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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3.03.12 3.11 일본동북대지진, 그 아픔의 기억을 기념하여
  6. 2013.03.10 좋은 설교자가 되려면
  7. 2013.03.10 귀 뚫린 종의 사명
  8. 2013.03.03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9. 2013.03.03 불안으로부터의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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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7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그리스도 안의 생명

성경 : 요한복음 15장1절~6절

(15: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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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혼자말/靑情 / 2013. 3. 16. 23:30



<들꽃>


너에게 말을 건다

차분하게

한참을 앉아 마주하고

이미 빼앗긴 눈길 위에다

손을 내밀어도

차마, 

꺾을 수 없는 망설임으로

심장처럼 나는 떨린다


아직도 시린 밤을

여린 네가 어찌 견딜까

아무도 몰라주는 이 벌판에

어찌 너는 그리 고우냐


떠나는 걸음에 

실어준 향기를 먹고

나도 또 살아보마

봄은 따뜻하고

너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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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4 목양칼럼 ::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킨 사람은 역사상 오직 하나였다.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율법’의 심판 아래에서 예수님 이외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두가 죄인인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 은혜가 왔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행함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어 의롭게 된다. 옷 입는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는 뜻이다. 믿음이 곧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는다. 세례가 바로 이 두 가지의 경험이다. 율법의 심판 아래서 죽는 것과 십자가의 은혜 아래서 새롭게 살아나는 것, 그것이 바로 세례 안에 압축된 경험이다. 


예수님의 명령으로 교회는 두 가지 성례를 영원한 규범으로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성찬과 세례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예식의 바탕은 바로 십자가이다. 

성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이라면 세례는 나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성찬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고 세례를 통해 자기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진정한 십자가는 이 두 죽음이 하나로 연결되었을 때에 완성된다.


십자가를 묵상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 위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정확하게 알아야 할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운전면허를 이미 가진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다시 모아서 기본적인 교통규범을 재교육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알고 있더라도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것이 매해 돌아오는 사순절의 의미이다. 아니, 심지어 매일이라도 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묵상되어야 마땅하다.


아직도 자신에게 미련이 남았는가? 당신은 죄인이다. 부정하지 마라. 율법 아래 ‘죄인’이라는 굴레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가장 간단한 계명이라도 그것을 항상 지킨다는 것은 어렵다. 하물며 모든 계명을 항상 지켜야 한다니 그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러니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제 그만 받아들여라. 희망은 없다. 전혀. 조금 선한 것도 쓸모 없다. 무기징역을 받은 죄인에게 식당에서 줄을 잘 선다고 보석을 시켜주지는 않는다. 나의 선함이 내게는 위로가 된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자유를 주지는 못한다.


그러니 이제는 가능성 없는 나를 버리고 예수를 바라보자.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나를 대신하여. 죄 없는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그분이 찔림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분이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셨다. 이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전혀. 이것은 완전한 구속이다.


조금은 맥이 빠지는 것이 사실이다. 남은 인생을 통해 뭔가를 치열하게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더욱 그렇다. 적어도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몫 따위는 없다. 우리는 이미 얻었고, 완성되었으며, 허락되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 이 십자가를 묵상하는 일과 그 십자가의 은혜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것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나타나고, 십자가의 도가 공격 받을 것이며, 십자가는 점점 잊혀혀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싸움이다. 우리는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지키려고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레지스탕스가 아니라 해방군의 싸움이다.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십자가의 해방을 나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선포하는 싸움인 것이다. 그러니 넘어짐은 있어도 패배는 없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영광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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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말/靑情 / 2013. 3. 12. 22:36



< 잠 >


죽은 듯이 누워
숨을 쉰다
배가 출렁거린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저 너머에선 내가
어찌 살고 있을까
삶은 
여기와 저기를
넘나들며 이어가는 것
하나를 끊어내면
다른 하나가 이어진다

어렴풋이 무언가
떠오르려 하다가도
느낌만 남기고
바람결에 흘러간다

이제 기억이 껍질을 
깨뜨리려 하는가보다

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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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분명히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잊습니다.
일본에서는 다시 원전이 가동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전쟁의 위협 속에서 그 원전을 무기로 바꾸어 핵무장을 하자는 이야기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참으로 경악할 일입니다. 역사상 핵 폭탄을 두 개나 맞은 나라, 그리고 인류에게 일어난 원전사고 중에서 가장 큰 참사가 일어난 나라가, 그 사고로부터 2년도 안 지나서 어떻게 핵무기를 입에 올리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욕망에 눈이 어두운 인간의 현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동북대지진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것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 그리고 인생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참 감사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 어려움 속에서 저에게도 힘든 나날이 이어졌지만, 그러나 고통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어제 하루 동안... 일본동북대지진의 2주년을 기념하여 저의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입니다.
하나하나 다시 곱씹으며 사진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삼가, 고인들에게 평안을... 그리고 남겨진 유족과 재해민들에게는 위로를... 다시 전합니다.


