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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4 평화, 누군가는 해야 한다


누구나 평화를 갈망한다. 

다정하게 손잡고 산책하는 부부관계와 사랑으로 충만한 자녀들, 그리고 직장에서는 신뢰와 선의로 가득한 동료관계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평화가 없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도 가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서 평화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직장이 충분한 보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최선이 없고 덜 위험한 선택, 곧 차악(次惡)이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직장이 좋아서가 아니라 가정보다는 편해서 직장에 남으며, 가끔은 그 직장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술이나 쇼핑과 같은 것으로 푼다.

이런 삶의 방식이 습관처럼 굳어지면, 결국에는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조차 서서히 죽는다.

평화 없는 삶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참 어리석다. 인생은 누구나 한 번 뿐이고, 그렇기에 스스로 소중해야 한다. 

포기해도 되는 것이 있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 필수적인 것들을 포기하려 하고 있다.


평화는 남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한 사람이 평화를 만들 때에, 그것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을 감싸 안는다.

평화는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다. 평화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정과 직장에서 사랑과 보람이 채워지는 것이다. 평화는 한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존엄과 만족을 얻는 상태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가장 이상적인 조건이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주의하라! 평화는 기다려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일해야 한다. 

일하지 않고 평화를 가지려 하는 것은 운동 하지 않고 다이어트 하려는 시도 만큼이나 무모하고 어리석다. 

노동한다(일한다)는 표현은 참 아름답다. 그것은 땀 흘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선한 결과를 계속해서 기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수고의 결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평화는 결코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기 안에 평화를 이루고, 그 다음에 주변의 사람들과 평화하며, 마지막에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목표는 거룩하며 장엄하다.

평화를 깨뜨리는 자신의 문제를 짚어라. 자기를 지속적으로 개혁하라. 지금 평화를 위해 무슨 노동이 필요한지 생각하라. 희생이 없으면 평화도 없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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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7 용서, 위대한 선택



사람이 처음부터 불완전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피조물로 사람을 지으셨고, 그에게 영광을 더하시기 위하여 자유를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라는 값진 선물을 그만 타락하는 일에 사용하고 말았다. 이 선택의 결과로 사람은 죄가 주는 불행과 싸우는 길고 고된 시간을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중심으로 인간의 역사를 보는 관점을 신학에서는 ‘구속사’라고 한다. 

‘구속(救贖)’이라는 것은 죄를 용서하여 구원한다는 의미이니, 결국 구원의 역사는 용서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를 타락에 사용한 사람을 용서하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이처럼 긴 역사의 시간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처절한 희생을 하신 것도 역시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선택이었다.

용서는 아프다. 아픔이 없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용서는 간단하게 되는 법이 없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사랑의 마음을 위협하는 자기 안의 질문들과 싸우지 않고 간단하게 용서하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서를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락을 통해 잃어버린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용서이기 때문이다.

죄가 사람 안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들을 파괴한다. 

죄와 하나님은 결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가 살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죽고, 하나님이 살면 우리 안에 죄가 죽는다. 그래서 죄는 필사적이다. 

특별히 죄는 용서를 파괴한다. 원한을 오래 품고, 더 열렬하게 미워할수록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 힘은 강력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용서하는 마음은, 죄를 무력하게 한다. 

당장은 분노하거나 미워할 수 있어도, 용서하면 그것이 한 사람을 지속적으로 지배하고 망가뜨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용서하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사 마지막으로 하셨던 기도 역시 용서의 중보였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자기를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를 찾아가 용서하시고 다시 제자로 세우셨다.

결국 용서 없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도, 본받을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운명적이다. 거부할 수 없는 선택이다. 용서하지 않을 수 없어 용서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덜 위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스스로 하든지, 타의로 하든지 어렵고 힘든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만 용서하라. 이유를 달지 말고, 그냥 용서하라. 

당신에게 용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대하게 만들고 싶어하신다는 뜻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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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0 탓, 그 자기 함정



사람은 하나님께 창의적인 능력을 부여 받았습니다.

