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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단한 묵상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성품은 좋고 나쁨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성품을 들어 마치 최고의 미덕(美德)인 것처럼 찬양하는 것은 편협한 관점일 때가 많습니다. 성품이 인격 속에서 조화로울 때,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조화가 깨뜨려지면 어떤 것이든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바라고 기대하는 마음은 조화로운 인격 안에서 '소망'이 됩니다. 그러나 절제를 벗어나 지나치게 바라고 기대하는 마음은 '탐심'입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비슷하지만, 둘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습니다.


탐심은 파괴적인 소망입니다. 그것 하나만 이룰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극단적인 선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신 가나안의 풍속 가운데, 어린 아이를 불에 바쳐서 풍요를 빌었던 것과 같은 일이 '소원'을 이유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져버리고, 가족을 희생하고, 심지어 자기를 망치면서도 무언가를 추구합니다. 이것을 '소망'이라고 포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사실은 소망이 아니라 '탐심'입니다.


탐심은 절제를 모릅니다. 절제의 간섭을 허용한다면 당연히 탐심은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열렬하게 타오르고, 이성적인 비판을 회피합니다. 

사람들은 예배당을 짓는 일에, 교인들을 모으는 일에, 선교에, 구제에, 애국에, 봉사에 '탐심'이 끼어들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당연히 그 거룩한 이름들 속에는 '소망'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의외로 인간의 일은 대부분 탐심에 지배를 받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부단한 묵상이 필요합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거울에 자기를 비추며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 아래 있는 이성을 사용하여 신앙과 성품을 늘 순화(純化)하는 것입니다.

이런 묵상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도 눈 먼 장님과 같아서 소망과 탐심이 헷갈리고, 조화롭지 못한 성품의 부조화를 겪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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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목마름은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몸을 만드시고 '사랑'으로 호흡을 불어 넣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 없이 흙일 뿐이고, 흙을 채우는 모든 것에 불구하고도 '사랑'이 없으면 목마른 것이다.


인생의 길을 걷다가 지치고 막연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한 잔의 생수도 다름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건강하다. 사랑 받고 있는 사람에게선 빛이 난다.


그러나 사랑에 굶주린 사람은 영혼이 창백하며 거창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표정부터 남루하다.


사랑을 대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사람의 생명이 하나이듯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자기 실현의 길도 하나이며, 그것은 바로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세계가 지옥이며, 사랑이 충만한 나라가 천국이다.


마음의 무수한 상처를 덮어 새살이 돋게 하는 약도 사랑이며, 삐뚤어지고 망가진 정신을 고쳐 온전하게 하는 힘도 사랑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모든 선물의 총합보다 사랑이 더 크다. 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인생의 작은 일부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자체를 포기하고 자신을 괴물로 만드는 것이다. 


사랑해야 비로소 사람이다. 


사랑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며,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심지어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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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사랑과 하나님 사랑


우리 안에서 자기 사랑을 도려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내 자신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자기 사랑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그 갈등에서 간혹 이기기도 하지만, 자기 사랑의 뿌리가 남겨져 있는 동안에는 항상 신앙이 위기를 겪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관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자기 사랑의 사형입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 자신이 준비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울질 하고 있지는 않은지... 신앙이 행복의 수단으로 전락했다면, 이미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미신일 뿐입니다. 

참된 신앙은 버림을 통해 얻고, 죽음을 통해 부활하며, 비움을 통해 채워지고, 포기를 통해 희망을 만납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을 도려내야 비로소 하나님 사랑이 꽃 피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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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5 목양칼럼 ::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은 늘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는다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먼 곳을 살필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부르기 전에 이미 거기 계시고, 내가 찾기 전에 이미 나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매 순간 되새겨야 합니다. 기쁜 일에는 물론이고 슬픈 일에도 기억해야 합니다. 여유로울 때에도 생각하고, 바쁠 때에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그분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느낌이나 감정과 상관 없이 하나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예배를 빼먹고, 기도를 안하고, 성경을 전혀 읽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곁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분이 나빠지셨다고 자리를 박차고 우리 곁을 떠나시는 분이 아니라, 깨어진 관계를 슬퍼하고, 문제에 대하여 변론하며,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문제 투성이가 되어도, 여전히 하나님은 그런 우리 곁에 늘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 동행은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새로운 시간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 너머에, 우리가 살았던 시간에 대하여 깨끗이 정산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재판의 순간 만큼은, 우리는 따뜻한 하나님이 아니라 냉정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 냉철한 얼굴 속에도 따뜻한 자비를 잊지 않으시겠지만, 적어도 우리 인생에 대하여 대충 넘어가 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은 든든하고, 감사하고, 따뜻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신경 쓰이며, 부담스럽고, 두려운 하나님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맘대로 살지 못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행동과 말을 다하며 사는 사람은 분명 곁에 계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끔은 혼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나중에 어쩌려고 저런 말과 행동을 할까?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하나님의 재판정에 서지 않을 사람처럼 구는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늘 가까이 계십니다.

