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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7 타성을 경계하라


타성(惰性)에 젖어가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휴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서서히 젖어가는 타성은 목표를 흐리고 의지를 무력하게 한다.

이런 타성의 과정이 시작되면, 모든 것은 생기를 잃는다.

심지어 잘 하던 일들까지도 예전과 달리 김 빠진 탄산음료 같은 느낌이 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지만, 표면적으로는 똑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본인에게 일어난 변화를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손에 힘이 빠져서 전혀 다른 결과들이 만들어지고, 최근에는 자신을 통해 긍정과 발전의 열매가 전혀 맺혀지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기까지 타성은 우리의 생각을 마비시킨다.

타성에 젖어가면서도 전혀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과 아울러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타성에 젖어갈수록 타인에 대하여 비판적이 된다는 것이다.

긍정은 내적인 성품이다.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일수록 타인에 대하여도 긍정적일 확률이 많다.

반대로 자신을 믿지 못하면 타인도 믿지 못한다.

타성은 결국 우리 안에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성적으로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하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그 변질을 알고 있다. 덕분에 자기에 대한 의심이 만들어지고, 그 의심은 왜곡되어 타인에게 투영되는 것이다.

타성은 신앙도 흔든다.

타성은 기존의 방식을 고집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특징이지만, 그 근간은 게으름이다.

그래서 게으를 타(惰)를 쓴다.

그 게으름으로부터 현실에 안주하려는 타성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알거니와 신앙은 항상 새로움을 요구한다.

과거의 은혜를 기념하는 것은 좋지만, 과거의 만나로 오늘 배를 채울 수는 없다.

오늘은 오늘의 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타성에 젖은 사람은 언제나 과거의 것으로 오늘을 살려 한다.

그래서 마치 그의 삶에서 생기가 빠져나가듯, 그의 신앙도 서서히 메마르고 부패한다.

결국 남는 것은, 미라(mirra)이다.

화려한 복색으로 과거의 영광을 추측하게 하지만, 실체는 말라 흉측하게 변해버린 미라를 보는 것처럼 타성에 젖은 사람은 주변을 놀라게 한다.

변명은 필요 없다. 모든 사람은 타성과 싸워야 한다.

이 위험에 처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특별히 신앙인은 더욱 그러하다.

이기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쉽고 편하게 가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매일의 삶과 신앙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최선을 스스로에게 주문하고, 확인하는 과정만이 타성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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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8 목양칼럼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남기신 교훈이 세족식이었다. 그 안에 담긴 겸손과 섬김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묵상할 때마다 여전히 감동적이다.

기독교의 요체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사랑'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의 모호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유행가 가사부터, 연인들의 이별의 이유도 사랑이고, 심지어 인격적이지 못한 교사가 아이들에게 폭행을 가할 때에도 사랑이라는 말로 자신을 포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증거를 요구한다. 마치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처럼, 진정한 사랑이라면 사랑을 진심으로 나타내는 행위가 따라야 한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의 반대편으로 행하는 것은 결국 그가 말하는 사랑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 증명되었다고 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결코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혹은 독생자)을 십자가에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그 사랑을 깨닫고 확인할 때마다 감동받고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족식을 통해 주셨던 것도 바로 그것이다. 교양적인 가르침과 도덕적인 모범만을 찾는다면 우리는 세족식의 껍질만 씹는 격이다. 그런 것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본질은 아니다.

사도요한은 그 밤에 거기 있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사람들, 심지어 가롯 유다의 발까지 정성스럽게 씻어 주시던 날을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물론 그 날의 감동 때문에 그는 평생을 겸손하고, 섬기려 노력했을 것이다. 목회를 하다가 신자들이 거역하고, 배반하는 일을 당하더라도 요한은 그 밤에 자기 앞에 무릎을 꿇으셨던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결코 험해질 수 없었다. 그는 낮아지고 또 낮아지며, 섬기고 또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요한의 삶이 단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교훈이 정당하기 때문에 가능한가?

인간의 부조리는 몰라서가 아니라, 바른 것을 알면서도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에 있지 않던가!

우리는 겸손이 아름다운 미덕이며, 섬김이 감동적이라는 것을 몰라서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겸손과 섬김 속에 담겨 있는 인내와 희생과 자기 부인의 고통을 알기 때문에 그 길로 걸어가기를 망설이는 것이다.

