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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중, 하시모토, 그리고 여자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에서 사람의 등장은 매우 인상적이다.

지금으로부터 3500 여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내용으로는 대단히 파격적이다. 

고대사회에서도 간혹 모계사회가 있었다고 하지만, 메이저문화는 남성우월적이었고 이것은 창세기 자체에서도 줄곧 드러나는 특성이다.

심지어 예수님 당대에까지 랍비들은 공적 기도문을 통해, 이방인과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라고 남자들에게 가르쳤다. 여자는 깨닫지 못하며, 질투와 탐심이 많고, 아담을 죄로 유혹한 열등한 존재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창세기는 이런 인간의 문화를 배격한다. 단지 이 한 구절을 놓고 보기에도 하나님의 형상은 남자와 여자에게 모두 담겨졌다. 남자와 여자는 '사람'이라는 보통 명사 안에서 평등하다. 그것은 남자들이 손으로 가리고 싶었고 가렸던 성경의 선언이다.


온 나라가 시끄럽다. 한국 대통령이 당선의 첫 걸음으로 미국에 달려갔다. 왜 꼭 그렇게 미국이 처음이 되어야 하는지 개인적으로는 유감스럽다. 마치 명나라의 그늘에 섰던 고려와 청나라의 볼모가 되었던 조선을 보는 것 같다. 미국은 대국이고 우리는 소국이니, 미국에서 인증을 받아야 비로소 한국 대통령이 되는 것인가?

하지만 분단된 현실과 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의 대통령이 가지는 비애쯤으로 생각하고 넘어가자. 뽑는 과정에서야 반대 할 수도 있지만, 일단 선출된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얼굴이고 우리의 자존심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대통령의 미국 순방을 누군가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것도 대통령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낙점한 청와대 대변인에 의해서. 이 사람 이전에 방송에 나와 하는 말을 보면, 과연 이 사람이 청와대 대변인 깜인지 아니면 뒷골목 왈패깜인지 혼돈이 생기더라. 그러나 그것도 넘어가자. 사람 속을 누가 다 알겠는가? 열 가지 단점이 있어도 한 가지 장점을 찾아 사용하는 것도 좋은 윗사람의 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 없다. 이건 왈패도 아니었다. 왈패들도 꺼리고 혐오한다는 협잡꾼이다. 오십이 넘은 남자가 21살 여성에게, 그것도 막강한 권력을 배경으로 성폭력을 행사했다.  그 과정은 심지어 돌아오는 비행기에 마일리지 정립한 것까지 세세히 까발려지는 현실이니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이 인간이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21살 여성을 무능력하고 작은 일을 침소봉대하려는 사람으로 매도했다. 그리고 심지어 자기가 속했던 청와대에 책임을 미루면서까지 자기는 책임감 있고 이성적인 사람인 척을 하려고 했다.

인간아, 인간아... 껍질만 사람의 형상이라고 사람이 아니다. 네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과연 어디다 팔았느냐? 네가 알몸으로 호텔에서 문을 열어줄 때에, 네 권력이 하늘을 가려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하나님은 그 순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일본 오사카 시의 시장인 하시모토는 변호사 출신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패기 있는 주장과 행동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무능력의 늪에 빠진 일본 정치를 구원할 신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사람들은 심지어 그를 차기 총리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직 전국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하지만 일본 정치인 중에서 그 만큼 영향력을 가진 사람도 드물다.

그가 이번에 2차세계대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극단적 발언을 했다. 전쟁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군인들에게는 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위안부 문제를 '필연적인' 전쟁 과정으로 합리화시킨 것이다.

심지어 그는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들이 일본 사창가를 많이 애용해주면 좋겠다는 발언도 했다. 극우의 아이콘이라고는 하지만 그야말로 안하무인이다. 당장 극우적 인사들조차 난감한 표정으로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좋은 정치인을 가지는 복은 없는가보다. 