그것을 잊지 말고 사십시오. 그러면 일요일만이 아니라 모든 인생의 날이 주님의 날이 될 것이며, 예배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직장과 가정에서도 항상 진실한 예배의 삶이 이어질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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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8 목양칼럼 :: 능력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주로 영화 속에 나오는 장면이지만, 현실에서도 일어나 우리들을 아연하게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사고나 사건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도피를 하는 중에 거의 예외 없이 일어난다. 서로 살겠다고 밀치며 뛰다가 누군가 넘어지면 그 몸을 밟고 또 넘어져 결국에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는 것이다. 때로는 ’사고’ 자체보다 그렇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더 나오기도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서울 지하철을 타니 계속해서, 사고와 테러를 당했을 때에  침착하게 안내를 받으며 피난하라는 영상이 나왔다. 사람들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영상이 무의식에 딱지를 만들면,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사고 앞에서 조금은 정신을 차리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게 하여 더 곤란한 피해를 줄이도록  돕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보았다.


인생은 모두 행복을 향해 달린다. 문제는 이 달리기가 화재가 발생한 지하철 역에서 도망 나오는 군중의 그것과 비슷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다. 그러나 그 능력이 우리가 구하는 행복의 관건은 아니다. 인생의 터널 속에서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도 간혹 있겠지만, 대부분은 충분히 행복을 맛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이 충돌한다. 서로 앞을 가로 막는다. 남의 몸을 밟고서라도 내 행복을 찾겠다는 저돌적인 돌진 앞에서 결국에는 자기도 발목이 걸려 넘어지고 만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이 얽히고설켜 종국에는 행복으로 탈출하는 자 보다 불행의 터널에 갇히는 자들이 속출하는 것이다.


탐욕의 불이 붙어버린 세상이라고 지레 절망할 필요는 없다. 또한 누구에게나 한 번 뿐인 인생을 절망으로 낭비해서도 안 될 일이다. 급할 수록 잘 생각해야 한다. 과연 무조건 달리면 나 혼자 이 불행의 세상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내 능력만 믿으면 나만은 구원 받을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그리고 너무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비상구를 안내하는 불을 켜셨다. 그리고 말씀 하신다. 침착하게 안내를 따르면 모두 살 수 있다고. 혼자 살려고 하지 말고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거들어 같이 살도록 하라고. 단순히 구출되는 것이 아니라 영웅이 될 기회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니 더욱 어이 없는 일이다. 2천 년 동안이나 계속되는 안내 방송에도 귀를 막고 여전히 자기의 직감대로 무작정 달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그래서 누군가를 짓밟고 열심히 달리는 것이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역시 인생은 능력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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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1 목양칼럼 :: 공감할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재능 중에서 정말 귀하고 귀한 것 중의 하나가 공감(共感)하는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에도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친구를 만들고 공동체를 이루며 특별한 ‘우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마음으로 똘똘 뭉친 집단은 비록 그 숫자가 적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마음을 이루는 기본이 바로 서로의 감정과 느낌을 공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은, 바로 이 공감의 재능이 점점 옅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친구’라 말하는 사람 사이에도 과연 상대방의 감정과 생각을 읽고 공감해주는 능력이 얼마나 발휘되고 있을지 의문입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심지어 이 공감의 능력이 가족 사이에서도 사라져간다는 것입니다. 

공감이 없는 인간관계는 모래알의 집합과 같습니다. 그것은 함께 있지만 서로 하나되지 못하며 때문에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낳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고 함께 해 줄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마음은 병이 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가 되면 뭐합니까?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해줄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여유를 얻으면 뭐합니까? 함께 놀아줄 사람이 없다면.

