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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길로 가지 마라!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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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목양칼럼

 

쉬운 길로 가지 마라!

편해지고 싶고 그래서 타협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잘 알기에 마음에 새기고 외치는 소리다. 그러나 그 말의 진의(眞意)가 고통을 무조건 사서 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누군가가 예수님을 흉내 내어 십자가에 스스로를 못 박은 모양이다. 완전한 자살인지, 누군가 협조했는지 아직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모든 정황이 스스로의 결정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불행하게도 교회의 역사에서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되어 왔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자기의 것으로 삼기 위해 몸을 상해(傷害)하고 심지어 스스로 죽기까지 했다.

인간의 본능에는 고통을 숭배하는 마조히즘(masochism)적 경향이 있는가 보다.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고통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향들은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되지 못한다.

예수님은 맹목적인 고통이 아니라, 희망을 위한 과정으로서의 고통을 받아들이도록 말씀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소망을 위한 인내’이다. 만약 소망이 없다면 인내는 무의미해진다. 이것은 성경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는 사실이다.

고통을 통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고통 자체가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고통은 삶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고통이 은혜의 통로가 되려면, 그 안에 소망이 역사해야 한다. 고통을 이기는 소망의 힘, 그것이 바로 신앙의 비밀이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셨던 선물이다.

쉬운 길로 가지 마라.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쉬운 길로 가라.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누리고, 삶을 긍정하는 것은 신앙의 반대가 아니다. 다만 행복과 쾌락이 소망의 가치를 훼손하여서 마땅히 치러야 하는 대가(代價)마저 회피하려고 할 때, 그 때만은 쉬운 길을 버리고 좁은 길을 선택해야 영혼이 사는 것이다. 그 선택에서조차 자기의 편안함을 위해 쉬운 길을 선택할 때에, 신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존엄이 무너지는 것이다.

나는 의지가 약하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으니, 인간이란 계속해서 노력하는 과정에서 아름답게 되더라. 완전하고 강해야만 감동적인 것이 아니라, 약하더라도 자기를 변화시키려고 계속 노력할 때에 그 진심(盡心)에서 다른 사람들을, 그리고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힘이 나오는 것 같다.

일부러 고통을 즐길 필요는 없다. 행복할 수 있으면 되도록 행복하게 살아라. 그러나 생각하라.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무엇인지.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이 말이 쉬운 길로 가지 말라는 외침의 속뜻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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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7 목양칼럼



바람이 분다. 거센 바람이 건물마저 흔들고 있다. 그래서 바람도 지진처럼 느껴진다. 햇살과 바람이 번갈아 불어댄다. 종잡을 수 없는 날이다...

나는 내일 아침에 센다이로 간다. 400명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구호물품을 들고 가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물건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일본에 올 때도 그랬다. 내가 불쌍히 여겼던 것은, 재정적인 상황이나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목회자가 없는 것이었다. 문제가 없는 세상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따뜻한 사람 하나 있어서 그 마음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문제라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은 귀한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사랑하고 희생하는 마음은 값지고 소중하다. 나는 일본에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직접 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마음이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이 부족했다. 이번의 지진을 겪으면서 그것을 알게 되었다. 뼈 아팠고, 지금도 많이 아프다. 

상황은 잘 보면서 마음은 보지 못하는 안목이 안타깝다. 지난 5년의 세월을 겪고서도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는 오해들이 슬프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지금의 상황과 나를 향하는 모호한 시선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차겁고 냉정한 그 말들이 아프다. 

센다이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참혹한 현실을 볼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면 아주 오랜 시간 계속해서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사용하신다면, 분명히 내 기도를 통해 무언가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물질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이다. 결국 나는 이 재난으로부터 타인(他人)이 되지 않기 위해서 센다이로 가는 것이다.

동경드림교회는 어떻게 될까? 그런 걱정은 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손해 보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 내가 걱정인 것은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를 포함하여 누구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을 견디지 못하면 믿음의 상은 없다.

어떻게 이게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인 줄 아냐고? 그럼 누가 어떻게 감히 날마다 땅을 흔들리게 할 수 있을까? 현실은 돈 문제인 것 같지만, 원인은 보다 깊은 차원이다. 돈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차원이다. 이것도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장님이 아닐까? 

지금이야말로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말씀에 귀 기울이고 기도해야 하는 시간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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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4 부활절 목양칼럼



아이가 태어났다. 머리숱이 많은 여자아이라고 한다. 

