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쉬운 길로 가지 마라! makarios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896)
목회 (632)
인생 (179)
동경in일본 (35)
혼자말 (50)
추천 (0)
02-25 05:06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5.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2010-11-28 흔들리는 내 조국의 평화를 지켜 주소서



밖에는 비가 오고 있다.

점점 겨울이 깊어가는 것을 느낀다. 더구나 한국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소식은 더욱 마음을 춥게 만든다. 평화롭던 어촌(漁村)에 갑자기 포탄이 떨어지고, 영화 속에서나 보던 일들이 생겨났다. 민간인도 죽고, 젊은 군인도 목숨을 잃었다. 모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설마 전쟁이 일어나겠는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어차피 전쟁은 이성의 결과였던 적이 없다. 증오와 분노의 광기(狂氣)가 사람들을 몰아가면 아무리 단단하던 평화도 깨어지고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는 야만(野蠻)의 시대를 맞았던 것이다.

지금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제일 위험한 도화선(導火線)이 되어 있다. 한국과 북한의 대치 이면에는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가 서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나라 중에서 아무도 전쟁을 바라지는 않는다. 심지어 제일 영향력이 있는 중국도 그러하다. 중국이 이제 개방의 봄바람을 통해 자본의 맛을 알아가는 중인데, 전쟁으로 이 소중한 성장의 기회를 잃고 싶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중국도 북한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있었던 직후(11월25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環球時報)는 1면 머리기사에서 이례적으로 북한을 ‘성난 짐승’이라고 표현하고, 중국은 사자춤을 앞에서 리드하는 춤꾼이 아니라고 했다. 북한의 영원한 우방을 자처했던 중국도 이번 북한의 행동에 대하여는 당황했던 것이 틀림없다. 또한 중국의 말도 듣지 않는 북한에 대하여 어떻게 해보라고 원망하는 서방의 태도가 억울했던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세계의 늪이 될 가능성이 있다. 만약 북한이 실제로 중국과 논의 없이 대규모 전투를 감행한다면, 한국에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미국은 자연히 참전하게 되고, 그 미군의 후방기지가 있는 일본도 구경만 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세계의 군사적 균형을 위해서라도 중국과 러시아는 무언가 행동을 강요 받게 되는 것이다.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와는 많이 다르다. 어쩌면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이 불안의 근원이 치유되고, 내 조국 대한민국이 하나로 통일 될 수 있을까? 적어도 내게는 어머니 같은 한반도가 세계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전쟁의 늪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 불명예의 가능성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이 땅이 평화를 얻기에는 그토록 많은 순교자의 피를 흘리고도 아직 부족하다는 말인가……

분명한 사실은 지금이 기도할 때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것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떠들어야 소용 없고, 화를 내는 것은 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이 땅에, 이 시대에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도록 기도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하나님, 내 조국 대한민국을 긍휼히 여기소서. 그 땅의 흔들리는 평화를 지켜 주소서. 제발 지켜 주소서. 제발 지켜 주소서. 아멘!”


2010-11-28 牧羊コラム


外には雨が降っています。

だんだん冬に移り変わっていくことを風の冷たさから感じます。また韓国から聞こえてくる冷たい 知らせはいっそう心を冷たくさせます。平和だった漁村にいきなり砲弾が落ち、映画の中で目にしていたようなことが起きました。

民間人も死に、若い兵士も命を失いました。すべては一瞬でした。 

それでも人々は「まさか戦争など起きるだろうか。」と考えているようです。

だがどうせ戦争とは 理性の結果だった敵などいません。憎悪と憤怒の狂気が人々に侵食すればどんなに固い平和でも儚く消え人々は互いを殺す野蛮の時代を迎えてしまいます。

今の朝鮮半島は地球上で一番危険な導火線となっています。韓国と北朝鮮の対立の裏にはアメリカと日本、中国とロシアがいるからです。もちろんこの国の中でどの国も戦争は望みません。また一番影響力のある中国でさえそうです。中国がやっと開放の春風を通して資本の味を味わっていく中なのに、戦争でこの貴重な成長の機会を失いたくはないはずです。

だが問題は中国も北朝鮮をしっかり統制できないということです。北朝鮮のヨンピョン島砲撃があった直後(11月25日)、中国共産党の機関紙、<人民日報>の姉妹紙である<環球時報>の一面記事で異例的に北朝鮮を怒り狂った獣と表現し、中国は獅子踊りを前でリードする踊り人ではないと書いた。北朝鮮の永遠の味方だち言っていた中国も今回の北朝鮮の行動に対しては驚いたのに違いない。

また中国の話しさえ聞かない北朝鮮に対してどうかしてみろという他人任せな態度にも抑鬱だった模様だ。

このような理由で北朝鮮は世界にとって底なしの沼になる可能性がある。本当に北朝鮮が中国と論議もなく大規模な戦争を強行するのなら、韓国に兵力を駐屯させているアメリカは自然に参戦することになり、その米軍の後衛基地がある日本も見ているだけでは終わらないであろう。そんなことが起きたら世界の軍事的な均衡を保つためにも中国とロシアはなにか行動を強要されるようになるであろう。

アフガニスタンやイラクとは大きく違う。今、私たちの前には一歩先も見えない未来が置かれてあるのかも知れない。そのことを考えるとなかなか寝付けない。どうしたら今の状況に私ができる最善のことができるのか正直分からない。どのくらい時間が過ぎればこの不安の根源が治癒され、私の祖国の大韓民国がひとつに統一されるのだろうか。私にとっては母親のような朝鮮半島が世界を破滅の落とし穴に向かわせる戦争の沼にな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この不名誉な可能性から脱出できるのだろうか。この地が平和を得るにはたくさんの殉教者が流した血では不足だというのか……