그 능력이 좋은 일에 사용될 때에 사람의 가치는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이기심과 욕망을 위해 발휘되면 사람은 가장 절망적인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더욱 나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는 것에 이 창의성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합리화, 핑계, 변명, 탓 등으로 불려지는 이러한 성향은 불편하게도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두 아들의 모습에서 저를 반성할 때가 많습니다.

두 살 차이의 남자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다 보니, 둘은 대립과 갈등에 놓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둘의 사이가 특별히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침마다 둘이 사이 좋게 학교에 등교하는 모습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불거지면, 둘은 서로를 탓합니다.

언제나 자기의 반성은 없고 상대방이 문제를 유발했다고 고발합니다. 

그러나 더욱 강력하게 고발하면 고발할수록 그것은 본인들의 인상을 나쁘게 합니다. 왜냐하면 고발을 듣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그런 태도들이 아주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반성하고 상대를 덮어주려 한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중재할 수도 있을 터인데, 자기가 옳다고만 하니 얄미운 마음도 듭니다. 

두 아들을 통해 저는, 남의 탓을 하며 자기의 잘못을 변명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주 미련한 태도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모두 부족한 자녀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시지 않고 자비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자기를 반성한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실수들을 관용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 탓, 환경 탓을 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결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이 나쁘게 행동한다고 하여서 은밀한 방식으로 보복하는 것, 혹은 똑같은 방법으로 응대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모습이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가인의 얼굴인 것입니다.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도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미움과 분노를 정당하게 해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람은 설득하여 자기의 편을 삼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결코 이런 사람의 편이 되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작은 잘못에도 회개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안아 주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정의 보다 큰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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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3 우리에겐 과거의 분별력이 필요하다



러시모어(Rushmore)에서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얼굴을 조각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조각가 지올코브스키(Korezak Ziolkowski)는 한 수우족 추장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것은 자신들에게도 영웅이 있었음을 알아달라는 간략한 편지였다.

타슈카 위트코. 수우족의 말로 미친 말(Crazy Horse)라고 불려졌던 추장.

인디언을 그 땅에서 몰아내는 전쟁이 치열했던 시절, 미국의 제7기병대를 대파하고 존 커스터 장군을 전사하게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체포되었고, 35살의 나이에 비참하게 죽었다.

지올코브스키는 1949년부터 휴대용 착암기를 하나 들고, 러시모어에서 27Km 떨어진 곳에 이 타슈카 위트코의 얼굴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인디언 말살의 역사를 사죄하는 의미로, 미국의 연방정부는 1천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지올코브스키는 거절했다.

오로지 기부금과 관광수입으로 그는 이 외로운 일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1982년, 지올코브스키는 혼자서 750만톤의 돌을 깨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끝은 아니었다. 그의 아내와 10명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일을 이어 받은 것이다.

드디어 1998년, 타슈카 위트코의 얼굴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말을 조각하는 작업이 계속 진행중이다. 높이 171m, 길이 201m로 예정된 타슈카 위트코의 조각상은 완성되기까지 앞으로도 100년이 더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묘하게도 러시모어의 위대한 대통령들을 이 타슈카 위코트가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

마치 오늘날의 미국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기억하라는 듯이.

지올코브스키는 말했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살려면 우리에겐 과거의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픈 과거를 따지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그들은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붙잡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과거를 제대로 기념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미래에도 과거의 실수가 그대로 재현되고, 정말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붙잡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일이 생겨난다.

타슈카 위트코는 증인이다. 미국이 서부개척의 시대에 인권을 짓밟고 유색인종을 차별했던 것, 심지어 말살하려 했던 것에 대하여 엄중하게 항의하는 증인이다.

더불어 앞으로는 결코 어떤 사람과 민족을 향해서도 그런 식으로 하지 말라고,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살인의 역사는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경고이다.

타슈카 위트코를 오늘날에 다시 불러낸 지올코브스키의 삶도 참 감동적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인류는 위대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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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6 또 옥합이 깨어졌다!



한국에서 한 자매에게 전화를 받았다.

맑은샘교회를 담임하던 시절에 결혼준비를 말씀으로 도왔던 자매이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녀는 시댁과 남편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다가 결국에는 이혼했으며 지금은 아들과 둘이 살고 있다. 

