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쉬운 길로 가지 마라! makarios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896)
목회 (632)
목양칼럼 (474)
설교 (132)
교육 (19)
자료보관 (0)
시편묵상 (7)
인생 (179)
동경in일본 (35)
혼자말 (50)
추천 (0)
11-24 03:25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4.1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2009-12-27 새로운 기독교를 기대하며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언제나 세상을 깨우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하나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시대에 기독교가 기독교로 섰던 것은 아닙니다.

그 예전(禮奠)과 조직이 여전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잃어버렸을 때에, 기독교는 회를 칠한 무덤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끊임 없는 예배 속에서도 영적으로 메말라갔고, 시대는 거룩한 교회의 이름으로 어둠의 일들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둠이 한 시대를 풍미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대가 가르쳐 주지 않는 하나님을 골방의 기도와 말씀으로 만나고, 그 하나님을 위해 죽기를 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익숙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등장하였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세상이 알고 있는 그런 하나님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를 영화로 만들었던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생각납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반대하고 마침내 못판 위를 맨발로 걸아갈 때에, 그 장면을 지켜보던 일본인 순사는 주기철 목사님을 설득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변절한 목회자를 향하여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과 주기철이의 하나님은 다르오?”

그렇습니다. 같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도, 주기철 목사님의 하나님과 살기 위해, 아니 이익을 위해 언제라도 변절할 수 있는 종교인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역사 속에서 역동하는 부흥의 역사가 계속되어 왔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 그러나 제대로 만나지 못한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오늘까지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새로운 기독교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타성을 버리고, 하나님을 갈망하며,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부흥케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듯 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멀리 떠난 시대를 각성시킬 수 있는, 새로운 마음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은 그 바탕이 과거입니까? 아니면 성경입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은혜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그러한 각성이 없다면, 당신이 무엇을 행하고 얼마를 제단에 올리든지 그것은 다만 종교적 습관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익숙한 종교생활을 경고합니다. 감동이 없는 신앙생활은 결코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헌신의 삶일 수 없습니다.

믿음을 삶으로 보여주십시오. 당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함께 시대의 어둠을 걷어내고 소중한 교회를 교회되게 할 것입니다. 밋밋하고 무능력한 기독교가 아니라, 시대를 놀라게 하는 성경 속의 바로 그 기독교를 새롭게 이 시대에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동경드림교회의 품은 꿈입니다.

'목회 > 목양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0-01-10 온전한 한 사람  (0) 2014.05.01
2009-12-31 내 마음의 성전  (0) 2014.04.30
2009-12-20 영원한 동행  (0) 2014.04.30
2009-12-13 설교와 설교자  (0) 2014.04.30
2009-12-06 이제 다시 시작이다  (0) 2014.04.30
Posted by makarios
, |

영원한 동행

2009-12-20 목양칼럼

 

월요일에 입원을 했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만 사흘을 보내고 있다.

평생에 처음으로 수술을 경험했다. 수술복을 갈아입고 수술실에 들어가 마취를 기다리며 누워 있는 경험은 인상적이었다. 팔만 마취를 했기 때문에 옆방에서 수술을 하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 순서가 되기를 기다렸다.

마취제가 투여되면서 서서히 나의 팔은 나로부터 분리되어 갔다. 의사는 손가락을 가르고 종양을 떼어냈다. 모든 과정은 1시간 남짓이었다. 하지만 참 많은 생각이 머릿속으로 흘러갔다. 나는 가만히 찬양을 불렀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어린 시절, 어두운 밤길에서도 어머니의 손을 잡으면 두렵지 않았다. 악몽을 꾸는 날에도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 옆에 누군가 있어준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가 되는지 모른다.

결국 인생은 누구와 동행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막연히 혼자 걷는 길이라면 인생은 항상 예기치 못한 두려움과 우울한 느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도 나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는 동행이 있다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물론 부모도, 좋은 친구도, 애인도 소중한 동행이다. 지금도 내 옆에서 새우잠을 자며 나를 간호해 주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안쓰럽고도 따뜻하다. 친구의 자상한 병문안과 아내의 눈물 어린 안부는 다시 한 번 내 삶을 소중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하지만 아무도 영원한 동행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야 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비애일 것이다. 해서 우리는 누군가를 남겨야 하고, 또한 홀로 남아야만 한다.

 

내 나이 마흔, 주님이 없다면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가족을 위한 유산도 만들지 못했고, 하나뿐인 어머니를 내 손으로 모시지도 못했다. 유명한 이름도 없고, 남이 알아주는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얇은 환자복 한 벌을 입고 싸늘한 수술실의 침대 위에 누워 밝은 조명등 아래 내 몸이 샅샅이 비춰졌을 때, 나는 편안했다.

나의 주님은 거기서도 함께 하셨다. 그분은 나를 꼭 안으셨다. 내가 동경드림교회를 섬겨왔던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수많은 과오와 허물이 숨어 있지만, 주님은 그런 상처들을 나무라지 않으셨다. 오히려 어루만지며 쉼을 가지라고 하셨다.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종양이 아니라 내 기억을 떼어내는 수술이었다. 힘들고 쓰렸던 기억들, 내가 교회를 섬기기 위해 흘렸던 눈물을 어루만지는 수술이었다.