今、私たちが知ることができるのは今がお祈りする時であるということだ。事実それ以外、私たちにはできることがないのだ。騒いでみてもどうしようもないし、怒ってみることはそれ以上に役に立たない。今はこの地へ、この時代へ神様の慈悲が注がれるようにお祈りしまたお祈りするしかないようだ。

「神様、私の祖国韓国を恩恵で満ちさせてください。その地の揺らぐ平和お守りください。お守りください。お守りください。アーメン」


Posted by makarios
, |

성장통(成長痛)

2010-11-21 목양칼럼


간혹 아이들이 이상한 아픔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릎 관절이나 종아리 근육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종아리가 아픈 것은 많이 뛰어 놀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노인도 아닌 어린 아이가 무릎의 관절이 아프다고 하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가 혹시나 다친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라면 이런 통증은 성장통(成長痛)일 수 있습니다. 몸이 자라나는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관절과 같은 부분들이 일시적으로 약해지게 됩니다. 이 때에 아이는 통증을 느껴서 밤에 일어나 울기도 하지만 그것은 병이 아닙니다. 잘 먹고 쉬면 몸은 곧 정상을 회복하여 오히려 성장한 모습으로 튼튼해지게 됩니다.

영적으로도 성장통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을 때에, 그 성장은 때로 급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서서히 변화가 나타날수록 변화에 따르는 충격은 작아집니다. 그러나 만약 아주 급히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면, 우리는 삶의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는 성장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때때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혼란에 싸이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우리는 모든 결정에 있어 우리 자신이 결정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는 성경말씀에 따라서 예수님이 해주시는 결정들을 따르게 됩니다. 이러한 결정들은 우리가 내리던 것과는 너무도 달라서, 주변에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잠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좋아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변화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점진적으로 생활 속에 새로운 질서가 생겨나고, 우리가 좀 더 성장된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만, 신앙생활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대가를 치러도 결코 손해보지 않는 훌륭한 결과들을 가져옵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은 잠시 고통이 따르더라도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참으로 복된 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대하여 좀 더 열심을 가져 보십시오. 잠시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서 포기하려고 들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이 주실 열매들을 생각하십시오. 당신이 믿음을 얻고 신앙 안에서 성장하게 된다면, 당신의 나머지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가치를 귀중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물러설 수 없을 것입니다.

샬롬~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2010-11-21牧羊コラム


時々子供たちが変な痛みをうったえることがあります。膝の関節かふくらはぎの筋肉が痛いというのです。ふくらはぎが痛いのはたくさん走り回って遊んだからといえますが、老人でもない小さい子供が膝の関節が痛いというのは理解するのが難しいです。だから親は子供が怪我をしたのではないかと心配したりします。                                    

成長期である子供ならこのような痛みは成長痛かみしれません。体が育つ速さがとても速くなると 関節のような部分が一時的に弱くなります。この時期には子供は痛みを感じ夜中にも起きて泣いたりしますが、それは病気ではありません。ちゃんと食べて休めば体はすぐに正常に回復し、かえって 成長した姿となり、健康になります。                            

霊的にも成長痛があります。私たちが神様の子供のように良いキリスト人になることを決心した時、その成長は飛躍的なものになります。徐々に変化が現れるほど変化に対する衝撃が小さくなります。だが、とても急に変化が現れるなら、私たちは生活の中で色んな成長痛を経験する事になります。 

時々、イエスを信じ、信仰生活を始めた人が逆に混乱してしまう事がありますがその理由がこれです。イエスを信じる以前は、私たちはすべての決定において私たち自身が決定者でした。だがイエスを信じ以後は聖書のとおりイエス様が決めてくれる決定に従うことなります。このような決定は私たちが決めていたこととは違いすぎて、周囲に誤解を招くこともあるし、時には、少しの間、否定的な結果をもたらす事もあります。                      

だが、これは断じて悪くなっていいくのではなく、良くなっていく過程です。私たちがイエス様を 信頼し、変化する事を諦めないなら、一つ一つ生活の中に新しい秩序が生まれ、私たちがもっと成長した姿になったということに気づ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るでしょう。             

ハッキリと言いますが、信仰生活は易し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だが、私たちがこのような対象を 払っても絶対に損ではない素晴らしい結果を持ってきます。良いキリスト人になる過程はすこし苦痛が伴うが、永遠の幸せと幸福を得ることができる真に恵まれた道なのです。           

信仰生活にもっと熱心になってみて下さい。少しの間難があるかるといって諦めようとしないで、 神様がくれるであろうものを考えてみて下さい。あなたが信仰心を持ち、信仰のなかで成長するようになれば、あなたの残された人生を変えることができます。その価値を重要視するなら、私たちは 決して引くことができません。

シャロ~ム~


(ローマ8:18)「私はこのように考えている。今の時のいろいろな苦しみは、将来私たちに与えられる栄光に比べるなら、全く取るに足りないものである。」 

Posted by makarios
, |

2010-11-14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새 출발의 기회가 있습니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바로 그 때가, 사실은 자기가 원하는 새 출발을 하기에 가장 적당한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과 친척과 유산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새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인도하시고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에 자기의 인생을 걸었고, 하나님은 그의 순종에 축복으로 보상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80살의 노인이 되어서야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모세)도 처음에는 우리처럼 약한 마음으로 망설였지만, 하나님을 믿고 이집트의 파라오에 대항하였고, 결국에는 노예로 살아가던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하여 가나안 땅까지 이끌었습니다.