물론 민족간의 역사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당면한 경제 문제도 중요하다. 그러나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인권에 대한 문제이다. 만약 인권이 세워지지 않으면, 경제가 발전해도 사람이 부속품으로 전락할 것이며, 국가간의 관계가 증진되어도 그것은 상류층을 위한 치장에 지나지 않게 된다.

결국 정치도, 경제도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사람을 어떤 눈으로 보고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그 기초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한가? 외국에서 자랐지만 고국의 대통령이 왔다고 해서 그 도움을 위해 인턴으로 나선 21살의 여성은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그녀는 아마도 정치적 인생의 첫 걸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녀는 치한을 만났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오히려 큰 소리를 치는 이상하고, 비열하고, 최악의 치한을 만났다. 

이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다면, 과연 그는 그 권력을 가지고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아마도 국내에서는 훨씬 많은 21살의 여성들이 그의 희생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기가 막히는 일이다.


차라리 종군 위안부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낫다. 그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위지만, 그래도 부끄러움은 아는 것이다. 부끄러우니까 가리고 지우려고 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위안부가, 성노예가 필연적인 아이템이라니... 그리고 외국 군대에게 자기 나라의 사창가를 애용해 달라니... 이런 사람이 만약 일본의 총리가 된다면, 과연 일본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적어도 여성은 사회적 약자로서 수없이 희생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얽혀 있다. 여자가 희생양이 되는 것이 과연 남자들의 행복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부인이 그렇게 당하는 사회가...


우리는 3500년 전에 성경이 이미 말해준 진리도 아직 수용을 못했다. 그 현실이 참담하다. 그럼에도 아직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계속 떠드는 당사자와 주변인들이 나라를 이끈다고 하는 것이 너무도 유감이다. 정말 말해주고 싶다. 그 입 좀 다물라. 하나도 잘한 일이 없으면서 어떻게 자기가 억울한 사람인 것처럼 너스레를 떠는가?


정치가 희망을 주기는커녕 사고나 안 치면 좋겠다는 생각이 한국과 일본에 모두 만연하다. 

격랑처럼 흘러가는 현실에서 먹고 살기도 힘들고 빠듯한데, 잘 살고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거짓말을 하던 사람들이 결국에는 자기만 아는 협잡꾼에 지나지 않았다는 정체가 밝혀질 때에는 그 배반의 상처는 오래오래 좌절과 무력감으로 남는다.

그래서 넘어갈 일이 아니다. 단호하고 엄중해야 한다. 말에 책임을 지게 만들어야 하고, 다시는 헛소리를 못하게 하든지, 아니면 계속 헛소리를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사람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 기필코 그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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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의 인생

목회/설교 / 2013. 5. 12. 21:41


2013-05-12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시험의 인생

본문 : 마태복음 4:5~7


(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4: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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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간섭들


정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일반적 혹은 이교적 의미를 기독교 안에서 차용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학생 시절, 교회에 나온 한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평생을 절에 다니다가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온 할머니는, 절에 다니던 믿음에 그대로 교회의 옷을 입히려고 하셨습니다. 새벽이면 추운 계절에도 찬물로 목욕을 하고 새벽예배를 나오시고 기도를 밤새워 하시면서 한 가지 말만을 주문처럼 반복하셨습니다. 할머니는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 두려워했고, 모든 고난을 본인이 하나님께 정성을 기울이지 못해 생기는 일이라고 자책했습니다. 

이 할머니는 복음을 믿은 것일까요? 물론 나이들면 사람이 굳어지고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과거의 습관이 어느 정도 지속되고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내적 변화입니다. 의외로 더 나이드신 분들도 기독교 신앙에 제대로 입문(?)하면 표정이 편안해지고 행동과 생각에서 은혜의 꽃이 피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외람되지만, 그 할머니는 교회에 나오기는 했지만 복음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고 회고합니다...


