문제이거나 혹은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가슴을 활짝 여십시오.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당당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외에 우리는 무엇으로도 약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강하고 담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밖에서 얻어터지고 우는 아이보다 부모를 더 속상하게 하는 아이는 없을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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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8


이(李)집사님은 성격이 차분하고 사려 깊은 분이셨습니다.

제가 전도사를 하던 시절에 학생부의 부장을 맡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수고하며 조력해 주시던 좋은 파트너였습니다. 작은 학원을 운영하셨는데, 전도에 열심을 다하셨고 또한 학생부의 활동을 위하여 물심양면(物心兩面)의 조력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런데 뭔가 그늘진 부분이 있었습니다. 무어라 딱 말을 하기는 힘들지만, 세상을 보는 관점과 사역에 대한 생각 등에서 불쑥 집사님답지 않은 생각과 말들이 튀어나올 때가 있었습니다.

사귐을 가지면서 저는 그 분이 청년 시절에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분이 다녔던 교회의 분위기는 몹시 뜨거웠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청년들은 너도 나도 목회자의 길을 서원했고, 마치 그런 서원을 하지 않으면 충분히 은혜를 받지 못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분도 자신이 받은 은혜에 감격하며 ‘주의 종’이 되겠다는 서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서원’은 이후 20여년이 지나는 동안 늘 마음속의 한편에 그늘을 드리우는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학원을 운영하며 그렇게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겼지만, 그 일은 늘상 ‘서원’을 배신하고 도망한 도피처라는 무의식이 깔려 있었고, 세상과 주님의 일을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이분법적인 가치 속에서 그분은 언제나 ‘요나’에 시달리는 불쌍한 영혼이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런 분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곤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는 순간, 자기 삶의 보따리를 모두 싸서 교회 안으로 이사해야 한다는 생각은 많은 성도들을 그늘지게 하고 죄의식에 시달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의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는 사명에 실패하고 살인자의 죄를 짓고 이곳으로 도망 와 40년의 세월을 허송한 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어라고 하십니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5)

이 말에 담긴 함축적인 뜻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나 애굽뿐 아니라 이곳 미디안 땅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허송했다고 생각했던 40년의 세월도 사실은 하나님의 기다림 속에 사용되었던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종’은 교회 안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역의 대상은 실제로 교회보다 세상입니다. 때문에 저는 이 집사님과 같은 분들이 많아져서 온 땅에 복음으로 역사하는 학원, 가계, 회사, 정부가 생겨야 한다고 믿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주님의 종이며, 동역자입니다. 그러니 목사인 것처럼 여러분의 일을 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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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1


넘어진 아이가 깨어진 무릎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울음을 터뜨린다. 놀라서 다가온 엄마가 아이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등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괜찮아...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말인가? 이미 넘어졌고, 무릎에는 피가 나고 있는데... 나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데 엄마는 뭐가 괜찮다는 말인가?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제자들은 흩어졌고 적대세력은 기세등등했다. 이제 다시는 예수님의 꿈이 되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의 곁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을!”

어떻게 평강을 누리란 말인가? 예수님은 이제 그들 곁을 떠나실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문제는 고스란히 다 제자들의 몫이다. 이런 입장에서 과연 ‘평강’이 가능한가?

…….

지혜로운 엄마는 아이가 넘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걷고 뛰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을 안다. 무릎에 딱지가 좀 생기더라도 이것은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배우는 것이 안 배우는 것보다 아이에게 훨씬 이로움을 준다. 또한 그런 상처가 결코 결정적인 위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이를 생각하는 큰 틀에서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있어 새로운 차원으로의 성장을 의미했다. 

비록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밀밭을 함께 걷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의 눈은 더 이상 이전처럼 예수님을 보며 안도감을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떠난 것이 아니며, 떠나지도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함께 계신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이것은 정말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신나는 축복이었다. 