아빠는 송재영, 엄마는 서주은.  두 분 다 서른이 훨씬 넘어 부모가 되었다.

산통을 하다가 결국에는 수술을 했다고 하지만, 다행이도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다고 하니 감사하기만 하다.  

사연 많은 세월이 흘러가는데도,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고 아이는 해맑게 태어난다.

막달에 들어선 산모가 지진을 피해 12층 아파트에서 계단으로 내려왔을 때, 그리고 동경에서 나고야로 피난하고 다시 흔들리는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향할 때, 내심 불안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하지만 생명은 현실보다 강했고, 은혜는 고통보다 컸다.

아직도 매일 땅이 흔들린다. 그 후유증은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세상이 계속 흔들리는 것처럼 불안을 느끼게 한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안심이 되지 않는 현실에서, 몇 달 전의 평화와 안도감은 꿈처럼 희미하게 기억된다.

그래도 살 이유가 생겼다. 아직도 연한 초록 같은 내 자식과, 이 모진 세상이라도 희망을 품고 태어나 준 아이를 위해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그들 손에 물려주기 위해서 안간힘이라도 써보아야 한다.

희망은 파도 저편의 등대처럼 반짝거린다. 보일 때도 있고,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거기 있음을 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절망을 무찌르는 칼날 같은 믿음이다.

하나님은 내게 물으신다. 이제 뭘 어떻게 할꺼냐고? 나는 대답한다. 기다리겠다고. 희망을 믿고 나의 인생을 그래도 사랑하겠다고. 아픈 사람을 다독거리고,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며 아직도 내게 주신 것에 감사하겠다고.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말씀 드린다.

꿈은 죽었다. 높이 오르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은 이미 사형 당했다. 그러나 꿈이 죽은 자리에 새싹이 다시 돋았다. 지금 내곁의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결코 모든 인류를 사랑할 수 없다던 테레사 수녀의 말씀과 같이, 나는 이미 그런 삶에 내 인생을 걸었고, 그 여정에 고생은 있어도 후회는 없다.

이해 받기에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아직 멋지다고 생각한다. 아직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한참 내 인생의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벌써부터 내 인생의 결말이 몹시 궁금하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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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목양칼럼


항상 지혜로운 사람은 내일을 살고, 우매한 사람은 과거를 살아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을 내일의 씨앗으로 삼아 살아가지만, 우매한 사람은 오늘을 어제의 찌꺼기로 낭비하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깨닫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나서야 후회한다면 그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사람의 인생에는 후회가 반복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설사 실수와 같은 경험을 통해서도 점점 지혜로워집니다. 과거에는 그러했지만, 내일은 달라지기 위하여 자기를 돌아보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통하여 점점 더 성숙하고 아름답게 완성되는 삶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과거의 자기를 자랑하는 것을 흔히 봅니다. 그러나 그 과거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오히려 현실은 초라하고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결국 이런 자랑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자기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 꿈을 향해 가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자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만약 그가 말만 하는 허풍쟁이가 아니라면, 이 사람이야말로 미래에 유력한 사람이고, 실력으로 무서운 사람입니다.

자신을 곰곰이 살펴 봅시다. 당신의 생각은 미래를 더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과거를 더 향하고 있습니까? 지금의 현실에서 당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과거의 당신이 아니라 미래의 당신이어야 합니다. 얼마나 고생을 하고, 승리를 얻으며 여기까지 왔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흘려 보내고, 이제 다시 허리 띠를 졸라 매고, 무엇을 향하여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이 생각처럼 길지 않습니다. 시간은 빠르고 능력은 작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뚜렷한 목표를 정하고, 자기의 의지와 능력을 집중하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능숙함이란 단지 그 일을 많이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불필요한 힘을 빼고, 집중할 곳에 힘을 모아서 사용하는 판단력이 관건입니다. 그런 분별력이 없으면 아무리 그 일을 오래 해도 능숙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디를 포기하고, 어디로 그 힘을 가져다가 집중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결국 이 결정의 핵심은, 내가 정말 원하고 되고 싶은 인생이 무엇이냐를 찾는 것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미래의 나’에 대하여 대답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혜의 근본이십니다. 그분의 대답이 가장 정확하고 옳습니다. 그 대답을 듣기까지 기도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붙들어 더 이상 과거의 사람이 되지 말고 미래의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결코 당신은 바른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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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3 목양칼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다고 하여서 보기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선포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바라시는 일이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단지 몇 시간 사이에 재앙이 닥쳤습니다. 평화롭던 오후, 따뜻한 봄볕이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중에, 재앙은 야수(野獸)처럼 덮쳤습니다. 이미 천 명이 넘는 희생자가 확인되고 있고, 아마도 그 수치는 더욱 커질 것이 확실합니다.