또한, 우리가 성경적으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용이나 신뢰, 혹은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믿음에 대한 정의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비슷하고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의 '믿음'을 그런 안경을 통해 풀이하는 것은 부적당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믿음에 대한 정의와 이해에 있어 성경적인 것을 받아들이려는 결심을 해야 마땅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그대로 가지고 추측을 하면, 성경과 경험 혹은 미신이 짬뽕이 되어서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혼돈에 빠뜨리게 됩니다.

요즘은 강단에서도 인문학의 책을 인용하여, 역으로 그것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매우 부당합니다. 인문학은 성경을 설명하는 참고는 될 수 있어도 성경을 풀이하는 해석자는 될 수 없습니다. 그 한계를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많은 지식이 사람을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을 계량할 수 있나요?


믿음은 성경 속에서 가장 유구한 주제입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믿음은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흐르는 강물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날까지 존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는 믿음과 소망이 언젠가 폐하여진다는 뜻이 아니라, 결국 사랑으로 수렴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가볍지 않은 주제입니다. 다시 말해, 한 마디로 정의 하거나 심플하게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그런 식으로 접근했을 때에 필연적으로 많은 헛점을 가지는 주제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당연히 심플한 것을 좋아합니다. 복잡한 것은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몫이고 자신들은, 아주 적당하고 간결한 진리를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욕구는 자칫 그릇된 확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믿음에 대하여 치명적 오류, 혹은 오해를 평생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일단 한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믿음'을 사람이 계량할 수 있습니까? 이를테면,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을 나누거나 분별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하여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이새의 집을 찾았을 때입니다. 


삼상 16:6~7

(16: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 엘리압을 보고 반하였습니다. 사무엘 같은 선지자가 단지 정말로 외모만 보았을까요? 사무엘은 깊이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Surely)'이라는 말로 드러납니다. 이는 사무엘이 가지고 있는 모든 오감이 엘리압을 통해 만족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외모(the outward appearance)'라고 이해하는 것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라고 언급하셨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여기서 외모라고 해석된 히브리어 '아인'은 본래 '눈(eye)'을 의미합니다.  눈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가장 좋은 지표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때문에 엘리압에 대한 사무엘의 만족은 경솔하거나 가벼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울을 버리는 슬픔과 현실적인 왕을 배반하는 반역의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새로운 왕을 찾아나선 사무엘이 어찌 이 일을 가벼이 여겨 경솔하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찾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무엘의 미스(miss)는 인간의 한계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의 모든 경험과 능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게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의 내적인 심연, 곧 '중심(the heart)'을 보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누구나 그릇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중심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 요소입니다. 그것은 사울과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버림을 받고 다윗은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그릇 안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무언가가 있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믿음' 이외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절대적으로 가치를 인정하시는 것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인격적 결함이나 지식의 부족이나 심리적 트라우마는 모두 하나님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으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창세기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무엘도 믿음은 계량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모든 지식과 경험을 총 동원해도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적 관점에서 '외모'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부여 받은 인간의 내면은 가벼이 엿보고 판단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 내면의 그릇에 담긴 '믿음'이라는 가치 또한 사람의 판단을 벗어나 있습니다. 그걸 확실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령함 속에서 추측은 가능하지만, 그것 또한 사무엘 선지자의 미스(miss)처럼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 흔히 사람들끼리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을 논하고, 판단하고, 칭찬과 비난을 하는 것은 대단히 경솔한 일입니다. 특별히 목회자가 신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알게 하시지 않습니다. 목사가 함부로 사람을 판단해서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 얼마나 흔히 일어납니까? 그리고 그런 판단의 근저에 대부분, 그 사람의 믿음에 대한 경솔한 확신과 판단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런 경험들이 잘못 전달되어, 신자들은 목사가 사람들의 믿음을 계량할 수 있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의 신뢰를 자신의 믿음 좋음의 표지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자기 믿음을 제일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말씀 앞에서) 정말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볼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그 실체를 발견하고 어느 정도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외적인 환경,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나 직분, 혹은 기능적인 업무에 의존하여 '믿음'을 가늠하는 것은 대단히 그릇된 결과를 주게 됩니다. 