오늘이 일본의 동북대지진 2주년입니다. 
지진은 오후 2:46분에 일어났고, 경보 후 약 15분 후부터 인근에 쓰나미가 몰려들었습니다. 지역에 따라 20미터에서 40미터의 쓰나미가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날은 아주 쾌청한 날씨였습니다. 
2만5천명이 죽거나 실종된 것으로 잠정 집계되었지만, 실상은 정확한 통계가 불가능했습니다. 마그네튜 9.0이라는 인간이 목격할 수 있는 최대의 이 재난이 과연 무엇인지, 나름대로 기념해 볼까 합니다.

이 사진들은, 사고후 재난지원을 위해 구호품을 가지고 방문했던 현장에서 제가 직접 촬영한 것들입니다. 기억에 남는 몇 장만 올려 보겠습니다...



자동차는 특히 처참했습니다.
참 역설적이게 보였습니다.
인간이 몸을 대신하여 속도를 추구하여 가장 빠름의 기계를 낳았지만, 그 기계 역시 죽음의 속도를 이기지는 못한다는 증명 같았습니다. 
도시 곳곳에 쳐박히고, 엎어지고, 만신창이로 찌그러진 차를 보면서... 나에게는 저것들이 다 인간의 몸뚱이요, 영혼 같았습니다.
물질문명의 꼭대기를 추구했던 일본, 가장 자연재해에 대하여 완벽한 대비가 되어 있다는 일본이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의 사건이 나옵니다. 인간은 거기서 하늘에 닿는 도시를 짓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인상적이게도... 하나님은 그 도시를 직접 살펴보기 위해서 '내려오십니다.' 
'하늘에 닿는 도시'라는 허망한 야망을 위해 올라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들의 도시는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야'하는 땅의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나는 그 허망한 '바벨탑'의 실체를 내 시대에서 목격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래의 앨범 사진이 볼 때마다 가슴 아픈 사진입니다.
쓰나미에 쓸려서 그야말로 사라진 도시의 폐허에서 망연자실 하다가, 그 한 주택에서 찾아내 내 손으로 펼쳤던 앨범입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거기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 집에 저렇게 저녁 식탁이 있고, 아이가 있고, 꿈이 있고, 웃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인생이구나. 참 허허로운 것이 사람이구나. 사랑하고 사랑 받을 기회가 지금뿐일지 모르겠구나... 한참을 그 밀려오는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사진입니다.

저는 가끔 이 사진을 꺼내 한참을 다시 봅니다.

그것은 인생이 무엇인지를, 이 한 장의 사진이 나에게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고 있으면... 역설적이게도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주택지는 거대한 폐허의 벌판으로 변했습니다.
학교건물도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쓰나미와 함께 떠밀려온 자동차와 집의 잔해들이 학교건물에 충돌하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공장지대 역시 철골구조만 남겨졌습니다.

2만5천의 사망, 실종자 통계가 정확할 수 없는 까닭은, 이처럼 마을 자체가 한꺼번에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누가 살았는지 증언할 사람도, 관공서도 남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노동의 현장에서 노인이 많고, 외국인 노동자가 많은 일본에서는, 그야말로 죽었는지조차 모르게 사라진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을 것입니다.

덩그런 폐허에 장비와 함께 누군가 써 놓은 '힘내자! 이시마끼'라는 간판이 아리게 눈에 들어옵니다.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들 만큼이나 산 사람들의 처지도 나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 해에는 더욱, 이상기온으로 늦추위가 계속되었습니다.
눈이 오고, 밤이면 살을 에이는 비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구호품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닐 봉지에 담겨진 식량과 물과 생필품을 받아야만, 한꺼번에 집과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살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여진이 계속되고, 원자력발전소의 불안한 소식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이렇게 얼어붙은 땅에 쳐박힌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자원해서 자기 차에 식량과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와서는 나누고, 함께 먹고, 잔해를 치우고, 함께 텐트에 누웠습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사람이 위대한 것은, 모두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사람답게 살려고 안깐힘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사망과 생명의 경계가 분명했습니다.

