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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30 예수님처럼 사람을 사랑하자!


사람이 제일 귀하다. 그래서 결과보다 사람을 중시해야 한다. 설사 조금 부족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사람을 지키고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신자의 당연한 선택이다. 예수님을 주(主)라고 부르면서, 그분이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한 사람의 가치를 훼손하고 조롱한다면, 그것은 모순이고 패역이다.

사람을 지키고 세우기 위해서는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성경은 ‘사람’의 본질을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중요하고 바탕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 현실에서는 망각할 때가 많다.

겉이 멀쩡하다고 멀쩡한 사람이 아니다. 속을 살피고 보아야 한다. 겉으로 건강해 보이는 사람도 속으로는 지독하게 병들고 약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지키고 세운다는 뜻은, 겉이 아니라 속을 이해하고 보살핀다는 뜻이다.

마음에서 근심과 오해가 병이 되지 않도록 하소연을 들어주고, 때로는 아름다운 격려와 적절한 충고를 병행해야 한다. 상처 받지 않고 살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각박하지만, 그 상처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오랜 질병이 되지는 않도록 항상 서로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배려와 헌신은 진실한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매너와 예절의 차원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차원에서 사람을 섬기는 훈련을 쌓아가야 한다.

물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황금을 목적으로 삼는 자는 결코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맘몬(mommon)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지키고 세우는 일에 소용되는 물질은 아까운 것이 결코 아니다. 가난한 부모라도 자식을 교육하는 것에 아끼지 않아야 미래의 희망이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의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절하게 하는 교회야말로 희망이 살아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옵션이 될 수 없다. 다른 모든 것은 취사선택의 대상이 되지만, 사람은 누구라도 섬김과 사역의 대상이며 끝까지 중보 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할 때에, 이미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떠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그런 일들이 흔하다. 겸손이 소심함으로 조롱 당하고, 사람을 종처럼 부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능력 있는 사람처럼 미화(美化)된다. 그래서 육체는 멀쩡해도 마음이 망가지고 병든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은 마음을 고치시는 의사이셨다. 그분을 만나면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회복되었다. 사마리아의 우물가 여인이 그랬고, 삭게오가 그랬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백부장도 그러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섬기는 자신의 행동이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손해를 보실 것을 알면서도 약한 사람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셨다. 그래서 그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인생이 바뀐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나는 지금도 예수님이 같은 일을 하신다고 믿는다. 다만 성령을 통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 다를 뿐이지, 사람을 지키고 세우는 모든 현장에서 예수님은 임재 하신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사람을 향한 사랑에서 변함이 없으시다.

묻고 싶다. 누구를 사랑하는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도 한다. 은혜를 받은 신자라면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 원수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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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랍비가 필요하다!

2010-05-1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랍비’라고 불리셨다. 

이 말은 교사, 혹은 선생이라는 뜻이다. 유대인은 전통 속에서 지혜와 지식을 소중히 하였기 때문에 이 ‘랍비’라는 호칭은 지금까지도 영예로운 이름으로 계속 남아 있다. 그래서 랍비는 아주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이름이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가르침’을 경시하는 풍조가 늘어간다. 아이들은 교사를 존경하지 않는다. 덕분에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비명이 들린다. 수업 시간에 맘대로 구는 아이들도, 교사가 꾸지람이라도 할라치면 핸드폰을 들이대며 동영상 촬영을 하고, 심지어 학교로 경찰을 부른다고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가르침’의 근본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머리로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아는 과정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지식이 머리를 채운다면, 감동은 가슴을 채운다. 그래서 아는 것이 삶을 지배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가르치는 과정에 감동이 없다. 아이들은 성적을 위해 배우고, 자기를 변화시키기 위해 배우지 못한다. 그런 과정에서 단지 결과만을 중시하는 우리의 사회풍토가 아이들에게 가르침의 감동을 말려버린 것이다. 그래서 머리는 가득 차도, 가슴이 텅 비어버린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주일학교라는 소중한 전통을 가져왔다. 

아이에게 마땅히 행할 것을 어려서 가르치면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성경의 권면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소중한 경험을 주고 싶어하는 어버이의 마음이 그 근간이 되지 않았는가 싶다.