(3)

믿음은 정말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한 가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좋은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흔한 구호에 그런 것이 있지요. 큰 믿음을 가져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믿음을 통해 쟁취하라. 등등...

심지어 '믿음'의 한 단면이 하나님과의 씨름이라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씨름은 스포츠가 아니라 전투기술을 뜻합니다.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과 전투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 되는데... 참 곤란한 무대포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 오셨을 때에 제자들은 귀신 들린 한 아이를 앞에 두고 그야말로 씨름(전투)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아이에게 들어 있는 귀신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세대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셨지요. 이 본문은 복음서 저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지요? 바로 마태, 마가, 누가 복음 모두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마 17:17,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막 9:19, 개정)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눅 9:41,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보통 마가의 본문이 가장 처음이고, 마태와 누가의 복음이 그 다음을 따르는 시대적 순서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거의 신약성경의 마지막을 담당합니다.

흥미롭게도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기억했고, 마태와 누가는 그 본문에 '패역'이라는 단어를 삽입했습니다.

기록의 시대적 순서가 그렇다고 해서 마가의 본문만이 원문이고 나머지는 기록자의 부연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자체가 거룩한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함께 짝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 34: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이것이 성경입니다. 때문에 믿음 없음의 한 단면이 패역입니다. 서로 다른 본문이 아니라 서로 보완을 이루는 본문입니다. 

마태와 누가의 본문에서 '패역'은 '디아스트레포'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이미 70인경(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던 유태인의 성경, 당연히 신약은 없다)에서부터 39회나 사용된 전례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것은 타락을 의미하는데, 특별히 인간의 본성이 뒤틀리고 구부러져서 거기로부터 나오는 죄의 행위를 뜻합니다.


귀신 들린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고자 합니다. 선한 일입니다. 그리고 전에도 이런 일을 했던 경험이 제자들에게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을까요?

후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피면, 마태복음에서는 '겨자씨 만한 믿음'을 말씀하시고, 마가복음에서는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사본에 따라서는 '기도와 금식'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마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막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누군가 틀린 것입니까? 아니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의 바른 독법은, 그 다름이 조화와 보완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내적인 내용이라면, 기도(와 금식)는 그 형식입니다. 

결국 제자들의 실패는 믿음의 실패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실패를 마태와 누가는 '패역'이라고 특정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패역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구부리다, 뒤틀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 됩니다. 가위가 있습니다. 날이 서서 아주 잘 자르는 가위입니다. 그런데 충격이 가해져서 뒤틀어졌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겨납니까? 그 날카로운 날이 서로 맞지 않아서 자르지 못하게 됩니다. 본래의 용도, 유용성에서 이탈되는 것입니다. 이게 패역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가치 있는 것을 무가치 하게 만드는 악한 경향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신 32:5, 잠 8:13)

그러니까 선하고 거룩한 일이라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간섭하면 즉시로 매우 통속적이고 저열한 것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본문에는,  이 사건의 직후로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는 변론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9: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해석한다면,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와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 구원하고자 했다기보다 서로 이번 기회를 통해 자기의 능력을 드러내고 입지를 견고하게 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심적 상태가 겉으로 들어나지 않았겠지만, 제자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지 못했고, 귀신은 귀신 같이 제자들의 패역한 상태를 파악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마태복음의 본문에서 '겨자 씨 만한 믿음'을 말씀하실 때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산을 옮긴다'는 거대한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거스려 순수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한 깊은 자성입니다. 