어제까지 우리와 함께 이 땅을 밟고 살아가던 그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잃고 목숨까지 잃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잃습니다. 지구상에서 자연재해에 대하여 가장 대비가 잘 되어 있다는 나라에서 이처럼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한 것을 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그토록 경고하고 있었던 바로 그 일이 지금 우리의 목전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안전하다 할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이를 수 있고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짐을 두고서 순식간에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하여 깊이 마음에 새겨 배우기를 원합니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재앙을 딛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재앙이 끝난 것인가를 가늠하기 위하여 조금 더 지켜봐야 하고, 이미 생겨난 불을 꺼야 하며, 무엇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번 기회에 결코 방관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로 전도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손해를 감수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이 재앙을 통해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목숨과 모든 소유의 주권자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 지음을 받았고,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소유권을 주장하고 세상에서 왕이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그분의 나라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이 땅의 것을 버리면 오히려 더 영원한 것을 예수님의 품 안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이 곧 기회입니다. 평상시에는 결코 열 수 없었던 일본의 마음을 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땅의 치유를 위해 구경꾼이 되지 말고 앞으로 나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동경드림교회에 용기와 결단력을 주시기를 구합니다.

마라나타!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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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6 목양칼럼


삶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최선(最善, The best)을 다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의 태도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확장하고 더 가치 있고 탁월한 사람이 되도록 인도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주위를 살펴 보니, ‘최선’이라는 것이 유동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제의 최선과 오늘의 최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성장하고 변하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가 처한 현실도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습관에 안주하기를 잘 합니다. 늘 하던 만큼의 범주 안에서 그것을 자기의 최선이라고 착각하고 더 노력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우리의 가능성을 죽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와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데도 자신을 낮게 평가하고 더 노력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런 자신의 삶을 ‘최선’이라고 힘주어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목회자의 눈으로도 이런 모습이 안타까운데, 하물며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심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원형을 다른 피조물에서 취하지 않으시고 바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원한다면 사람은 평생을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항상 겸손한 태도로 배우려고 하십시오.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 자기의 것으로 삼고자 하십시오. 자기를 어떻게 하면 더 훌륭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갈 수 있을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현실 속에서 그런 생각이 구체적인 행동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삶의 대부분은 습관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습관은 무서운 것입니다. 습관은 어느 정도 타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으려고 저항하며, 언제나 편안 하려고만 하는 욕망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방치하면 사람은 게으르게 되기 쉽습니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물론 쉬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적당한 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를 분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쉬고 싶은 욕구와 무언가를 해야 하는 필요가 서로 충돌할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최선’입니다. 

‘최선’은 할 수 있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좋고 나쁨의 감정과 상관 없이, 내가 가진 현재의 한계를 깨뜨리고 그 너머의 미지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한 번도 그렇게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장은 낯설고 힘겨울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최선’을 경험하고 나면, 비로소 자기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고 기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의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개척해 가는 사람을 프론티어(frontier)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바로 영적 프론티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나는 이런저런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나약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 한계는 깨뜨려지기 위해 있는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 분명히 깨뜨려질 수 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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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7 목양칼럼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 갈수록 꿈은 사라져 간다고 말을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만만하지 않은 세상에 직면하며 자신감은 사라지고 꿈은 시들어 갑니다. 그렇습니다. 평생 가슴속에 꿈을 간직하고 살기에는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래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세상을 건너고 있지만, 나이를 먹어도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간절한 열망으로 피어나는 꿈이 내 가슴에는 있습니다.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연기 피어나는 포기의 순간, 이제는 모든 것이 끝이 났구나 하고 생각을 해도, 다시 가슴 깊은 곳에서 불꽃처럼 일어나 나를 전율하게 하는 꿈이 내게는 있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모순입니다. 말한 것을 다 지키지도 못하고, 자기중심의 허울을 다 벗지도 못했습니다. 나는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합니다. 때로는 희망을 말하면서도 절망하고, 믿음을 외치면서도 불안에 떱니다. 자기를 변명하는 덧칠을 해대기도 하고, 나를 편들어 달라고 엄살을 떨기도 합니다.