동경 드림교회도 그런 마음으로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요즘 주일학교 찬양을 살피니, 랩도 있고, 로봇 춤도 있다. 플래시 애니매이션을 사용한 성경동화도 있고, 주일학교를 꾸미는 재미 있는 내용들도 참 많다. 얼마나 많은 교사들이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수고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요즘의 주일학교가 예전보다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좋은 가르침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멀티미디어에 익숙한 요즘의 아이들에게 구식의 주일학교를 고집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교회가 세상의 방식만 따라 간다면 세상의 문제들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생긴다.

좋은 가르침은 ‘랍비’의 정신에서 나온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셨던 것처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항상 삶으로 좋은 모범을 보이셨던  삶의 나눔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고 믿으셨던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감동을 되찾아 줄 비법이 아닐까?

동경드림교회 교사들에게, 그리고 부모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삶과 믿음을 인도할 ‘랍비’이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진리 속에서 감동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좋은 옷, 좋은 음식보다 더 중요하고 귀하다. 이 사실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자부심을 가지고 함께 걸어갔으면 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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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9 자격 없는 충고



네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라!

이 계명에 대하여 과연 내가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나뿐인 홀어머니를 외롭게 고국(故國)에 남겨두고 일본에 와서 목회를 하고 있는 나는, 이 계명이 늘 마음에 큰 짐이 된다. 

얼마 전에는 갑자기 청천벽력(晴天霹靂)  같은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가 건강검진을 받으시다가 담낭 쪽에 이상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의사는 암이 의심된다며 대학병원에서 정밀진단을 받도록 의뢰했다. 대학병원의 정밀검사라는 것이 오늘 신청하고 내일 받는 것이 아니기에, 어머니는 거의 한 달을 기다리셔야 했다. 그 동안 맘 고생이 얼마나 심하셨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어머니는 유난히도 고통에 대하여 민감하시다. 그럼에도 거의 평생을 심한 만성 두통으로 고생하셨고, 자궁암 수술을 받으셨고, 치과 진료와 관절 등으로 연일 심한 고통을 겪어 오셨다. 그럼에도 한 번도 아들인 내게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셨다.

그런 어머니이시기에 더욱 마음이 쓰인다. 사실 현재의 내가 별로 도움도 드릴 수 없는 형편이고 보니, 어머니뿐 아니라 나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못한다.  

그저 묵묵히 돌아서 어머니는 어머니의 고통에 서럽고, 나는 나의 불효에 서럽다.

지난 목요일 아침, 기다리던 검사결과가 나왔다. 다행히도 암이 아니라고 한다. 

어머니의 목소리에 오랜만에 힘이 넘쳤다. 그간에 참아왔던 힘겨운 마음의 짐을 털어내는 어머니의 안도를 들으며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인생은 유한하다. 흐르는 강물을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인생의 순간들도 그렇게 흐른 뒤에는 돌아오지 않는다. 

만약 내가 인생의 마지막에 서게 된다면, 부자로 살지 못한 것이나, 명예를 얻지 못한 것으로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 날에 내 마음에는 오직 하나의 후회가 남으리라. 

그것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후회… 좋은 아들이고, 좋은 아버지이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좋은 목사로 살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아마도 그런 것들이 짙게 남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해두고 싶다. 남에게 잘하라 말할 자격도 없지만, 그러나 조금 더 노력하자고 권하고 싶다. 부모에게 공경할 수 있는 기회를 소중히 하라. 우리의 세월도 기다려주지 않고, 우리의 부모님도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 대리석 묘비를 세우는 일은 미련한 일이다. 

차라리 지금 기회가 있을 때에 적은 용돈이라도 드리는 것이 지혜이다. 바다 건너 이국 땅에 있지만 좀 더 자주 목소리로 안부를 여쭈고, 되도록 많이 뵙도록 노력하는 것이 귀하다.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항상 건강 하시기를 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점점 쇠약해지고, 늙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너무 많이 기다려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기다리고 싶어도 기다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며, 목숨이기 때문이다.

어버이날이라 더욱 어머니가 그립다. 가슴에 붉은 카네이션 달아 드리고 한 번 업어 드리기라도 하고 싶다. 더는 맘 고생 없이 사셨으면 좋겠다.

이제라도 자식 노릇 좀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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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2 자녀를 위해 부모는 소중하다



어린이 주일이다. 특별히 동경드림교회의 주일학교를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감사하고 기쁘다. 이 작은 시작이 마침내 꿈을 이루어서 정말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일학교로 자라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의 시대는 인간이 가진 것은 많지만 정작 누리는 것은 적다고 생각한다. 