결국 요한에게 이 세족식이 특별했다면, 그것은 다른 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토록 특별하신 이유는, 그분처럼 진심으로 모든 것을 다해 요한을 사랑해준 분이 다시는 없기 때문이다.

 

정의는 아름답다. 하지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희생이 필요하다. 그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라는 위대한 이름의 능력이다. 때문에 사랑이 없으면 정의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바가 바로 그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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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동경드림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함께 부름 받은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직분은 충성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딤전 1:12, 개정)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 살아도, 우리의 본향이 천국이며 언젠가는 그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날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고, 그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감당하는 일은 무엇보다 소중하며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경드림교회가 네리마에 자리한 것도 4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 은혜의 발자취를 걸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동경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과정은 먼 길을 각오하게 합니다.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신앙이 깨어지고 흐트러진 사람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입니다. 목회자를 신뢰하지 못하기에 목양의 거룩한 감화를 받지 못하고, 성경이 아닌 전통과 조직에 묶여진 사람들이 많으며, 지금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과거의 신령한 추억으로만 신앙을 연명하는 불행한 영혼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아직 미숙하고 어리지만, 그래도 역사에 도전해야 합니다.

거룩한 부흥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영혼들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임재를 드러내시며, 타성을 깨뜨리시고, 사람의 모든 철학과 지식을 굴복하게 하시며, 교회를 교회되게 세우시는 역사를 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소망하는 것은, 우리 동경드림교회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 땅에서 시작하는 작은 불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성공과 형통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를 각오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땅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주실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며 불꽃처럼 타올라 어둠을 밝히는 교회를 세우도록 함께 싸우자는 것입니다.

한 아이의 생명을 위해 우리가 함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사 응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아이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인(sign)이며, 증거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그 확신을 품고 나아가 교회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올해 동경드림교회의 목표는 힘 있게 기도하고, 세상에 나아가 증거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출석인원이 50명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청년회와 주일학교를 조직하고, 거룩한 양육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추수할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구경꾼이 아니라,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하는 거절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부흥을 위하여 자기를 헌신할 충성된 종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헌신예배가 바로 그러한 새출발의 시작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0년 2월 21일,

직분자 헌신예배를 앞두고 교회 창가에서

김종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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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4 목양칼럼

 

소명(Calling)은 기독교의 핵심적 사상을 담고 있는 말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세계사 시간에 ‘직업소명설’이라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이슈가 되었던 이 사상은, 직업에 따라 차별을 가하고 신분적 계급으로 삼았던 중세의 사회제도를 뒤흔들어 현대를 낳았다. 산업화를 통해 부를 축적했지만, 귀족으로부터 차별 받아왔던 도시상공인들이 개신교를 중심으로 단결하면서 중세사회는 신분제, 귀족제를 넘어 시민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직업소명설’이란 사람의 직업이 우연히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통해 결정되었다는 사상이다. 결국 그가 대장장이를 하던지, 농부를 하던지, 혹은 장사를 하던지 간에 그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다는 것이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소명에 민감하다. 그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과정을 하나님의 은총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현실(Here and Now)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반대로 현실을 부정하고, 자꾸만 자기가 생각하는 더 좋은 다른 것에 대한 갈망만을 마음에 키운다면 그는 소명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까지도 세신다고. 그 만큼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햇살과 비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래도 믿음의 자녀들을 향한 그분의 마음이 남다르지 않겠는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牧者)가 되신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 의미 없고, 불필요한 과정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라고 노래했다.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시는데, 항상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가로만 길이 이어져야지 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일이 생길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양을 길들이고, 양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한 목자의 프로그램 속에는 ‘음침한 골짜기로 행진하기’와 같은 특별한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소명’을 묵상해야 한다. 왜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나를 부르셨을까? 지금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순종이 어떤 것일까?

그것을 묵상하고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완전하시다. 그리스도인에게 우연은 없다. 우리 인생과 현실에는 소명이 있다. 그것을 알고 사는 사람과 모르고 사는 사람은 천지(天地)차이다. 소명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깨닫게 된다. 소명을 알 때 찬양과 감사가 시작된다. 소명의 사람은 초라할 수 없다. 소명은 순종을 필요로 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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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0 말씀묵상, 놀라운 동행의 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산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결코 예수님 안에 머물 수 없습니다.