그 모든 진실이 새벽마다 뼈아프지만, 나의 실체가 내가 미치고 싶은 꿈과 너무 멀어서 절망하고 또 절망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꿈이 내 가슴에는 있습니다.

나는 교회를 세우고 싶습니다. 실체가 언어로 변해버린 시대에서, 다시 말씀을 실체로 바꾸는 교회를 세우고 싶습니다.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믿음을 통해 진실한 하나의 가족이 되는 교회, 신앙이 소유보다 중요해서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교회, 겸손과 온유함이 자라가는 교회,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는 교회,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교회, 시대를 생각하고 미래를 제시하는 교회, 아이들의 꿈을 소중하게 가꾸고 자라게 하는 교회, 성경에 나오는 신앙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외치는 교회… 바로 이런 교회를 이 땅에 세우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소박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분이 내게 주신 이 꿈이 얼마나 창대하고 버거운 것인가를 실감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꿈이며, 또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꿈입니다. 어쩌면 불가능한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 손이 닿지 않는다고 하여서 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니, 지금 내 손이 닿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갈망하는 몸짓으로 다가가려 합니다.

나는 자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교회를 말로만 외치지 않고, 나의 인생부터 그 든든한 주초가 되게 하기 위해 더 크고, 깊은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상처에서 꽃을 피우고, 역경에서 지혜를 배울 것입니다. 더 낮아지고 가난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해서, 마침내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시는 예수를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이 내게 그런 교회를 보게 한다면, 나는 춤추고 또 울다가 홀연히 그분의 나라로 옮겨갈 것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꿈을 이해하지 못하면 나의 가족도, 친구도 될 수 없습니다. 꿈은 내 생명입니다. 내 마음의 불꽃이며, 나의 이유입니다.

당신에게도 어떤 꿈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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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0 목양칼럼

 

부모의 사랑은 아이들이 더우면 걷어차고, 필요할 때는 언제나 끌어당겨 덮을 수 있는 이불 같은 것이어야 한다. 얼마 전에 별세한 작가 박완서의 고언(古言)이다.

돌이켜보면, 거절과 실망을 넉넉하게 감수하는 사랑은 멀기만 하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는 즉시로 실망감을 드러내거나 상처를 안긴다. 너그러움은 노력해도 쉽게 생겨나지 못하고, 옹졸함은 언제나 마음에 스며들어 나를 놀라게 한다.

언젠가 어머니와 나란히 걸으며 물은 적이 있다. 당시의 나는 아이들의 버릇 없는 행동과 집안에서의 잦은 마찰로 고민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하셨다. 아이들을 너무 어른으로 보지 말라고. 아직 아이이기 때문에 버릇도 없고, 고집도 부리는 것이라고. 참아주고 기다리면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결국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내가 우려했던 것들을 대부분 극복했다.

성장하면서 더 어려운 고민들이 생겨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보다는 자신들이 경험하고 깨달으며 배워나가는 것이 대부분이 아닐까 한다.

부모란 그 성장과정에서 든든한 우군이요, 동행자가 되어주는 역할이 아닐까? 아무리 실수하고 어리석은 짓을 하더라도 항상 같은 자리에서 조용하게 지켜보며 모든 것을 내어주는, 아낌 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나이를 먹어가도, 어머니의 음식은 항상 같은 맛이고, 아버지의 손은 항상 그렇게 따뜻했으면 한다. 그 손이 아이들을 끌어주고, 때로는 어깨를 다독거리며, 모진 세상에 위로가 되고, 쉼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유명하고 유력한 부모 보다는 평생을 따뜻한 부모일 수 있기를 원한다. 걷어차도 결코 떠나지 않는 이불 같은 존재로서 말이다.

목사의 일도 같은 일이지 싶다.

열정적인 모습과 몇 마디의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도 사람의 바탕은 쉽게 감출 수 없다. 결국에는 드러나는 것이 사람의 바탕이다. 그리고 그 바탕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아이가 자라듯이 신앙이 자라는 과정도 세월을 필요로 한다. 그 과정 동안에 믿어주고, 사랑하고, 기다려주는 것이 목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누군가 말하기를, 아이들은 밥이 아니라 부모의 시간을 먹고 자란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소중하다. 자기를 위해 가장 쓰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시간일 것이다. 그런데 자식은 그 부모의 시간을 대부분 차지한다. 그 숭고한 헌신이 없이는,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결코 자라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나는 지금 모험을 하고 있다. 내 아이들과 양떼를 위해. 그렇다고 무엇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자기들 편이라는 것만은 알았으면 좋겠다. 비록 부족하지만, 그래도 항상 사랑하려고,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아버지요, 목사라는 사실만은 알았으면 좋겠다.

