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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1 문화와 영성



오래 기다렸던 사꾸라가 너무 빨리 진다. 봄을 의심하게 만드는 추운 기온이 계속되더니, 비가 오는 날씨도 많아서 사꾸라가 흐드러지자마자 떨어졌다. 맑은 날, 사꾸라나무 밑에서 꽃을 눈처럼 맞고 싶었는데 기회가 너무 빨리 날아갔다.

봄은 설레임의 계절이다. 포근한 날씨도 그렇지만, 사방에서 뿜어대는 꽃의 열기도 그렇고, 꽃만큼이나 예쁜 새싹과 아장거리는 동물들과 화려한 여인들의 복장이 그러하다. 귀에 좋은 음악 하나 꽂고 길을 걸으면 한참을 걸어도 지루하거나 피곤하지 않다. 계절에 따라서 이렇게 거리가 달라지고 사람들이 달라지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음악 얘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해볼까?

중학교 시절에는 발라드 팝송을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에는 하드락과 헤비메탈을 들었다. 교회에서는 뉴에이지운동에 대한 경계를 더하고 있었지만, 그 시절에 들었던 메타리카, 할로윈의 음악은 너무 강렬해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듣다가 스무 살 시절에는 다시 재즈와 국악을 들었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며, 나의 음악도 변했다. 요즘은 연주음악을 주로 듣는다. 클래식이나 재즈, 혹은 국악을 듣는데, 언제부터인가 가사를 듣는 것이 부담스러워져서, 그냥 무의식의 저편으로 음악을 흘려 보내며 긴장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음악이 좋아졌다.


나는 문화란 공기와 같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산소를 필요로 하지만, 산소만으로 호흡하지 않는 것처럼 문화란 좋은 것만의 집합이 아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위험의 요소들이 내재한다. 하지만 그것을 취사선택하고 조절하는 과정을 통해 문화는 개인화 된다.

특별히 음악이 그러하다. 뉴에이지 음악이 영성을 흐린다고 하지만, 나는 가끔은 조지 윈스턴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들으면서 성경을 읽는다. 퀸의 바이씨클(bicycle)은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에 애청하는 음악이고, 클래식 꿀벌의 비행도 그러하다. 비 오는 날에는 진한 커피와 재즈가 좋고, 우울한 기분일 때는 할로윈의 어 테일 뎃 워즌트 라잇이나 킹 크림슨의 에퍼타프를 듣기도 한다.


물론 찬양은 내 신앙과 삶의 일부이다. 그렇지만 찬양을 들으면 영성이 깊어지고, 다른 음악을 들으면 영성이 흐려진다는 견해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한 곡의 노래를 통해 흐려지고, 맑아질 영성이라면 그 깊이가 너무 빈약하다는 뜻은 아닐까?

드라마와 영화를 즐기고, 스포츠를 즐기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마음은 ‘정죄’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언제나 ‘자유’를 말씀하신다. 안식일의 수많은 규례에 얽매였던 유대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얼마나 자유로우셨는가? 전통적 유대인의 눈에 예수님의 모든 행동이 규범을 벗어나는 신성모독으로 보였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일생을 사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언가를 1시간 하면 괜찮고, 3시간 하면 죄라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먼저 그 나라를 구하며 살고 있다면, 우리가 어떤 환경에 놓이더라도 결코 우리의 영성과 신앙의 빛은 흐려지지 않을 것이다.


문화를 문화로 받아들이고 사용하라. 단지 도구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음악이나 다른 예술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우리 마음에서 나오고, 마음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진다. 

그러니 차라리 하루의 삶에 말씀을 묵상하며 그분과 동행하려는 노력을 더하는 것이, 경계와 두려움으로 문화적 편식을 시도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나으리라.

뱀은 이슬을 먹고도 독을 만들고, 꿀벌은 쓰레기를 헤매고도 꿀을 만든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디에서나 주님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삶은 예수님의 것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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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4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창세기의 26장에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창 26:17,18)


아브라함과 이삭의 나이 차이가 100살이다. 지독한 세대차이를 예감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삭은 아버지의 방식들을 이해하고 순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아들은 아버지와 다르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나이가 먹을수록 점점 아버지와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아들들의 운명이다. 그것이 유전자 속에 들어 있는 기질 때문이든,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섭리이든, 피하기 힘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삭은 현명했다. 그는 아버지가 이루었던 업적을 부정하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시작하는 법을 알았다. 그는 아버지가 지었던 이름으로 우물들을 부르며, 아버지를 존중하고 또한 깊은 그리움으로 기념했다.