주님은 오늘도 넘어지고 실망하는 우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괜찮다.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해라!” 이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약속대로 행하실 것이며, 결국에는 더 귀한 축복을 주실 것이다. 우리를 그렇게 이끄실 자신이 있기 때문에 선하신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평강’의 미소를 보이시는 것이다.

주님의 품에서 투정을 부려도 좋다. 그러나 ‘포기’는 하지 말라. 무릎이 아프기 싫어서 걷기를 포기하고 계속하여 기기만 하겠다는 아이는 결국 엄마의 화난 얼굴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파도 일어나야 한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 사 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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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4


자동차의 왕이라고 일컬어지는 헨리 포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드 자동차의 창업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젊은 날의 그는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직장생활에 골몰하는 셀러리맨이었습니다.

특별한 점이라면, 매일 퇴근 후에 헛간에 들어가 무언가를 만들기 위하여 연구에 몰두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생각에 대하여 ‘바보 같은 생각이다!’라고 조롱하였지만, 그의 아내만은 그의 남편을 신뢰하고 도왔습니다.

매일 헛간에서 밤을 새우는 남편으로 인해, 추위에 떨면서 등잔불을 들고 쫓아다니며 같이 밤을 새운 날이 허다했다고 합니다. 결국 부인의 희생적인 내조 속에서 포드는 자동차를 발명했고 훗날에는 명성과 부를 함께 얻게 되었습니다. 

포드는 생전에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지금의 부인과 꼭 결혼하고 싶다...”

사랑은 헌신 속에서 증진됩니다. 자기를 내어주는 내어줌이 없이는 사랑이 자라지도 않을뿐더러 점차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때문에 진정한 사랑은 신뢰이며 또한 헌신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평범해진 21세기를 살면서도, 우리는 도무지 사랑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한류의 열풍이 부는 이유도, 어떤 사회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일본 사람들이 잃어버린 순수한 사랑의 열정과 떨림을 한국 드라마가 되살려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뒤집어 생각하면 일본의 영혼들도 순수한 사랑에 목말라 있다는 말이 됩니다.

헌신하지 않는 공허한 사랑의 고백은 우리를 얼마나 지치게 합니까? 말로는 부드럽고 좋지만 실상은 이기적인 사랑의 허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상처주고 있습니까?

아내의 헌신, 남편의 순애보, 성도의 섬김, 목자의 희생과 같은 고귀한 가치들은 어떤 면에서 ‘골동품’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것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닙니다. 새것이 줄 수 없는 감동, 깊은 맛, 영혼의 떨림을 주는 골동품도 있기 때문입니다.

고루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아픔을 감수하며 자기를 내어주십시오. 당장은 그것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심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러한 인내를 통하여 사랑이 증진되고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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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7


거대한 통나무는 강물을 따라 흐르기만 하지만, 작은 물고기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영적인 생명이 있는 신자는 시대를 ‘좇아’ 살지 않고 시대를 ‘이끄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를 보면,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무색하게 하는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회를 개혁하는 양심의 목소리로 자리하던 교회가 이제는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물욕에 눈이 어두워 자기들끼리 싸우는 진흙탕이 되고 있으니 주님의 심정이 얼마나 가슴 아프실지 헤아림이 가지 않을 지경입니다.

조국의 교회는 그냥 부흥한 것이 아닙니다. 미신으로 얼룩졌던 조국의 강산 방방곡곡에 십자가의 첨탑이 들어서기까지는 그야말로 가시밭을 걷는 누군가의 피눈물이 있었습니다. 눈비를 마다하지 않고 밤새워 들과 산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역사와 부흥을 갈망했던 우리 선배들의 발자취가 이룬 거대한 업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그 가나안의 열매를 따 먹는 세대가 조상들의 하나님을 망각해가고 있습니다. 예배당의 평수와 성도의 숫자만 헤아리고 정작 하나님의 뜻과 그의 나라를 깊이 묵상하지 못하는 일천함이 조국의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2007년도는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난지 꼭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聖都)가 되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었던 그 해의 영광을 다시 기억하고 사모하게 되는 해입니다.