그것만 알아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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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3 목양칼럼

 

사람의 심리적 약점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이기심이 아닐까 한다.

이기심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게 한다. 그래서 이기심에 정복당한 사람은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만이 피해자라고 느끼지만, 실상은 옳지 않으며 오히려 가해자인 경우도 있다.

요셉을 이집트에 노예로 팔았던 요셉의 형들도 그러했다. 요셉이 아버지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고자질 한다는 이유가 그들을 흥분시켰다. 그들의 눈에 요셉은 죽어 마땅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에게는 4명의 아내가 있었고, 요셉의 어머니는 요셉과 베냐민만을 출산했다. 결과적으로 요셉이 어린 시절부터 형제들 사이에서 소외를 경험했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특별히 더 신경을 썼을 것이고, 그 특별한 보호가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화(禍)를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요셉의 형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셉은 처음부터 배반자요, 아첨꾼이었다. 요셉으로 인해 그들만이 손해를 보고 있었다. 이런 일방적인 생각이 마침내 살인을 모의하고, 열 명이 힘을 합하여 한 명을 테러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목회자의 입장이 되니, 항상 ‘편들기’의 오해를 경험한다. 물론 사람이 아무리 중심을 잡아도 가끔은 기울고, 공정하지 못하다. 그러나 결코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더구나 때로는 마치 요셉과 같이 특별한 도움이나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사정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할 수도 없다. 결과적으로 오해를 불러올 만한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오해할 만한 경우가 생기더라도, 기본적인 신뢰가 목회자와 신자 사이에 있다면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사람은 이기적이다. 앞에서 말한 요셉의 형들처럼, 자기 입장만 있고 상대의 입장에 대하여는 무지한 경향이 오해를 키우고, 신뢰를 흔든다. 객관적인 사실은 확인도 해보지 않고, 자기 생각의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오해와 상처를 키우는 미련한 양떼들이 현실에는 적지 않게 있는 것이다.

흥분하지 말고 조용히 골방에 앉아 기도해 보라. 내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 대하여 생각하라. 이기심의 비늘을 눈에서 걷어내고, 상대만이 아니라 나도 함께 보려고 노력하라. 

사람은 상대적이다. 뭔가 불편한 것이 있다면 분명히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나에 대하여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기심을 경계해야 한다. 자기 중심적인 경향은 하나님의 은혜를 막아 버린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치고 은혜를 지속적으로 경험하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기독교의 신앙에서 ‘사랑’을 빼면 남는 것은 위선뿐이다. 이기심은 그 위선의 씨앗이다. 가장 중요한 것들 중에서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신앙의 모든 가치 있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항상 조심할 일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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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6 목양칼럼


성경을 알아갈수록 성경에 대한 경외심을 품게 된다.

고대에는 성경과 같은 방대한 저작이 다시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출판이 편리해지면서 성경보다 더 다양한 스토리와 많은 분량을 가진 책들이 넘쳐난다. 그러니 성경이 과거에 비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덜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이 성경을 연구한 역사가 이미 2천 년에 이르고 있다.

때문에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성경은 연구되었다. 고고학에 바탕을 둔 문화?역사적 해석, 다양한 철학의 방법을 동원한 철학적 해석, 그리고 성경을 문학작품으로 다루는 문학적 해석, 심지어 성경에 나타나는 숫자들의 상징성에 대해서까지 이미 다 꼼꼼하게 연구되었다.

더구나 20세기 말에는 본문비평과 같은 방식들이 ‘성경’을 거룩한 하나님의 계시에서 인류의 문화유산 정도로 格下(격하)하고, 아예 아무런 경외심 없이 성경을 난도질 하였다. 결과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편지에서 인간의 책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은 인류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책이다. 자유주의 학자들이 아무리 성경은 허구라고 떠들어도,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엄숙한 고백을 선언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에도 끊이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20년을 넘게 성경을 연구했다. 처음 신학을 시작할 때에는 10년 정도이면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보니, 오히려 나는 바닷가에서 한 바가지에 물을 들고 서 있는 소년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은 바다와 같고, 내가 아는 지식은 한 바가지의 물에 불과하다.