싱글맘이 되었지만 그녀는 용감했다. 신앙을 붙들고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며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싸우는 그녀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대견했다. 그 강한 생명력이야말로 모성(母性)이며 신앙(信仰)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번에 다시 나를 놀라게 했다. 중국의 평신도 선교사로 헌신한 것이다. 중국의 청소년 사역에 크게 기역하고 있는 열방학교에 무보수의 간호교사 겸 사무원으로 자원하여 출국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함께 기도하며 헤쳐 나왔기에, 이번에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격려와 기도 외에는 없었다. 파송이 된 이후에는 조금이라도 후원을 시작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우리 사이에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때로는 불행이 축복의 통로가 된다. 편안한 삶은 우리의 열정을 소진시키고, 안주하게 하여서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게 만드는 때가 많다. 

그러나 불행은 살고 싶다는 갈망을 주고, 그 몸부림 속에서 치열하게 살다 보니 이전까지는 알지 못하던 인생의 보배들을 알게도 하고, 얻게도 한다.


한 여인이 자기 인생에 닥친 불행과 싸우기 위해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한다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마치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과 같다. 그녀는 성경에 ‘죄 많은 여인’이라고 기록되었다. 그녀의 인생이 순탄하지 못했음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렇게 힘겨운 인생과 싸워 왔던 여인이기에 그녀는 예수님의 은혜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받을 수 있었다. 

삼 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통째로 붓고 옥합을 깨뜨리는 이 감동적인 헌신은 평범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행동이다. 너무도 외롭게 살아왔기 때문에,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 이토록 절실했던 것이다.

나는 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쓰시기 전에 먼저 상처를 허락하신다는 것을.

그 상처들은 우리를 가난하게 한다. 주님 밖에 없다고 소름 돋는 고백을 하게 한다. 말이 아니라 흐느낌으로 주님과 대화하게 하고, 몸 밖에 드릴 것 없으니 이 몸뚱아리라도 받아달라고 헌신하게 한다.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었을까? 유치원생의 아들을 데리고 중국의 선교사로 헌신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아팠을까? 결국 그녀의 옥합은 눈물을 견디지 못하고 깨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의 쓸데 없는 행동을 나무라고, 핍박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제 주님의 판단이 남았다. 

당신도 그녀가 낭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쓸데 없는 일을 했다고 하시겠습니까?


(눅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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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30 예수님처럼 사람을 사랑하자!


사람이 제일 귀하다. 그래서 결과보다 사람을 중시해야 한다. 설사 조금 부족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사람을 지키고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신자의 당연한 선택이다. 예수님을 주(主)라고 부르면서, 그분이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한 사람의 가치를 훼손하고 조롱한다면, 그것은 모순이고 패역이다.

사람을 지키고 세우기 위해서는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성경은 ‘사람’의 본질을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중요하고 바탕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 현실에서는 망각할 때가 많다.

겉이 멀쩡하다고 멀쩡한 사람이 아니다. 속을 살피고 보아야 한다. 겉으로 건강해 보이는 사람도 속으로는 지독하게 병들고 약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지키고 세운다는 뜻은, 겉이 아니라 속을 이해하고 보살핀다는 뜻이다.

마음에서 근심과 오해가 병이 되지 않도록 하소연을 들어주고, 때로는 아름다운 격려와 적절한 충고를 병행해야 한다. 상처 받지 않고 살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각박하지만, 그 상처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오랜 질병이 되지는 않도록 항상 서로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배려와 헌신은 진실한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매너와 예절의 차원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차원에서 사람을 섬기는 훈련을 쌓아가야 한다.