특별히 이삭은 신앙적으로 더욱 그러했다. 아버지의 신앙을 고리타분하고 구식의 신앙이라고 매도하지 않았다. 그것을 사랑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다시 이삭의 하나님이 되셨던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찬송가 이외의 ‘복음성가’가 200 여 곡에 불과했다. 그리고 신앙과 관련된 책도 많지 않아서, 대표적인 기독교 서적이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 정도였다. 

그렇지만 신앙의 갈망은 깊고 순수했다.

고난주간마다 금식을 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사실이 죄송하고 슬퍼서 일주일 내내 우울한 표정으로 살았다. 그리고 잘 생각나지도 않는 죄들을 회개하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쓰며 가슴을 쳤다.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십자가와 부활에 관련된 구절에는 빨간 볼펜과 색연필이 빼곡하게 밑줄 그어졌다. 요절을 암송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살고, 부활절 예배에서 성찬을 받을 때에는 예외 없이 흐느꼈다. 예수님을 위해 살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불편하던 예배당의 추억이 가고, 극장식의 화려한 예배당들이 세워졌다. 가요보다 더 음악적인 찬양들이 만들어지고, 이제 복음은 산업화되고 있다. 매주 새로운 신앙의 길을 인도하는 서적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인터넷은 지구상의 모든 설교를 안방까지 배달한다.

그러나 고난주간이 허전하다. 그 시절만큼 절실한 무엇이 없다. 기도에서도, 예배에서도 흐느끼는 사람을 찾기 힘들고, 있다면 너무 유별나게 보여서 눈총을 받을 지경이다. 그래서 더 이상 십자가를 아파하는 사람도, 부활절 성찬 앞에서 맹세하는 젊은이도 보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그 시절이 그립다. 세월을 거슬러 싸워볼 수 있다면, 이삭처럼 우물이라도 파고 싶은 심정이다. 과거와 단절된 신앙이 아니라, 과거의 은혜를 이어가는 내 어린 시절의 신앙을 이 동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양(量)과 포장으로 승부하는 신앙이 아니라, 깊이와 진심으로 담아내는 신앙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내 할머니와 어머니의 하나님이, 이곳 동경에서 내 아이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다른 소원이 없겠다.

그것이 내가 그토록 절실하게 주일학교를 시작하는 이유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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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8 도움의 기술 (The Art of Help)



선한 뜻(善意)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 중에 하나이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남을 돕는 것은 우리 삶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방법에 서툴러서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가진 선한 뜻과는 다른 결과를 만들 때도 많다.

예를 들면, 도움을 통해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다. 심지어 모멸감을 느끼게 하거나 미움이 생겨나게 만들기도 한다.

 

젊은 시절, 가난한 전도사로 생활하며 교인들의 사랑과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루는 교회에서 가까운 집사님이 보따리를 주셨다. 우리 아이들보다 좀 더 큰 형제가 있는 집이었는데, 덕분에 아이들에게 작아진 옷을 챙겨서 주신 것이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서 보따리를 아내에게 전했다.

그런데 그 옷을 살피던 아내가 화를 냈다. 열 개는 넘는 옷이 들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태반이 너무 상하거나 낡아서 도저히 아이들에게 입힐 수 없는 옷이었기 때문이다.

아내를 더욱 맘 상하게 한 것은, 그 집사님이 결코 자기의 아이들에게는 아무 것이나 입히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기의 아이들에게는 최상의 것을 주면서, 가난한 전도사의 아이들에게는 너무도 남루한 옷을 물려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도 선의(善意)는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시절, 매달 생활비를 걱정하고 아이들에게 맘껏 해주지 못해 미안해 하던 젊은 아빠와 엄마의 입장에서는, 그 선의를 헤아리기 이전에 너무도 맘이 상하고 속상한 보따리였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예민하고 약하다.

특별히 그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라면, 십중팔구 그 마음도 아주 예민해져 있을 것이다. 때문에 아주 작은 소홀함에도 깊은 상처를 남기거나 오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도울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마 6:3) 그 은밀함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한 방법이지만, 동시에 구제를 받는 사람을 배려하는 가장 아름다운 기술이다.