성경은 열려진 책(Opened Book)이다. 그 풍부한 비유와 상징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지혜와 지식을 얻는 만큼 성경은 보이고 드러난다.

우주의 기원과 자연의 법칙과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원리들을 발견하고 성경을 보면, 성경은 이미 그것들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늘 읽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것은 우리가 몰랐기 때문이지, 성경이 엉뚱한 대답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성경을 비과학적이라고 몰아가는 비방이야말로 무지한 폭언(暴言)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편지이다. 그 안에는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이지 엄청난 진리들이 아직도 빛나고 있다. 마치 시시한 가로등 밑에서는 찬란한 별빛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가 이미 다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교만으로 인해 성경이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경드림교회에서 순수과학을 전공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목사로서 그들에게 간절하게 권한다. 성경을 보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살피면, 분명히 인류의 역사에 기여할 탁월한 발견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을 깊은 신비로 인도할 영감과 자극들이 성경 속에는 무수하게 숨겨져 있다…

무엇보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도한다. 이 한 가지 만으로도 성경은 세상에 비할 것이 다시 없는 소중한 보배이다. 성경을 많은 책 중의 하나, 혹은 재미 없고 딱딱한 遺物(유물)로 취급하지 말라. 이 보다 더 바보 같은 짓은 없기 때문이다.

샬롬~


Japanese Version


聖書は深く埋もれた宝だ

2010-02-06-牧羊コラム

 

聖書について知るほど聖書に対する尊敬心を持つようになる。古代に聖書のような莫大な著書は存在しなかった。だが今日に至って出版が便利になり聖書よりもっと多様なストーリーや分量を持った本が溢れている。聖書が過去に比べ人々の視線を集めないのは当然のことだ。その上聖書を研究した歴史がもう二千年に達している。だから人間ができる全ての方法で聖書は研究された。こう工学に背景をおいた文化、歴史的解析、多様な哲学の方法を駆使した哲学的解析、また聖書を文学的作品として扱う文学的解析、そのうえ聖書に表れる数字が持つ象徴性についてまでもう全て細かく研究された。また二十世紀末には本文批評のような方法で「聖書」を聖なる神様の神託から人類の文化遺産程度に格下げし、何の尊敬心もなく聖書を侮辱した。結果的に聖書は神様の手紙から人間の本に転落する受難を受けた。なのにも関わらず、今もまだ聖書は人類に一番影響力を及ぼしている本だ。自由主義学者たちがどんなに聖書は空虚なものと声を上げても、聖書の中で神様を経験したという厳粛な告白を宣言する人々はこの時代にも途絶えていない個人的にも私は今まで二十年ほど聖書を研究した。最初神学を始めるときは十年程度だったら聖書全体を理解できると思っていた。だが今に至ってみると、逆に海辺の前でいっぱいの水を持っている少年のようだと感じる。聖書は海のようで、私の知識はいっぱいの水に過ぎない。

聖書は開かれた本(opened Book)だ。その豊富な比喩よ象徴がそれを可能にする。私たちが知恵や知識を得るほど聖書は見え開かれる。宇宙の起源や自然の法則や物理学、化学、生物学の原理を発見し聖書を見ると、聖書はもうそれらの事を語っている。私たちがいつも読んでも知れなかったのは私たちが知らなかったからであって、聖書が間違った答えをしたからではないということだ。その点で私は、聖書を非科学的だという誹謗こそ無知な暴言だと思う。

聖書は神様の手紙だ。その中で私たちが知ることができないだけであってまだ膨大な真理が光り輝いている。言ってみればつまらない街灯のの下では輝く星の光が消えるように、私たちが全て分かったという傲慢さのせいで聖書がどんどんもっと見えなくなっているのである。東京ドリーム協会で純粋科学を専攻する青年たちがたくさん出ることを願う。そして牧師として彼らに切実に願う。聖書を見て下さい!神様を敬う心で聖書をみてみると、絶対に人類の歴史に残る卓絶した発見をできる。あなたたちを深い神秘に導かれる霊感や刺激たちは聖書には無数に隠されている。

何より聖書は私たちを神様の心に導く。このひとつを持っても聖書はほかの物と比べることのできない重要な宝だ。聖書をたくさんの本の中の一つ、またはつまらなく固い遺物として扱ってはいけない。これより馬鹿な行為はないからだ。

シャロー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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