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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6 내 마음을 맡아 주세요


사람이 피곤하면 예민하게 되고, 예민하면 짜증스럽다. 육체적인 피곤함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피곤함은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순환한다.

피곤한 사람의 주변에서는 피곤한 사람들이 양산된다. 말과 표정, 느낌의 찌꺼기가 오물처럼 사람들을 습격한다. 단지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마음을 고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정말 피곤하게 만드는 원흉이라고나 할까!

세월은 사람을 좋게도 변하게 하고, 나쁘게도 변하게 한다. 그런데 스트레스는 병적이다. 한 번 그 흐름에 빠지면 헤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인생의 적이다. 좋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점점 나아지는 변화가 꼭 필요한데, 스트레스는 나쁜 변화를 주도한다.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이미 죄를 짓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 때문에 충분히 나쁘다고 할 수 있다. 스트레스의 상황에 빠지면 사람은 대부분 나쁘게 변해간다. 아무에게나 짜증을 내고, 자기를 쉽게 변명하며, 반성하지 않고, 흥분하고, 때로는 우울하고, 심지어 웃으면서도 슬프다.

나는 스트레스가 사람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향하여 하나님은 땀 흘리는 노동과 땅의 엉겅퀴와 가시나무의 저주를 말씀하셨다. 쉽게 풀어 말한다면, 세상이 맘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노력해도 실패하고, 욕심 부리지 않아도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은 고민하고 힘겨워 하며 살게 된 것이다. 결국 아담 이후로 이 저주의 굴레에서 사람은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요즘 기도의 제목은 나의 마음의 주권을 주님께 위탁하는 것이 전부이다. 나이를 먹고, 언제부턴가 ‘문제’도 인생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다는 것은 단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를 반응하게 하고, 생명의 의욕을 가지게 만든다. 배고픔을 모르면 먹는 즐거움도 모르게 되는 것처럼, 문제의 시기를 통해 우리는 평안의 가치를 발견한다. 그러니 문제도 필요한 것이며, 인생의 일부이다.

다만 그 문제를 통해 스트레스 상태에 휘말리는 마음이 진짜 문제이다. 실망과 좌절을 겪고서도 나중에 되돌아보면 얼마나 사소하고 부끄러운 옹졸함이던가! 좀 더 대범하고 강단 있게 대처했다면 문제의 시기가 오히려 자존감을 높이고 긍지를 주지 않았을까? 마음이 암울한 환상을 만들고, 행동이 그에 반응했기 때문에 실수했던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아, 마음이 진짜 문제다. 산책길에 줄을 풀어주면 사방으로 날뛰며 뒹구는 강아지처럼, 문제를 기회 삼아 여실히 허접함을 드러내는 나의 마음이야말로 내 인생의 원수이다.

예수님, 내 마음을 좀 맡아주세요. 줄로 묶어 주세요. 그러나 다치지 않게 조금은 부드럽게 대해 주세요.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을 만져 주세요. 내가 바꿀 수 없는 부분을 안아 주세요. 미련하고 좁은 마음이 소중한 내 인생을 낭비하지 않도록 도와 주세요. 내 마음이 더 이상 나의 소유가 아니라 당신의 소유라고 말해 주세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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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31 화해, 공존의 비밀


사람이 서로 잘 지내는 비결은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 싸우고 잘 화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 함께 지내면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긴다.

특별히 일본에 와서 그것을 더 확인하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한국에서 아주 친한 친구들이 함께 일본에 와서 룸메이트로 지내다가 문제를 겪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약간은 과장된 이야기가 되겠지만, 친구로 와서 원수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사람을 사귀는 것도 물론 어렵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깨어진 관계를 봉합하고 다시 친구가 되는 방법, 곧 ‘화해’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소한 문제를 두고서도 극단적으로 대치하다가 결국에는 좋은 사람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화해(和解)’란 서로 조화를 찾고 문제를 푼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먼저 암묵적인 전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싸움을 했더라도 잘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충돌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잊지 못할 수준의 모욕이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망각은 불편한 약점이기도 하지만 은혜로운 축복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에게 어떤 기억은 평생 잊혀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가해자는 잊더라도 피해자는 잊지 못하기 쉽다. 그리고 그런 기억을 남기게 되면 아무리 화해를 위해 노력해도 완전한 회복이 불가능할 수 있다. 물론 싸울 때에는 감정에 취해서 다시는 안 본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신중해야 한다.

