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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길로 가지 마라!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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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2 자기다운 마흔은 꽃보다 아름답다



성공과 승리의 이야기가 대개 그렇듯이 모든 그림자는 가려지고 좋은 점들만이 부각된다. 마치 그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갈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처럼.

이 불편한 반쪽 짜리 - 혹은 그 이하의 -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실패와 패배의 경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인생은 외계의 다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인생을 사랑한다. 생명과 삶은 성공과 실패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인생의 대부분은 어떤 결과를 만드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는 표피적인 처세술을 혐오한다. 내 자신의 가치관이 너무 고전적 舊式(구식)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변명 같은 이유를 하나 더 붙인다면, 성공을 위해 살기 보다는, 사는 것 자체를 더 소중하게 여기며 순간순간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일단 자신과 남을 속이는 표피적인 처세술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게 된다. 마음은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입과 행동은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하는 - 이런 모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 현대인들의 일반적인 분열은 결코 건강한 모습이 아니다.

나는 화가 나면 화를 낸다. 외로우면 외롭다고 한다. 슬프면 울고, 우울할 때에는 웃을 꺼리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조금은 천박해 보이는 코미디를 보면서 박장대소를 하는 것도, 삼각 관계의 드라마를 보면서 연민의 눈물을 짓는 것도, 창가에 서서 먼 하늘을 응시하며 머릿속에 시를 읊조려 보는 것도 결국은 나의 모습이다.

사람의 내면은 클래식을 듣는다고, 시를 읽는다고 고차원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코미디를 보면서 웃어 준다고, 가요를 따라 부른다고 천박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내면을 가장 천박하게 하는 것은 '거짓'이다. 좋은 것을 좋지 않다고 하고, 싫은 것을 싫지 않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내면은 언제나 불편하다. 반대로 사람의 내면에 가장 좋은 자양분은 '진실'이다. 솔직함은 실수까지도 사랑스럽게 한다. 

나는 내가 이룬 것들에 대하여 자부심이 있다.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그런 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초라하고, 한심한 존재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나답게 살아왔다. 고민했고, 실수도 많이 했지만,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려고 하기 보다는, 언제나 나의 안에서 깨달아지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향하여 나 다운 보폭으로 걸어왔다. 그래서 삶의 순간마다, 구비마다 추억이 배이고, 따뜻한 감정이 스미는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마흔이 넘은 요즘은 가을에 앞서 외롭다. 나를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이들이 곁에 많지만, 여전히 인생은 혼자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만 한적한 곳으로 숨고 싶고, 말수를 줄이고 싶다. 좋은 책이 고프다. 

이럴 때는 그냥 조금 기다려 주면 된다. 괜찮다. 성공을 향한 의지는 별로 없어도 삶에 대한 애착은 누구보다 강하니까. 조금 기다리면 다시 일어나 가던 길을 재촉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의 인생에 더 이상 반전이 있을까 싶다. 외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내적으로는 쉽게 예상되지 않는다. 나는 나다운 인생의 방식을 찾았고, 그것을 이미 구현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不惑(불혹)의 나이에 知天命(지천명)이라, 자기다운 마흔은 꽃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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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5 젊은이여 꿈을 향해 돌진하라!



愚公移山(우공이산)이라고 했다.

사람에게 우직함이 없으면 큰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끈기와 인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장점이다. 

요즘 기업에서 人才(인재)를 찾을 때에는, 그 기준이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옛날에는 ‘성실함’이 최고의 덕목이었는데, 최근에는 ‘창의성’이 최고의 덕목이 되었다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아예 성실함과 근면성이 순위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조직과 융화하고, 순발력이 있으며, 개인적 능력이 극대화 되어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성실함과 근면함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현대적인 생각인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창의적인 생각이란 허접한 몽상이 아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나름 의미 있는 수준에 이르지 않고서는 창의적인 발상, 그 자체를 가질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 과정을 견디고 통과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실함의 바탕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시련이 없는 인생이 있겠는가? 누구나 苦生(고생)을 한다. 그 과정을 통과하고 꽃을 피우기에 인생의 성공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순발력이 뛰어나고, 자기 능력이 월등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내적인 강함을 가지고 우직하지 못하면 그는 평범한 성공은 거두어도 탁월한 성공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를 하나 선택하라. 무언가를 미치게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중요한 資産(자산)이다. 그 好感(호감)이 보다 성실할 수 있도록 당신을 도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방향과 길을 결정했다면, 일단은 10년을 투자하라. 밥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바로 그 분야에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 남아라. 