 

가난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는, 현실적인 도움보다 먼저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야 한다. 그런 마음이 공감(共感)되지 못하면 도움도 순수하게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해서, 누군가를 도우려면 상대의 입장과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무턱대고, 내가 도우려고 했는데 왜 내 마음도 몰라주냐고 말하기 보다는, 과연 내가 도움을 주는 입장이라고 하여서 상대방을 너무 쉽게 내려보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한다.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진실한 도움은 오직 사랑에서만 나온다. 그리고 사랑은 절묘한 기술이 필요하다.

도움을 주면서도 상대를 존중하고 세우는 길은 없는가?

그것이 우리가 함께 고민할 문제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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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1 하나님은 한국인을 사랑하신다


2010년 2월20일, 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었던 밴쿠버.

바이애슬론 여자부 12.5㎞ 집단출발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주인공은 독일의 시모네 하우스발트(31)였다. 그녀는 다음날에 있었던 시상식에서 시상대에 오르기 전에 메달의 세리머니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서양인들에게는 아주 이상한 장면이었다.

시상식 후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의 세리머니를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내 안에 또 다른 나’는 도대체 또 무엇일까?

그녀의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간호사로 독일에 이민을 가서 독일인 남편과 결혼하여 그녀를 낳았다. 결국 그녀가 말한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바로 그녀 안에 흐르고 있는 한국인의 피를 말한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 유계순씨는 시모네가 한국을 아주 좋아한다고 했다.

동계올림픽 기간 동안 선수촌 식당에서는 한국김치가 제공되었다. 시모네는 독일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엄마, 나 매일 김치 먹어!”라고 자랑을 했다고 한다. 또한 어려서 배우지 못했던 한국말을 배우기 위하여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고도 한다.

우리 애국가에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가사가 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그냥 불러 왔지만, 이제 생각하면 의미가 깊다.

우리나라 이름의 요체가 되는 한(韓)은 가죽 위(韋)를 뜻으로 하는 글자이다. 이는 가죽이 무언가를 둘러 싸는 것을 그 의미로 담아 크게 아우른다는 뜻이 있다.

땅도 작은 한반도에 그것도 반쪽이 난 나라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어색하다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나라는 그 이름부터가 영토 보다는 국민을 위주로 하며, 그것도 크게 모두를 아울러서 대국(大國)을 이루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과거에 재외동포에 대하여 거의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덕분에 해외로 향한 한국인들은 현지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몸으로 겪어야 했다. 특별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일본의 재일동포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大恨民國)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한국인의 눈물과 피가 흘려지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한국인임을 포기하지 않으며, 그 고향과 동족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살아온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인이다. 고추장과 김치를 항상 먹어 민족성마저 독해져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당해도 결국에는 이겨내고 뿌리를 내린 이후에, 마침내 대한민국을 찾고 눈물로 고향 땅을 적시는 사람들이 바로 한국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대한민국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토록 아름다운 한국인을 세계 어디서나 떳떳하게 끌어안아 주고, 눈물 닦아 주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恨)을 한(韓)으로 승화시키는 일이 우리 시대에 일어나기를 바란다.

모호해지지 말라. 당신은 어디에 살아도 한국 사람이다. 그것을 잊지 말라.

원래부터 우리가 정치와 권력에는 복이 없었다. 탐관오리가 조선시대를 풍미했다면, 부패한 정치인들이 근대사를 점령했다. 독재자의 폭주(暴走)로 시민들이 학살되고, 자본가의 욕망과 싸우기 위해 노동자들은 분신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 그런 것은 한국땅의 역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쓰러지지 않았다. 한국인은 싸우고 또 싸우며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왔다. 그리고 그 행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믿는다.

광야가 위대한 인간을 낳는 것처럼, 한국인은 한국의 근대사가 주는 파란만장(波瀾萬丈)한 풍파 속에서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향하여 뭔가 큰 일을 행하시기 위하여 이 조그만 ‘한국인’을 준비하시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아우르는 사람이 필요하다.

아우른다는 것은, 타인이 자기와 다름을 인정하며, 동시에 그것을 자기의 색깔 안으로 융합해서 재탄생 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나의 것을 무작정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통해 선택하게 하는 문화적 역량이다.

당신의 피 안에 그런 창조성이 분명히 흐르고 있다. 그것을 인정하라.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다운 길을 새롭게 찾으라. 남이 다 가는 길로 가려고 하지 말고, 한국인으로서 당신만이 걸어갈 수 있는 새로운 길에 도전하라.