‘만약’이라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에 두고 싸워야 한다. 좀 더 발전한다면, ‘화해’할 것을 미리 계산하면서 싸우는 노련함이 필요하다. 우리가 나중에 화해할 것을 미리 생각하면서 싸울 수 있다면, 우리의 표현과 방법이 당연히 많이 순화되게 될 것이다.

화해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다. 사실은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인격적인 결함이며, 모진 잘못이다. 어떤 사람에게서도 완전함을 기대할 수 없듯이, 우리가 만나는 갈등에서도 어느 한 편의 일방적인 잘못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많고 적음은 있겠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화해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함이다. 미련한 사람은 갈등 속에서 상대방의 잘못만을 계속 생각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부족을 생각한다. 심지어 타인의 잘못이라도, 그것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는 것[타산지석(他山之石)]이 참된 지혜이다.

화해하라. 되도록이면 사람을 잃지 말아라. 설사 헤어지더라도 화해하고 헤어지라. 야곱과 에서도 화해했지만 그들이 이후로 함께 살지는 않더라. 하지만 계속 미워하며 떨어져 사는 것과 서로를 향한 좋은 감정을 가지고 떨어져 사는 것은 전혀 다르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화해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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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4 목양칼럼


여름이다. 더위에 지치면 입맛이 없기 쉽다.

입맛이 없을 때는 밥상에도 과거로의 회귀(回歸)가 일어난다. 화려한 것보다는 뭔가 복고풍(復古風)의 담백한 음식을 찾는다. 개인적으로 그 중의 하나가 깍두기이다.

새로 담근 깍두기가 아니라 잘 익었거나, 혹은 조금 신맛이 나는 깍두기가 좋다. 깍두기를 담글 때에 찹쌀이나 쌀로 풀을 쑤어 넣었다면 나중에 국물이 약간 걸쭉해서 밥을 비비기 좋다.

이 국물을 하얀 쌀밥에 듬뿍 얻는다. 물론 깍두기도 적당히 들어가야 한다. 수저로 밥을 비비기 시작하면, 신맛의 냄새가 코로 들어오면서 벌써 침이 꼴깍 넘어간다. 처음부터 완전하게 비빌 필요도 없다. 먹으면서 천천히 비벼가도 되니까… 당장 밥그릇의 윗부분을 벌겋게 비벼서는 깍두기와 함께 한 입 가득 베어 문다.

깍두기가 좀 매운 맛이 강하다면, 담백한 나물이나 생선 같은 반찬을 곁들여 먹으면 더 맛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그냥 시원한 냉수 한 잔만 있으면 뚝딱 밥 한 그릇을 해치우게 된다.

어린 시절에는 이렇게 밥을 먹는 어른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햄이나 장조림이 맛있지 깍두기에 무슨 찬사를 돌린단 말인가! 깍두기는 그저 촌스런 반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 진가(眞價)를 저절로 알게 되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 혼자서도 한 끼의 식사를 책임질 수 있는 저력, 그리고 숙성(熟成)의 과정을 통해 오묘하게 입맛을 끄는 매력까지…… 깍두기는 밥상의 지존이다!

사람이 그렇고, 인생이 다 그렇다. 처음에는 화려하고 달콤한 것이 좋지만, 그런 것은 오래 가지를 못한다.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화려한 것이 아니라 수수한 것이다. 평범해 보이고, 어떨 때는 지루해 보이는 것이 사실은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자극을 원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런 자극이 곧 충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평생을 그렇게만 살 수 있을까? 인생은 짧지 않고, 신앙은 평생의 문제이다. 결국 우리는 깊은 강을 건너 주님의 나라에 가야 한다. 그리고 이 순례의 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아주 담백하고 평범해 보이는 원리의 실천이다.