지난 주에는 미국에서 신앙생활 하시는 친척 형님을 뵈었는데, 어린 시절에 이민을 가서 사업을 하며 나름 성공한 분이었다. 이분을 통하여 이민사회의 문제들을 듣고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 대화 중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 우리 가족이 사는 곳도 부유하고 좋은 동네이다. 하지만 과연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행복한지는 모르겠다. 교회에서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어서 교우들에게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집을 좀 작은 것으로 하고, 차를 조금 덜 좋은 것을 타시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만드시는 것이 좋겠다. 이민사회가 돈을 벌다가 자녀들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이 모두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인생도 부분만이 아니라 모든 여정에 하나님의 소중한 행복이 준비되어 있다. 다만 그것을 깨닫고, 누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은 수고롭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과 행복이 주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일이며, 소중한 일이다. 

그런데 요즘의 시대가 이런 행복을 소홀히 한다. 단지 아이들에게 좋은 옷과 좋은 집을 주기 위해서 엄마와 아빠를 빼앗는다. 과연 아이들에게 고급 맨션이나 기름진 음식이 중요할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목회를 하면서 부모와 정이 없는 불행한 자녀들을 종종 보았다. 그들에게 부모라는 말의 의미는 가까운 이웃 보다 못했다. 명절에 어쩔 수 없이 고향에 내려가고, 몇 푼의 용돈을 드린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부모와 자식의 사이는 그저 그렇고 그런 부담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부모와 자식의 사이는 결코 오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껏해야 20년 안쪽의 세월을 통해, 부모와 자식의 사이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시절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면 죽을 때까지 회복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자녀들은 깨어지기 쉬운 유리그릇과 같다. 좀 더 세밀하게 대해야 하고, 더 조심해야 한다. 단지 옷과 집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것을 주기 위하여 노력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아이를 돌보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는 부모가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식이야말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걸고 집중해야 할 중요한 대상이다.

주일학교를 시작한다. 그러나 주일학교는 가정의 보조적인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신앙의 교사는 역시나 부모이다. 부모가 바로 서야 자녀가 산다. 그래서 모든 부모에게 자기의 신앙과 삶을 더 소중히 하라고 말하고 싶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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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5 인생의 문제 속에서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하나의 문제를 넘으면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때문에 문제가 없는 인생을 구한다면 그것은 인생 밖으로 나가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오히려 생각해보니, 문제 또한 인생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록 내가 원하는 현실은 아니지만, 다양한 문제를 겪는 과정을 통해 인생은 늘 새롭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인생 자체가 만만하지 않은 것은, 인생이 숨기고 있는 문제의 날카로움 때문이다.

더러는 문제에 침몰당해 인생 자체의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문제를 잘 이겨내고 극복하는 과정은 인생을 지혜롭게 한다. 처음부터 내면이 강하거나 성숙한 사람은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생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했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인생이 문제의 인생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인생의 문제는 위기이면서 기회인 것이다.

문제는 우선 이겨내야 한다. 문제 앞에 선 사람들은 방법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상 인생에는 무수한 방법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내가 모르는 것이지 없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어떤 선택들은 용기와 희생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소극적 태도가 해결책을 찾는 것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신중하게 생각하고, 단호하게 결정하라. 그리고 쉽게 가려고 하지 말라. 인생 자체가 쉽지 않은데, 쉬운 길이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어려운 길을 선택하되, 충분한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좋다.

문제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실상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문제를 잘 해결하고 극복하더라도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치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 이것은 승리가 아니라 패배가 된다.

사람은 누구나 조급하다. 느린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여서 조급함이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더 조급할 수 있다. 조급함은 행동의 느리고 빠름을 말하는 문제가 아니라, 참아야 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내적 결핍의 문제이다. 결국 성숙한 인격과 신앙으로부터 조급함을 조절하는 능력이 나오는데, 참아야 하는 순간에 참지 못하고 조급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그런 내용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조급한 사람은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 항상 상대적이기 쉬운데, 문제로 인하여 자기가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것이다. 이를테면 두 대를 맞은 대신에 세 대를 때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해결이 아닐뿐더러 받은 상처는 이후에도 고스란히 남아 나의 다음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 문제를 해결하고도 오히려 패배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이 때문이다.