성경에는 이 밖에도 나이를 뛰어 넘은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이 분들이 나이를 뛰어 넘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이 분들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너무 늙거나 무능력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한 것입니다. 그 믿음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늦었다고 할 만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명에 도전할 수 있도록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십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때를 따라 도와 주시고 새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혼자라서 외롭다고요? 자신은 너무 늙었다고요? 벌써 머리가 바보가 되었다고요?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요? 우리가 이런 말을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 곁에서 매우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들이 보여주었던 용기를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를 도와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예전에는 나 혼자라서 약했지만, 이제는 믿음이 있고,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니 다를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산이라도 옮길 수 있습니다.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나의 인생에 새 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지금 선언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내일로 미루다 보면 포기하게 됩니다. 당신에게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지금부터 당신의 편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새로 시작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샬롬~


まだ遅くないです

2010-11-14 牧羊コラム


生きているすべての人には再出発できるチャンスがあります。もう遅いと考えているならそれはとても愚かな考えです。もう遅いと思う時こそ実は、自分が望む新しい出発をするのに一番適切な時なのかも知れません。聖書に登場するアブラハムは75歳になってから神様の声を聞きました。 神様はアブラハムに故郷と親戚、遺産を諦めて神様が指示する新しい土地に行けと言いました。 そしたら神様は彼の行く道を祝福すると約束してくれました。アブラハムはこの約束に自分の人生を賭け、神様はアブラハムに見返りとして祝福しました。モーセは80歳の老人になってから神様の使命を受けました。モーセも最初は私たちのように弱い心で戸惑いましたが、神様を信じエジプトのファラオに対抗し、結局、奴隷として生きていた200万人のイスラエルの民を解放しカナンの地まで導きました。聖書にはこれ以外にも年のハンデを越えた話はたくさんあります。この方たちが年のハンデを越えられたのはもとろんこの方たちが神様を信じたからです。自分はもう年だ才能がないだと思わずに、逆に自分を呼んだ神様を完全に信頼したのです。その信じる心がほかの人にはもう遅いという年にも関わらず新しい使命に挑戦する力をくれたのです。キリスト人は一人ではありません。 私たちには愛し助けてくれる神様がいつも一緒にいてくれます。これをヒブライ語で「イマノエル」 と言います。神様はただ私たちと一緒にいてくれることだけではなく時によって助けてくれ新しい力をくれる方です。一人だから寂しいですか。自分はもう年だと思いますか。もう頭が馬鹿になりましたか。このような言葉を私たちがこのようなことを言うとき神様は私たちの横でとても悲しみます。 私たちがイマヌエルの神様を知らず信じていないからです。私たちはアブラハムとモーセに習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彼らが見せてくれた勇気を見習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私たちもまた始めることができます。私を助けてくれる神様と一緒なら不可能なことわありません。以前は私一人だから弱かったが今は神様を信じ、神様が助けてくれるからきっと違うでしょう。勇気を持って挑戦しましょう。 神様に力をくださいとお祈りしましょう。私たちに本当の信じる心があれば、山でも移せるでしょう。今日はいい日です。私の人生で新しい出発が必要だと感じるなら、それを明日にしないでいま宣言し始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明日からといっていたら諦めるようになります。あなたに信じる心があれば神様は今からあなたの味方になってくれるでしょう。これを信じ新しく始める人には幸があります。

シャローム



Posted by makarios
, |

2010-11-07 예배를 삶의 중심에



세계적인 설교가 제임스 E. 화이트는 그의 책 <하나님과 친절한 사귐>에서 다음과 같은 그의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러시아에서 한 교회의 주일 아침 예배 설교를 부탁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가 나뿐 아니라 여러 명이었습니다. 예배는 거의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친 뒤 나는 그 교회 목사님과 잠깐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예배가 긴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교인들의 열의에 더욱 놀랐던 것입니다. 3시간 내내 그들은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았고 지루한 기색도 없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도 집에 돌아갈 마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운을 떼었습니다. “미국에서는요, 예배가 한 시간이 넘으면 여기저기서 시계가 삑삑거립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신앙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게 허용되지 않았고, 발각되면 모두 감옥에 들어갔지요. 지금 이런 일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질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저 행복한 겁니다. 그리고 어떤 앞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매주일이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혼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예배를 너무 건성으로, 느긋하게, 습관적으로 드렸던 게 아닌가? 이 사람들은 예배가 무엇인지를 안다. 그렇기 때문에 고초를 당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다시 감내할 의지가 있는 것이다. 예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갈 의지가 있는 것이다. 죽을 의지가 있는 것이다. 한평생 살면서 예배만큼 귀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건강을 잃기 전에는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고, 친구를 잃기 전에는 친구의 아쉬움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잃고서야 그것의 귀중한 가치를 안다면 이 또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매주일, 우리에게 소중한 교회가 있다는 것과 아름다운 지체들이 있다는 것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추구하는 간절한 신앙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다른 것들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예배가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예배의 부흥으로부터 영적인 성숙과 전도와 삶의 활력이 생겨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소중하게 지켜져야 하며, 또한 최선을 다해 드려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동경드림교회 지체들에게 권합니다. 예배를 삶의 중심에 두십시오. 그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 소중한 기회를 소홀함으로 잃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샬롬~


** 

개인적인 사정으로 2007년 4월 29일의 목양칼럼을 다시 게재합니다.