하루에 한 번 마음을 기울여 기도하기, 그리고 성경을 늘 곁에 두고 묵상하며 살아가기, 주일은 예배에 빠지지 말기(덧붙여 늦지도 말기),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기, 밥을 먹을 때에는 늘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이런 것들이 정말 간단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신앙에 있어서도 ‘깍두기’로 돌아가야 한다. 햄과 치즈, 장조림을 내려놓고, 내가 정말 시대와 환경에 상관없이 나를 입맛 돌게 하는 깍두기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여름철 입맛이 없다고 신앙까지 무력해지지는 말자. 계절에 맞는 입맛이 있듯이, 신앙에도 각각의 때에 적당한 은혜가 있기 마련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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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0 목양칼럼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본래 억울하고 슬프기만 한 일은 아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육신의 노쇠함 이상으로 그의 정신과 인격이 풍요할 수 있다면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며 행복할 수도 있는 일이다.

결국 세월에 대한 한탄은 흘러간 세월에 비하여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자각에서 나온다. 나이만 먹었지 도대체 인생에 발전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는 정신적으로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곤두박질친다.

성경에는 나이 먹은 사명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새출발을 결단한 것이 75세였고,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타는 사명의 나무를 보았던 것은 80세였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여호수아와 갈렙도 70세가 훨씬 넘어서 가나안 전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더 일찍 믿음을 가지고 순종했다면 더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섭리와 사명의 준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극히 인간적인 생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셉과 다윗의 인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설사 아주 늙은 나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압축된 세월 속에서 사명자를 ‘나이 먹게’ 하신다. 속된 말로 ‘애늙은이’를 만드시는 것이다. 이러한 숙성의 과정이 없이 사명자는 만들어질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준비이다. 하나님은 사명자에게 능력이 아니라 인격을, 지능이 아니라 지혜를, 기술(skill)이 아니라 경륜을 원하시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특별한 은혜 속에서, 보낸 세월(나이)보다 훨씬 깊은 것을 얻었으며, 그로 인하여 시대를 변화시키는 탁월한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나이 먹는 것이 두렵지 않다. 이룬 것이 적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고 정리된 것이 늘어갈수록 언젠가는 이것들이 꼭 요긴하게 사용될 때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왜냐하면 사명자로서의 내 세월은 결국 하나님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목회로 인하여 많이 속상했다. 가슴에서 눈물이 났다. 속상함을 달랠 길이 없어 우두커니 창가에 서 있다가, 결국에는 기도자리에 앉았다. 가슴에서는 펌프질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이 말씀을 들었다.


(이사야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런 일들은 그냥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다. 나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세월일 뿐이다. 결국 이 슬픔도 내 재산이 될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내 인생의 상처들을 통해 오히려 목회의 진주들을 만드실 것이다.

깨달음의 순간에 나는 손을 들고 감사했다. 문제는 잊혀졌고, 은혜만 남아 빛이 났다.


흰머리에 부끄럽지 말자. 세월은 나를 익어가게 한다. 역경과 고난은 그분의 사랑이다. 내가 그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분은 나를 중요하게 사용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이 시대를 향한 내 안의 메시지이다. 공허한 말이 아니라, 피 묻은 복음이 필요하다. 비루한 것들을 단칼에 날릴 수 있는 날카로운 말씀의 검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지금 이 광야에서 나에게 그 검의 길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가치 있는 길을 가고 있다면 세월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세상이 무어라고 말하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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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7 목양칼럼


요즘 찬혁이가 시험기간이다. 본인의 말로는 시험공부를 매일 5시간 정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외에도 시험에 임하는 준비가 남다르다. 우선 밤 10시가 넘으면 무조건 잠자리 준비를 해서 늦어도 11시에는 잠자리에 든다. 잠자기 직전에 샤워를 하고 꼭 따뜻한 우유를 한 잔 마시는데, 이것은 숙면을 위한 처방이다. (평소에는 따뜻한 우유가 아니라 날씬한 몸매를 위해 감식초를 넣은 우유를 마신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다시 샤워를 한다. 물의 온도가 중요한데 40도 정도가 적당하다. 이 정도 온도라야 온 몸의 세포가 깨어나 최선의 컨디션을 발휘하게 된단다. 또한 뇌를 위해서 꿀물을 한 잔 마셔준다. 적당한 당분은 뇌세포를 활성화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찬혁이는 말한다.