그렇게 10년을 치열하게 살아남고, 다시 처음에서 자기의 길을 생각하라. 

남들이 하라고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산을 옮기기 위해서 다시 길을 선택하고 모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결국 최고의 資産(자산)은 ‘돈’이 아니라 ‘경험’이고 ‘안목’이다. 그래서 어떤 분야에서 10년을 일하고도 길이 보이지 않고 경험이 빈약하다면, 그것이야말로 ‘빈곤’이며, ‘실패’인 것이다.

신앙의 젊은이들이여! 

쉬운 길로 가지 말라. 고생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지 말라. 기도하지 않고 결정하지 말라. 

주님을 신뢰하고, 가슴을 펴라. 지금 고생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아직 당신의 이력서는 만들어지는 과정에 불과하다. 더 멀리 보고, 더 우직하게 자기의 길을 가라. 자신감을 가지라. 그게 부족하면 주실 때까지 기도하라. 적어도 세상 앞에 섰을 때에는 움츠린 자신이 아니라 가슴이 쫙~ 펴진 젊은이가 되라.

꿈에 대하여 미련하라. 不狂不及(불광불급)이라고 했다. 미쳐야 미친다. 미친 듯이 자기의 분야에서 10년을 살아남으면 반드시 길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꿈이고 비전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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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9 신앙은 예배당 밖에도 있다



구약과 신약을 얼마나 보았을까? 

읽은 것도 적지 않지만, 연구하여 설교한 것도 적지 않다. 20여 년을 사역자로 살아왔으니 이 일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성경을 많이 보고 많이 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하여 이 말을 꺼내는 것은 아니다.  

공부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은 잡다한 것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핵심을 짚어내고 요점을 간추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난 세월 동안, 항상 성경이 말하는 근본적인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편지이다. 그렇다면 그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또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바른 신앙의 기초이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계명과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열린다. 

고아원을 방문했다. 원장은 아이들을 규칙을 통해 통제한다. 고아들이 말썽을 부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규칙을 고안한다. 이를테면 현관에서 신발 정리를 하지 않으면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이번에는 가정을 방문해 보자. 부모도 똑같이 아이에게 규칙을 가르친다. 그러나 부모의 규칙은 아이를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똑같이 신발정리를 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아이가 하지 않으면 부모가 그 일을 한다.

하나님은 어느 편이실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고아원 원장처럼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율법을 강요하는 분이라고 이해한다. 하나님도 율법의 허점을 아셨다. 율법은 벌칙이 따른다. 그 벌칙은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려주기 위한 장치이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만들지 못한다. 결국 하나님은 율법을 포기하시고 복음을 택하셨다. 이유는 간단하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그 백성을, 자녀들을 통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신자들의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앙생활이 신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십자가를 지고, 눈물과 땀으로 헌신해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성령과 은혜로 충만하면 그 과정조차 기쁨과 찬양 속에서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다.

주일에 여행을 해도 좋다. 어디든 가까운 교회에 가서 예배는 드리면 좋겠다. 

만약 그것도 할 수 없다면 혼자서라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양하는 시간을 만들라. 그럴 정도의 신앙만 있다면 그 사람을 굳이 예배당 안에 가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밖에서라도 오히려 더 큰 은혜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모든 목회자가 가르칠 만한 내용은 아니고, 오해와 논란의 소지도 있다. 그래도 나는 주일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원하신다고 믿는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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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2 행복과 평화는 사람이 결정한다



지난 11일에는 아이들과 함께 우에노에 나갔다. 준혁이가 국립서양미술관에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던 중에 인상파 화가, 모네가 자신의 집 앞에 있는 호수에서 딸들과 뱃놀이를 하던 그림을 보았다. 마침 우에노 호수에도 보트가 있던 것이 생각이 나서 미술관에서 나온 후에 아이들과 함께 보트를 타러 갔다. 준혁이가 노를 젓는 동안,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호수 주변의 사진을 찍었다. 행복했다…

이번 주가 아이들 여름방학의 마지막 주간이었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에는 아이들과 함께 토시마엔에 갔다. 최집사님이 할인권을 주셔서 일일 자유이용권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놀이동산에도 가고 수영장에도 가서 하루를 보냈다. 아이들이 참 좋아했다. 아내가 정성껏 준비해준 도시락과 음료수가 있으니 부족함이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는지, 아이들의 체력과 열정에 놀라울 정도였다. 결국 그 하루가 나에게는 어깨의 화상(火傷)으로 남았다. 햇볕에 익어버린 피부 때문에 지금도 부자유함을 느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과 보낸 하루는 더없이 행복했다. 의젓하게 자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인생의 보람을 느꼈다. 언젠가는 내가 이 날을 추억할 것이고, 아이들 또한 그럴 것이다. 그 추억 속에서 우리는 아마도 많이 행복할 것이다.