물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황금을 목적으로 삼는 자는 결코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맘몬(mommon)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지키고 세우는 일에 소용되는 물질은 아까운 것이 결코 아니다. 가난한 부모라도 자식을 교육하는 것에 아끼지 않아야 미래의 희망이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의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절하게 하는 교회야말로 희망이 살아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옵션이 될 수 없다. 다른 모든 것은 취사선택의 대상이 되지만, 사람은 누구라도 섬김과 사역의 대상이며 끝까지 중보 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할 때에, 이미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떠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그런 일들이 흔하다. 겸손이 소심함으로 조롱 당하고, 사람을 종처럼 부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능력 있는 사람처럼 미화(美化)된다. 그래서 육체는 멀쩡해도 마음이 망가지고 병든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은 마음을 고치시는 의사이셨다. 그분을 만나면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회복되었다. 사마리아의 우물가 여인이 그랬고, 삭게오가 그랬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백부장도 그러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섬기는 자신의 행동이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손해를 보실 것을 알면서도 약한 사람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셨다. 그래서 그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인생이 바뀐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나는 지금도 예수님이 같은 일을 하신다고 믿는다. 다만 성령을 통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 다를 뿐이지, 사람을 지키고 세우는 모든 현장에서 예수님은 임재 하신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사람을 향한 사랑에서 변함이 없으시다.

묻고 싶다. 누구를 사랑하는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도 한다. 은혜를 받은 신자라면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 원수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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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랍비가 필요하다!

2010-05-1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랍비’라고 불리셨다. 

이 말은 교사, 혹은 선생이라는 뜻이다. 유대인은 전통 속에서 지혜와 지식을 소중히 하였기 때문에 이 ‘랍비’라는 호칭은 지금까지도 영예로운 이름으로 계속 남아 있다. 그래서 랍비는 아주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이름이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가르침’을 경시하는 풍조가 늘어간다. 아이들은 교사를 존경하지 않는다. 덕분에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비명이 들린다. 수업 시간에 맘대로 구는 아이들도, 교사가 꾸지람이라도 할라치면 핸드폰을 들이대며 동영상 촬영을 하고, 심지어 학교로 경찰을 부른다고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가르침’의 근본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머리로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아는 과정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지식이 머리를 채운다면, 감동은 가슴을 채운다. 그래서 아는 것이 삶을 지배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가르치는 과정에 감동이 없다. 아이들은 성적을 위해 배우고, 자기를 변화시키기 위해 배우지 못한다. 그런 과정에서 단지 결과만을 중시하는 우리의 사회풍토가 아이들에게 가르침의 감동을 말려버린 것이다. 그래서 머리는 가득 차도, 가슴이 텅 비어버린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주일학교라는 소중한 전통을 가져왔다. 

아이에게 마땅히 행할 것을 어려서 가르치면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성경의 권면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소중한 경험을 주고 싶어하는 어버이의 마음이 그 근간이 되지 않았는가 싶다.

동경 드림교회도 그런 마음으로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요즘 주일학교 찬양을 살피니, 랩도 있고, 로봇 춤도 있다. 플래시 애니매이션을 사용한 성경동화도 있고, 주일학교를 꾸미는 재미 있는 내용들도 참 많다. 얼마나 많은 교사들이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수고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요즘의 주일학교가 예전보다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좋은 가르침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멀티미디어에 익숙한 요즘의 아이들에게 구식의 주일학교를 고집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교회가 세상의 방식만 따라 간다면 세상의 문제들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생긴다.

좋은 가르침은 ‘랍비’의 정신에서 나온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셨던 것처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항상 삶으로 좋은 모범을 보이셨던  삶의 나눔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고 믿으셨던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감동을 되찾아 줄 비법이 아닐까?

동경드림교회 교사들에게, 그리고 부모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삶과 믿음을 인도할 ‘랍비’이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진리 속에서 감동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좋은 옷, 좋은 음식보다 더 중요하고 귀하다. 이 사실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자부심을 가지고 함께 걸어갔으면 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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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9 자격 없는 충고



네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라!

이 계명에 대하여 과연 내가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나뿐인 홀어머니를 외롭게 고국(故國)에 남겨두고 일본에 와서 목회를 하고 있는 나는, 이 계명이 늘 마음에 큰 짐이 된다. 

얼마 전에는 갑자기 청천벽력(晴天霹靂)  같은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가 건강검진을 받으시다가 담낭 쪽에 이상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의사는 암이 의심된다며 대학병원에서 정밀진단을 받도록 의뢰했다. 대학병원의 정밀검사라는 것이 오늘 신청하고 내일 받는 것이 아니기에, 어머니는 거의 한 달을 기다리셔야 했다. 그 동안 맘 고생이 얼마나 심하셨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어머니는 유난히도 고통에 대하여 민감하시다. 그럼에도 거의 평생을 심한 만성 두통으로 고생하셨고, 자궁암 수술을 받으셨고, 치과 진료와 관절 등으로 연일 심한 고통을 겪어 오셨다. 그럼에도 한 번도 아들인 내게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셨다.