그래서 이 세상에는 불행한 부자도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막상 그 가진 것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는 사람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고, 외롭고 고독한 세상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찾아가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 모든 사람들과 마음의 벽을 허물고 공감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 가정, 내 교회에서부터 이런 공감을 나타내고 하나되지 못한다면, 이 거창한 사명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공감의 기본은 잘 듣고 눈여겨 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하여 부주의한 사람은 결코 상대방의 감정을 수용하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감은 어린 아이가 아닌 성숙한 어른의 특성인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울타리를 깨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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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4 목양칼럼 :: 


인생에는 성공과 실패가 교차합니다.

성경에도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 그 미래의 일을 사람에게 숨겨 두셔서 겸손을 배우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지나치게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성공만 생각하는 것은 오만한 태도에서 나오는 그릇된 모습일 수 있습니다. 누구의 인생에나 실패는 있고, 어쩌면 우리는 그 실패를 통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하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실패는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실패를 통해 우리의 맨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시고, 연단하시고, 변화시켜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변화이며, 실력의 성장만이 아니라 우리 전인격의 성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자기의 실체를 낱낱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스스로 나를 안아줄 수 있습니까? 내가 나를 용납하고 안아줄 수 없다면 나 보다 크신 하나님 앞에 어찌 나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용기’는 스스로 자신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성공과 실패를 다 예상할 수 없는 인생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하는 내면의 밑천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나에게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 생각 속에서, ‘나름 괜찮고 멋진 녀석이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이면에는 조용히 ‘용기’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하여 실망이 쌓이고, 의심이 부풀고, 비판의 목소리만 높아져 있다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결코 용기가 나오지 않으며, 나를 설득할 수 없는 사람이 남을 설득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복을 얻을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내면의 거울입니다. 원하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마법의 지팡이가 아니라 자기를 살피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으로 자기를 변화시켜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용기를 잃으면 인생은 표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복을 달라 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 자신을 긍정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돌보십시오.

우리 모두에게는 이것을 위한 진정한 기도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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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8 목양칼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세월은 무시하지 못할 무게로 다가온다.

특별히 청춘이 다하고 중년에 들어서면 더욱 조급한 마음이 들게 되는 것 같다. 조바심을 한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알면서도 그 마음의 조절이 쉽지 않다.

청춘의 특성이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라면, 장년의 특성은 ‘오늘’의 가치를 발견하고 붙잡는 것이 아닐까?

철학자 몽테뉴는 말하기를,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다. 다른 모든 날을 결정해 주는 날이다. 라고 했다. 

어느 개그맨의 말처럼, 인생은 내가 막을 내리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인생에 반전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오늘이 인생 전체를 결정하는 중요함을 가지는 까닭이다.

영화 ‘아메리카 뷰티’에는 비슷한 대사가 등장한다. 오늘은 당신의 남은 인생에서 첫 번째 날이다. (Today is the fir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  

정말 벼락 같은 금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하루라도 젊을 때에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고, 하고 싶은 것을 즐기자고 말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 욕망을 따라 살자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과연 그런 삶이 만족을 줄 수 있을까?  얼마나 먹으면 실컷 먹은 것이요, 얼마나 즐기면 후회하지 않을까… 불행하게도, 욕망은 바닷물과 같아서 먹으면 갈증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갈증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욕망을 따라 살면 반드시 절망에 다다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른 소망이 있다. 하루라도 젊을 때에, 주님을 위하여 더 열심히 살고자 하는 바램이다. 말씀을 공부하는 것도, 선교지에 나가는 일도, 자기를 바꾸는 일도 오늘이어야 한다. 내일 하겠다고 생각하면 결국에는 못하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일은 오늘 같은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내일은 내가 오늘과 같이 여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월을 아끼라 하셨다.(엡5:16) 오늘의 가치를 깨닫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내일은 내일에게 맡겨두고, 오늘에 집중하여 살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오늘을 흘려 보내지 말라는 것이다. 아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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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葬 ]

 

고려장.  늙고 쇠약한 부모를 산속에 버리고 돌아왔다는 모진 자식들의 장례법.
그러나 고려장은 전설로 전해질뿐, 그 실제적 고증이 이루어진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전설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감독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 (楢山節考(유산절고)는 이러한 일본의 고려장을 내용으로 한다.
본래 후카자와 시치로(深澤七郞)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고 하는데, 1982년에 개봉되었고 아직까지도 수작으로 일컬어지는 영화이다.
이 영화 또한 리메이크작품이다. 1958년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惠介) 감독이 같은 이름의 영화를 이미 만들었다. 가부키 양식에 맞춘 추상적인 영화였다고 하는데, 쇼헤이 감독의 작품에는 그 명성이 미치지 못한다.

