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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8


오랜만에 지혜가 집으로 놀러왔습니다. 함께 과일을 먹고, 놀이를 합니다. 나무 블록으로 탑도 쌓아 올리고, 오빠들과 나란히 앉아 게임을 하기도 하고, 함께 책상에 앉아 그림도 그립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사모가 억지로 말을 걸었습니다. “촌놈아, 너는 어떻게 그렇게 이쁘냐?” 그랬더니 대뜸 지혜가 고개를 돌리면서 “うるさい!”라고 대꾸를 합니다. 그 한 마디에 모두가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지금은 이 녀석이 내 앞에 앉아서 “목사님, 지금 뭐해?”라고 물으며 눈빛을 반짝이고 있습니다. 정말 기적 같은 아이입니다.

올해에만 해도 이 녀석에게 모질고 힘든 수술이 몇 번이었는지,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던 시간들, 얼마 전까지 병원에 아이를 보내며 가슴으로 울던 날들이 모두 꿈만 같습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이제는 지혜가 조금 편안해 보이니 교회가 다급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지혜의 미소는 내가 살았던 지난 1년의 세월과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맘 깊은 곳에서 감사가 우러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솔로몬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던 것처럼 일본을 향해 발길을 떼는 나를 향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물론 다른 소원들도 있었지만 제일 간절했던 것은 지혜로 인해 눈물 흘리던 두 집사님과 포대에 싸여 있던 갓난 아이, 지혜를 곁에서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교회는 사람이라 믿기에, 내가 목사로서 한 사람을 세워줄 수만 있다면 그 한 사람을 통해 주님은 주님의 교회를 옳게 세우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지켜 지난 2년을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지혜뿐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섬겨야 할 사람들이 더 많이 늘었습니다. 처음에는 타인과 손님으로 만났던 지체들이 이제는 형제보다 더 가까워져서 내가 기도해줘야 하고, 신앙을 챙겨주어야 합니다. 비록 경제적 어려움은 더해가고 있어도 그런 점에서 참 부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에 많은 것이 필요한 것 같아도 때로는 하나면 족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지난 1년을 통해 가장 귀한 선물, 가장 아름다운 주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바로 우리 앞에 있는 ‘지혜’라는 선물 말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응답하실 것이고, 우리와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먼저 잠시 숨을 고르고 다른 것을 기도하기 전에 먼저 감사와 찬양으로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조직이 아니라 비전을, 겉모양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접대가 아니라 형제의 교제를, 돈이 아니라 건강을, 종교적 습관이 아니라 경건을 추구해야 합니다.

더디기는 하지만 저는 우리가 바르게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내가 기도하는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님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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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1


어린 시절 학교 가는 길에는 항상 노점상이 있었습니다. 문방구나 가게보다 훨씬 싸고 푸짐한 노점상의 먹을거리들은 조그만 주먹에 동전을 만지작거리게 만들며 뿌리치기 힘든 유혹의 갈등을 주곤 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어 때로는 그 시절에 먹었던 그 ‘불량식품’들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달고나, 뽑기, 쫀득이, 쭉쭉이, 본드 같은 튜브에 들어서 빨대 끝에 묻혀 풍선을 불다가는 질겅거려 씹던 이상한 껌? 등... 그 시절에는 누구나 먹었던 아이들의 이상한 음식이 있었습니다.

엄마들은 ‘불량식품’을 경계하기 위하여 아이들을 타일렀고, 선생님들은 종례시간에 노점상 앞에 멈추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라고 훈시했지만, 그래도 항상 아이들은 그 노점상 앞에 북적거렸고, 그 푸짐한 유혹은 끝내 유년의 기쁜 추억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참 희한한 일입니다. 그건 분명히 건강에 해가 될 만한 음식들이었는데도, 그것을 먹었던 내가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 다시 그 이상한 먹거리들을 추억하게 된다는 것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우리의 몸이 얼마나 독소를 잘 해독하고 소화의 기능이 뛰어난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