그런 어머니이시기에 더욱 마음이 쓰인다. 사실 현재의 내가 별로 도움도 드릴 수 없는 형편이고 보니, 어머니뿐 아니라 나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못한다.  

그저 묵묵히 돌아서 어머니는 어머니의 고통에 서럽고, 나는 나의 불효에 서럽다.

지난 목요일 아침, 기다리던 검사결과가 나왔다. 다행히도 암이 아니라고 한다. 

어머니의 목소리에 오랜만에 힘이 넘쳤다. 그간에 참아왔던 힘겨운 마음의 짐을 털어내는 어머니의 안도를 들으며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인생은 유한하다. 흐르는 강물을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인생의 순간들도 그렇게 흐른 뒤에는 돌아오지 않는다. 

만약 내가 인생의 마지막에 서게 된다면, 부자로 살지 못한 것이나, 명예를 얻지 못한 것으로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 날에 내 마음에는 오직 하나의 후회가 남으리라. 

그것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후회… 좋은 아들이고, 좋은 아버지이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좋은 목사로 살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아마도 그런 것들이 짙게 남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해두고 싶다. 남에게 잘하라 말할 자격도 없지만, 그러나 조금 더 노력하자고 권하고 싶다. 부모에게 공경할 수 있는 기회를 소중히 하라. 우리의 세월도 기다려주지 않고, 우리의 부모님도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 대리석 묘비를 세우는 일은 미련한 일이다. 

차라리 지금 기회가 있을 때에 적은 용돈이라도 드리는 것이 지혜이다. 바다 건너 이국 땅에 있지만 좀 더 자주 목소리로 안부를 여쭈고, 되도록 많이 뵙도록 노력하는 것이 귀하다.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항상 건강 하시기를 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점점 쇠약해지고, 늙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너무 많이 기다려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기다리고 싶어도 기다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며, 목숨이기 때문이다.

어버이날이라 더욱 어머니가 그립다. 가슴에 붉은 카네이션 달아 드리고 한 번 업어 드리기라도 하고 싶다. 더는 맘 고생 없이 사셨으면 좋겠다.

이제라도 자식 노릇 좀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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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2 자녀를 위해 부모는 소중하다



어린이 주일이다. 특별히 동경드림교회의 주일학교를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감사하고 기쁘다. 이 작은 시작이 마침내 꿈을 이루어서 정말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일학교로 자라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의 시대는 인간이 가진 것은 많지만 정작 누리는 것은 적다고 생각한다. 

지난 주에는 미국에서 신앙생활 하시는 친척 형님을 뵈었는데, 어린 시절에 이민을 가서 사업을 하며 나름 성공한 분이었다. 이분을 통하여 이민사회의 문제들을 듣고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 대화 중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 우리 가족이 사는 곳도 부유하고 좋은 동네이다. 하지만 과연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행복한지는 모르겠다. 교회에서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어서 교우들에게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집을 좀 작은 것으로 하고, 차를 조금 덜 좋은 것을 타시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만드시는 것이 좋겠다. 이민사회가 돈을 벌다가 자녀들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이 모두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인생도 부분만이 아니라 모든 여정에 하나님의 소중한 행복이 준비되어 있다. 다만 그것을 깨닫고, 누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은 수고롭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과 행복이 주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일이며, 소중한 일이다. 