아들 녀석의 호들갑(!)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저 녀석이 뭐를 해도 하겠구나! 온 식구들의 눈치를 받으면서도 저렇게 컨디션을 챙기고, 자기를 아끼는 것을 보면 시험결과도 분명 나쁘지 않겠구나…’

사람은 믿음 속에서 성장한다. 특별히 자신에 대하여 어떤 믿음을 가지는가에 따라서 인생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를 믿는 사람은, 결코 자기를 함부로 하지 않는다. 자기 인생을 소중하게 여기면 타인의 인생도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그 상호작용에 의하여 사람은 위대하고, 아름답게 세워지는 것이다.

미래는 결코 불쑥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어제와 오늘의 결과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굴곡(屈曲)이 있지만, 그 과정에서도 자기를 향한 믿음을 지키고 스스로 자기를 소중히 여길 때에, [=자중자애(自重自愛)] 마침내 희망의 해가 떠오른다. 어려운 때가 지나고 기회가 왔을 때에, 그는 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실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관계를 되도록 넓게 하라. 항상 노력하고, 기회 앞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후회 없도록 살아야 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이 모든 것의 근원은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내가 나를 믿고 사랑하지 않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를 편안함 속에 방치하며 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돌아갈 희망은 없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을 때에도 거울을 보고 말하라. 너는 소중하다. 너는 할 수 있다. 너의 꿈은 현실이 될 것이다. 그 날을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 함부로 살지 말고 가장 소중한 사람답게 훌륭하게 하루를 살자!

유명한 처칠의 연설처럼,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이미 패배이다. 그러나 자기를 지키면 언젠가는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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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2 목양칼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물론 밥을 먹고 산다. 그러나 밥이 전부는 분명히 아니다. 

사람에게는 밥 이상의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 절실한 무언가를 찾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고프고, 허전하다. 

요즘은 생각을 많이 한다. 책상 위의 모니터를 응시하다가도 생각에 빠지면 한 동안 시간을 잊는다. 다른 사람이 보면 정신이 잠시 나간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속으로는 생각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흘러간다.

생각이 많아진 것을 보면 나이를 먹었는가 보다. 쉽게 내리던 결정도 거듭거듭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 나름 신중해졌다는 느낌이다. 그 생각의 깊이와 무게만큼이나 내 인생도 더 풍요하게 채워지기를 기대한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인생이 손 안의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젊은 시절에야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조금 낭비를 하고 객기를 부려도 괜찮지 싶다. 하지만 중년에 들어서고, 한 번뿐인 인생에 대하여 알아가면, 점점 시간의 무게를 느끼고, 자기 인생이라는 전체적인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에 대하여 고민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30대를 지나면 고민이 시작되고, 40대를 지나면 고민이 숙성되는 것 같다.

나는 내 인생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주변의 사람들이 왜 일본에 가서 굳이 고생을 하느냐고 묻곤 하는데, 사실은 그게 내 이유다. 내 인생은 소중하기 때문에, 하찮은 일에 쓰기 싫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 적어도 만만하지 않은 일에 도전하고 싶었고, 후일에 뒤돌아 보았을 때에 후회하지 않게 살고 싶었다

아직은 모르겠다. 과연 내가 의도한 대로 살아낼 수 있을지. 가끔은 후회도 들고,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잘못 살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긍지,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보람이 나를 밀어주고, 끌어주고 있다.

제일 불쌍한 사람은 자기가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삶에 끌려가는 사람은 스스로의 환경에 갇힌 노예와 다름이 없다. 

왜 한 번뿐인 인생을 원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낭비하는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라. 가장 만족할 수 있는 일을 하라.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하고, 보람을 거둘 수 있는 인생을 살아라. 그게 정말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대신 선택해 주시지 않는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고 하면서 마냥 기다리지는 말라. 결정해야 하는 사람은 당신이며, 하나님은 이미 그 선택을 위해 필요한 말씀을 충분히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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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5 목양칼럼


믿음은 소망이다.