 

휠체어에 실려 밖으로 나오니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애틋한 눈빛으로 안도의 숨을 쉬는 어머니를 보며 열심을 다해 살아야 하겠다는 강한 의욕이 피어 올랐다. 나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이 오기까지 아직은 살아야 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그리고 나의 영원한 동행이 되시는 그분을 위해 남은 평생을 살리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보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 살리라. 인생은 참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Posted by makarios
, |

2009-12-13 설교와 설교자



하나님의 말씀이 상실된 시대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

비록 성경의 완성과 함께 기록자로서의 선지자와 사도는 끝이 났지만,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의심하고 부정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것은 자칭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너무 많은 피해와 상처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강단이 개인의 숭배를 위한 독설로 가득 차고, 근거도 없는 축복과 저주의 논리들이 사람들을 농락하는 광경은 불행하게도 이 시대에 너무 흔한 모습이다. 사람들마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말하는 습관을 가졌지만, 정작 어디서도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고통의 경험은 마음을 닫게 하고, 그러기 때문에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설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보다는 필터링 하려는 태도를 흔히 가진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자의 말을 구분하여 들으려는 이러한 태도는 원래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녹음기와 같은 단순한 도구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단지 차갑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설교의 동기는 목양(牧羊)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양떼를 사랑하는 마음이 설교의 동기가 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양떼들은 그가 사랑하고 돌봐야 할 대상이지 믿고 의지하여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 / 김남준 / 생명의말씀사 

(본문 P. 130)

설교자를 설교자가 되게 하는 것은 설교의 기술이 아니라 설교자의 마음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우시는 경험을 통해 설교자 자신을 변화시켜 이루신다. 때문에 변화된 설교자만이 온전한 설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설교자를 특별한 소명의 사람들로 우리가 인식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가 아무리 박식한 지식과 다양한 논리로 긴 시간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부으신 설교자의 마음이 없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그의 행위는 설교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성경과 자기의 생각과 시대의 지식들을 적당히 버무린 잡탕 강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강단을 존중하라는 말을 들어왔다. 때문에 강단에 서고 거룩한 가운을 입으면 일단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간주하려고 하고, 웬만하면 비판하지 않으려는 터부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을 가장 존중하는 태도는 그의 말을 믿는 것이다. 그를 인간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는 태도야말로 강단과 거기 선 하나님의 사람을 가장 존중하는 경건한 태도인 것이다.

속으로는 그의 설교를 비판하고, 자기의 생각으로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듯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류하는 속셈을 품고서 겉으로만 가만히 앉아 고개를 끄덕거린다고 하여서 어찌 그것이 존중과 경외라는 것인가!

설교자와 싸우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진짜 설교는 아무에게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설교자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설교와 설교자 앞에 무릎을 꿇고 거룩한 말씀의 세례를 경험하라는 것이다.

혼돈된 세상을 살기에, 처음 그 설교를 듣는 동안 자기의 신앙과 성경적 토대를 가지고 검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출신 신학교도, 소속 교단도, 그를 파송한 유명한 교회도 믿을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과 성령 가운데 설교자를 분별해야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드러났다면, 우리는 이 모든 인간적 잣대를 모두 버려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를 검증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었을 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종을 향하여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경건의 태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그 설교자를 믿지 못하면서 그에게 영혼의 목양을 받는다는 말인가? 그를 통해 증거되는 말씀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험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죄와 싸워 자기를 변화시키며,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킨다는 말인가?

<300>이라는 인상적인 영화는 스파르타의 영웅들이 시리아의 대군을 물리치는 영웅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 영화 속에서 스파르타의 군인들은 서로 등을 맞대고 적을 맞는다. 그 순간 두 병사는 한 몸이다. 인간은 모두 자기의 앞에 최적화 되어 있고, 반대로 뒤편에는 약하다. 뒤는 볼 수 없으며, 찌를 수 없고, 발로 찰 수도 없다. 하지만 두 병사가 서로 등을 맞대고 싸울 때에 그들의 약점은 서로의 강점으로 보완된다. 그들은 단지 전력을 다해 자기 앞에 있는 적에게만 집중함으로써 자기의 등을 자신에게 맡긴 파트너를 보호한다.

설교자와 신자도 그러해야 한다. 설교자를 계속해서 의심하고 회의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공멸하는 길이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그런 교인들이 넘쳐난다. 자기에게 매주일 설교하는 설교자를 비판하고 못마땅해 하면서도 똑 같은 자리에 앉고, 설교자의 성품과 신앙에 대하여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그의 축도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뭐 하는 짓인가? 이런 종교생활을 과연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반복이 과연 당신의 영혼을 살리고 당신의 성품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것 같은가? 아니면 서서히 고사시켜 마침내 하나님에 대하여도 영적으로 무감각해지도록 만들 것 같은가?