행복과 평화는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행복의 이유를 찾고, 평화의 사람은 어디에서나 평화를 만든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조건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 조건들이 모두 마련된다 하더라도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행복과 평화는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그들은 노예의 자리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했다. 그들은 광야에서 절대로 먹을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며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했다. 

온 세상의 물이 바다로 흘러가도 바다를 채우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은 조건과 환경으로 채워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 행복해야 하고, 자기 힘으로 평화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생각해보니 내 자신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참 감사하다. 아이들이 건강한 것이 감사하고, 편안한 교회가 감사하고, 나를 믿고 사랑해주는 양무리가 감사하다. 내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 감사하고, 아직도 내 마음에 꿈이 있는 것이 감사하다.

더 훌륭한 목사가 되고 싶다. 나는 내가 뼛속까지 목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내 마음을 다스려 항상 행복하고 모든 자리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내게는 아직도 변하고 자라야 할 부분들이 있는 것이다.

지금의 동경드림교회가 완전하지는 않다. 오히려 부족한 부분이 많은 교회이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바꾸어 보면, 참 감사한 교회이다. 이것을 깨닫고 섬길 수 있다면, 우리 자신도 좀 더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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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5 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다



큰 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지난 주일, 마쯔리가 한참이었다. 가계들 중에 ‘그라페’를 파는 가계가 눈에 들었다. 일본인이 아니라 외국인 가족이 장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란 눈의 부인은 프랑스 여자 같았는데, 장사를 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 딸로 보이는 찬혁이 또래의 딸아이가 너무 귀여워서 눈길이 갔다. 개구쟁이 어린 아이들이 두 명 더 보였고, 서 너 사람의 어른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두 집이 함께 장사를 하는 것 같았다.

어른들이 장사에 몰입하는 동안,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놀 거리를 찾았다. 

마침 찬혁이와 준혁이도 텐트 뒤에 있었기에 그 아이들에게 ‘호떡’을 주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처음에는 거절하던 아이들이, 얼마 후에는 서로 가까워져서 호떡이 담긴 종이컵을 들고 자기 부모에게로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그러다가 일이 생겼다. 갑자기 어린 아이들의 엄마로 보이는 여인이 다가오더니 대뜸 준혁이를 붙들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분위기가 이상해서 나도 다가갔다. 준혁이는 땅에 앉아 풀만 뜯고 있고 여인은 심각하게 심문을 계속했다.

대충 곁에서 들으니, 어린 아이들이 놀다가 200엔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나무에도 거꾸로 매달리고, 준혁이가 아이들을 손잡아 주기도 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기분 나쁜 것은 그 엄마의 고압적인 태도였다. 마치 준혁이가 어린 아이들의 돈을 챙긴 것이 아니냐는 듯이 따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많이 상했다.

아이들과 그 엄마가 돌아간 후에, 준혁이를 나무랐다. 어찌 되었든 어른이 묻고 말하는데, 자리에 앉아 고개만 들고 대답하는 무례함과  중학교 3학년이나 되었으면서도 억울한 정황에서 별로 해명하지 못하는 어리숙함에 화를 낸 것이다.

결국 준혁이는 그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 엄마도 미안했는지 아이들의 손에 그라페를 보내왔다. 사과의 선물인지 아니면 보냈던 호떡에 대한 답례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선의(善意)로 받고 그만 생각을 접기로 했다.

돌아서 생각하니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혁이 입장에서는 아이들과 놀아주고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것이니 얼마나 억울할까? 어른을 향해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에 대하여 꾸지람을 한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아들을 도둑 취급하는 듯한 느낌에 대한 분노가 섞여 꾸지람이 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집으로 떠난 준혁이가 도착하기도 전에 전화를 했다. 