성경은 단순한 지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라고 하는 것들도 실상은 ‘묵상’의 다른 방식일 뿐 세상적인 공부와는 의미가 다릅니다. 묵상의 기본은, 나의 알고자 하는 노력과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은혜가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묵상할수록 겸손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영적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공부했지 묵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들이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잘 알고, 역사에 대하여 탁월한 이해를 가졌다 하더라도 이러한 지식은 그들의 내면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결국 그들은 화려한 언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에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가 아니라, 우리의 가슴과 인격 속에 자리해야 합니다. 알고 행하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만도 못합니다.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진리를 찾되,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능력으로서 만나기를 힘쓰십시오. 보여주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진정으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십시오. 그것이 삶의 습관이 되면, 우리는 대부분의 인생에서 안정을 취하고 확실한 목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묵상의 근간이 기도와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묵상을 위한 기도는 갈망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이 마음 속에서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자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마치 그 성경 말씀을 처음 대한 것처럼,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성경을 받아들이면 항상 놀라운 은혜를 받습니다.

성경을 가벼이 대하지 마십시오. 존중하고 경외하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경배하듯이 성경을 향하여 절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렇게 귀한 마음을 가지면 성경이 스스로 자기를 열어 보여줄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스스로 보여주시기까지 아무도 볼 수 없는 책입니다. 표면의 글자가 아니라, 그 안에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성경을 대하는 특별한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여기 있습니다. 생명의 길이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던 생명의 양식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품고, 그것으로 길을 삼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평생 누리는 동경드림교회 모든 가족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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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31 예배의 다양성에 대하여


영어권에서는 예배를 ‘서비스’라고 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섬겨 경배하는 예배의 기능을 생각하면 금새 고개가 끄덕여지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서번트(servant, 종)’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서비스’를 정성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제대로 되고 있을까? 언젠가부터 이 서비스가 주객이 전도되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 다시 말하면, 점점 하나님을 향한 서비스에서 사람들을 향한 서비스로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열린예배(Open Service)란 원래, 구도자 중심의 예배를 지칭한다. 이 말은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아직 어리고 미숙하기 때문에 그 방법을 잘 알지 못할 때에 그것을 친절하게 돕는다는 의미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아직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신자들을 향하여 부드러운 음식을 준비하자는 것이다.

때문에 이 열린예배 자체가 이미 닫혀진 제한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무작정 맘대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 곧 성경의 내용 안에서만 열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원칙을 소홀하게 여기거나 포기한다면, 그야말로 최근 유럽에서 생기는 참람한 사태처럼, 예배당에서 예배와 함께 칵테일을 제공하거나, 댄스 파티와 예배를 동시에 제공하는 기발한 발상들을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복잡한 예식의 규칙들을 주시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아무리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더라도, 세상의 모든 것을 용납하고 타협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예배는 지켜야 하는 마지노선(Maginot Line)이 있는 것이다.


예배의 근간은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다. 다양성은 이 본질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의 편의와 기호를 최대한 배려하더라도, 결국 예배의 중심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성도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다가도 다시 포기하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때도 있다. 설교의 최종적인 평가는 항상 “하나님께서 과연 이 설교를 지금 전하기를 원하실까?”라는 질문을 통해 결정한다. 설사 사람들이 거북해하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이 원칙에 확신이 서면 강단을 향하여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신이다.


지난 주에 <직분자회의>를 하다 보니, 오전예배와 오후예배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왜 두 번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신앙이 어리거나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은 당연히 그런 질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다들 헤아렸다.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서 다소 혼란을 겪은 것은, 정말 신앙이 어린 신자들을 향하여 뭔가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직분자 자신들이 이 질문에 대하여 명백한 대답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일이었다.  

맞다, 되도록 예배는 지루하지 말아야 하고, 많은 사람을 편안하게 품어야 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유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예배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고유한 색깔을 살리는 노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핵심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복음을 바르게 증거하고, 영혼을 목양하는 것이 예배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동경드림교회가 주일에 두 번의 예배를 드리고, 두 편의 긴 설교를 듣는 것은, 그 시간이 목양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것을 명령한 것도, 전통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 과정과 내용을 결정한 것은 목회자로서의 나 자신이다.