정말 믿음이 있습니까? 그 믿음이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거나,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거나,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는 모든 '패역'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그런 믿음은 겨자 씨 만한 것으로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그 믿음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너무나 가난하지 않습니까?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냐고요? 아니라는 말도, 그렇다는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만약 그것을 이해하고 안다면, 위의 질문은 저절로 풀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논지에서 조금 벗어난 부연입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은혜로 주셨지만, 은혜 받은 자에게는 은혜 받은 자다운 삶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지만, 그 믿음에 부응하는 삶은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패역에 넘어간 현실을 기도(와 금식)의 부재로 진단하셨습니다. 좀 더 넓게 이야기 한다면, 경건을 상실한 믿음은 무력한 말장난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음은 평생에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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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5 목양칼럼


오늘은 주일이고 어린이날입니다.
열 일곱에 들어선 아들이 어린이날이라고 선물을 달랍니다.
뭘 줄까? 물었더니... 웃기만 합니다.
이런 경우 제일 어렵습니다. 알아서 주어야 하는데 이미 다 주어서 더 줄 게 없거든요. 
사실, 아들에게 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줄겁니다. 
그건 굳이 어린이날이 아니라도 상관 없습니다. 사랑하니까요. 
사랑하면 달래서 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지. 그래서 항상, 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하나님께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요즘 기도는 감사를 곱씹고 찬양을 드리고 내 솔직한 심정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를 드립니다. 감정적으로 솔직해지는 것이 쉽지 않네요. 솔직함이라는 것이 자기의 본 바탕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인데, 나 자신의 맘을 나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자리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 맘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나의 처지가 편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사실 요즘처럼 막막한 때도 없습니다. 
일본에 와서 8년에 들어섰는데 교회도, 아이들도, 내 앞길도 아직까지 막막합니다.
그러나 8년 동안 배운 것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다. 내게 부족함이 없다!" 라는 한 가지 깨우침이기 때문에 더이상 이 문제에 빠져 죽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데 항상 최선으로 주시겠지요...

삶의 속도가 분주한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해 주신 것들이 흔하게 지나쳐 사소하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고집만 부립니다. 
하나님 난감하실 겁니다. 이미 다 주었는데, "이게 다예요? 정말 최선을 다하신 겁니까? 이게..." 하고 있으니. 버르장머리 없는 피조물 같으니라구...

삶 자체가 소중하다는 것을 왜 모를까요? 하루 살아있는 이 자체가 정말 감동하고, 감사할 일인 것을. 천하의 부동산보다 하루의 생명이 더 귀하다는 것을. 건물이 아니라 몸이 귀한 것을. 옷보다 기쁨이 귀한 것을. 음식보다 편안한 마음이 귀한 것을. 돈보다 사랑할 사람이 귀한 것을. 언제쯤이면 깨달을까요...

제발 속도를 줄이세요. 그리고 자신과 주변을 향해 눈을 열어 주세요.
함께 사랑하고 격려할 사람들이 저렇게 많습니다. 우리가 감사해야할 이유들이 이렇게 많습니다. 또 귀한 하루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에도 모자른 세월을 분노와 미움으로, 허영과 무관심으로 낭비하지 말자고요.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살자고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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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5일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떡으로만 사는 인생

본문 : 마태복음 4:1~4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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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

목회/목양칼럼 / 2013. 4. 16. 23:18

<충만>

성경이 말하는 '충만'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가르칩니다. 정확하게 그림으로 묘사하면 차고 넘쳐 흐르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의 의미가 정적(靜的)인 것이 아니라 동적(動的)입니다. 계속 공급되고 그래서 계속 흘러넘치는 작용과 반작용의 역동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충만'이라는 말을 성경은 사람에게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그릇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 그릇은 채워짐을 통하여 넘쳐 흐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흘러 넘친 것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드신 후에, 남는 것을 거두어 12바구니를 채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버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마6: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산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화전(火田)을 주로 가꿉니다. 그러나 가끔은 산을 개간하여 논을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 논은 계단식이 됩니다. 그리고 그 가장 높은 논은 반드시 수원(水原)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농부는 일단 가장 높은 곳의 논을 가로막아 물을 채웁니다. 논에 물이 일렁거려 벼를 키울 수 있게 되면, 둑을 열어 다음 논으로 물을 흘려 보냅니다. 그리고 다시 그곳이 채워지면 그 아래 논으로 물이 흘러갑니다...