“준혁아, 아빠가 생각해보니 너무 지나쳤다. 너도 억울한 부분이 있는데, 아빠가 내 아들을 모함하는 느낌에 화가 나서 오히려 너에게 지나치게 한 것 같구나. 미안하다. 앞으로 어른 대할 때는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아빠도 더 조심할테니…”

준혁이는 아빠를 이해해 주었다. 그리고 몇 가지 교훈이 남았다. 

역시나 화내는 것은 의(義)를 이루지 못한다. 선을 행하고도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다. 우리가 억울함을 당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더 많이 속상하시다. 마지막으로, 목사라도 잘못 했으면 아들에게조차 사과하는 것이 옳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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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8 용서하려면 잠시 눈을 돌리자



아무리 훌륭해도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다.

사람의 마음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야말로 도토리 키 재기의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mission)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는 '용서'에 대한 교훈이 많다.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말씀을 하셔서 압박감이 들 정도이다. 그래서 우리, 성경을 계속 묵상하는 사람들에게는 용서의 부담이 노이로제(neurosis)를 일으킬 지도 모른다.

기도와 말씀의 삶은 결국 '용서'라는 필연적 담(wall)을 만나게 한다.

이것을 '담'이라고 적는 이유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이 용서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용서'라는 것은 넓은 마음으로 상대의 잘못과 실수를 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우리 마음은 그렇게 크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비슷한 크기의 그릇 두 개를 들고 하나를 다른 하나에 담으려고 억지를 부리다가 금이 가게 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설픈 용서의 노력을 하다가 절망한다. 용서해야 할 사람을 품지 못할 뿐더러, 옹졸한 자신에 대하여 죄책감이 들고, 영적인 신앙생활도 엉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용서'를 당장의 문제로만 보지 말고, 보다 길게 바라보고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의 책임을 무작정 내일로 미뤄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그릇도 가늠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자신을 몰아대는 것이 훌륭한 답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마음의 성장이 필요하다. 그래서 당장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말고, 점점 나아질 계획을 가지라는 것이다.

나는 용서하기 전에 먼저 잠시 무관심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에 대하여 내가 생각하는 기대를 내려놓고, 민감해진 시선도 내려놓고, 잠시 자신과 그 상대방에게 시간을 좀 주라. 화가 나거나 섭섭한 마음을 가라 앉혀야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라.

그러니 용서하기 위해서 우선은 눈을 돌리라. 연이어 다시 또 용서해야 할 일들이 생겨나게 하지 말라. 용서는 숙제와 같아서 하나도 벅찬 경우에, 둘과 셋으로 늘어나면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그러니 그 사람을 위해서, 또한 나를 위해서 잠시 마음을 준비할 시간을 벌도록 해보라.

이제 조금 차분하게 되었다면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기도하라. 그러면 그 사람뿐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덧붙여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결국에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우리의 운명이다. 

그러니 아무리 밉더라도 대놓고 내색은 하지 말라. 당장 용서하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너 밉다!’고 얼굴에 쓰지는 말라. 

이 충고를 듣지 않는다면 당신은 언젠가 몹시 부끄러울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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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1 만남을 위해 기도하라



만남이 중요하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만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날마다 좋은 만남의 축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1999년. 당시 올림픽 대표 축구팀을 맡았던 허정무 감독은 선수들의 훈련을 위해 명지대 축구부와 연습경기를 가졌다. 그런데 그 경기에서 대표팀 선수 5명을 제치고 골을 넣는 명지대 선수를 발견하게 된다. 허정무 감독은 이후 10경기의 연습경기를 관찰한 후에 감독의 직권으로 그 선수를 대표팀에 차출했다.  그가 박지성이었다. 

박지성은 이후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히딩크 감독을 만났다. 그리고 월드컵 4강의 신화를 도왔다. 그 다음에는 히딩크와 함께 네덜란드 리그에 진출해서 챔피언이 되었고, 거기서 다시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로 자리를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한국과 서로 자웅을 겨루는 일본은 물론, 아시아에서는 그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축구 선수라는 것에 이견이 별로 없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을 중계하면서도 일본의 해설자는 박지성에 대한 부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그의 열정, 노력, 그리고 가능성은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과연 그에게 허정무 감독, 히딩크 감독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오늘이 있을 수 있었을까? 나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맹자(孟子)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나, 한석봉의 어머니가 어둠 속에서 떡을 썰며 한석봉의 학문하는 마음 자세를 다시 가르쳤다는 이야기도 결국은 마찬가지이다. 좋은 부모를 만나는 만남이 있었기에, 그들의 특별한 재능도 새롭게 탄생하고 그처럼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나의 꿈을 이해해 주는 사람과 만나고 싶다. 내가 말하는 신앙, 교회, 인생에 대하여 공감하고 끝까지 같이 걸어줄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기도의 제목이 달리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부족함을 덮어주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도와주며 함께 내 마음의 꿈을 이루어갈 사람이 정말 필요하다. 