곰곰이 더 생각해보면, 건강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병균과 독소가 몸에 해롭다고 하여서 무균실에 들어가 산소만 마시면서 사는 것이 결코 건강한 삶이 아닌 것처럼 때로는 세상의 풍파와 세속에 처해 있으나 그것을 적절히 소화하고 이겨내며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젊은 청년을 보고 ‘돌도 씹어 삼킬 나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런 말을 듣던 시절에는 솔직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좋은 음식 다 놔두고 돌이 뭐야! 그럼 나더러 돌밥이나 먹으라는 뜻인가?’라는 반항적인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보면, 그것은 젊음의 건강함이 흠뻑 묻어나는 담백한 표현이 아니었나 합니다. 돌도 씹어 삼킬 나이이니, 조금 억울한 일이 있어도, 섭섭한 감정이 들어도, 힘들어도 능히 이겨낼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긍정적 암시가 어른들의 말씀에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좋은 설교 듣고, 맘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항상 위로와 감동 속에서 사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신앙생활만을 동경하면 평생 만족함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좋은 신앙이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신앙이 아닌가 합니다. 때로는 내게 해로운 것까지도 은혜 가운데 좋게 해석하고 유익하게 소화해서 긍정적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신앙이 좋은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누구나에게 건강의 비결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정해진 시간만큼 삽니다. 그리고 그 삶의 시간 동안, 불안과 걱정, 두려움으로 살 것인지, 감사와 기쁨으로 살 것인지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결정합니다. 참된 신앙은 물론 어떤 경우에도 후자를 택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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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4


항상 위기는 기회도 됩니다.

사람은 무언가 절박함이 없이는 마음까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이 오히려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살만 해서 안일하게 넋이 빠진 사람보다 뭔가 간절한 이유가 있어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께 예민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위기는 위기대로 해결하고 또한 함께 많은 은혜를 받으며 예상치 못한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위기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위기의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기도와 삶의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통하여 우리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문제 속에서 우리의 초점은 ‘해결’이지만 하나님의 초점은 ‘변화’와 ‘성장’입니다. 그리고 순서적으로 하나님의 목표가 먼저 이루어져야 다음으로 우리의 목표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표가 정확하게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위기를 통해 뭐가 변해야 하고 어디가 성장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찰하시고, 우리의 미련함을 긍휼히 여기사 마치 가정교사가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것처럼 자상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위기 가운데 기도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위기 자체를 인하여 눈물 흘리는 것이지만, 점차 기도 가운데 성령의 은혜가 부어질 때에 우리는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우리 자신의 삶에 실천하기 위하여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위기가 기회로 바뀌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이러한 훈련의 방식이 참 감사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변화’를 요구하시지 않고 다만 ‘해결’만을 주신다면 우리는 은혜를 받을수록 점점 유약(幼弱)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단련하시고 변화를 요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수록 오히려 더욱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위기는 점점 사소해지고, 삶은 모험과 기대로 충만하게 됩니다.

홍해 바다 앞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지만, 요단강의 범람하는 물결 앞에서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순종했습니다. 40년의 세월 후에 그들이 겪었던 위기가 그들의 신앙을 강화하면서 그들은 이제 비로소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크다 하면 크고 사소하다 하면 사소합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결정에 따라 얼굴을 달리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그러면 위기는 오히려 기대로 가득찰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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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8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을 지속적으로 묵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깊이 인식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향하여 헌신하는 일과 세상을 섬기는 일에 더 견고하게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신앙대로 살고자 하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남들이랑 똑같은 법칙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대로 살면 무시당할 일도 없고, 손해 볼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걸고 살아가려면 얼마나 불편하고 손해 볼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신앙인들이 교회 안과 밖에서의 얼굴을 바꾸어가며 적당히 타협하며 살게 되는가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믿는다’는 소극적 태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난도 받는다’는 적극적 태도를 가지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바울사도는 말했습니다. (빌 1:29)