2010-11-07牧羊コラム


世界的な牧師「ジェ-ムズE.ホワイト」は彼が著書した本<神様との親切な付き合い>で次のような彼の経験を語ります。

ロシアである教会の日曜日、朝の礼拝の説教を頼まれたことがありました。だけど説教者は私だけではなく数名でした。礼拝は三時間近くまで続きました。礼拝を終えた後、私はその教会の牧師さんと少し話をしました。礼拝が長いことにも驚きましたが、聖徒たちの熱意にもっと驚かされたのです。三時間の間ずっと彼らは席を立たず退屈した様子も伺えませんでした。礼拝が終わった後にも家に帰る気がないように見えました。私が話を切り出しました。「アメリカでは、礼拝が一時間を越えるとあっちこっちで時計が鳴り始めますよ。」その牧師さんはこのように言いました。「何年か前までは信仰共同体として一緒に集まり礼拝を捧げるのが許されなかったし、見つかったら監獄にいれられましたよ。今、礼拝を公開的に捧げることができるのがいまだに信じられませんよ。だから私たちは ただただ嬉しいのですよ。あと、これからどんなことが私たちを待ち構えているか知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から、毎週このように自由に礼拝を捧げることができる最後の日だという心で礼拝をしているのですから礼拝を中断しようとは思わないのですよ。」その話を聞き私は一人でこんな事を考えました。これまで私は礼拝を適当に、ダラダラと、習慣的に捧げたのではないか。この人たちは礼拝が何かを知っているのです。だから苦難があってもそれに耐えることができる意志をもっているのです。礼拝をして監獄に入れられるなら入る意志があるのです。死んでも良いという意志があるのです。今までを生きてきて礼拝より大事なものはないという事をこの人たちは知っているのです。


健康を失う前は健康の大事さを知ることができず、友人を失う前は友人の大事さをしることができないと言われます。だが失ってからその価値に気づいてしまってはもったいないことです。私たちは毎週、私たちに大事な教会があるという事、周りの人たちに恵まれているという事、礼拝を通じて神様を求める切実な信仰があるという事に感謝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教会は礼拝共同体です。違うことも重要ですが礼拝が一番根本的な事です。礼拝の復興から、霊的な成熟と伝道の生活の活力が生まれます。だから礼拝は大事に守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し、最善を尽く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愛する東京ドリ-ム教会のみなさんに勧告します。礼拝を生活の中心においてください。そしてその礼拝を通じて神様に会うことを思慕してください。その貴重な機会を失わないでください。それがわたしの願望です。

シャローム~ 


Posted by makarios
, |

2010-10-31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



모든 사람은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면 함께 행복하게 됩니다. 사랑은 받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람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서로 사랑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말썽을 부리는 청소년기의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가 말하는 것마다 일부러 거꾸로 행동합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화를 내고, 아이는 그런 부모를 보면서 더 고집을 피웁니다.

사실 마음 속을 살펴보면, 양편은 모두 사랑을 원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말썽을 부려도 이해해주는 부모님을 바라고 있고, 부모는 늘 순종하는 온순한 자녀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희망의 가장 바탕에는 상대방으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에게조차 사랑 받기를 원하는 욕구는 발견됩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도, 정작 자신은 중요하게 여겨지고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분명한 모순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순은 가장 망가진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모순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에 대하여 불평하고 있다면, 평소에 과연 당신이 그 사람에게 사랑 받을 만한 행동을 얼마나 했는가 반성해 보십시오. 분명히 별로 충분하지 못할 겁니다.

결국 우리는 사랑을 받고 싶으면서도 사랑 받을 만한 존재로 살아가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모순과 부족을 이해하고 덮어줄 수 없는 양면의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인하여 우리는 행복에 이르는 가장 훌륭한 길을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길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 중의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완전하게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도, 아무리 오래 된 친구도 완전한 사랑을 서로에게 행할 수는 없습니다.

조건을 따지지 않는 완전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선물을 주고, 따스한 격려의 말을 하며,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내게 잔소리를 하고, 실수투성이에, 固執不通(고집불통)인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나를 기다리게 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며, 재미 없는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나만큼이나 그도 사랑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에게는 사랑 받는 것만큼이나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랑은 내가 그런 사람들 속에서도 미움과 원망으로 자기를 망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이런 사랑을 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기 힘든 순간에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이십니다.

샬롬~



永遠で完全な愛

2010-10-31牧羊コラム

 

すべての人は愛されたいと思っています。だから互いに愛すると、一緒に幸せになります。愛は受ける人の為のものだけではなく、愛を捧げる人の為にも最も良い選択です。だが私たちはそれを知っていても互いに愛することに問題を抱えています。

話を聞かない青少年期の子供がいるとしましょう。その子供は親が何かを言う度にわざと逆に行動します。親は子供を叱り、子供はそんな親を見てもっと話を聞きません。

心の中を見てみると実は両方とも愛を求めています。子供はイタズラをしても理解してくれる親を望み、親はいつも話を聞き従う温厚な子供を願っています。

私たちが社会から隔離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ってしまう 凶悪な犯罪者さえ、愛されたいと願ったりします。彼らは少しも他人を配慮せず、また他の人を傷つけているにも関わらず、自分は大事にされ、愛されたいと願っているのです。

これは明らかに矛盾しています。だが、このような矛盾は心が壊れている人だけに 現れる ものではなく、私たちみんなに現れる一般的な矛盾です。今、考えてみてください。あなたは自分を愛してくれない誰かに不満を抱いているのなら、果たしてあなたは愛される行動をどのくらい行ったのかを振り返って みてください。おそらく不十分でしょう。

結局、私たちは愛されたいと思っていながら愛されるのにふさわしい存在として生きていけない、なのに他人の矛盾と不十分なところ を理解してあげられない二つの 弱点も持っています。私たちは幸福にたどり着く最も素晴らしこを知っていてもこの致命的な弱点のせいで実現できていないのです。もちろんその道にたどり着くことは互いに愛することです。 

