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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9


어떤 사람이 냇가에서 금을 찾고 있습니다.

냇물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황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흙을 꺼내 고운 채 위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물 밖으로 나온 흙은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볼품없는 진흙과 돌처럼 보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채를 물가에서 흔들어 잔돌을 골라냅니다. 그리고 흙은 다시 쟁반에 담아 물위에서 가만히 부드럽게 휘저어 줍니다. 가벼운 흙은 물에 쓸려 나가지만, 무거운 황금은 거기 남을 것입니다. 그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고르고 또 고르면 결국에는 반짝이는 진짜 금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냇가에서 금을 찾는 일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사랑을 위해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모래와 황금이 섞인 그런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결정할 때에, 그것은 ‘난 이 모래 속에 분명히 황금이 있다고 확신해!’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인내하며 고르고 또 고르는 것입니다.

고통의 잔돌을 골라내고, 실망의 흙을 세월의 물에 흘려보내면,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반짝이는 사랑이 금처럼 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믿음이고, 믿음은 소망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고, 믿기 때문에 소망하는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은 흙뿐이지만, 그러나 그 안의 어딘가에 금이 있다고 믿을 때에 우리는 소망을 품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희귀할뿐더러 사랑하기를 겁내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인스턴트 식품처럼 끓는 물에 넣고 3분만 기다리면 완성되는 사랑을 찾다가 상처를 입고 마음이 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흙은 필요 없으니 내 앞에 당장 번쩍이는 황금을 가져다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텔레비전 드라마에나 나오는 환상일 뿐입니다. 사랑은 눈물을 먹고 자라고, 한숨으로 영글며, 가슴 아픔을 통하여 익어갑니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지고 쉽지 않게 성숙하기 때문에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그분의 사랑은 가슴 아파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편지처럼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진정한 사랑은 ‘오래참음’으로 시작해서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위해 인내를 배우도록 합시다. 잘 참고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합시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사랑이란 그야말로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분명하게 깨달아집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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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2


1990년대는 한국교회가 찬양의 부흥을 경험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이전까지 교회는 ‘준비찬양’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는 예배를 앞두고 미리 마음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찬양이 사용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서브 아이템은 예배 본래의 것과는 구분되었고, 그래서 찬양은 젊은 아이들이나 좋아하는 뭔가 덜 신령하고 조금은 경박한 그런 것으로 이해될 때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사탄인 루시퍼가 음악을 담당하던 천사였기 때문에 모든 ‘음악’에는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그토록 많은 찬양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찬양을 잃어버린’ 시간을 오래 겪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경배와 찬양’이 소개되고, 예배의 부흥에 찬양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배우고, 하나님께서 교회의 찬양을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배워가면서 구습의 껍질을 깨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찬양이 교회에 차고 넘쳐서 세상을 향하는 물결이 되었으니, 새로운 장르로 자리매김한 CCM은 바로 그러한 기독교 문화 콘텐츠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과거보다 훨씬 풍성한 찬양의 열매를 오늘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생각해야 할 문제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찬양이 유행의 대상이 되어 새로운 찬양에만 매력을 느끼고, 화려한 연주와 빼어난 음악적 기교에 열광하는 것은 찬양의 본질을 흐리는 잘못된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찬양은 음악으로 표현되지만, 그 본질은 마음입니다. 투박하고 소탈하더라도 진심이 담겼을 때에 찬양이 찬양되는 것이지, 만약 그 중심에 마음이 담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찬양일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적으로 불어난 오늘의 찬양이 과연 과거의 척박한 시대보다 더 성숙한 마음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동경드림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으로 사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에 이바지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찬양은 무엇입니까? 변화된 사람의 노래입니다. 은혜를 경험하고 변화되지 못하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새로운 곡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음악적으로 더 아름다운 멜로디라기보다는 새로운 마음의 곡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성숙한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노래인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자리를 회복하십시오. 그래야 찬양이 찬양답게 드려질 수 있습니다. 새 노래보다 새 마음을 추구하십시오. 일본의 메마른 영혼들을 촉촉하기 적시기 위하여 오늘 우리교회에 필요한 것은 성령의 은혜로 변화된 사람들의 찬양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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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5