현재의 우리가 비록 예수 믿는 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히고, 재산을 몰수당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여전히 세상으로부터 부당한 대우와 억울한 말과 신자이기 때문에 당하는 핍박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피하면 참 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런 일들을 당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고,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또한 그 일을 믿음으로 잘 감당할 때에 우리에게 영광의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대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동경드림교회 지체들이 믿는 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자부심을 현실의 사소한 손해와 바꾸지 않고 주님 오시는 날까지 끝까지 지켜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길은 ‘희생’의 길입니다.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세상이 이뻐서가 아니라 주님이 좋아서 그 일을 행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이 식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그분이 내게 주신 구원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되새기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 비참하게 살다가 버려질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와 주시고, 만나 주시고, 은혜 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격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분의 사랑이 진심으로 감동되어 그분을 위해서라면 옥합이라도 아깝지 않고, 목숨이라도 부족하다는 절실한 마음이 있습니까? 신앙은 바로 그런 마음으로부터 출발하고 지켜져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십시오.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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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1


일본에 와서 보니, 다른 어떤 대적보다 ‘분주함’이 신앙에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쉼 없이 계속해서 일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낮만 만드시지 않고 밤을 두신 까닭은, 사람의 체질이 ‘쉼’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일에만 몰두하다보면 결국에는 병이 찾아오고 정신적으로도 공허해지게 됩니다.

문제는 이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배웠고,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는 쉬면서 신앙을 점검하고 하나님을 바라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주어진 환경이 너무 척박해서 일에 매이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신자의 믿음에 우호적이지 않으며 알게 모르게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그것을 극복해야 신앙이 크는 것이고 영적인 승리를 누리는 것입니다.

저는 일본에서 신앙생활하는 우리가 한국에서보다 두 배는 더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주어진 환경이 훨씬 비신앙적이며, 또한 사회의 구조가 일을 너무 숭배하고 좋아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오래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신앙적 정서가 죽고 일본적인 정서가 스며들게 됩니다. 일본적인 것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앙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여겨집니다.

한국에서는 바쁜 일상을 살면서도 새벽마다 교회를 찾아 설교를 듣고 기도하는 신앙인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말뿐인 신자들도 많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말 신앙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아직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곳 일본에서는 신자를 만나기도 어려울뿐더러 정말 우리의 모범이 될 만한 좋은 신자를 만나기는 더 어렵습니다. 모두 자기의 기준이 강하고 그래서 자기 방식에 도취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생활은 분주하고, 모범은 없고, 사회적 분위기도 신앙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신앙생활은 힘이 듭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가 의지할 곳은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고, 우리가 힘쓸 것은 기도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정말 전투하는 심정으로,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행하지 않으면 지키기 힘들고 그냥 영적인 잠에 빠지기는 너무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일자리가 없어서 일본에 보내신 것입니까? 육신의 떡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이곳에 부르신 것은 이 영적 황무지 동경에서 제대로 신앙생활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래서 분주함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시다. 주님께서 동경드림교회를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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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4


플로리다의 한 시골에 청년 우체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황량한 시골길을 걸어 날마다 편지를 배달하는 자신의 일을 지겨워했습니다. 언제고 기회가 생긴다면 직업을 바꾸어 이 지긋지긋한 시골을 벗어나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신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신 삶의 자리에 분명 의미가 있다고 믿고, 그 자리를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변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머니에 꽃씨를 넣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황량한 시골길을 걸으며 그는 조금씩 자기의 주머니에서 꽃씨를 꺼내 길에 뿌리기도 하고, 어떤 것은 손수 심기도 하였습니다.

무려 30년 지나도록 그는 그 일을 꾸준히 했습니다. 

이제 그가 다니던 길에는 무수한 꽃이 피어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하였습니다. 그 지역의 명소가 되어 사람들이 찾아왔고, 꽃에 취하던 사람들은 한 우체부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다시 한 번 감동하였습니다.

사람이 앉았다가 일어난 자리에 쓰레기만 남는 사람이 있고 인격의 향기가 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큰 일, 큰 비전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모든 인간의 일이 오히려 작은 일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며, 성실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먼 미래의 성공이 아니라 바로 지금 현실에서 우리가 믿음에 합당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무한 삶의 자리에 여러분도 꽃씨를 좀 뿌려 보십시오. 남을 잠시 웃게 하는 유머일수도 있고, 같이 나누는 커피 한 잔의 여유일수도 있고, 힘을 잃은 지체를 위한 격려의 쪽지일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누구처럼 꾸준히 해나가다보면 그것으로 인해 내 주변이 꽃밭으로 변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신자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격의 향기가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일을 믿음과 성실함으로 행할 때에 세상은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려운 현실을 방치하지 말고, 사람을 귀히 여기십시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삶을 보여주십시오. 여러분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 자리에 파송되었습니다. 이 신분과 사명을 절대로 잊지 말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동경드림교회의 지체들에게 주께서 능력 주시기를 구합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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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7