충만은 낮은 곳을 지향합니다. 충만의 흘러넘침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충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은혜를 부으사 충만하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건강이든, 물질이든, 신앙이든... 자기만 채우려 하는 자에게는 충만의 물줄기가 옮겨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충만한 것을 다른 사람의 충만으로 이어갈 줄 아는 사람에게는 계속 흘러 넘치는 은혜가 부어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입니다.
충만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만한 삶이 계속되도록 관리하는 것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 충만하신 분들이 앞으로도 계속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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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과 일본>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같은 전범국가의 길을 걸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독일과 일본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전후 70년, 그러나 아직도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했던 독일군에 대하여 법정에 세워 죄를 묻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이번에도 새로운 근무명단이 발견되면서, 이 명단의 사람들이 과연 모두 법정에서 죄를 받았는지 검토하고, 아직 세워지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추적하여 그를 법정에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http://j.mp/ZsAoJe

일본은 전범들에 대하여 오히려 애국충렬지사로 둔갑시키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 문제가 그러하고, 역사 교과서를 통하여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범들을 미화하는 작업들이 그러하다.
이런 일들이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못지 않게 비참한 피해를 입었던 주변의 국가들에 어떤 정신적 2차 피해를 주는 것인지 전혀 개의치 못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일본을 강하게 하고,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한다는 점만을 생각하다는 점에서 군국주의 망령은 아직도 이 나라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 하시고 은혜를 주셨다. 그럼에도 성경은 계속해서 '회개'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양보하지 않는다.
이것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구원받은 자에게는 더이상 회개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야말로 하나는 알고 둘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여겨진다.
인간의 '회개'는 어차피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에 있어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죄를 모두 깨닫고 모두 회개할 수 있다는 말인가!
회개는 하나님의 용서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치료와 회복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죄를 깨닫고 그것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죄에 대해 자기를 다스리고 고쳐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가벼이 여기는 자들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거룩도 가벼이 여기고, 심지어 도덕적이지도 못한 '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의 추락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도원에 6개월 들어갔다 오는게 회개가 아니라, 회개는 자기 죄를 정직하게 자백하고 그 책임을 지는 것이다. 안 그렇게 생각하는가?)

누누이 말하거니와, 일본은 부흥하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세계적인 대국이 된 것은 맞는 말이지만, 이들은 아직도 과거의 불행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보라. 평화헌법을 개헌하고 세계분쟁지역에 군대를 파병하는 일이 거론되고 있으며, 핵무기로 무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한 국가의 군사적 자위권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왜 평화헌법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 일본이 과연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경찰의 역할을 감당할 만큼 주변국가의 신뢰를 회복하고 과거를 청산했는지 살펴 본다면... 이 모든 시도들은 격에 맞지 않는 것이며, 오히려 과거 군사대국의 힘을 길러 군국주의를 일으켰던 '망령의 부활'이라는 길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일본은 부자다. 때문에 그 위신을 내세워 '사과합니다'라는 한 마디에도 인색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돌려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런 사과는 주변국가를 감동시키지 못하며, 때문에 과거의 상처는 매년 거듭되는 덧남의 과정을 통해 우리 곁에 다시 살아나 돌아오고 있다. 그래서 일본은 전후 70년이 지다도록 이웃에게 미움을 받고, 멀리 서구와 미국에서 대신 위로를 얻는 '가깝고도 먼 나라'가 되버린 것 같다.
그에 비하여 독일은 매번 총리가 유감과 사과를 반복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전범에 대한 재판을 계속함으로써, 불행의 불씨를 스스로 털어내고 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홀로코스트 같은 반인류적 범죄는 법정에 세워 그 정의를 묻겠다는 독일의 결심은, 일본과는 너무도 대비되는 자세가 아닌가 한다.
나는 두 나라의 태도를 통해, 진정한 반성과 회개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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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혼자말/靑情 / 2013. 4. 14. 01:02