아이에게서 젖을 떼는 시기가 있습니다. 요즘은 엄마 젖을 대신하여 분유를 먹이는 아이들도 많으니 어떤 아이에게는 젖병을 뗀다고 해야 하겠군요. 아무튼 그간에 익숙했던 생존의 방식을 버리고 낯선 새로운 방식을 습득해야 하는 아이에게는 이 시기가 매우 스트레스를 받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결사적으로 젖(병)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고, 엄마는 그야말로 독한 마음을 먹으면서까지 아이에게서 젖(병)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대나무가 자람의 과정 속에서 마디를 이루듯, 사람도 성장하면 한 번씩 자기를 점검하고 과거와 선을 그어야 합니다. 그저 익숙하고 편하다고 하여서 기존의 방식대로만 살면, 결국에는 젖(병)을 떼지 못하는 아이처럼 많은 좋은 것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당장은 괴롭기만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있다면 그것이 꼭 필요하며 서로에게 유익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젖(병)을 빼앗는 변화를 통해서만 사람은 바른 성장과 건강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올바른 척도는 내적인 성장입니다. 화려한 이력이나 과거의 경험, 혹은 신비한 능력의 유무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얼마나 굴복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변화되었는가가 기독교 신앙의 관건(關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내적인 성장이 편하고 안일한 환경 가운데서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고달프고 바쁜 현장이 곧 내적인 성장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분별력입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에 집중할 것이냐를 제대로 분별할 때에 우리는 신앙을 통해 삶의 질서를 세울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기를 개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를 자랑하고 향수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함정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과거의 젖(병)을 버리고 현실로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가 빈약합니다. 하나의 마디를 이루고나면 다시 처음부터, 기초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항상 자신이 ‘졸업생’이라고만 생각하지 정작 이제 새로운 현실 가운데서 ‘신입생’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영적 성장의 과정에서 완전한 졸업에 이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으로 살다가 주님께 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출발선에 서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며, 또한 익숙한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마음으로 돌아갑시다. 다시 배우도록 합시다. 신앙의 새로운 마디를 이루기 위하여 기초로부터 새로 시작합시다. 익숙한 젖(병)일랑 이제는 이별할 때가 되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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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9


존 비비어는 그의 책 [순종]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가 어릴 때, 폐결핵에 대한 예방주사를 맞기 위해 병원에 갔습니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갔지만, 정작 존은 예방주사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반항을 했는지 간호사 두 명이 달려들어 존을 붙들었으나 결국에는 그에게 주사를 놓을 수 없었답니다.

집에 돌아온 존을 앞에 두고 그의 어머니는 어린 존을 설득하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왜 주사를 맞아야 하는지, 주사를 맞지 않으면 어떤 위험에 놓이게 되는지, 존을 고통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기 위하여 주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진지한 설명 속에서 어린 존은 결심을 하게 되었고 비록 주사가 고통스럽겠지만 더 큰 위험을 예방하기 위하여 스스로 주사를 맞겠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존은 스스로 병원에 가서 얌전하게 주사를 맞았다는 것입니다.

존 비비어는 때로 예방주사처럼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때마다 이 일화를 떠올린다고 하였습니다. 당장은 쓰리고 아파 보이는 일도 사실은 축복과 보호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돈, 명예, 건강과 같은 것들이 사실은 매우 중간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더 행복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것들 때문에 자기를 망치고 남에게 슬픔이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하나님께 구하고도 빨리 받지 못하거나, 혹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우리의 환경이 열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하며,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인도하심이 우리 인생 가운데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선택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에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대 속에 순종이라는 아름다운 신앙의 미덕이 얼마나 희귀해져 있습니까? 사람들은 자기 맘에 드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야할 아버지는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닙니다.

동경드림교회의 사랑하는 지체들이 좀 더 순종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이 당장은 어려워 보여도 사실, 순종을 결심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내적 평안이 찾아온답니다.

필요하지 않다면 왜 주셨겠습니까? 뭔가 이유가 있겠지요. 당장 이해하지 못해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기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순종하려고 노력합시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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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2


나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중고차를 받았습니다. 매우 낡은 차라서 구입한 값보다 이후로 수리비가 더 들어갔지만 지금도 그 차를 잊을 수 없습니다. 