도시가 쓰나미에 휩쓸려 폐허로 변해버린 그곳에, 저 축대 위에는 멀쩡한 생명의 피난처가 있었습니다.
당일에 많은 사람들이 저 축대 위에서 도시가 물에 잠기고, 불이 나고, 같은 마을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비명 지르며 지켜 보았다고 합니다.
한 발의 길이, 한 발의 높이... 그것은 평소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지만, 그러나 재난 속에서 생명과 죽음을 갈랐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이와 같을지 모릅니다.




이 동영상은 바닷가 시오가마항의 한 멘션에서 촬영된 것입니다.
항구를 타고 들어온 쓰나미가 삽시간에 도로를 타고 도시를 휩쓰는 과정이 잘 보여지고 있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이와테에 쓰나미가 들어오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갔을 당시에도, 아직도 여전히 대형지진의 위험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한 주에 400번 정도의 여진이 왔습니다.
그 흔들림과 추위, 공허함, 곳곳의 잔해에서 아직도 확인되는 시신, 그리고 사람들의 상실감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대단하다고요? 착각에 불과합니다.
산다는 것은 허락된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취소되는 순간, 인간은 야망과 끈끈한 집착을 끊고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결말입니다.



한 작은 어촌에서 이들 부부를 만났습니다.
어린 시절에 이곳에서 자랐던 남편은, 은퇴한 후에 정착하기 위해 고향집을 고쳤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도시와 이곳을 왕복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쓰나미가 몰려왔습니다.
축대 위에 있던 이 집의 1층까지 물이 밀려왔고, 그 물은 계단을 타고 2층을 휘돌아 나갔습니다. 덕분에 집안이 온통 물에 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이 집을 결코 헐지 않겠답니다. 나라에서는 집을 철거하면 새로 짓는 보조금을 주겠다고 했지만, 남편은 그 어린시절의 추억이 담긴 집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집안에서 쓰레기로 변한 살림살이를 집 밖으로 들어냈습니다. 
한 나절을 땀을 흘리며 함께 일하는 동안, 우리는 언어, 민족, 국가, 나이를 넘어 친구가 되었습니다. 
나중이라도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놀러 오라고... 따뜻한 미소로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는 부부에게서, 우리는 따뜻한 희망을 보았습니다.





아픔, 슬픔, 죽음이 지난 자리에서도 자연은 여전했습니다.
갈매기는 창공을 날았고, 노을은 안식을 위해 서서히 다가왔습니다.
깨지고 망가진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움직이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숭고했습니다. 아름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이재민들은 고통 속에 있을 겁니다.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고, 무엇보다 돌아올 수 없는 가족을 가슴에 묻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3/11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화인(火印)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사람은 삽니다. 살려고 노력하고, 마침내 그 고통을 이겨냅니다. 그것이 희망의 힘입니다.

세상은 아프지만, 그런 희망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이 내가 여기 있는 이유이고, 이곳에서 아직도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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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설교자가 되는 비결이 있을까?


후배로부터 설교에 대한 조언을 부탁 받았다. 이런 부탁은, 일단 몹시 부담스럽다. 아직 그런 것을 말하기에는 내가 너무 부실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결국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여전히 어렵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그리고 내가 느끼고 품은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참 막연하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몇 자는 남겨도 될 것 같아서 간략하게 말하고자 한다.

우선, 이 글은 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둔다.


비결1, 좋은 설교자가 되라


좋은 설교는 좋은 설교자로부터 나온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거둘 수 없고,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없다고 하셨다. 결국 사람은 그 열매를 통해 자기를 증명하게 되어 있고, 그것은 설교자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설교를 전하고자 하는 노력이 좋은 설교자가 되고자 하는 노력과 다를 수 없다고 믿는다. 만약 그 둘이 서로 갈라서게 된다면, 그것은 더이상 설교가 아니라 '사기'일 것이다. 

때문에 좋은 설교자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경건의 훈련을 통해 영적으로도 그러하고, 또한 지적인 발전을 계속해야 하며, 그 깨닫고 아는 것이 삶과 괴리되지 않도록 인격적인 성장도 노력해야 한다. 