기도와 말씀은 큰 도움이 된다. 간헐적인 관심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지만, 만약 성경을 암송하거나 묵상하는 지속적인 습관을 가진다면, 조급함의 많은 부분이 잠잠하게 된다. 또한 마음을 드리는 깊은 기도생활은 좁아지는 시야를 넓게 하며, 생각의 틀을 새롭게 하는 은혜가 있다.

나는 현실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응답 이전에 경건생활 자체가 인생의 문제를 풀어가는 것에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깨닫는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삶은 문제를 대하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강하게 하기 때문이다.

당장 의도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전혀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열심을 내어 전진할 수 있다면, 인생은 분명히 다른 길을 통해서라도 그 소망으로 인도할 것이다. 실제 문제는, 우리는 조급하여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을 때에, 낙심하고, 그래서 상처를 받고 포기하기에 길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막히는 것이다.

낙심하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하라. 문제를 위해 기도하라. 그러나 단지 문제를 해결하여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문제보다 강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라. 문제를 통해 지혜를 얻도록 기도하라. 문제 속에서도 약해지거나, 병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문제의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자신의 실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을 통해 반성하는 것을 잊지 말라.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성숙이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될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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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1 문화와 영성



오래 기다렸던 사꾸라가 너무 빨리 진다. 봄을 의심하게 만드는 추운 기온이 계속되더니, 비가 오는 날씨도 많아서 사꾸라가 흐드러지자마자 떨어졌다. 맑은 날, 사꾸라나무 밑에서 꽃을 눈처럼 맞고 싶었는데 기회가 너무 빨리 날아갔다.

봄은 설레임의 계절이다. 포근한 날씨도 그렇지만, 사방에서 뿜어대는 꽃의 열기도 그렇고, 꽃만큼이나 예쁜 새싹과 아장거리는 동물들과 화려한 여인들의 복장이 그러하다. 귀에 좋은 음악 하나 꽂고 길을 걸으면 한참을 걸어도 지루하거나 피곤하지 않다. 계절에 따라서 이렇게 거리가 달라지고 사람들이 달라지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음악 얘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해볼까?

중학교 시절에는 발라드 팝송을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에는 하드락과 헤비메탈을 들었다. 교회에서는 뉴에이지운동에 대한 경계를 더하고 있었지만, 그 시절에 들었던 메타리카, 할로윈의 음악은 너무 강렬해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듣다가 스무 살 시절에는 다시 재즈와 국악을 들었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며, 나의 음악도 변했다. 요즘은 연주음악을 주로 듣는다. 클래식이나 재즈, 혹은 국악을 듣는데, 언제부터인가 가사를 듣는 것이 부담스러워져서, 그냥 무의식의 저편으로 음악을 흘려 보내며 긴장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음악이 좋아졌다.


나는 문화란 공기와 같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산소를 필요로 하지만, 산소만으로 호흡하지 않는 것처럼 문화란 좋은 것만의 집합이 아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위험의 요소들이 내재한다. 하지만 그것을 취사선택하고 조절하는 과정을 통해 문화는 개인화 된다.

특별히 음악이 그러하다. 뉴에이지 음악이 영성을 흐린다고 하지만, 나는 가끔은 조지 윈스턴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들으면서 성경을 읽는다. 퀸의 바이씨클(bicycle)은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에 애청하는 음악이고, 클래식 꿀벌의 비행도 그러하다. 비 오는 날에는 진한 커피와 재즈가 좋고, 우울한 기분일 때는 할로윈의 어 테일 뎃 워즌트 라잇이나 킹 크림슨의 에퍼타프를 듣기도 한다.


물론 찬양은 내 신앙과 삶의 일부이다. 그렇지만 찬양을 들으면 영성이 깊어지고, 다른 음악을 들으면 영성이 흐려진다는 견해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한 곡의 노래를 통해 흐려지고, 맑아질 영성이라면 그 깊이가 너무 빈약하다는 뜻은 아닐까?