私たちはどの人も 完全に愛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ことを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親が子供を愛し、夫婦が互いに愛する。また、幼なじみである友人の間でも、完全に愛し合う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条件を問わない完全な愛を行う者は唯一神様だけです。

それは自分にプレゼントをしてくれたり、温かい激励の言葉を言ってくれたり、自分 を愛してくれる者に向けての愛ではなく、自分に小言を言い、失敗ばかりで、頑固 な人に対する愛です。それは自分を待たせたり、寡黙でつまらない人に対する愛です。

なぜなら自分と同じくその人も愛されることを切実に願う人だからです。また自分が愛されるほどそういう人を愛することは重要です。そういう愛は そんな人たちの中でも憎しみと恨みで自分をダメにしない唯一の選択だからです。



Posted by makarios
, |

2010-10-24 긍정적으로 기대하기



요즘 큰아들 준혁이가 고등학교 입시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되도록 좋은 학교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족들도 열심히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감이 늘 좋은 격려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잔소리도 되고, 걱정도 되고, 책망도 됩니다. 가끔은 이런 말들이 오히려 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좀 더 조심스럽게 기대하는 마음을 표현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를 가집니다. 더 부드러운 남편의 모습을 기대하고, 더 자상한 아내의 모습을 기대하고, 더 착한 자녀들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대감은 오히려 실망만 안겨주고 서로의 마음을 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더라도 그렇게 잘 행동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계속해서 기대하는 마음만 표현하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받게 되면 그 의무를 포기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입장, 생각, 능력을 고려하여 때로는 우리가 가지는 기대감을 낮추거나, 혹은 조금 더 천천히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기대감이 관계를 망치지 않고 더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그 기대감이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고 아직 실망하지 마십시오. 서로 사랑하고, 상대방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면서도, 아직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다면, 더 많은 이해와 노력이 필요할 뿐입니다.

한 번 약속을 어겼다고 하여서 크게 실망감을 드러내고 상대방을 상처 주면, 관계는 점점 더 나빠질 뿐입니다. 그러나 너그럽게 이해하고, 조금 더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빌립보서 4: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Let your gentleness be evident to all.)”

기대하는 것을 숨기고만 살아가지는 마십시오. 기대하는 마음은 사랑의 한 단면입니다. 다만 조금 더 부드럽게 표현하십시오. 그리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면 이런 태도를 가지는 것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기대를 통해 점점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있을까요? 그런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답니다. 샬롬~



肯定的に期待すること

 

2010-10-24 牧羊コラム

 

最近、長男のジュンヒョクが高校入試の準備をしています。できれば、より良い学校に行ってほしいと思って、家族みんなが応援しています。しかし、その期待感がいつも良い励ましにはなりません。時々、その期待は小言、心配、叱責になってしまいます。逆に、このような期待の言葉が子供の心を傷つけてしまうのではと思い心配になります。だからこれからはより慎重に期待しているという心を表現しようと思います。

私たちは愛する人に期待を持ちます。もっと優しい夫の姿を期待し、もっと親切な妻の姿を期待し、もっと素直で良い子供の姿を期待することは自然なことです。なぜなら彼らは私たちが愛する人だからです。だけど気をつ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相手を理解できない期待感は返って失望させ互いの心を傷つけてしまうかもしれないからです。人が変わることには相当な時間が必要です。また人は自分がどのようにすればよいか知っていても行動できない時が多いです。そんな状況にも関わらず続けて期待する心だけを表すことは負担になってしまいます。また私たちは自分が負えない負担を受けるとその義務を諦めようとする傾向が現れることもあります。何かを期待する前にまず、その人の立場、考え、能力を考慮し時には私たちが持つ期待感を下げたり、もう少しゆっくり表現する必要があります。そうすれば期待感が関係を壊さずもっと肯定的な結果を作っていくことができます。

あなたは今、あなたが愛する人に何を期待していますか。その期待感が簡単に満足できないからといって失望しないでください。互いを愛し、相手が何を期待するか知っていてもまだそのような行動ができないのなら、もっと多くの理解と努力が必要なだけです。一度、約束を破ったからといって失望感を大きく表し相手を傷つけたら、関係はどんどん悪化するだけです。だから寛大な心で理解し、もう少し待つ方法を習ったら私たちが予想したよりもっと良い結果を一緒に作っていけると思います。

聖書のピリピ4:5によると

「あなた方の寛容な心を、あらゆる人々に示しなさい」(Let your gentleness be evident to all)

と書かれています。

期待することを隠さないで生きてください。期待することは愛の一種です。ただもう少し穏やかに表現してください。そして待つことを訓練してください。愛する人のために毎日お祈りするとこのような態度を持つことには役にたちます。愛する人が自分の期待を通して少しずつ変わっていくことを見届ける事より美しい姿があるのでしょうか。そのような事を経験する事は本当に幸せな事のはずです。



Posted by makarios
, |

2010-10-17 솔직한 대화



사람이 서로 대화하는 것에는 4가지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첫 단계에서 사람은 습관적인 말을 사용합니다. 이를테면, 밥 먹었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이런 말에는 말하는 사람의 마음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주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다른 친구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아이에 대하여 말을 하지만, 역시 자기의 마음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판단과 생각을 드러냅니다. 대화 하는 동안 조심스러운 마음에서 조금씩 편해지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단계에서는 자기의 느낌과 감정까지 솔직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이런 대화는 관계를 깊어지게 하고 사랑을 발전시킵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대화는 사실 처음의 1~2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서도 정작 서로 깊이 친해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커튼을 가운데 두고서 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옆에 있으면서도 무엇인가 차단된 것만 같은 느낌이 우리들을 외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의 성도들뿐 아니라,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침대를 사용하는 부부임에도 대화가 깊지 못하면 오해가 자라납니다. 아주 사소한 오해로 인하여, 부부의 견고한 사랑이 금이 간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솔직한 대화를 훈련해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상대방이 그렇게 자기를 드러내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편안함 속에서 방어적인 경계심을 포기하게 됩니다. 때문에 상대방을 감정적으로 편안하게 하는 일이 대화에서는 가장 중요합니다. 