사람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아무리 탁월한 사람이라도 ‘같이’ 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오히려 능력이 부족한 사람 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사람은 서로 잘 만나야 하고, 또한 그 만남의 의미를 잘 살려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 안의 가능성이 폭발하게 되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나는 목회자로서, 좋은 만남을 위해 항상 기도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이 기도를 통해, 좋은 사람을 만날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좋은 사람이 되어 누군가의 인생을 가치 있게 하는 만남의 상대가 되도록 준비하라고 말하고 싶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결국 사람은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알아본다. 때문에 내가 그만한 수준의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좋은 만남의 축복을 하나님께 받을 수 없다. 그것이 기도가 필요한 이유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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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5 함께 고생해줘서 고맙습니다


서(猛暑). 그야말로 맹렬한 더위가 왔다.

33~37도를 넘나드는 더위는  하루 종일 냉수와 선풍기를 찾게 만든다. 얼음물을 아무리 먹어도 갈증은 풀리지 않고 몸은 가만히 있어도 기운이 빠진다. 1년 내내 더운 나라에서는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살까?

지난 월요일에 밖에서 일을 좀 했다. 식구들 자전거가 모두 고장이라서 나만 쳐다보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아내의 자전거는 앞 바퀴가 펑크가 났고, 준혁이 자전거는 밸브와 변속기에 이상이 생겼고, 찬혁이 자전거는 체인이 끊어졌다.

찬혁이를 조수로 데리고 자전거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아들은 그늘에 앉아서 손장난만 한다. 어차피 바퀴를 분해하거나 체인을 새로 조립하는 일에는 별로 도울 일이 없었다. 잔심부름을 몇 개 부탁하고 혼자서 땀을 뻘뻘 흘리며 2~3시간을  일했다.

자전거 3대를 모두 고치고 집으로 올라와 샤워를 하고 차가운 냉커피를 한 잔 했더니 살 것 같았다. 아내는 내가 좋아하는 메밀 국수(소바)를 준비했다. 네 식구가 얼음을 넣은 쯔유국물에 곁들여 소바 1킬로(한 쟁반)를 먹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동훈 권찰은 매일을 이렇게 일하겠구나!’ 

(c.f. 전동훈 권찰은 현재 벤츠 일본 본사에서 막내 정비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더위에 고생할 사람이 어디 전동훈 권찰 만일까? 아르바이트 하는 청년들부터, 하루 종일 외근을 주로 하는 최동현 집사님까지… 사실 동경의 여름은 힘들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는 계절이다.

그 노동과 땀 흘림의 대가로 교회가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사실 노동의 현장은 더위나 육체적인 피로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도 작지 않다. 그 모든 것을 무릎 쓰고 살기 위해, 그리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수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두 아실 것이다. 우리들이 흘린 땀과 눈물, 그리고 한숨을 아실 것이다. 

그것과 바꾸어 가족을 부양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아름답고 귀한 일이다.

이 여름에 동경드림교회 식구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눈에는 언제나 여러분이 주인공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키며 살아가는 삶은 하루하루가 전투이고, 모험이다. 그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을 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우리 교회의 재산은 여러분이다. 목회자로서 건강을 잘 돌보기를 부탁한다.

덥다고 입맛을 잃어 대충 먹지 말고, 기운이 날 수 있는 음식 잘 챙겨 먹고, 동전 아끼지 말고 이온음료나 생수 충분히 마셔주고, 무엇보다 아침과 저녁으로 조금씩 운동을 해서 체력을 키워야 한다. 

함께 고생해줘서 고맙다. 길고 ,어렵고, 뼈 있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들어줘서 참 고맙다.  조금씩 좋게 변해줘서 고맙다. 우리 꼭 이 땅에 멋진 교회를 세워 주님께서 춤추시게 해드리자. 그 날을 위해 함께 땀 흘리자.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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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8 아, 왜 나는 변하지 못할까?



장마가 지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시작되는가 보다. 그래도 밤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점점 그 저녁의 경계마저 무너뜨리는 더위가 오고 있다. 