비록 몸은 현해탄을 건너 이 일본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저는 우리 동경드림교회의 지체들이 자기 믿음의 뿌리를 알고 또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뜻을 깨달아 함께 기도하는 용사들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조국과 조국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새롭게 열려야만 하는 통일의 시대는 정치와 경제적 힘이 아니라 바로 복음의 능력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때문에 교회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조국은 다른 희망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목사님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지금의 조국을 고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갑절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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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31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하원의원은 분주한 자신의 삶으로 인하여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그는 피곤함과 짜증이 가득하여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앞에서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길을 청소하고 있는 청소부를 만나게 됩니다.

이 하원의원이 청소부를 향하여 물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이 일이 지겹지도 않습니까? 당신이 청소해도 금새 다시 더러워질 텐데요...”

그러자 그 청소부가 아주 밝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저는 하나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의 모퉁이를 빛나게 청소하는 중인걸요!”

존귀한 일을 하면서도 비전이 없으면 맹목적이 되고, 하찮게 보이는 일을 하더라도 마음에 비전이 있으면 그 일은 숭고한 목적을 이루는 과정이 됩니다.

요즘, 저의 집은 기이한 풍경이 아침마다 있습니다.

아내는 서둘러 출근을 하고, 집안의 청소와 빨래 너는 일을 제가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귀찮고, 창피하고, 그래서 짜증이 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지나가는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기 위하여 신경을 쓰면서 부끄럽게 빨래를 널었습니다.

그러다가 기도하는 중에 은혜를 입었습니다. 내가 지금 겪는 이 과정이 훈련이라는 것, 일본이라는 황무지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치루는 영적인 대가라는 것을 주님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침마다 와이셔츠를 다림질 해주는 아내의 수고가 없이 어떻게 말끔한 차림으로 강단에 서서 설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도 거룩하지만, 그 설교를 위하여 다림질로 수고하는 아내의 헌신도 거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work)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며, 동시에 목적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학교는 거룩하고 일반 대학은 거룩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대학을 다니는 사람의 목적이며 신앙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바른 목적이 서 있다면 그가 하는 모든 일은 거룩한 사명이요, 영적인 제사가 될 수 있습니다.

2006년도의 마지막 날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던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그 목적을 한 시라도 잊지 말고 사십시오. 그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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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4


메뚜기와 하루살이가 함께 놀다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메뚜기가 말했습니다. “우리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다시 만나자.” 그러자 하루살이가 놀라며 대답합니다. “내일? 그게 무슨 말이니? 내일이라니……. 너는 정말 그런 게 있다고 믿니?”

어느 늦은 가을에 메뚜기와 개구리가 함께 따뜻한 햇볕을 쏘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개구리가 말했습니다. “이제 날이 너무 쌀쌀하구나. 우리 금년에는 그만 만나자. 내년 봄에 다시 보자, 메뚜기야!” 그러자 메뚜기가 놀라며 대답합니다. “내년? 그게 무슨 말이니? 내년이라니……. 너는 정말 그런 게 있다고 믿니?”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왠지 숙연한 생각이 찾아듭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사라져간 내 인생의 1년을 무엇으로 보상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또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은 영원에 대한 삶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영혼이 없고, 그저 소멸되는 존재라면 우리가 신앙의 도리대로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영혼이 영원한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 영원한 영혼이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성심(誠心)을 다해 삽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사람들아, 이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 이제 불에 타 없어질 이 세상이 끝나면 하늘로부터 새로운 세계가 주어질 것이다. 그곳에서 만나자!” 그러자 사람들이 말합니다. “내세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더러 그것을 믿으라고?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것을 믿을 수 있지…….”

우리가 세상의 평가와는 다른 평가를 위하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현실주의자의 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패배한 자의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말구유에 태어나시고 십자가 형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삶이 비추는 영원한 진리의 빛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눈에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영원을 향해 부끄럽지 않게, 그리고 진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성육신의 모범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 모두의 믿음이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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