사실은 이 부분이 설교자가 좋은 설교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노력이며 동시에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지점이라 하겠다. 영적인, 지적인, 그리고 인격적인 균형과 발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말씀을 흠 내지 않고 온전히 받아 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다.


비결2, 성경을 경외하라


말씀에 대하여 충성심을 가져라. 성경은 암호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고, 때문에 인간이 이해하는 범주를 훨씬 넘어서는 깊고 오묘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훌륭한 장인은 타인이 보기에는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작품에도 애정어린 손길을 몇 번 더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그의 눈길과 경험이 닿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완성하려는 열정이야말로 작품을 물건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준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는 마음(경외심)이 중요하다. 성경을 믿어야 한다.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내게 대답을 하고, 구하는 자에게는 열려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 성경에 귀를 기울이고 지극히 깊이까지 치열하게 파고 들어가는 훈련이 설교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보편적으로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전도사 시절부터 4~5시간을 소모했다. 

설교할 분문을 결정하고, 그것을 분해하여 이해하고, 어의를 살피고,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추출한다. 그리고 주석과 다른 책들을 통해서 나의 이해가 바른 것인지 확인하고, 혹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핀다. 그리고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면, 그것을 글로 옮긴다. 

초고는 보통 세 번을 다시 손질한다. 처음에는 작성한 직후에 읽으며 수정하고, 다시 본문을 새로 묵상한 이후에 가감하고, 설교하는 아침이나 직전에 다시 확인하며 손질한다.

일본에 온 이후에는 한 편의 설교 준비시간이 더욱 길어졌다. 그것은 우리 교회의 경우, 주중에 전혀 모임이 없기 때문이고, 한 편의 설교로 하나의 주제를 제대로 설교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설교에 대한 준비 시간도 갑절로 늘어났다. 요즘은 보통 8시간 이상을 한 편의 설교준비에 사용하고 있다.


비결3, 좋은 귀를 가지라


좋은 귀를 가져라. 설교자는 대부분 말하는 입장에만 선다. 그것이 결국 자신에 대하여 무지하게 만든다. 설교자 만큼 좋은 설교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다. 훌륭한 설교를 개인적으로 듣고 은혜를 받을 때에, 그것이 마중물이 되어서 더 좋은 설교를 전할 수 있게 해준다.

요즘은 오픈되어 있는 세상이다. 마음만 있다면 좋은 설교자의 설교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마음의 멘토로 삼을 만한 목사님의 설교를 지속적으로 들으며, 설교자 자신도 주님의 양(羊)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고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좋은 설교는 모방을 해도 나쁘지 않다. 책을 내는 일은 저작권의 문제가 있겠지만, 설교를 하는 일은 '복음'이라는 오픈소스를 사용하는 일이다. 때문에 어떤 설교를 모방한다고 하여서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제대로 해야 한다. 설교준비가 부족해서, 혹은 쉽게 설교를 때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설교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도적질이다. 그러나 다른 분이 하신 한 편의 설교가 내것으로 깊이 용해되어서 설교자 자신의 목소리로 변하여 선포될 수 있다면, 그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또한 꼭 자기 설교를 들어봐라. 음색, 톤, 발음 같은 것들은 물론, 자기도 모르는 언어적 습관까지 고쳐야 할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요점을 흐리는 곁가지,  불필요한 농담, 심지어 성경을 잘못 인용하는 오류까지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나중이라도 양해를 구해 정정할 것은 정정하고, 개인적으로 고칠 습벽은 고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설교에 자기가 은혜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도 은혜 받지 못하는 말씀을 들고서 다른 사람들의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교가 해산의 수고를 통해 태어나는 옥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설교에 쉬운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것을 소개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모리배들이다.


비결4, 청중을 사랑하라


설교를 듣는 사람들(청중)을 사랑하라. 설교는 죽은 언어가 아니다. 단지 의미만을 전달하기 원하셨다면, 책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부르시고, 훈련하여, 강단에 세우시는 까닭은, 우리가 전하는 진리가 '사랑'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의미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 의미에 본래의 감정을 실어서 전달하는 것이 설교자의 의무이다. 

때문에 설교자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불타올라야 한다. 