예수님은 다양한 신분과 직업의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셀롯 당원 시몬은 당시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여 무장혁명을 주장하던 사람이었지만, 세리 마태는 로마의 준 관료로 자기 백성으로부터 개 취급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의 집안은 괜찮았고, 나다나엘은 경건했지만, 베드로는 성격이 급했고, 빌립과 도마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뜯어보면 어떻게 이 열둘이 하나의 팀을 이룰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화목하게 하셨고 오히려 그들의 연합으로부터 폭발적인 능력을 이끌어내셨습니다.

우리가 ‘화목’이라는 말을 성경에서 찾아볼 때에, 그 말은 성향과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말은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뭔가 불편하고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가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시를 누군가 끌어안고 용서해 주기 때문에 일어나는 평화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화목’인 것입니다.

저는 교회의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러한 ‘화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향이 맞아서 하나된 사람들이 아니라, 신앙이 같아서 하나된 사람들의 모입니다. 때문에 언제나 충돌과 경쟁, 시기와 같은 불편한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12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불현듯 누군가 자기들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설명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언가를 느끼는 순간, 그들과 동행하던 바로 그 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동행이 우리들의 교회에도 계속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둘이지만 사실은 셋입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화목을 배우고 누군가의 가시를 끌어안아 용서하고 관용합니다. 그 은혜의 용납 속에서 교회는 교회로서 ‘화목’의 특징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겸손의 마음이며 또한 화목의 마음입니다. 그분이 스스로 낮아지셨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의 화목뿐 아니라 우리끼리의 화목이 가능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동경드림교회는 품이 넓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틀을 버리고 예수의 품에 안겨서 함께 행복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기 내어줌은 결코 우리의 자존심과 이기심 안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 안에서 ‘화목’을 깨우쳐 갑시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을 버리고 서로 은혜로 세우는 공동체가 되도록 합시다. 그래서 동경드림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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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30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좋은 교회란 사람이 많이 모이기도 해야 하지만, 모인 사람들이 제대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양편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그래도 중심은 ‘많다’ 보다는 ‘변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교회가 거대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성장에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지역의 특성과 시대의 필요성, 그리고 그 교회가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역량들이 함께 작용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마치 기업의 생리처럼 작은 교회가 무조건 큰 교회를 벤치마킹 하려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런 노력은 성경이 말해주는 교회의 존재목적에 부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시기까지 기다려야 하며, 그 기다림의 가정을 어떤 비전과 기도로 준비할 것이냐가 보다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저는 목회에서 사람을 중시합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주어진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돋보기를 통해 태양의 광선이 하나의 초점에 모아질 때 불이 붙는 것처럼 사람도 관심과 애정의 초점을 통해서만 변화된다고 믿습니다. 

저는 동경드림교회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성장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그 과정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이냐의 문제는 지금 우리의 반응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이미 결정된 길이었지만, 다만 그들의 믿음과 반응에 따라 그 시일은 단축되기도, 지연되기도 하였습니다.

애굽에서의 습성을 고치고, 마음의 패역을 버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갈 때에 이스라엘은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에 있어 가나안땅의 축복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것을 위해 존재합니다. 때문에 남이 아니라 바로 내가 문제입니다. 핑계만 일삼고 정작 믿음이 없어 기도하지 못하는 나, 설교를 듣고 이해는 하지만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 감동이 내려오지 못하는 나, 남을 판단하되 자신을 고치지 못하는 내가 문제입니다.

교회만 커지면 뭐합니까? 내가 고쳐지지 않으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 바른 목적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의 열매는 저절로 맺어질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의 일에 집중하고, 성도는 성도의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교회요, 큰 교회요, 바른 교회입니다. 동경드림교회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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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3


미국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헌법에 의거, 1849년 3월4일 대통령에 취임해야 되는데 그날이 주일이라 취임을 거부하여 에치슨 상원의장이 24시간 대통령 임무를 대신했습니다.   