드라마와 영화를 즐기고, 스포츠를 즐기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마음은 ‘정죄’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언제나 ‘자유’를 말씀하신다. 안식일의 수많은 규례에 얽매였던 유대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얼마나 자유로우셨는가? 전통적 유대인의 눈에 예수님의 모든 행동이 규범을 벗어나는 신성모독으로 보였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일생을 사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언가를 1시간 하면 괜찮고, 3시간 하면 죄라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먼저 그 나라를 구하며 살고 있다면, 우리가 어떤 환경에 놓이더라도 결코 우리의 영성과 신앙의 빛은 흐려지지 않을 것이다.


문화를 문화로 받아들이고 사용하라. 단지 도구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음악이나 다른 예술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우리 마음에서 나오고, 마음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진다. 

그러니 차라리 하루의 삶에 말씀을 묵상하며 그분과 동행하려는 노력을 더하는 것이, 경계와 두려움으로 문화적 편식을 시도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나으리라.

뱀은 이슬을 먹고도 독을 만들고, 꿀벌은 쓰레기를 헤매고도 꿀을 만든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디에서나 주님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삶은 예수님의 것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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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4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창세기의 26장에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창 26:17,18)


아브라함과 이삭의 나이 차이가 100살이다. 지독한 세대차이를 예감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삭은 아버지의 방식들을 이해하고 순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아들은 아버지와 다르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나이가 먹을수록 점점 아버지와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아들들의 운명이다. 그것이 유전자 속에 들어 있는 기질 때문이든,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섭리이든, 피하기 힘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삭은 현명했다. 그는 아버지가 이루었던 업적을 부정하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시작하는 법을 알았다. 그는 아버지가 지었던 이름으로 우물들을 부르며, 아버지를 존중하고 또한 깊은 그리움으로 기념했다.

특별히 이삭은 신앙적으로 더욱 그러했다. 아버지의 신앙을 고리타분하고 구식의 신앙이라고 매도하지 않았다. 그것을 사랑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다시 이삭의 하나님이 되셨던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찬송가 이외의 ‘복음성가’가 200 여 곡에 불과했다. 그리고 신앙과 관련된 책도 많지 않아서, 대표적인 기독교 서적이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 정도였다. 

그렇지만 신앙의 갈망은 깊고 순수했다.

고난주간마다 금식을 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사실이 죄송하고 슬퍼서 일주일 내내 우울한 표정으로 살았다. 그리고 잘 생각나지도 않는 죄들을 회개하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쓰며 가슴을 쳤다.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십자가와 부활에 관련된 구절에는 빨간 볼펜과 색연필이 빼곡하게 밑줄 그어졌다. 요절을 암송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살고, 부활절 예배에서 성찬을 받을 때에는 예외 없이 흐느꼈다. 예수님을 위해 살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불편하던 예배당의 추억이 가고, 극장식의 화려한 예배당들이 세워졌다. 가요보다 더 음악적인 찬양들이 만들어지고, 이제 복음은 산업화되고 있다. 매주 새로운 신앙의 길을 인도하는 서적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인터넷은 지구상의 모든 설교를 안방까지 배달한다.

그러나 고난주간이 허전하다. 그 시절만큼 절실한 무엇이 없다. 기도에서도, 예배에서도 흐느끼는 사람을 찾기 힘들고, 있다면 너무 유별나게 보여서 눈총을 받을 지경이다. 그래서 더 이상 십자가를 아파하는 사람도, 부활절 성찬 앞에서 맹세하는 젊은이도 보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그 시절이 그립다. 세월을 거슬러 싸워볼 수 있다면, 이삭처럼 우물이라도 파고 싶은 심정이다. 과거와 단절된 신앙이 아니라, 과거의 은혜를 이어가는 내 어린 시절의 신앙을 이 동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양(量)과 포장으로 승부하는 신앙이 아니라, 깊이와 진심으로 담아내는 신앙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내 할머니와 어머니의 하나님이, 이곳 동경에서 내 아이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다른 소원이 없겠다.

그것이 내가 그토록 절실하게 주일학교를 시작하는 이유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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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8 도움의 기술 (The Art of Help)



선한 뜻(善意)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 중에 하나이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남을 돕는 것은 우리 삶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방법에 서툴러서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가진 선한 뜻과는 다른 결과를 만들 때도 많다.

예를 들면, 도움을 통해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다. 심지어 모멸감을 느끼게 하거나 미움이 생겨나게 만들기도 한다.