그런데 요즘의 시대가 이런 행복을 소홀히 한다. 단지 아이들에게 좋은 옷과 좋은 집을 주기 위해서 엄마와 아빠를 빼앗는다. 과연 아이들에게 고급 맨션이나 기름진 음식이 중요할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목회를 하면서 부모와 정이 없는 불행한 자녀들을 종종 보았다. 그들에게 부모라는 말의 의미는 가까운 이웃 보다 못했다. 명절에 어쩔 수 없이 고향에 내려가고, 몇 푼의 용돈을 드린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부모와 자식의 사이는 그저 그렇고 그런 부담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부모와 자식의 사이는 결코 오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껏해야 20년 안쪽의 세월을 통해, 부모와 자식의 사이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시절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면 죽을 때까지 회복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자녀들은 깨어지기 쉬운 유리그릇과 같다. 좀 더 세밀하게 대해야 하고, 더 조심해야 한다. 단지 옷과 집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것을 주기 위하여 노력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아이를 돌보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는 부모가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식이야말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걸고 집중해야 할 중요한 대상이다.

주일학교를 시작한다. 그러나 주일학교는 가정의 보조적인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신앙의 교사는 역시나 부모이다. 부모가 바로 서야 자녀가 산다. 그래서 모든 부모에게 자기의 신앙과 삶을 더 소중히 하라고 말하고 싶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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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5 인생의 문제 속에서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하나의 문제를 넘으면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때문에 문제가 없는 인생을 구한다면 그것은 인생 밖으로 나가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오히려 생각해보니, 문제 또한 인생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록 내가 원하는 현실은 아니지만, 다양한 문제를 겪는 과정을 통해 인생은 늘 새롭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인생 자체가 만만하지 않은 것은, 인생이 숨기고 있는 문제의 날카로움 때문이다.

더러는 문제에 침몰당해 인생 자체의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문제를 잘 이겨내고 극복하는 과정은 인생을 지혜롭게 한다. 처음부터 내면이 강하거나 성숙한 사람은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생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했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인생이 문제의 인생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인생의 문제는 위기이면서 기회인 것이다.

문제는 우선 이겨내야 한다. 문제 앞에 선 사람들은 방법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상 인생에는 무수한 방법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내가 모르는 것이지 없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어떤 선택들은 용기와 희생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소극적 태도가 해결책을 찾는 것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신중하게 생각하고, 단호하게 결정하라. 그리고 쉽게 가려고 하지 말라. 인생 자체가 쉽지 않은데, 쉬운 길이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어려운 길을 선택하되, 충분한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좋다.

문제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실상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문제를 잘 해결하고 극복하더라도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치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 이것은 승리가 아니라 패배가 된다.

사람은 누구나 조급하다. 느린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여서 조급함이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더 조급할 수 있다. 조급함은 행동의 느리고 빠름을 말하는 문제가 아니라, 참아야 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내적 결핍의 문제이다. 결국 성숙한 인격과 신앙으로부터 조급함을 조절하는 능력이 나오는데, 참아야 하는 순간에 참지 못하고 조급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그런 내용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조급한 사람은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 항상 상대적이기 쉬운데, 문제로 인하여 자기가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것이다. 이를테면 두 대를 맞은 대신에 세 대를 때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해결이 아닐뿐더러 받은 상처는 이후에도 고스란히 남아 나의 다음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 문제를 해결하고도 오히려 패배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이 때문이다.

기도와 말씀은 큰 도움이 된다. 간헐적인 관심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지만, 만약 성경을 암송하거나 묵상하는 지속적인 습관을 가진다면, 조급함의 많은 부분이 잠잠하게 된다. 또한 마음을 드리는 깊은 기도생활은 좁아지는 시야를 넓게 하며, 생각의 틀을 새롭게 하는 은혜가 있다.

나는 현실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응답 이전에 경건생활 자체가 인생의 문제를 풀어가는 것에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깨닫는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삶은 문제를 대하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강하게 하기 때문이다.

당장 의도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전혀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열심을 내어 전진할 수 있다면, 인생은 분명히 다른 길을 통해서라도 그 소망으로 인도할 것이다. 실제 문제는, 우리는 조급하여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을 때에, 낙심하고, 그래서 상처를 받고 포기하기에 길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막히는 것이다.

낙심하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하라. 문제를 위해 기도하라. 그러나 단지 문제를 해결하여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문제보다 강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라. 문제를 통해 지혜를 얻도록 기도하라. 문제 속에서도 약해지거나, 병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문제의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자신의 실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을 통해 반성하는 것을 잊지 말라.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성숙이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될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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