분노와 미움과 같은 감정들은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쁜 영향력을 미칩니다. 반대로 아름다운 음악이나 좋은 차를 나누어 마시는 것은 솔직한 대화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것은 '칭찬'입니다. 

 

당신과 함께 대화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오늘 요리는 아주 훌륭했어요. 당신 목소리가 아주 매력적이군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대화하는 사람은 좀 더 쉽게 자기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생각하십시오!" (빌 2:3) 

이것이 행복한 대화와 관계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이와 같은 마음으로 섬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곁에 있는 사람들을 칭찬하십시오. 특별히 가정에서 칭찬이 부족하지 않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그 용기를 돕기 위해서, 당신 부터 편안한 사람이 되십시오.

샬롬~



率直な対話

2010-10-17 牧羊コラム


人が互いに対話をすることには四つの段階があるといわれています。

初めての段階では人は習慣的な言葉を使用します。例えば、「食事はしましたか。」「良い朝ですね!」などの言葉です。このような言葉には話している人の心がよく表れません。二番目の段階では私たちは主に自分ではなく他人の話をするようになります。他の友達について、近所の人について、子供について話しますがやっぱり自分の心はよく表れません。三番目の段階でやっと私たちは自分の判断や考えを表します。対話をしている間、相手を警戒していた心が少しずつ 開いていくという意味です。そして最後の四番目の段階では自分の感じや感情まで率直に表すようになります。このような対話は関係を深くし愛を発展させます。

だが、私たちの大半の対話は実は最初の1~2段階を超えていません。だから長い間一緒にいても互いに親密になっていかないのです。カーテンでしきりを作って互いに対話するように、横にいるけど何か遮断されたような感じが私たちを孤独にさせてしまうのです。これは教会の信徒達だけではなく夫婦の関係にも当てはまります。

同じベットを使用する夫婦でも対話が深くなければ誤解が生まれます。とても小さな誤解のせいで夫婦の固い愛にひびが入ってしまうのはとても不幸なことです。だから私たちは率直な対話を訓練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自分が率直に話そうとすることだけではなく、相手が自分を表し率直に話せる雰囲気を作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人は安心感の中で防御的な警戒心を諦めるようになります。だから相手を感情的に安心させることが対話の中では一番重要です。怒りや憎しみのような感情は対話を始める前に悪い影響力を及ぼします。だが、美しい音楽や良いお茶を分けて飲むことは率直な対話をするのに助けになります 。だけど何より良いことは「褒める事」です。

「あなたと一緒に対話をすることができてうれしいです。」

「今日の料理はとても素晴らしかったです。」

「あなたの声はとても魅力的ですね。」

「配慮していただき有り難うございます。」

このような言葉を聞くと、対話する人はもっと簡単に自分の心を表せるようになるのです。聖書によると「ただ謙遜な心で他人より自分を低く思いなさい。」(ビル2:3)

と書いてあります。これが幸せな対話と関係の秘訣です。神様は私たちが互いに向けてこのような心で尽くすことを 願っているのです。

今日から隣にいる人を褒めてください。特に家庭内で褒める事が足りないのではないか考えてみてくださいいまあなたが愛する人のために必要なことは、自分の心を率直に話せる勇気ですその勇気を助けるために、あなたから安心できる人になってください。


Posted by makarios
, |

2010-10-10 겸손한 자에게 지혜가 따른다



춘추전국시대 말기, 한 젊은이가 학문을 구하며 전국을 떠돌았다.

어느날 개울가를 지나게 되었는데, 한 노인이 다리 위에서 슬며시 자기의 신발을 물에 떨어뜨리더니, 젊은이 신발 좀 꺼내 주게! 라고 청하였다. 청년은 노인이 일부러 신발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지만, 노인이기 때문에 참고 물에 내려가 신발을 가져왔다. 그리고 내친김에 무릎을 꿇어 공손하게 신발을 신겨 주었다.

꽤 쓸만한 젊은이군! 노인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청년에게 말하였다. 내 자네에게 좋은 선물을 줄테니 닷새 후 아침에 여기로 나오게. 노인은 그 말만 남기고 자기의 길을 가버렸다. 청년은 이상한 노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 때문에 닷새 후 아침에 그 다리에 다시 나갔다. 벌써 노인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이 화를 냈다. 젊은 사람이 늙은 사람을 기다리게 하다니... 자네는 게으르군. 오늘은 줄 수 없으니 다시 닷새 후에 이곳으로 오게. 결국 청년은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닷새 후에는 길을 서둘러 아직 이른 새벽에 다리로 나갔다. 그러나 노인은 그래도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이 또 화를 냈다. 아직도 예의가 없군. 오늘도 줄 수 없으니 다시 닷새 후에 이곳으로 나오게. 

다시 닷새 후, 청년은 하루 전 저녁부터 다리에 나가서 노인을 기다렸다. 밤이 늦을 무렵, 노인이 다리에 나타났다. 청년이 공손하게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 노인은 흐뭇해 했다. 