현대 ‘프레스토’라는 차종이었는데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 바람만 나오던 차였습니다. 여름이면 차안이 그야말로 찜통이 되어서 4개의 문을 다 열고 10분은 기다려야 탈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히터 성능은 그만이라서 겨울이면 반팔 셔츠를 입고 운전을 하곤 했습니다. (미련하지요, 히터를 좀 줄이면 될 것을... 그 때는 뭔가 자기 멋에 취했나 봅니다. ^^)

그 차 덕분에 일상에 지치거나 마음이 복잡한 날에는 밤새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동해로 갈 수 있었습니다. 주로 잘 갔던 곳이 주문진인데, 동해에서 해안이 가장 원만하고 조용한 해수욕장입니다. 여름이면 여름대로, 겨울이면 겨울대로 바다를 보며 생각을 하고 자기를 타이르기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는 길에는 설악산이나 오대산에 들려 기암과 계곡과 나무들 속을 하루 종일 걸으며 혼자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미국에서는 아이가 조금 자라면 아빠가 마당의 나무 위에다 오두막을 지어 준다고 합니다. 한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시간과 적당한 고독의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본에서 사는 동안, 외로움은 있지만 오히려 건강한 고독은 부실하다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외로움을 느끼지만, 정작 그 고독이 자기를 잘 정리하고 미래를 다짐하는 건강한 에너지로 승화되지 못하고 그저 우울한 잿빛 하늘처럼 항상 그렇게 사람들을 억누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방세와 미래의 불안은 모두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동경에 왔지만 정작 동경의 실체를 체험도 못하고 그저 집과 학교, 혹은 집과 직장만을 오고가며 수년을 보내는 지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가장 친절하면서도 가장 폐쇄적인 일본 사람들, 그리고 그 주변을 맴도는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외국인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지치고 힘겨운 일입니다.

여름에 계획들 있으십니까? 여러분 하나하나가 건강해야 교회가 건강합니다. 일상에서 잠시 발을 빼고 혼자일 수 있는 곳을 찾으십시오. 미술관이든, 공원이든, 가까운 지방이라도 좋습니다. 

가며 오며 머리를 좀 비우고, 대신에 새로운 생각과 신앙으로 자기를 채워보도록 하십시오. 늘 하던 생각, 늘 하던 고민의 식상함에서 벗어나 무언가 자기를 가슴 떨리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 보십시오.

쉼은 필요하며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멈추지 않으면 멀리 갈 수 없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지체들이 교회를 통해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자기를 완성해 가기를 바랍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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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5


1942년 10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을 띠고 출발한 에데리켄 벡커가 바다에 추락했습니다. 그는 ‘날으는 요새’라고 알려진 B-17기를 몰고 남태평양을 횡단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연료가 떨어져 비행기가 바다에 곤두박질쳤던 것입니다. 

그는 구명조끼를 입고 탈출했지만 악천후와 물, 상어, 햇빛 등과 싸워야 했습니다. 8일이 지났을 때 휴대용 식량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오후에 혼자서 예배를 드린 다음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졸고 있을 때 뭔가가 그의 모자에 내려앉았습니다. 갈매기였습니다. 그것은 곧 양식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잡아 고기는 먹고 내장은 낚시 미끼로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구조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갈매기는 어떻게 육지에서 수백 킬로나 떨어진 곳에 와 있었을까요? 

하나님만 아실 일입니다. 

구조된 이후 매주 금요일 저녁만 되면 이 늙은 신사는, 양동이에는 새우를, 자신의 가슴에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자신을 구해 준 갈매기들이 떼 지어 있는 방파제로 갑니다.

삶의 과정을 돌아보면, 누구나 한 가지쯤 기적을 만나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위기와 역경의 순간으로부터 우리는 값없는 은혜를 통해 구원을 받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벡커와 같이 그 은혜를 기억하고 평생을 감사에 헌신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에는 감격의 찬양을 뜨거운 눈물로 부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감격을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바울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했고, 그 십자가의 구원에 보답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그리스도께 바쳤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고통을 받아야 했지만 한 번도 그것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받은 은혜를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죽고, 그리스도인들이 감옥에 갇힐 때에 그가 했던 일들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죄인을 끝까지 찾아와 깨달음을 주셨던 주님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감사가 없고 불평이 스며 있다면, 그것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이 은혜를 망각하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기념하십시오. 삶의 기적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손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셨는지 항상  찬송하기를 멈추지 않는 동경드림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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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26일로 체르노빌 사고가 28주년을 맞았습니다.