그 심정이 무엇인가? 단 한 번이라도, 강단에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했다면, 그 심정이 바로 한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설교자 앞에 놓여 있는 하나하나의 영혼을 깊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설교의 원인이고, 능력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그는 설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하기 전에는 항상 버릇처럼 그런 기도를 한다. 교훈이든, 책망이든... 오늘 전하는 말씀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해달라고... 그 사랑 없이는, 내가 어떤 지식을 동원하고 어떤 비밀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그것은 정의를 가장한 흉기이며, 자기의 과시이고, 하나님을 빙자한 한(恨) 풀이다. 그런 설교자는 듣는 이의 영혼을 죽인다. 그런 설교자는 차라리 설교하지 않는 것이 자신과 교회를 위해 유익하다.


비결5, 농부의 마음을 가져라


내가 이해하기에, 설교는 농사다. 농부의 마음이 필요하다. 조급하면 망한다. 오늘 설교했다고 내일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면 큰 실망감에 사로 잡힌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식간에 사람을 건져 올리기도 하지만, 아주 오래 동안 숙성의 시간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나는 자주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을 어부 중에서 선택하셨을까? 그리고 왜 '사람 낚는 어부'라는 표현으로 부르셨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대개 자연을 상대로 하는 일차적 노동의 현장이 그러하지만, '인내'를 배경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음에도 실패하였지만 다시 말씀에 의지하여 한 번 더 내리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설교자가 품어야 하는 마음이다.  수 년 동안이나 거름을 주고 애정을 쏟아 가꾸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열매가 없어 도끼에 찍힐 위험에 처한 포도나무를 위해 간절하게 마지막 기회를 간청하는 농부의 마음이 바로 설교자의 마음이어야 한다.

농부에게는 믿음이 있기에 기다릴 수 있다. 흔히 땅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 믿음의 내용이다. 

이와 같이 설교자는 마땅히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신뢰해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현실에서 사람들은 은혜를 모르고 거절하는 것처럼만 보이더라도, 전하게 하신 하나님이 마침내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강퍅한 마음보다 더 강하다는 신뢰를 품어야 하지 않겠는가!


비결6, 나를 관찰하라


설교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설교자는 말씀을 해석하게 된다. 그 해석의 옳고 그름과 얕고 깊음에 따라서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면 좋은 설교란 무엇인가? 두 가지 측면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여 전하는 것이고, 다음은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도록 전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설교자는 성경을 깊이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 사람이 무엇이며 어떠한지를 이해해야 한다.

의외로 남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는 것에 비하여, 자기 자신을 놓치는 설교자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진정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 시작이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자신을 위해 설교하라. 자신에게 들려주어야 할 메시지를 찾으라. 자신이 꼭 필요로 하는 설교를 준비하라. 그 과정이 의외로 많은 것을 얻게 한다. 


비결7, 은혜가 아니면 설교할 수 없다


모든 노력을 기울인 이후에도, 역시나 준비된 원고를 들고 강단에 서면 떨린다. 그리고 준비된 것도 못하고 내려오기도 하고, 준비된 것 이상을 전하고 내려오기도 한다. 이것이 단지 컨디션의 차이일까? 그날의 운(運) 때문일까? 

설교에는 사람이 설명할 수 없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사실 그것이 핵심이다. 만약 그것을 놓치고 있다면 그는 아직 제대로 설교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완성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간섭과 임재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고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가난한 마음이야말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이라 생각한다.

가끔은 사람의 탁월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 막는 것을 본다. 그들은 자기 재주에 취해서 그만 하나님을 가려 버린다. 사람들 또한 그들의 재주에 눈과 귀가 현혹될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 설교는 죽었고, 그의 재주는 사람을 모으기는 해도 살리지는 못한다. 

설교는 생명이 그 영광이다. 누군가 그 설교를 듣고 살아나야 한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면, 얼굴 표정이 밝아지고, 언어가 변하고, 행동이 달라진다. 그런 날이 거듭되면 인격이 변한다. 그렇게 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야말로 설교자의 영광이요, 보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결코 설교자의 능력이 아니다. 훈육의 힘이 아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이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이것을 잊어버리는 순간, 그는 세상에서는 스타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늘에서는 추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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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0 목양칼럼 :: 


교회 직분의 가장 근간이 되는 ‘집사’라는 말은 히랍어 ‘디아코노스’에서 왔습니다.