내 자네가 두루 학문을 구하는 것을 알고 자네를 시험했네. 좋은 책을 하나 줄 터이니 그것을 익히고 연구하면 반드시 세상에 큰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네.

이 노인이 바로 태공망(강태공)이었다. 그는 말년에 일생의 심혈을 기울여 <육도삼략>이라는 전술책을 저술했는데, 그것을 바로 이 젊은이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리고 이 청년의 이름이 바로 장량(長良)이다. 한나라의 시조가 되는 유방을 도와 나라를 세웠던 전설적인 책사였다.

고전(古典)은 다소 억측과 과장이 있지만, 그것을 지나 살피면 인간과 세상을 꽤뚫어 보는 깊은 지혜의 통찰력이 담겨 있다. 이 이야기도 그러하다.

사람이 지혜로운 것은 역사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이라는 말은, 한 개인이 항상 같은 출발점에서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선진들이 과거에 얻은 지혜를 물려받아 그것의 토대 위에서 인생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결국 장량에게 태공망은 발돋음 할 수 있는 토대였다. 태공망의 경험과 지혜가 압축된 <육도삼략>이 있었기에 장량은 혼란의 시대를 끝내고 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겸손한 자가 지혜를 얻는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처럼, 미련한 자는 경험을 통해서만 배우고 지혜로운 자는 역사를 통해서 배운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만이 아니다. 내 할머니, 내 아버지의 훈계 또한 살아있는 역사이다. 선배가 말해주는 조언도 넓은 의미에서는 그의 경험과 고민이 담긴 역사이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자기 인생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다면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막아주는 <육도삼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장량은 노인을 공경했다. 그 겸손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교만한 사람은 당장은 높아도 오래 가지 못한다. 교만은 모든 사람의 적(敵)이 되게 만든다. 교만은 항상 남의 지혜를 무시하며, 자기의 생각에 과도한 자신감을 주어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만든다. 

하지만 겸손하면 배우게 된다. 겸손한 자는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된다. 겸손은 두루 은혜를 입게 하고, 성공을 오래 간직하게 한다. 그래서 성경에도 아래와 같이 말씀했다. 우리가 가슴에 새길만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잠 11:2) 교만한 사람에게는 수치가 따르지만, 겸손한 사람에게는 지혜가 따른다.

 

일본어판 

 

謙虚な者には知恵が伴う

2010-10-10 牧羊コラム

 

春秋戦国時代末期、一人の若者が教えを求めて全国を放浪した。ある日、水辺を通り過ぎることになったのだが、一人の老人が橋の上ですっと自分の靴を水に落とし、「青年、取ってきてくれないか!」と頼んだ。青年は老人がわざと靴を落としていたのを見たが、老人を敬う気持ちで水辺に行き靴を持って来た。そしてそのうえ膝をついて礼儀正しく靴を老人にはかせてあげた。「結構使える青年じゃのう」老人は満足そうに笑みを浮かべながら青年に言った。「君にいいものをあげるから、五日後の朝にこの橋に来なさい。」青年は変な老人だと思ったのだが、老人を敬う気持ちにつられて五日後の朝にその橋に行った。老人は先に来て待っていた。老人は怒り出した。「若い青年が老人を待たせるとは君は怠けているなあ 今日はあげ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五日後の朝にまたこの橋に来なさい。」結局、青年は手ぶらで帰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五日後には道を急ぎまだ早い夜明けに橋に向かった。だがそれでも老人は先に出てきて待っていた。老人はまた怒り出した「また遅れるとは礼儀がなっていないなぁ、今日もあげ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また五日後にこの橋に出てきなさい。」また五日後、青年は一日前の夜から橋に出て待っていた。夜が更けていく中、老人が橋に現れた。青年が礼儀正しく立って待っているのを見て、老人は嬉しそうだった。「君が教えを求めているのを知り、君を試させてもらったよ。いい本をあげるから その本を学び研究すれば必ずこの世で自分の志をかなえる事ができるであろう。」この老人は「太公望」だった。彼は人生の末年、自分の一生の精髄を集略した「六韜」という兵法書を著書していて、それをこの青年にゆずりあげたのであった。そしてこの青年の名が「長良」、後に漢の始祖になる「劉邦」を助け国を建てた伝説的な策士である。古典は多少、憶測と誇張を含んでいるが、それを過ぎ振り返ってみると人間とこの世を正確に捉える深い知恵と洞察力が含まれている。この話もそうである。人が賢明なのは歴史的な生き物だからだ。歴史的な生き物という意味 は、一人、個人がいつも同じ出発点で人生を始めるのではなく、先人達が過去に得た知恵を受け継ぎその土台の上で人生を始めるという意味だ。結果的に「長良」にとって「太公望」と言う人は一歩先に踏み出せる土台だった。太公望の経験と知恵が圧縮された「六韜」があったからこそ「長良」は乱世の時代を終え、大陸を統一することができたのだ。「謙虚な者が知恵を得る」と言った歴史学者のトインビーの言葉のように、愚かな者は経験だけを通して学ぶが知恵のある者は歴史を通して学ぶ。歴史はただの過去の記録ではない、自分の祖父母、親のき訓戒もまた生きている歴史だ。先輩が言ってくれる助言もまた広い意味ではその人の経験や悩みが含まれている歴史だ私たちがこのすべてを自分の人生の養分として受け取ることができれば私たちはたくさんの試行錯誤を止めてくれる「六韜」を得ることになるのだ。「長良」は老人を敬った。その謙虚さが彼の人生を変えた。傲慢な人は最初は成功しても長く続かないものだ。傲慢さはすべての人の敵になっていくように人を変えていく。傲慢さはいつも他人の知恵を無視し、自分の考えに度が過ぎる自信を持たせ決定的な失敗をさせてしまう。だが謙虚を学ぶことができればいい。謙虚な人はすべての人の友人になる。謙虚は周りからの恩恵を呼び、成功を長く続かせる。だから聖書にも以下のように記されてあるのだ。私たちが心に刻まなければならない言葉である。

 

箴言11:2 傲慢な人には恥辱が伴うが謙虚な人には知恵が伴う。

Posted by makarios
, |

2010-10-03 변화의 간절함을 품다



나도 그런 날이 있었다. 