그동안 이 사고의 의료적 부분을 연구해온 학자들의 발표가 나오면서 원자력 발전소의 사고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무서운 재앙인지를 다시 알게 하고 있습니다.


원자력은 미래도, 희망도 아닙니다. 재앙입니다. 적어도 인류가 이 에너지를 안전하게 다룰 수 있을 때까지는 열지 말아야 하는 판도라의 상자입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대만은 탈원전 정책으로 강하게 회귀하여 이미 원전신설을 멈추었고, 지어진 것도 그 수명까지만 사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요즘은 짓는 중에 있는 원전을 포기하라는 야당과 시민사회의 강한 반발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부디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하여, 탈원전 정책에 대하여 관심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예고된 재앙은 함께 노력하여 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래는 강혜정님의 글입니다. 
출처 : https://www.facebook.com/haejung.kang.37

2014년 4월 26일은 체르노빌 핵사고가 발생한 지 28년째 되는 날입니다.
사고 당시 소련에 속했던 체르노빌은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우크라이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체르노빌 핵사고 현장은 폭발현장에 석관을 씌워놨지만 여전히 폐로도 못한 채 위태로운 상황이며, 피폭의 영향은 대를 이어 확대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 보고서의 데이터에 근거한 아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핵사고 당시 피폭 당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동의 약 80%가 만성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그래프 막대를 보면, 시간이 흘러 상황이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되었습니다.

<1992년 이후 피폭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동의 만성질환 보유 비율>
-파란색 막대: 건강한 아동
-분홍색 막대: 만성질환 아동

출처: 우크라이나 의료과학아카데미(AMS)의 조사연구를 기초자료로 작성된 우쿠라이나 정부 보고서 <체르노빌 사고 후 25년> 영문판 p.128



관련된 텔레비전 방송도 함께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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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7


사람이 꼭 말을 해야만 마음이 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직접적인 말보다 더 명확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들이 존재합니다.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간단한 위로, 같이 기도하는 중에 내 귀에 들어온 그의 기도소리, 나에게 준 너무도 적절한 선물, 그리고 섬김들...

참된 사랑이 가슴에 있을 때에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 사랑이 상대방의 가슴에 와 닿도록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 삶에 별처럼 빛나며 우리를 사랑받고 있다는 기쁨과 충만함으로 인도합니다.


아내가 한국으로 떠나며 가스렌지 위에다 포스트잇을 잔뜩 붙여 두었습니다. 된장찌개 끓이는 법, 미소시루 끓이는 법, 김치찌개 끓이는 법, 카레 만들기... 일주일 내내 그것을 볼 때마다 그 쪽지들은 아내의 마음이 우리들 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곤 했습니다.

어제는 지혜네가 자전거로 외출을 했다가 길을 잘못 들어 고생을 했던가 봅니다. 교회에 들어오자마자 박소연 집사님은 다운입니다. 그런데 최동현 집사님은 지혜부터 챙겨 말없이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문득 목사의 눈에 들어온 최동현 집사님의 손길이 인상적입니다. 그것은 최동현 집사님답지 않게(^^) 너무도 섬세한 손길입니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흠뻑 느껴지는 손길입니다.

우리는 자상한 손길이나 부드러운 눈빛을 통해 더 자주 사랑의 고백을 받습니다. 어깨 위에 얹은 따뜻한 손의 감촉을 통해 목소리 보다 더 많은 말이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요즘 많이 힘들지요?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오늘 하루 종일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그냥 당신이 그것을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공감(共感)’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표현이 없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양속담에 ‘돈과 사랑은 끝까지 감출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로 사랑한다 하면서 정작 말 보다 진한 마음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불쌍한 사랑입니다.

사랑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나이를 먹어갈수록 열정적인 사랑만큼이나 우리가 마시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사랑’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알게 모르게, 항상 그 자리에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럽습니다. 묵묵한 그 꾸준함이 그분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한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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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0


안나 로버트슨은 농장에서 고용되어 일을 하던 젊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일하던 농장에서 건실한 젊은이를 만나 결혼을 했는데, 그의 이름은 탐 모세스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열심히 일을 해서 마침내 자기 농장을 마련하였으며 슬하에는 10남매를 두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었습니다.