그 어원의 의미는 ‘봉사하다,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몸을 써서 누군가를 수종드는 사람으로 종을 뜻하지만, 단순한 종이 아니라 주인이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종을 뜻합니다. 때문에 그 섬김 또한 강제적인 노역이 아니라, 바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는 ‘귀 뚫린 종’이라는 특별한 종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이스라엘에서는, 본래 희년이 오면 모든 종들이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은 주인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주어진 자유의 기회를 반납하고 계속 종으로 남기를 원했습니다. 그럴 경우, 주인은 종을 데려다가 그 집 문이나 문설주에 세우고 귀를 뚫어 ‘귀 뚫린 종’으로 삼습니다. (출21:6. 신15:17)

아시겠지만, 히브리인들은 신명기 6장의 말씀을 따라 문과 문설주에 하나님의 말씀인 ‘레마’를 기록한 주머니를 달고 출입할 때마다 경배를 드렸습니다. 때문에 그 문이나 문설주에 종을 세워 ‘귀를 뚫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엄숙한 맹세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이름은 ‘종’이로되 주인의 아들(가족)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이러한 종은 실제로 주인과 한 상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았다고 합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땅 위에서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종을 부리고 주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러한 주인의 권력은 종이라는 약자에게는 늘 버거운 멍에가 됩니다. 때문에 종은 주인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주종(主從)의 신분제도가 해소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강제할 수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얼마나 많이 분노하거나, 불평하거나, 미워합니까?

그런데 이 주인은 얼마나 지혜롭고 덕스러웠으면, 종이 영원히 상전으로 모시기를 원하겠습니까? 그 주인은 분명히 자신의 권력을 다 사용하지 않고 믿음으로 절제하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귀 뚫린 종’을 가진다는 것은 단순한 재산의 증식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기쁨이요, 명예입니다. 사람들이 그 집을 드나들 때마다 문과 문설주에 생겨 있는 못자국을 보면서 이 사실을 기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던 ‘레마’의 말씀과 함께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하나로 그 문에, 문설주에 기념되었던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교회의 직분자들은, 마땅히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직분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평범해 보이는 의무야말로, 사실은 성경에서 가장 무겁고 하나님께서 매우 가치 있게 여기시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마땅히 사람을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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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3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갈라디아서 2:16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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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3 목양칼럼 :: 

인생에서 고생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불안이다.
목사와 상담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말을 한다. "이 고생을 언제까지 해야하는거죠?"
끝이 보이면 감당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욕이 꺾인다. 한 발자국도 더 나갈 힘이 없게 된다. 낙심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믿음조차 흔들린다. 불안은 참 무서운 영적 질병이다.

불안은 말로 해결되지 않는다. 불안해서 점집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단골이 된다고 한다. 원하는 대답을 듣고서도 약발이 며칠을 가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 위로가 되는 말을 들을 때에는 마음이 안정되다가도, 곧 불안이 다시 일어나서 마침내 다시 똑같은 대답을 듣기 위해 점집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불안은 가정(if)에서 출발한다. 그 가정이 충분한 근거와 이유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렇지 않을 이유가 더 많은데 그런 것은 몽땅 무시하고 불안에 스스로 빠져든다.
성경을 통해 이해한다면, 이러한 ‘불안’의 경향성은 죄와 연결되어 있다.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구원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이후 줄곧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 기둥의 인도함을 받았다. 그 하나님 임재의 보호하심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으로 인하여 불평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안이, 곧 믿음 없음의 표현이며 하나님께 대한 범죄의 쓴 뿌리라고 진단하셨다. 결국 죄가 불안을 낳고, 불안이 마침내 범죄하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나타났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불안하느냐? 너는 너의 하나님을 바라라!”
불안에 대한 해답은 결국 자신에게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편은 ‘너의 영혼아’라고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혼의 불안을 다스리고 하나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밖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자신이 자신에게 타이르고, 결단하고, 응원하고, 격려해서 불안으로부터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으로 시선을 옮겨가야 하는 것이다.
결국 불안은 기도할 제목이다. 안정된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

‘샬롬’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그것은 단지 정서적인 평안을 비는 인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진정한 평안을 기원하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그것이 열쇠이다. 

불안으로부터의 탈출은, 자기를 타이르고 다스리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해답은 역시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껍질을 벗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온전히 샬롬을 누려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불안으로부터의 완전한 결별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성숙을 위해 달려가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늘어난 셈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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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

혼자말/靑情 / 2013. 3. 1. 16:09


< 건널목 >


건넌다는 것은
여기와 다른
저기로 가는 것

그 중간을 가로지르는
단호한 단절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삶에도 이런
건널목 하나 있어서
지금을 끊어낼 수 있다면
새로운 나를
저편에서 만날까

처연히 서서
너머를 그려보는 동안
기차는 들어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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