나는 동경드림교회의 예배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 예배의 핵심만큼은 목회자로서 양보하지 않고 성실하게 이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자부심이다. 내가 설교에 대한 다양한 요구들에 대하여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쓴 약일수록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 먹어야만 하는 당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으면 환자는 입에 쓴 약을 먹으려고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배란 죄인의 입장에서는 다소 거북한 시간이다. 선포되는 진리가 우리 마음에 들지 않고, 심지어 우리에게 아픔을 줄 때가 많다. 때로는 지루하기도 하다.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풀어가고 설명하려면 그런 과정을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예배의 다양성과 변화는 이런 과정을 되도록 편안하게 전달하기 위한 선택이다. 때문에 거북함과 지루함과 같은 요소들을 다 제거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감싸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강단에서 증거되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가 그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찬양을 아무리 멋지게 드려도 그것이 목양을 대신하지 못한다. 기도를 아무리 긴 시간 드려도 그것이 기독교의 구원을 가져오지 않는다. 기독교가 그 오랜 시간, 복음을 강조하고, 복음의 전달자로서의 목사를 중요하게 여겼던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오직 영혼의 구원과 목양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는 것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며, 그 내용은 성경이고, 이 모든 것을 책임 있게 추구하며 인도할 인도자는 설교자로서의 목사라는 사실은 타협될 수 없다. 만약 이 근간이 흔들린다면, 교회는 예배를 예배되게 지켜갈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모든 예배자가 단지 수동적으로 수용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적극적인 예배자의 참여와 의견 개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목회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신뢰하는 바탕에서만 정리될 수 있다. 만약 그러한 조정이 없다면 그야말로 모든 의견은 혼돈만을 더할 것이다.


예배와 관련된 사역자는 모두 설교자를 도와야 한다. 설교자의 설교가 가장 능력 있게, 그리고 온전하게 전달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거나 자기 색깔을 고집하는 예배사역은 모두 잘못된 쇼맨십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만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역하는 것이고, 그 초점은 언제나 강단에서 증거되는 설교이다. 이 점을 바르게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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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4 잘하는 것에 집중하라

 

사람은 잘하는 것에서 재미를 느낍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을 광적으로 좋아합니다. 그러나 가끔 아주 드물게 게임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만납니다. 신기하게 여겨서 가만히 관찰해보면 게임을 지독하게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임을 즐기려면 어느 정도 잘해야 하는데, 전혀 소질이 없는 경우에는 게임이 오히려 스트레스만 더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준혁이가 재미있는 성적표를 받아 왔습니다. 학습에 대한 성적표가 아니라 체력검사에 대한 성적표입니다. 그런데 체육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그 성적표를 주면서 준혁이가 학년에서 1등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처음으로 전교1등이 되었습니다.

기분이 좋아지라고, 아내와 제가 ‘전교1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아빠도 못 이기겠다느니, 우리 집에서 제일 센 것은 우리 큰 아들이라는 등의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그랬더니 준혁이가 더욱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어제는 준혁이가 계획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방학도 끝났는데 무슨 계획표인가 물었더니, 체력 트레이닝 계획표랍니다. 전교1등을 지키기 위하여 더욱 운동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결심한 모양입니다.

중학교 시절에 보디빌딩을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들으니, 보디빌딩을 하는데 6개월이 고비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근육질의 몸을 만들겠다는 열의를 가지고 운동을 시작하지만, 6개월이 되기까지는 거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답니다. 근육이 붙기 시작하려면 기본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 기본을 만들기 위해서 6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참지 못하고 대부분의 초보자들은 포기하고 만답니다. 하지만 그 시기가 넘어가면 운동을 할 때마다 근육이 올라오고, 안 쓰던 근육들이 자리를 잡아가는데 정말 자기 몸이 재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그 힘겨운 운동을 하는데도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다른 특성이 있고, 그래서 각자 재미를 느끼고 잘하는 것들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못하는 것에서 스트레스를 받기 보다는 잘하는 것을 찾아내어 집중하는 것이, 우리 인생과 신앙을 풍요롭게 하는 비결이 아닌가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다 못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주신 장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재능’이라고 부릅니다. 그 재능을 찾아내고 잘 가다듬어 유익한 일에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자기가 뭘 못하는지는 스무 가지도 헤아리면서, 정작 자신이 가장 잘 하고 재미있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인생과 재능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낭비되고 맙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능률적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최고의 능률은 우리가 좋아하는 일에서만 나타나게 됩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다른 것으로 헷갈리지 말고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바로 그 일에 집중하십시오. 거기 당신의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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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7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


작은 외과 수술 후에 손가락에서 실밥을 뽑은 이후에도 손톱이 나는 과정을 겪고 있다. 뽑았던 손톱을 다시 덮어둔 까닭은 손톱이 새로 생기고 자라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한 번 뽑혔던 손톱이 다시 자라는 것에는 생각보가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보통 4~6개월 정도의 시간을 잡는가 보다. 그 동안 천천히 자리 잡고 자라나는 손톱을 위해 뽑았던 손톱을 다시 꿰매어 고정해 두었던 것이다.