그 안에 민족적 자긍심과 더불어 하나님의 비전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하나님은 한국인을 사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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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4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배가 부르면 사람은 타성(惰性)에 젖는다.

그래서 뭔가 갈망하는 마음을 ‘Hungry Spirit’ (헝그리 정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핍을 통해 오히려 의지를 강하게 한다는 것은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 특징이다.

동물도 도전하여 서열과 영역에 대한 싸움을 하지만, 일단 승부가 갈리면 복종한다.

반면에 인간은 납득하기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물론 포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독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역사는 발전하고 사회는 문명화 되어 왔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빛을 만드는 요인은 역설적으로 어둠이다.

독재가 있기에 민주주의가 꽃피고, 가난이 있기에 근면함과 도전정신이 일어나며, 불의가 있기에 정의가 빛난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약점을 강점으로 여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둠을 주셨다면, 그것은 빛을 주시기 위함이다.

문제는 언제나 성장의 기회이다.

부모의 가난은 빨리 독립하여 스스로 서라는 계시다. 진로의 장애는 더욱 의지를 굳세게 하고 기도하라는 뜻이다. 건강의 약함은 운동하라는 권면이다. 고독은 주님과의 더욱 친밀한 교제로의 부르심이다. 실패는 더 큰 성공을 위한 준비이다.

배신은 사람의 진심을 분별하는 지혜를 배우게 한다. 추락은 높아졌을 때에도 겸손하도록 만든다. 상처는 상처 받은 자들을 이해하게 한다. 억울함은 인내를 알게 한다.

그래서 인생(人生)에서는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넘어진 이후에도 배우는 것이 없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를 개혁하고 진리를 향하여 도전할 수 있다면, 많은 결핍이 오히려 위대함의 자산이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보라.

그분은 말구유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다.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권력의 변두리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2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분을 나의 구주로 고백한다.

그분을 닮고 싶다고 기도하고, 그분의 길을 나도 가겠다고 찬양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무엇을 닮겠다는 것인가?

유창한 외국어 실력, 학벌, 경제적 능력, 교양, 원만한 인간관계, 박학한 지식, 쇼맨십… 이런 것은 그분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분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셨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결핍에도 자기를 연민(憐憫)으로 보지 않으셨다.

결핍을 오히려 더 풍성한 은혜와 믿음의 기회로 대하셨다. 죽음 앞에서도 포기를 모르셨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셨다. 삶의 한 자락도 소홀하게 흘리지 않으셨다.

예수님을 묵상하고 배우라. 절박한 심정으로 날마다 그렇게 살아라.

이 보다 더 좋은 인생의 방법은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며, 위대함으로 인도한다. 그분을 통해 배우면 우리는 스스로 가장 행복할 뿐 아니라, 모두에게 가장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비밀이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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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7 타성을 경계하라


타성(惰性)에 젖어가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휴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서서히 젖어가는 타성은 목표를 흐리고 의지를 무력하게 한다.

이런 타성의 과정이 시작되면, 모든 것은 생기를 잃는다.

심지어 잘 하던 일들까지도 예전과 달리 김 빠진 탄산음료 같은 느낌이 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지만, 표면적으로는 똑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본인에게 일어난 변화를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손에 힘이 빠져서 전혀 다른 결과들이 만들어지고, 최근에는 자신을 통해 긍정과 발전의 열매가 전혀 맺혀지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기까지 타성은 우리의 생각을 마비시킨다.

타성에 젖어가면서도 전혀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과 아울러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타성에 젖어갈수록 타인에 대하여 비판적이 된다는 것이다.

긍정은 내적인 성품이다.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일수록 타인에 대하여도 긍정적일 확률이 많다.

반대로 자신을 믿지 못하면 타인도 믿지 못한다.

타성은 결국 우리 안에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성적으로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하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그 변질을 알고 있다. 덕분에 자기에 대한 의심이 만들어지고, 그 의심은 왜곡되어 타인에게 투영되는 것이다.

타성은 신앙도 흔든다.

타성은 기존의 방식을 고집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특징이지만, 그 근간은 게으름이다.

그래서 게으를 타(惰)를 쓴다.

그 게으름으로부터 현실에 안주하려는 타성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알거니와 신앙은 항상 새로움을 요구한다.