 

젊은 시절, 가난한 전도사로 생활하며 교인들의 사랑과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루는 교회에서 가까운 집사님이 보따리를 주셨다. 우리 아이들보다 좀 더 큰 형제가 있는 집이었는데, 덕분에 아이들에게 작아진 옷을 챙겨서 주신 것이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서 보따리를 아내에게 전했다.

그런데 그 옷을 살피던 아내가 화를 냈다. 열 개는 넘는 옷이 들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태반이 너무 상하거나 낡아서 도저히 아이들에게 입힐 수 없는 옷이었기 때문이다.

아내를 더욱 맘 상하게 한 것은, 그 집사님이 결코 자기의 아이들에게는 아무 것이나 입히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기의 아이들에게는 최상의 것을 주면서, 가난한 전도사의 아이들에게는 너무도 남루한 옷을 물려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도 선의(善意)는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시절, 매달 생활비를 걱정하고 아이들에게 맘껏 해주지 못해 미안해 하던 젊은 아빠와 엄마의 입장에서는, 그 선의를 헤아리기 이전에 너무도 맘이 상하고 속상한 보따리였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예민하고 약하다.

특별히 그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라면, 십중팔구 그 마음도 아주 예민해져 있을 것이다. 때문에 아주 작은 소홀함에도 깊은 상처를 남기거나 오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도울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마 6:3) 그 은밀함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한 방법이지만, 동시에 구제를 받는 사람을 배려하는 가장 아름다운 기술이다.

 

가난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는, 현실적인 도움보다 먼저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야 한다. 그런 마음이 공감(共感)되지 못하면 도움도 순수하게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해서, 누군가를 도우려면 상대의 입장과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무턱대고, 내가 도우려고 했는데 왜 내 마음도 몰라주냐고 말하기 보다는, 과연 내가 도움을 주는 입장이라고 하여서 상대방을 너무 쉽게 내려보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한다.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진실한 도움은 오직 사랑에서만 나온다. 그리고 사랑은 절묘한 기술이 필요하다.

도움을 주면서도 상대를 존중하고 세우는 길은 없는가?

그것이 우리가 함께 고민할 문제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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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1 하나님은 한국인을 사랑하신다


2010년 2월20일, 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었던 밴쿠버.

바이애슬론 여자부 12.5㎞ 집단출발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주인공은 독일의 시모네 하우스발트(31)였다. 그녀는 다음날에 있었던 시상식에서 시상대에 오르기 전에 메달의 세리머니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서양인들에게는 아주 이상한 장면이었다.

시상식 후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의 세리머니를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내 안에 또 다른 나’는 도대체 또 무엇일까?

그녀의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간호사로 독일에 이민을 가서 독일인 남편과 결혼하여 그녀를 낳았다. 결국 그녀가 말한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바로 그녀 안에 흐르고 있는 한국인의 피를 말한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 유계순씨는 시모네가 한국을 아주 좋아한다고 했다.

동계올림픽 기간 동안 선수촌 식당에서는 한국김치가 제공되었다. 시모네는 독일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엄마, 나 매일 김치 먹어!”라고 자랑을 했다고 한다. 또한 어려서 배우지 못했던 한국말을 배우기 위하여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고도 한다.

우리 애국가에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가사가 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그냥 불러 왔지만, 이제 생각하면 의미가 깊다.

우리나라 이름의 요체가 되는 한(韓)은 가죽 위(韋)를 뜻으로 하는 글자이다. 이는 가죽이 무언가를 둘러 싸는 것을 그 의미로 담아 크게 아우른다는 뜻이 있다.

땅도 작은 한반도에 그것도 반쪽이 난 나라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어색하다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나라는 그 이름부터가 영토 보다는 국민을 위주로 하며, 그것도 크게 모두를 아울러서 대국(大國)을 이루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과거에 재외동포에 대하여 거의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덕분에 해외로 향한 한국인들은 현지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몸으로 겪어야 했다. 특별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일본의 재일동포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大恨民國)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한국인의 눈물과 피가 흘려지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한국인임을 포기하지 않으며, 그 고향과 동족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살아온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인이다. 고추장과 김치를 항상 먹어 민족성마저 독해져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당해도 결국에는 이겨내고 뿌리를 내린 이후에, 마침내 대한민국을 찾고 눈물로 고향 땅을 적시는 사람들이 바로 한국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대한민국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토록 아름다운 한국인을 세계 어디서나 떳떳하게 끌어안아 주고, 눈물 닦아 주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恨)을 한(韓)으로 승화시키는 일이 우리 시대에 일어나기를 바란다.