직업이 목사이니, 손가락은 눈과 함께 가장 혹사 당하는 지체이다. 이렇게 수술을 할 때 까지는 몰랐는데 감각이 아주 예민해진 손가락을 쓰려니 평소에 정말 많이 사용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낮에는 붕대로 감은 손가락으로 타자를 치고, 밤에는 그 후유증에 시달리며 욱신거리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덕분에 기타를 치며 부르고 싶은 노래도 못 부르고, 손과 손을 마주 비벼 씻지도 못한다. 심지어는 수술했던 손의 손바닥에서 국수처럼 때가 밀리는 장면을 보며 경악하기도 했다.

매일 씻고 사용하는 동안에는 몰랐던 손가락의 유용함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현실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에 정말 익숙하지만 너무나 요긴한 지체들이 많다는 것을 배웠다. 그 모든 것들의 절묘한 조화와 상호작용 속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단순하고 쉬운 행위도 불편한 사람에게는 ‘기적’과 같다.

작은 아들이 말했다. 손톱이 빠지면 그것을 저를 달란다. 호기심으로 가지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다. 두고두고 빠진 손톱을 보면서, 내가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기적의 의미를 가슴에 되새길까 한다.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악이다. 그것은 창조주에 대한 불경(不敬)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모독(冒瀆)이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은 실상 가난함이 아니라 엄살과 어리광에 불과하다.

인생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삶이 당연한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떠오르는 태양을 애타게 보고 싶어 했지만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하루는 세상에서 제일 큰 하나님의 축복이며, 선물이다.

그 하루를 건강한 몸으로 산다. 자라나는 손톱과 발톱을 깎는 행위는 평범하지만 결코 당연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열심히 살아야 한다. 내가 존재하는 순간순간을 만끽하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세상을 채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커다란 업적이 아니다. 나는 확신한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 그리고 그 행복으로부터 매일매일 감사가 꽃피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정말 성공하는 인생이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는 바로 그런 삶이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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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한 사람

2010-1-10

 

문학은 사색과 삶을 반영한다. 문학을 통해 우리가 읽는 것은 단순한 문자의 의미가 아니라, 그 시대의 고민과 삶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작가들 중에 아주 우울한 분위기의 글이 많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특별히 젊은 작가들의 글에서 무력감과 우울함이 묻어난다. 인류의 역사상 가장 번성하고 풍요로운 문명을 누리는 오늘이지만, 오히려 젊은이들의 가슴에는 패배주의와 절망이 멍들어 있다는 것을 그들의 글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인간의 의미가 모호해지고 위기를 겪는 시대이다.

우리는 유전자의 복제를 통해 ‘유일한 자기(Only myself)’에 대하여 혼돈을 겪고 있으며, 또한 점차 늘어가는 인공장기와 기계화에 의해 ‘인간(human Being)’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도전 받고 있다.

더구나 교육은 건전한 시민을 만드는 본래의 목적에 실패했다. 과도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공격적으로 변하는 청년들이 많다는 것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교육을 과신하는 광증에는 빠져있다. 심지어 신앙까지 교육을 통해 주입하려고 하는 터무니 없는 열정이 교회에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시대상을 잘 반영한다.

2010년을 열면서 개인적으로 사색하는 바가 있다. 과연 이 우울한 시대 가운데 ‘복음’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복음은 이 시대에도 기쁨의 소식이 될 수 있는가? 우리가 가진 이 복잡하고 터무니 없는 문제들에 대하여 명백하고 시원한 대답을 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복음이 역사를 이끌어왔던 동력은, 결코 그것이 개인과 그 내면의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 그리고 시대와 역사적 차원에서 소통했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시대에는 자유와 자결의 원칙이 성경에서 나왔고, 노예의 시대에는 해방과 평등의 원칙이 바로 그 복음에서 꽃피웠다. 우리의 선배들은, 단지 가만히 골방에서 내세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내세를 믿기에, 지금의 시대를 용감하게 진단하고 더 성경적인 세상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었던 순교자들이었다.