주일성수는 대통령 취임식보다 우선하는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1924년 프랑스 파리 올림픽 당시 100m 세계 신기록 보유자 영국 에릭 리들(Eric Liddel) 선수는 100m 결승전 경주가 주일에 열리자 경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높여주셨습니다. 

400M경주에 출전하는 다른 선수가 갑자기 뛸 수 없게 되어 그가 대신 뛰었습니다. 그는 한번도 400m 경주를 해본 적이 없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47.6초의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는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서 1945년 병사할 때까지 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마도 천국에서 받은 그의 상급은 올림픽 금메달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죤 길모어 목사가 하루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작은 마을에 일력거로 주방용품을 팔고 있는 노인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서로 인사하며 안부를 묻고, 장사는 요즘 어떤지, 경기는 어떤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목사님은 할아버지께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믿는다고 대답하자 죤 길모어 목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인 것 같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때 할아버지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이 있지요. 그건 나를 구원해 준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랍니다." 

그 순간 길모어 목사는 '아! 나는 목회자로서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도 좋지만 항상 나와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든든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모습들을 알게 됩니다. 도전과 신뢰와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나보다 조금 부족해 보이더라도 옆에 있는 지체와 대화를 나눠 보세요. 당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가르쳐줄 사람입니다. 

주일입니다. 온전히 주일을 성수하시고 예배를 통하여 은혜로 충만케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일은 육신의 빵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멈추고 영적인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는 날입니다. 이 날의 은혜가 우리의 일주일을 지배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오늘은 누구를 통해 내게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설교를 주의하여 들으십시오. 그러나 목사만이 아니라 모든 지체들을 통하여 주님이 말씀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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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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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6


독일계 신학자로서 미국에서 활약하였던 폴 틸리히(Paul Tillich,1886-1965)란 분이 있다. 틸리히 교수가 한 말 중에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용기에 대한 말이다.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보다 덜 중요한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용기이다!”

옳은 말이다. 인생은 어차피 모든 것을 다 누릴 수가 없고 다 가질 수가 없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가장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보다 덜 중요한 것은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좇기 위해서는 배와 그물을 버려야 한다. 심지어 어떤 청년은 모든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초대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과는 반대로 부자였던 청년은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다.

그가 율법을 준행하고 선을 행하였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소유에 대한 애착이 더 컸던 까닭이다.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영성이다. 특히 세상에서 귀히 여기는 것을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포기할 수 있을 때 신자의 영성은 무르익는다. 이러한 버림은 억지로 아깝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은혜의 깨달음 속에서 일어난다. 바울이 세상의 모든 지식과 명예를 배설물로 여겼던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중국 사람들이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있다. 원숭이가 땅콩을 좋아하기에 원숭이가 다니는 숲속 길목에 땅콩이 든 옹기 항아리를 하나 묶어 둔다. 그 항아리의 주둥이는 겨우 원숭이의 편 손이 들어갈 만한 크기로 되어있다. 땅콩 냄새를 맡은 원숭이는 항아리 속에 손을 넣어 땅콩을 한 움큼 잡는다. 그리고 손을 빼려한다. 그러나 손에 든 땅콩 때문에 손이 빠지지 않는다. 그때 가서 원숭이를 잡는다.

원숭이가 살려면 손바닥 안에 든 땅콩을 버리면 손이 빠져나와 살게 되지만 원숭이는 땅콩이 아까워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잡혀 죽게 된다. 원숭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도 이와 같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살게 하시기 위하여 버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의심하고 조롱한다. 버려야 비로소 더 좋은 것을 주실 터인데 끝까지 자기 몫을 스스로 지키겠다고 고집하고 아우성친다. 

지금 우리에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그것을 붙잡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것이라도 포기할 용기가 있는가? 부족하다면 은혜의 깨달음과 용기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일이다. 버려야 할 때에 버리지 못하면 인생은 변하지 않는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용기 있는 자만이 승리를 차지한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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