 

고려장이 사실처럼 민간에 알려진 것은 일제시대의 일이다. 이 또한 조선의 역사를 부끄럽게 하려는 식민지 사관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부끄러움의 역사로 확대재생산된 것이라면, 보다 구체성을 가진 일본의 기로풍습(棄老風習)이 존재했고 그것이 현대에까지 소설과 영화로 확인된다는 사실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일본은 조선을 부끄럽게 만들기 전에, 과연 자신들에 역사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꼈었을까? 아니면 이 또한 돌을 던지는 자의 맹목(盲目)으로 가려졌을까?

 

요즘 사회를 '능력사회'라 부른다. 때문에 젊은이들은 서로 경쟁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경쟁은 좋은 점도 있다.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낼 뿐만 아니라 성취감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의 그늘도 분명하다. 그것은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없으며,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 찍힌다는 사실이다. 이들에 대하여 사회는 패배자, 혹은 루저(looser)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들은 처절하게 열매에서 소외된다.

 

사회적 소외는 분명히 또 다른 고려장이다. 아직 남겨진 가능성의 불꽃을 꺼 버리는 잔혹함이다. 농경사회 속에서 그 잔혹함은 노동력의 일부가 되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부어졌다면, 이제는 젊더라도 상대적으로 실패자의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면 누구나, 연령과 성별과 인종과 민족에 상관 없이 부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정상적일까? 과연 세상은 승자들이 독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만 할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의 밀림과 인간의 사회가 다른 점이 무엇인가? 혹자는 결코 다를 수 없고, 달라서도 안 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적어도 나 같은 목사가 성경이라는 안경을 통해 볼 때에, 이 세상은 극히 부끄러운 세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창조주가 본래 의도한 세상도 아니며,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이루려고 했던 세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숭고하다. 장애를 가진 사람과 장애가 없는 사람의 삶이 다르지 않고, 여자와 남자의 삶이 다르지 않고, 능력이 있는 사람과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삶이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당신의 형상을 부으셨다. 똑똑한 사람은 좀 더 하나님께 가깝고, 부족한 사람은 좀 더 하나님과 멀리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이 만인 평등의 사상이 역사 속에서 꿈틀거려서 차별을 철폐하고 인류를 진보시켜 온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만나는 또 하나의 그릇된 생각, 곧 현대판 고려장은 다시 한 번 성경의 세례를 받아야만 하는 우리 시대의 ‘누룩’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경영자라면, 사람을 잘 선택하여 고용하되 고용된 사람들이 성장의 부속이 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능력이 있는 사람과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차별을 과감히 철폐하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 포도원에 들어온 노동자들에게 평등하게 대우하였던 관대한 농장주의 경영을 시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모든 차별을 다 없애자는 과격한 주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는 복합적이고 고려할 조건들이 많다는 것도 안다. 다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인간의 존엄을 믿고 지키려는 의지를 가질 필요가 있고, 또한 그러한 의지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대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주님의 나라에서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군다고 했다. 이것이 상징은 아닐까? 사자처럼 유능한 사람과 어린 양처럼 무능한 사람이 함께 존엄을 지키고 친구가 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곧 주님의 나라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나라를 결코 우리의 일생에 이룰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만들어 가려고, 그런 세상을 내 현실에 실현하려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고려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고려장은 무슨 이유를 대고, 어떤 합리화의 과정을 거쳐도 여전히 부끄러운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며, 스스로 자신을 황금의 부스러기로,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불행이 우리 시대에 조금이라도 우리를 통해 해소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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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드림교회

2013-06-30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책망할 것이 없으면

본문 : 요한일서 3:18~24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3: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3: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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