그들의 시대에서 그들은 잃은 자(loser)였지만, 그러나 그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했다. 그들의 피를 먹고 세상의 부조리가 해결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려 왔기 때문이다.

결국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진리가 분명히 이 시대에도 우리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되고, 기쁨의 원천이 되겠지만, 그것은 말만으로는 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변화와 헌신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뭘 믿는가는 어떻게 사는가에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믿음은 참 불량이 많다고 생각된다. 시대의 등불이 되는 청년들을 키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을 자청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 방법을 찾고, 길을 걸어가는 것이 바로 나의 사명이요, 숙제이다.

많은 숫자가 아니라 온전한 한 사람에 집중하는 목회자가 되자!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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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 목양칼럼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동경드림교회에 예배당을 주신다면 과연 어떤 예배당을 세울까 생각을 해봤다. 너무 화려하지 않게, 그러나 단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만들어서 동경의 명물이 되고 안식처가 되게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요즘은 예배당을 극장식으로 많이 짓는다고 한다. 그래서 콘서트도 열고, 세미나도 빌려주어서 1년 365일 쉬지 않고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은행이 고객을 위해 문턱을 없애는 것처럼 교회도 사람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고 찾아올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그래서 북카페와 서점과 영화관이 예배당의 부속으로 패키지화 되고 있다.

이러한 실용주의가 과연 성경적인가? 나에게는 뭔가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배당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정의하셨다. 물론 사람들이 부담감 없이 쉽게 찾을 수 있으면 좋겠으나, 그러나 그렇게 편안한 예배당이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배당을 예배당 되게 하는 것은 십자가의 표식이 아니라, 거기서 드려지는 예배와 기도에 있다.

과거의 경험이다. 한 큰 교회로 새벽예배를 나갔는데, 늦게까지 기도하게 되었다.

5시에 시작된 새벽예배를 5시 반에 마치고, 7시가 넘어서까지 기도하며 있었다. 그러자 그 교회의 집사님이 슬며시 찾아와 등을 두드렸다. 8시부터는 지역 사람들을 위한 행사를 개최하기 때문에 예배당을 준비해야 하니 그만 나가 달라는 것이었다.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고 나오면서 뭔가 씁쓸했다.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내보내고 다른 행사를 준비한다면, 내가 예배당에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행사용 강당에 있었던 것인가?

거룩을 히브리어로 ‘카도쉬’라고 한다. 이 말은 원래 칼로 잘라낸다는 뜻이다. 거룩함의 본질이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룩’이라는 말이야말로 거룩한 낭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구별된 칼은 식사를 준비하는 것에 사용하지 않는다. 오직 제사를 위해 사용된다. 그 칼이 식사를 위해 사용될 때에는 식칼이지만, 제사만을 위해 사용될 때에 그것은 성물(聖物)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그분만을 위해 존재하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일주일에 한 번만 예배에 사용하고, 그냥 비워두는 것이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되도록 이면 사람들이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찾아올 수 있고, 또한 1년 365일 항상 사람들의 발걸음이 계속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다만 그러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편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임재 가운데 교제하며,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예배당은 중심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를 갖추고 이루어 가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는 집을 포기하고 다른 용도를 먼저 생각한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된 생각이 아닐까 한다.

일본의 기독교 인구가 0.3%라고 들었다. 가끔 예쁘게 지어진 예배당은 보이는데, 그 예배당이 예배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결혼식으로 유지된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슬프고 안타깝다.

나는 소망한다. 동경에 그분의 집이 생기기를.

언제나 그분을 향한 뜨거운 예배의 불길이 피워올라, 번제처럼 오직 나의 하나님만을 위해 존재하는 집이 세워지기를. 신자들은 언제나 눈물과 기쁨으로 기도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최고의 예우를 받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집이 동경에 세워지기를 원한다.

그 예배당은 장식보다 찬양으로 아름다울 것이고, 조명보다 말씀의 빛으로 빛날 것이며,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세워질 것이다. 어디에나 쉼이 있고, 자연이 있고, 사람들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바로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세울 것이다.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는가? 가슴 뛰지 않는가?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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