그녀의 나이가 80세쯤 되었을 때에, 그녀의 손에는 심한 관절염이 찾아왔습니다. 손이 아파 잠을 잘 이루지 못했으며, 점점 감각도 둔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점점 둔감해지는 손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삶의 풍경을 그대로 화폭에 옮겼습니다. 농장, 들판, 사람들과 가축, 노을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의 어떤 것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선물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뉴욕의 유명한 미술 수집상이 그 마을을 지나가다 한 상점에 들렀습니다. 거기에는 안나의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그는 첫눈에 그 그림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간곡한 요청과 도움으로 안나는 화가로 데뷔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모세스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미국의 역사에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라고 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80의 나이에 화가로 데뷔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500여점의 그림을 세상에 남겼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머니가 그렇게 엄청난 작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녀의 관절염과 외로움이 그 이유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남겨진 외로움과 밤마다 찾아오는 손가락의 통증을 잊기 위하여 그림에 집중하고 매달렸던 것입니다.

고통을 없애 달라고요? 좋습니다. 그러나 편안하면 과연 열심과 집중력이 생겨날 수 있을까요? 모든 일이 형통한데도 하나님을 향하여 계속해서 간절하게 매달리는 사람은 정말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찾고, 주님의 뜻을 깨닫곤 합니다.

때문에 고통 자체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의 에너지를 승화시킬 위대한 목적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프기만 하고 인생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함이 진정한 고통의 정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모질게 상처받음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더 큰 은혜와 능력으로 그 상처를 덮으셔서 위대하게 하십니다. 고통의 에너지가 은혜로 승화되어서 평범한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소중한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니 삶을 사십시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십시오. 고통에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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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3


큰 아들 준혁이가 드디어 엄마보다 키가 컸습니다. 작년 겨울방학까지만 해도 엄마와 팔씨름을 하면 엄마가 이겼는데, 얼마 전부터는 막상막하(莫上莫下)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전에도 둘이 팔씨름이 붙었습니다.

지는 사람은 서로 1시간 동안 부하가 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엄마는 별로 좋을 것 없는 이 경기를 피하려고 했지만 옆에서 아빠가 부추기는 바람에 어떻게 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결과를 말씀드리면 거의 압도적으로 준혁이가 이겼습니다. 서로 손을 맞잡을 때부터 이제는 준혁이의 손이 더 컸고, 힘을 주는 방법도 남자다와 엄마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준혁이는 기세 등등! 엄마는 뭔가 좋으면서도 섭섭한 표정...

그 때 엄마가 준혁이게 한 마디 했습니다.

“대장님, 그 좋은 힘으로 나가서 설거지나 하시죠?”

비록 한 판의 팔씨름으로 대장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엄마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찬혁이와 아빠는 배꼽을 잡았고, 준혁이는 “뭐야, 이게! 대장이 되도 하나도 좋은 거가 없잖아...”하며 같이 웃었습니다.

그러더니 반격을 했습니다.

“나보다 키도 작은 게... 나보다 힘도 없는 게...”

물론 엄마를 깔보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엄마의 표정은 싱글벙글하기만 합니다. 전혀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고 말입니다.

준혁이는 아직 모를 것입니다. 자기보다 커지고 힘세진 아들을 보는 부모의 심정을 말입니다. 섭섭한 마음보다 기쁨이 크다는 것을, 그렇게 되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준혁이가 태어났을 때, 아내는 젖이 별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먹성이 좋았던 준혁이는 유난히도 엄마의 젖을 빨았습니다. 부족한 젖을 빨다보니 젖꼭지가 갈라지고 피가 났습니다. 아내는 약도 바르지 못할 정도로 아파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가 젖을 찾으면 그 입에 젖을 물리고 자기는 울었습니다. 그렇게 준혁이가 컸습니다.

그런 준혁이가 이제는 의젓한 청소년이 되어가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에게 지는 것이 왜 기분 나쁜 일이 되겠습니까?

아마도 준혁이가 고등학생 즈음이 되면 팔씨름으로 아빠도 이기지 않을까 합니다. 어쩌면 더 일찍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아빠에게 준혁이는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소중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아무리 아빠보다 커져도 아빠가 안아주고, 돌봐주고, 사랑하고 싶은 ‘아들’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주 안에서 부모를 향하여 최선을 다해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습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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