믿음 안에는 ‘No’가 없다. 우리가 불가능을 말하고 인정하는 순간, 믿음은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며 남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과 염려뿐이다.

물론 세상에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러나 믿음은 안 되는 일이라도 일단 도전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는, 성공만이 아니라 그 도전의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다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가 성공보다 더 가치 있을 때, 우리는 성공보다 더 행복한 실패를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성경의 구약을 서술한 히브리어에서 ‘안다’는 말은 ‘경험한다’는 말과 구분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은 ‘믿는다’는 말과 ‘행동한다’는 말을 역시 구분하지 않는다. 믿는다고 말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 믿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기도의 결과가 나타나기 이전에 ‘먼저’ 감사하고, 기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 행동 속에 이미 믿음의 깊이와 분량이 드러난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믿지 못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스스로 이미 믿음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서 처해 있는 위험이기도 하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기도와 믿음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믿음과 반대의 방향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자기를 돌아보는 과정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자기 자신의 언어와 행동에 대하여 더 깊이 살피고 발견할수록 믿음을 마음으로부터 삶으로 끌어내 완성해가는 능력이 자라나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가 기대하고 있는 모습과 자기 자신의 현실을 착각하지 말라. 기대한다고 그것이 그냥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소망이 헛된 꿈과 다른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소망 안에는 그에 합당한 행동과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를 아름답게 하려면 자기를 알아야 하고, 고쳐야 하고, 발전해가야만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소망하자. 그리고 그 소망을 향하여 한 걸음씩(One step at a time!) 나아가자. 때때로 찾아오는 어둠의 시간은, 불평과 원망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 때가 바로 믿음을 말하고, 보여줄 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찾으시는 때이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 (전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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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9 목양칼럼

 

하나님,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막연한 이 땅에서 가족과 나의 미래와 사명을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모자라고 부족합니다. 그 모자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를 느낍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결국 은혜로만 당신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사실, 내가 아니라 당신의 이름으로만 모든 선한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습니다.

가난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두렵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지켜야 할 것이 많다면 고통도 크겠지만, 막상 내려놓아라 하시는데 별로 내려놓을 것이 없습니다.

일본으로 출발하던 때와 같이 그저 빈손이면 족합니다.

긍지는 사라지고, 자존심은 상처 받았습니다. 때로는 내가 누구인지를 계속 묻습니다. 

그래도 내게 남겨진 것이 있다면 그건 당신의 말씀입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경험했습니다. 이기적으로 살아가며 세상을 변화 시키려는 비전도, 의지도 잃어버린 무력한 그리스도인을 인하여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저를 울게 하고, 불타게 했습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무엇으로 이 시대의 영적인 잠을 깨울까? 어떻게 하면 이기심 가득한 우리 마음의 벽을 허물고 헌신하는 기쁨과 섬김의 행복을 알게 할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건물이나, 예식이 아니라 바로 변화된 사람임을 깨닫게 할까?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차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꿈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꿈은 나를 울게 하고 목마르게 합니다. 가슴이 뛰게 하고, 살게 합니다. 아무리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게 하고, 절망 앞에서도 용감하게 합니다.

나도 그것이 늘 신기합니다. 항상 너무 쉽게 무너지는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아침과 함께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은혜가 놀랍습니다.

지금은 내 가슴에 켜켜이 슬픔과 상처가 쌓여 가지만, 언젠가는 이 절망으로부터 세상을 치유하는 맑은 샘이 터져 나올 것을 믿습니다.

그 기대가 있기에 나는 여기 홀로 설 수 있습니다.

나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일본이 아니라 세계를 향하여 부름 받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양식이고, 생명입니다. 기도가 나의 호흡이며, 찬양이 나의 옷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어도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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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2 목양칼럼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제대로 보는 것이 쉽지 않다.

물론 보는 것에 정도(正道)가 따로 있지는 않아서 꼭 지식을 앞세워야 훌륭한 감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무식(無識)은 제대로 보는 것에 심각한 방해가 된다.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은 것을 이해하고 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변적인 지식들이 필요하다.