과거의 은혜를 기념하는 것은 좋지만, 과거의 만나로 오늘 배를 채울 수는 없다.

오늘은 오늘의 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타성에 젖은 사람은 언제나 과거의 것으로 오늘을 살려 한다.

그래서 마치 그의 삶에서 생기가 빠져나가듯, 그의 신앙도 서서히 메마르고 부패한다.

결국 남는 것은, 미라(mirra)이다.

화려한 복색으로 과거의 영광을 추측하게 하지만, 실체는 말라 흉측하게 변해버린 미라를 보는 것처럼 타성에 젖은 사람은 주변을 놀라게 한다.

변명은 필요 없다. 모든 사람은 타성과 싸워야 한다.

이 위험에 처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특별히 신앙인은 더욱 그러하다.

이기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쉽고 편하게 가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매일의 삶과 신앙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최선을 스스로에게 주문하고, 확인하는 과정만이 타성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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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8 목양칼럼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남기신 교훈이 세족식이었다. 그 안에 담긴 겸손과 섬김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묵상할 때마다 여전히 감동적이다.

기독교의 요체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사랑'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의 모호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유행가 가사부터, 연인들의 이별의 이유도 사랑이고, 심지어 인격적이지 못한 교사가 아이들에게 폭행을 가할 때에도 사랑이라는 말로 자신을 포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증거를 요구한다. 마치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처럼, 진정한 사랑이라면 사랑을 진심으로 나타내는 행위가 따라야 한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의 반대편으로 행하는 것은 결국 그가 말하는 사랑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 증명되었다고 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결코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혹은 독생자)을 십자가에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그 사랑을 깨닫고 확인할 때마다 감동받고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족식을 통해 주셨던 것도 바로 그것이다. 교양적인 가르침과 도덕적인 모범만을 찾는다면 우리는 세족식의 껍질만 씹는 격이다. 그런 것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본질은 아니다.

사도요한은 그 밤에 거기 있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사람들, 심지어 가롯 유다의 발까지 정성스럽게 씻어 주시던 날을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물론 그 날의 감동 때문에 그는 평생을 겸손하고, 섬기려 노력했을 것이다. 목회를 하다가 신자들이 거역하고, 배반하는 일을 당하더라도 요한은 그 밤에 자기 앞에 무릎을 꿇으셨던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결코 험해질 수 없었다. 그는 낮아지고 또 낮아지며, 섬기고 또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요한의 삶이 단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교훈이 정당하기 때문에 가능한가?

인간의 부조리는 몰라서가 아니라, 바른 것을 알면서도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에 있지 않던가!

우리는 겸손이 아름다운 미덕이며, 섬김이 감동적이라는 것을 몰라서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겸손과 섬김 속에 담겨 있는 인내와 희생과 자기 부인의 고통을 알기 때문에 그 길로 걸어가기를 망설이는 것이다.

결국 요한에게 이 세족식이 특별했다면, 그것은 다른 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토록 특별하신 이유는, 그분처럼 진심으로 모든 것을 다해 요한을 사랑해준 분이 다시는 없기 때문이다.

 

정의는 아름답다. 하지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희생이 필요하다. 그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라는 위대한 이름의 능력이다. 때문에 사랑이 없으면 정의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바가 바로 그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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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동경드림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함께 부름 받은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직분은 충성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딤전 1:12, 개정)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 살아도, 우리의 본향이 천국이며 언젠가는 그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날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고, 그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감당하는 일은 무엇보다 소중하며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경드림교회가 네리마에 자리한 것도 4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 은혜의 발자취를 걸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동경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과정은 먼 길을 각오하게 합니다.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신앙이 깨어지고 흐트러진 사람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입니다. 목회자를 신뢰하지 못하기에 목양의 거룩한 감화를 받지 못하고, 성경이 아닌 전통과 조직에 묶여진 사람들이 많으며, 지금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과거의 신령한 추억으로만 신앙을 연명하는 불행한 영혼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아직 미숙하고 어리지만, 그래도 역사에 도전해야 합니다.

거룩한 부흥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영혼들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임재를 드러내시며, 타성을 깨뜨리시고, 사람의 모든 철학과 지식을 굴복하게 하시며, 교회를 교회되게 세우시는 역사를 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소망하는 것은, 우리 동경드림교회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 땅에서 시작하는 작은 불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성공과 형통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를 각오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땅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주실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며 불꽃처럼 타올라 어둠을 밝히는 교회를 세우도록 함께 싸우자는 것입니다.