높은 곳에 올라 '야호'하고 외치고 싶은. 세상 모든 것을 내 발 아래에 두고 서보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우러러 보게 만들고 싶은.

그런 욕망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서 지금도 마음의 한켠에서는 수도 없이 수군거리며 나를 부추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얼추 나이를 먹었고, 그래서 그것이 틀린 목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은 안다. 만약 내가 그런 마음을 좇아 내 인생을 살고나면 결국에는 허무한 날이 올 것이며, 나는 가면을 쓰고 마치 내가 괜찮은 것처럼 가장하며 살아낼 자신이 없다.

길을 떠나던 날과 내가 많이 변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외양적인 과시(誇示)가 아니라 변화이다. 내가 먼저 변하고, 나의 가정과 교회가 변하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변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신성한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목회를 하면서, 날마다 한계를 절감했다. 처음에는 변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하여 고민했다. 그러다가 그들을 고치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고쳐야 한다는 것에 눈을 뜨면서, 나의 싸움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치열하게 옮겨갔다.

아주 사소한 습관, 생각의 방식, 이기심조차 내 안에서 죽어가는 과정에는 엄청난 저항이 뒤따르고 있다. 목사인 내가 이렇게 변하기 힘들다면, 날마다 세상에 온 몸을 담그고 살아가는 저들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결국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정말 목사라면, 나는 말하는 설교뿐 아니라 보여주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죄성과 악함을 죽이고, 그래서 날마다 점점 더 깊어지고 거룩해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한다면 나는 실패자에 불과하다.

그것을 알고 나서부터 나는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의 사람이 모이고, 어떤 건물을 짓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문제이며,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고민할 공통의 꺼리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모든 기도, 관심, 노력의 꺼리가 되지는 못한다. 

나는 변해야 한다. 내가 설교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도록 깊어져야 한다. 그래야 변하고 싶어도 변하지 못하는 나의 양무리를 선한 길로 인도할 수 있다. 그것이 있고 나서야, 많이 모이고 건물을 짓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말이 이해받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삶이 나누어지고, 우리 인생을 통해 무언가가 만들어진다면, 그제서야 처음부터 어디를 향해 출발했던가를 알게 될 것이다. 아주 작고 사소한 말씨와 행동에서, 그 사람의 신앙과 깊이가 드러날 것이다.

나는 그 어느 날을 위해 목회자의 길을 가고 싶다. 그래서 날마다 기도하는 것은, 내 양무리를 위해 먼저 나를 변화시켜 달라는 간절함이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10-09-19 나를 죽여야 비로소 이긴다!



제일 두려운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경쟁 사회를 살아가며,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에 집착한다. 이기는 자만이 기억되고 인정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기를 방어하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기술들을 습득한다. 이를테면 조리 있게 말하기, 강력한 인상을 풍기기,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등등의 노하우(know-how)는 결국 승리를 위한 戰法(전법)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 대하여는 여전히 무지하다. 고집쟁이에, 어리고, 유치한 자신의 모습을 방치하며 그 분노와 감정에 끌려 다닐 때가 많다. 

한 번의 전투로 전쟁이 결판나는 것이 아니듯이 남을 향한 싸움은 인생의 승패에 있어 지극히 미미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라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면 그의 인생은 이미 실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선연 권찰이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회사에서 속상한 일들을 넋두리 하며 어머니께 위로를 받고자 했는가 보다. 바다 건너의 어머니가 전화 저편에서 말씀하셨다.

"그런 일로 화내지 마라. 화내면 너만 천박해진다!" 

그 위로가 인상적이었는지,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더라. 곁에서 그 말씀을 전해 들으며, 자기와의 오랜 싸움을 이겨낸 老將(노장)의 꿋꿋한 모습이 떠올랐다.

남을 이기기 위하여 동원하는 격한 모습들이 오히려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패배한 초라하고 천박한 品性(품성)의 發出(발출)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흔히 간과한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외적으로 기독교의 핵심이 '사랑'이라면, 내적으로는 '자기부인'이다. 이기심을 죽이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여 승리하고자 하는 집착을 버리고, 그 반대로 자신을 죽여 타인을 사랑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다른 사람을 이기는 과정이 나와의 싸움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승리는 천박한 방법으로도 얻을 수 있지만, 내적이고 신앙적인 승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방식, 곧 그리스도의 모범이 아니고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돌이켜 나를 보자. 다른 사람 바꾸려고 할 시간에, 그의 문제는 모든 이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손에 맡기고, 나의 마음과 인생을 바꾸어 예수님의 모습을 닮도록 노력해 보자.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지 않으며 살고 있다는 것 말이다. 만약 예수님의 모습을 깊이 이해하고 닮아가기를 원한다면, 그 방향을 가리키는 것 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많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와 반대편으로 살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다. 외적 승리의 비결과 영적인 詐欺(사기)의 언어들이 마치 홍수처럼 사람들의 의식을 덮고 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을 덮어, 모두가 십자가의 정신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살아가는 세상, 그런 교회… 바라고 소원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이상일까?

샬롬~

Posted by makario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