<가로등>



여기가 네 자리다

세우신 곳에서

춥고 외롭고 떨리는 밤을

무수히 맞았어도

어둠은 아직 그대로

바람은 내 곁을 휘돌아만 갑니다


멀리 보이는 광장에는

무수한 빛이 마주 서 도열하고

외롭지도 춥지도 

않을 것만 같은데

나는 왜 이런 곳에 세우사

이렇게 청승맞게 하셨습니까


내 곁에도 사람들을

떠들고 뛰어 놀 아이들을

무수한 그림자를

푸른 잎사귀의 가로수를

허락해 주옵소서

목 놓아 울며 원했던 것이

얼마인 줄 아십니까


새벽이 찬란하게 밝아오면

내 초라한 몸둥이는

오히려 긴 그림자를 흔들며

꺼져 갑니다 

나를 세우신 자리에서

내게 부탁하신 인내를 배우고

당신 때문이라고

내가 살아 빛났던 순간이

기둥 같은 당신 때문이라고

마지막 말을 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광장보다는 어두운 이곳에

당신이 염려하고 

안스럽게 사랑하는 이들이

몇몇 있다는 것을

그들을 위해 나를 세우신

그 가슴 뻐근한 사랑을

이제는 같이 앓고 있습니다

하여, 원망은 없습니다


남겨진 소원이 있습니다

그 찬란한 새벽을 기다리며

내 불안한 빛을 꺼뜨리지 않는 일

다시는 부러워하지도

내 어둠에 갇혀 절망하지도

않는 일

당신이 붙여주신 이름답게

빛다운 빛으로

살아남아서 내 섬기는 그들의

앞길을 어둠 없이 밝히는 일

그것만이 이 밤에도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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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4 목양칼럼


기도의 좌편에는 이성이 있고 우편에는 신비가 있다.

양편에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잡아야 비로소 기도가 하나님을 구하는 시간이 된다. 

이성은 교만을 부르고 신비는 감정을 자극한다.

우리가 그 양편의 유혹을 스스로 이겨내는 것이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깨닫게 된 사실이,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모든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로 추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제대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충만한 은혜인 것이다. 설사 나의 기도가 응답되든지, 아니든지 간에 말이다.

내가 아무리 많은 노력과 시간을 기울이고, 열심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올바른 기도를 보장하지 못한다. 아니, 인간의 열심이 개입되면 될수록 오히려 더욱 삐뚤어질 가능성이 증가한다. 


누군가는 기도를 신을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정의하겠지만, 나는 이런 관점에 대하여 반대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은혜이다. 이 은혜가 없을 때에, 우리가 기도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방법과 시간은 종교적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수님은 그런 기도들에 대하여 '이방인들의 구함(the Gentiles seek)'이라고 명명하신 적이 있다.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기도의 오솔길은 무수한 방해와 함정들의 곁을 지난다. 당연하다. 우리는 대체로 보물을 얻기 위해 그런 위험한 길을 감수하지 않던가! 그 길 끝에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용기를 내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지만 용기를 가진다고 길이 저절로 편안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실한 지도를 필요로 한다. 덧붙여 우리가 오독(誤讀)할 경우를 위해 좋은 안내자가 있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다 허락하셨다. ‘성경’이라는 지도와 ‘성령’이라는 안내자를 통해 우리는 위험한 길을 안심하고 지날 수 있다.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확실하게 붙들어야만 가능하다. 지도보다 나의 감(感)을 더 믿던지, 아니면 안내자의 지시를 무시할 때 우리는 언제라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기도하기 위하여 기도하라. 맹목적으로 기도의 시간만을 늘리고, 무수한 욕망을 구하는 것으로 기회를 낭비하지 말라. 잘난 척도 말고, 신비한 경험을 쌓으려 하지도 말라. 그런 위험 속을 차분하게 걸어가라. 한 손에 성경의 등불을 들고, 한 손은 안내자 되시는 성령님을 붙잡고 앞으로 가라.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라. 그것이 진짜 기도이다... 부디, 그분의 임재를 경험한 후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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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7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성경 : 마태복음 3:1~4


(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3: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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