한 아이의 생명을 위해 우리가 함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사 응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아이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인(sign)이며, 증거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그 확신을 품고 나아가 교회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올해 동경드림교회의 목표는 힘 있게 기도하고, 세상에 나아가 증거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출석인원이 50명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청년회와 주일학교를 조직하고, 거룩한 양육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추수할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구경꾼이 아니라,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하는 거절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부흥을 위하여 자기를 헌신할 충성된 종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헌신예배가 바로 그러한 새출발의 시작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0년 2월 21일,

직분자 헌신예배를 앞두고 교회 창가에서

김종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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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4 목양칼럼

 

소명(Calling)은 기독교의 핵심적 사상을 담고 있는 말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세계사 시간에 ‘직업소명설’이라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이슈가 되었던 이 사상은, 직업에 따라 차별을 가하고 신분적 계급으로 삼았던 중세의 사회제도를 뒤흔들어 현대를 낳았다. 산업화를 통해 부를 축적했지만, 귀족으로부터 차별 받아왔던 도시상공인들이 개신교를 중심으로 단결하면서 중세사회는 신분제, 귀족제를 넘어 시민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직업소명설’이란 사람의 직업이 우연히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통해 결정되었다는 사상이다. 결국 그가 대장장이를 하던지, 농부를 하던지, 혹은 장사를 하던지 간에 그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다는 것이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소명에 민감하다. 그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과정을 하나님의 은총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현실(Here and Now)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반대로 현실을 부정하고, 자꾸만 자기가 생각하는 더 좋은 다른 것에 대한 갈망만을 마음에 키운다면 그는 소명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까지도 세신다고. 그 만큼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햇살과 비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래도 믿음의 자녀들을 향한 그분의 마음이 남다르지 않겠는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牧者)가 되신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 의미 없고, 불필요한 과정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라고 노래했다.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시는데, 항상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가로만 길이 이어져야지 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일이 생길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양을 길들이고, 양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한 목자의 프로그램 속에는 ‘음침한 골짜기로 행진하기’와 같은 특별한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소명’을 묵상해야 한다. 왜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나를 부르셨을까? 지금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순종이 어떤 것일까?

그것을 묵상하고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완전하시다. 그리스도인에게 우연은 없다. 우리 인생과 현실에는 소명이 있다. 그것을 알고 사는 사람과 모르고 사는 사람은 천지(天地)차이다. 소명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깨닫게 된다. 소명을 알 때 찬양과 감사가 시작된다. 소명의 사람은 초라할 수 없다. 소명은 순종을 필요로 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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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0 말씀묵상, 놀라운 동행의 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산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결코 예수님 안에 머물 수 없습니다.

성경은 단순한 지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라고 하는 것들도 실상은 ‘묵상’의 다른 방식일 뿐 세상적인 공부와는 의미가 다릅니다. 묵상의 기본은, 나의 알고자 하는 노력과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은혜가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묵상할수록 겸손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영적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공부했지 묵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들이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잘 알고, 역사에 대하여 탁월한 이해를 가졌다 하더라도 이러한 지식은 그들의 내면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결국 그들은 화려한 언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에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가 아니라, 우리의 가슴과 인격 속에 자리해야 합니다. 알고 행하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만도 못합니다.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진리를 찾되,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능력으로서 만나기를 힘쓰십시오. 보여주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진정으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십시오. 그것이 삶의 습관이 되면, 우리는 대부분의 인생에서 안정을 취하고 확실한 목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묵상의 근간이 기도와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묵상을 위한 기도는 갈망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이 마음 속에서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자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마치 그 성경 말씀을 처음 대한 것처럼,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성경을 받아들이면 항상 놀라운 은혜를 받습니다.

성경을 가벼이 대하지 마십시오. 존중하고 경외하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경배하듯이 성경을 향하여 절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렇게 귀한 마음을 가지면 성경이 스스로 자기를 열어 보여줄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스스로 보여주시기까지 아무도 볼 수 없는 책입니다. 표면의 글자가 아니라, 그 안에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성경을 대하는 특별한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여기 있습니다. 생명의 길이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던 생명의 양식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품고, 그것으로 길을 삼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평생 누리는 동경드림교회 모든 가족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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