몇 년을 동경에서 지내고 보니, 이제 동경의 여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리 겁은 나지 않는다. 이렇게 시작된 더위가 10월 무렵까지 기성을 부리겠지만, 그래도 시원한 물에 샤워하고 선풍기와 에어컨을 번갈아 사용하며 견디면 또 순식간에 단풍이 들고, 겨울이 올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간다. 아이는 자라고 어른은 늙는다. 그 어쩔 수 없는 순리 앞에서 인생이란 참 작고 단순하다. 월요일부터 주일까지의 쳇바퀴를 돌고 또 돌면 달력이 바뀌고, 한 해가 가고, 세대가 교차한다. 

늙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늙기 때문에 인생의 가치가 빛난다. 

만약 늙지 않고 젊음과 건강을 마지막까지 누리다가 갑자기 죽어야 한다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력이 떨어지고, 주름이 늘고, 머리카락이 하얀 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유한함을 경고 받는다. 그래서 삶의 아름다운 결말을 위해, 마음을 정돈하고 마지막을 준비하는 유익을 얻게 된다.

인생에서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 나이에 합당한 경륜과 지혜를 배워가지 못하는 것이다. 참을성이 늘고, 본질을 보는 심안(心眼)을 가지며,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배려하게 되고, 이해심이 깊어진다면… 나이를 먹고 노인(老人)이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영예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이값’을 못하는 자신을 본다.

조급한 심정과 컨트롤이 되지 않는 분노, 잦은 감정의 기복, 핑계와 변명, 무책임과 게으름, 도전하지도 못하고 포기하는 패배주의, 열등감,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옹졸함, 야비한 웃음, 회피와 도망…

그래서 더위는 이런 인생의 숙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나를 지치게 하는 것은, 이런 나 자신에 대한 변화에서 너무도 지지부진(遲遲不進)한 현실이다.

그리고 나의 설교는 이 현실과의 싸움이다. 

물론 문제를 덮고 적당한 타협으로 살 수도 있다. 적당한 칭찬과 모호한 언어들은 듣기에 편하고 갈등을 일으킬 여지가 적다. 그러나 나는 내가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피하고 싶지 않다. 나의 설교는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나의 현실과 고민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은 거북하기도 하겠지만, 길게 생각하면 이 설교가 나와 나의 사랑하는 양무리들에게 반드시 유익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함께 변하자! 더 미루지 말고, 정직하게 우리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 우리가 정말 싸워야 할 것은 계절의 더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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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1 진심으로 일본을 사랑하는가?



일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가?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인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아마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정리되지 못한 과거사의 앙금이 가슴 한 쪽에 남아있기 때문이겠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미움은 항상 정당한 논리로 자기를 포장하지만 그래도 그 본질은 야만이다. 그 안에는 용서와 평화를 거부하는 호전성과 이유 없는 맹목적 분노가 있다. 

대체적으로 친절한 일본인들 사이에서 살면서도 가끔은 아주 기분 나쁜 경험을 한다. 

그것은 일본인을 우월하게 여기고 같은 아시아의 사람들을 열등하게 여기는 차별의 언행들이다. 조금 다행인 것은, 그래도 그 차별과 모욕이 점점 부끄러운 것으로 각성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해를 향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내가 당하는 차별이 싫기 때문에 나 또한 차별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내 마음에 일본을 향한, 일본인을 향한 차별은 없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지체들이 우리를 이 땅에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선교에 있다고 말한다.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미움을 극복하고 진정한 화해의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를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올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선교사가 되기 전에 먼저 용서와 화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일본이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내가 먹는 일본의 곡식과 열매에 대하여 감사하며, 일본인을 친구와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변화 없이는 복음을 복음으로 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점이 결코 쉽지는 않다…)

우리가 건너야 할 시대의 강은 넓고 깊다. 어려서부터 들었던 일본을 향한 미움과 역사를 배우며 경험했던 분노도 깊지만, 우리가 이 땅에 와서 겪었던 차별과 현실의 부조리 또한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강을 건너 일본의 친구가 되어야 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야 한다. 말로만의 복음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자.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불신과 미신에 취한 이 땅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이 땅에도 교회가 세워지고  구원의 강물이 힘있게 흐르기를 기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하자. 

그 마음을 깨달아 갈 때에, 우리는 미움의 터널에서 나와 평화로운 미래로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을 고향처럼 살아갈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에 하나님의 축복이 꽃피기를 진심으로 축복하자.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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