이것은 미술도, 음악도, 역사도 그러하고, 심지어 사람도 그러하다.

목회자가 되고서 사람에 대한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하나는 세상에 이해될 수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에 변화가 불가능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직 그 사람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향하여 비난만 일삼을 때는, 잠시라도 감정을 가라앉히고 정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연 내가 그에 대하여 얼만큼, 무엇을 알고 있을까?’

사람은 모르는 것을 쉽게 단정한다. 그 성급함이 때로는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 같다.

또한, 사람은 변한다. 좋게도 변하고, 나쁘게도 변한다. 심지어 나쁘게 변하는 것도 뒤집어 생각하면 희망의 그림자일 수 있다. 만약 사람의 선과 악을 한 번의 행동이나, 어떤 시간에서 확정할 수 있다면, 그래서 한 번 악인은 영원한 악인이어야 한다면, ‘사람’이라는 말과 ‘희망’이라는 말은 서로 무관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의 은혜를 주신다. 사람은 언제라도 자기의 잘못을 돌이키고 기회를 붙잡을 수 있다. 사람에게 희망이 있는 까닭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하지만 그 약점을 스스로 고쳐갈 수 있는 선택과 노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고통을 동반한다. 부부간의 사랑이라도, 자식을 향한 사랑이라도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하물며 교회로 만나서 성도들을 믿음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 하랴!

그래서 끝까지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내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한다. 

그러한 사랑이 없이는 결코 누군가를 이해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참 많이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게 해달라고 항상 기도한다. 

함께 걸어줄 동행이 없다면, 이 망망한 인생의 광야를 건너 주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멀고 험한 길을 어떻게 혼자 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만이 위로요, 희망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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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5 목양칼럼


 

그래도 새벽 2시가 넘어서면서 조금 주변이 조용해졌다. 

늘상 차가 다니는 소리로 시끄러운 예배당에 잠시의 정적이 흐른다. 

신호등의 위력인가? 얼마의 여백 후에 다시 차가 아스팔트 위를 내달리는 소음과 엔진의 으르렁거림이 들려온다.

사람들은 이 새벽에도 멈추지 않고 어디를 향해 저렇게 달리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새 구두를 맞추러 왔다고 톨스토이는 말했다. 연인들은 목숨을 걸고 사랑을 맹세하지만, 결국 아주 사소한 문제로 이별을 한다. 자식이 철이 들면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남편이 고생을 벗어나면 아내가 병이 든다.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이 왜 그러해야 하는지? 

조금만 일찍 철이 들고, 조금만 더 참으면서 사랑하고, 조금만 더 건강해주면 안 되는 것인가? 

조금만 더 푸르고 싱싱한 시절에 죽음을 생각하고 보다 신중하며 너그럽게 살면 안 되는 것일까?

인간이란 얼마나 엉터리 같은 존재인가? 깊이 생각하며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는 번번이 무지와 감정으로 눈을 감는다. 그래서 나부터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다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다.

푸른 5월이다. 첫 주에는 아이들을 생각하고, 둘째 주에는 어버이를 생각하고, 오늘은 마음의 스승을 생각하는 주일이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말했다. (3장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결국에는 한 가지 말을 하고 싶다. 우리를 사랑해 주고, 우리의 행복을 함께 만들어 주는 사람들을 좀 더 소중하게 여기자고. 

사람이란 아무리 배부른 환경에 놓여도 함께 웃어주고 손잡아 줄 사람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행복은 시작이야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되어야 하겠지만, 마지막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웃음과 행복에서 채워지는 법이다.

이것을 미처 알지 못한다면 그는 평생 제대로 행복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예수님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상상은 잠시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하다. 아마도 그런 인생이 있다면, 그 자체가 바로 내 스스로 만들어내는 지옥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이 있어 감사하다. 어머니가 계셔서 감사하다. 그리고 내 스승과 친구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이 계셔서 너무너무 감사하다. 나의 인생이 조금이라도 가치를 가진다면, 그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이 풍성한 관계에서 나오는 향기라고 고백하고 싶다. 이 모든 소중한 ‘사랑’ 없이는, 나는 그야말로 껍데기에 불과하다. 아멘!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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