모호해지지 말라. 당신은 어디에 살아도 한국 사람이다. 그것을 잊지 말라.

원래부터 우리가 정치와 권력에는 복이 없었다. 탐관오리가 조선시대를 풍미했다면, 부패한 정치인들이 근대사를 점령했다. 독재자의 폭주(暴走)로 시민들이 학살되고, 자본가의 욕망과 싸우기 위해 노동자들은 분신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 그런 것은 한국땅의 역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쓰러지지 않았다. 한국인은 싸우고 또 싸우며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왔다. 그리고 그 행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믿는다.

광야가 위대한 인간을 낳는 것처럼, 한국인은 한국의 근대사가 주는 파란만장(波瀾萬丈)한 풍파 속에서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향하여 뭔가 큰 일을 행하시기 위하여 이 조그만 ‘한국인’을 준비하시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아우르는 사람이 필요하다.

아우른다는 것은, 타인이 자기와 다름을 인정하며, 동시에 그것을 자기의 색깔 안으로 융합해서 재탄생 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나의 것을 무작정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통해 선택하게 하는 문화적 역량이다.

당신의 피 안에 그런 창조성이 분명히 흐르고 있다. 그것을 인정하라.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다운 길을 새롭게 찾으라. 남이 다 가는 길로 가려고 하지 말고, 한국인으로서 당신만이 걸어갈 수 있는 새로운 길에 도전하라.

그 안에 민족적 자긍심과 더불어 하나님의 비전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하나님은 한국인을 사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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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4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배가 부르면 사람은 타성(惰性)에 젖는다.

그래서 뭔가 갈망하는 마음을 ‘Hungry Spirit’ (헝그리 정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핍을 통해 오히려 의지를 강하게 한다는 것은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 특징이다.

동물도 도전하여 서열과 영역에 대한 싸움을 하지만, 일단 승부가 갈리면 복종한다.

반면에 인간은 납득하기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물론 포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독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역사는 발전하고 사회는 문명화 되어 왔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빛을 만드는 요인은 역설적으로 어둠이다.

독재가 있기에 민주주의가 꽃피고, 가난이 있기에 근면함과 도전정신이 일어나며, 불의가 있기에 정의가 빛난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약점을 강점으로 여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둠을 주셨다면, 그것은 빛을 주시기 위함이다.

문제는 언제나 성장의 기회이다.

부모의 가난은 빨리 독립하여 스스로 서라는 계시다. 진로의 장애는 더욱 의지를 굳세게 하고 기도하라는 뜻이다. 건강의 약함은 운동하라는 권면이다. 고독은 주님과의 더욱 친밀한 교제로의 부르심이다. 실패는 더 큰 성공을 위한 준비이다.

배신은 사람의 진심을 분별하는 지혜를 배우게 한다. 추락은 높아졌을 때에도 겸손하도록 만든다. 상처는 상처 받은 자들을 이해하게 한다. 억울함은 인내를 알게 한다.

그래서 인생(人生)에서는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넘어진 이후에도 배우는 것이 없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를 개혁하고 진리를 향하여 도전할 수 있다면, 많은 결핍이 오히려 위대함의 자산이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보라.

그분은 말구유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다.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권력의 변두리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2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분을 나의 구주로 고백한다.

그분을 닮고 싶다고 기도하고, 그분의 길을 나도 가겠다고 찬양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무엇을 닮겠다는 것인가?

유창한 외국어 실력, 학벌, 경제적 능력, 교양, 원만한 인간관계, 박학한 지식, 쇼맨십… 이런 것은 그분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분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셨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결핍에도 자기를 연민(憐憫)으로 보지 않으셨다.

결핍을 오히려 더 풍성한 은혜와 믿음의 기회로 대하셨다. 죽음 앞에서도 포기를 모르셨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셨다. 삶의 한 자락도 소홀하게 흘리지 않으셨다.

예수님을 묵상하고 배우라. 절박한 심정으로 날마다 그렇게 살아라.

이 보다 더 좋은 인생의 방법은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며, 위대함으로 인도한다. 그분을 통해 배우면 우리는 스스로 가장 행복할 뿐 아니라, 모두에게 가장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비밀이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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