너무나 자명한 미래 앞에서, 사람들은 이런저런 핑계와 변명으로 자기를 기만하고, 신앙을 퇴락시키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작지 않은 죄악이다!

하나의 설교자가 모든 사람의 해답일 수는 없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지만, 설교자는 결코 그런 존재는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시대에 다양한 말씀의 종을 세우시고, 구원의 문을 되도록 넓게 여시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양이라면 자기 목자의 음성은 분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가 집에서 멀다느니, 큰 교회는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논리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당신은 지금 취미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신앙생활을 위해 교회를 찾는 것이다. 당신이 그 교회에 가려는 것은 시설과 사람들이 초점이 아니라, 바로 거룩한 예배가 초점이고, 그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중심이 설교자와 설교이다.

이 초점을 흐리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은, 결국 그 대가를 치를 때가 많다.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경험하지 못할 때 설교자를 대하는 교인들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설교 없이도 살아가는 교회생활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목양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 / 김남준 / 생명의말씀사 

(본문 P. 130)

우리 시대의 맹점과 불행을 본다. 그것은 분별력을 잃어버린 양떼들이 목자 없이 유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운 듯이 생각하지만 가장 미련하다. 자기를 목양할 설교자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그들의 생각은 명백하게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숙하여 그 어떤 도움도 필요 없는 자립된 하나님의 군사로 굳게 서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골방에서 홀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 목표를 위해 진력해야 한다. 또한 그 과정을 돌보고 이끌도록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목회자를 의지해야 한다.

목회자를 가장 훌륭하게 의지하는 방식은, 목회자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설교를 진심으로 듣는 것이다. 그 설교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로부터 사도들이 다른 모든 일을 뒤로 하고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專務)하려고 했던 이유이다.

말씀의 영광이 그립다. 강단 아래의 신자들이 그 말씀 한 마디에 눈물을 쏟고 자기를 부인하던 성경의 장면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지식이 아니라 영적 감동과 은혜가 지배하는 예배가 너무너무 드리고 싶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온전한 목양의 관계 없이 온전한 예배를 지속적으로 드리는 일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거기 서는 사람이나, 거기서 말씀을 듣는 사람이나 좀 더 경외심을 가지고 강단을 대해야만 한다. 우리가 정말 그것을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아멘!

Posted by makarios
, |

2009-12-06 이제 다시 시작이다



목사의 하는 일이 꿈을 꾸는 것이다. 그 꿈을 말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돕는 사람을 붙여 주시고 이루게 하신다. 처음 꿈을 말할 때에는 정말 꿈처럼 들리지만,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하고 기도하면 점점 꿈은 소망이 되고, 현실이 되어간다.

야이로 기도회를 하면서 나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지혜가 건강한 소녀로 자라가는 꿈이며, 동시에 동경드림교회가 성숙한 교회가 되어가는 꿈이다. 아픈 기억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강해지고 건강해지는 꿈, 주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여물어가는 꿈이다.

내년에는 주일학교를 시작할 것이다. 지혜가 그 주일학교에서 자랄 것이다. 누가 동경드림교회 첫 번째 선생님이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그 분은 아마 한 10년쯤은 해주면 좋겠다. 명예로운 근속으로 동경드림교회의 주일학교를 동경에서 제일 훌륭한 주일학교로 만들면 좋겠다. 꿈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꿈을 아이들의 가슴에 심는 교회가 되면 참 좋겠다!

내년에는 강단에 집사님들을 세울 생각이다. 사도행전을 읽으며,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님들은 모두 훌륭한 설교자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동적으로 목사의 설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널리 증거하는 진짜 집사를 세우고 싶다.

조금 부족하면 어떤가? 그래서 목사가 있지 않는가! 지난 20년을 신학에 게으르지 않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아직도 모르고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성경에 대하여는 남부끄럽지 않게 연구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내가 부축하며 집사님들을 세우는 일은 그리 과도한 일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신나고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동경드림교회의 집사는 보통 말하는 그런 집사가 아니라, 정말 성경에 나오는 바로 그 집사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집사님들에게 계속해서 꿈을 꾸고, 그 꿈을 어떻게 현실 속에서 이루고 성취할 것인가를 알기 위해 기도할 것이다.

 

꿈은 도전의 원인이 되고, 도전은 시행착오(施行錯誤)를 동반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와는 다르다. 실패는 거듭될수록 꿈을 작아지게 만들지만, 시행착오는 거듭될수록 꿈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명확하게 만들어 준다.

나는 동경드림교회가 이미 3년의 시간을 사용했지만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교회를 위해 헌신할 마음을 준비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고, 우리가 사역할 바로 이 자리의 정서를 습득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지만 잘 이기며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중요한 것을 하나 얻었는데, 그것은 우리 교회의 고유한 색깔이다.

말하자면, 성공하는 교회의 방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로서의 교회가 가져야 하는 철학을 만들어 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동경드림교회에 와서 분위기가 가족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위기 이상을 원했다. 우리는 분위기만 가족인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 가족인 교회를 원했다.

밥 한 그릇을 나누어 먹어도 끝까지 함께하며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와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를 헌신할 수 있는 사랑을 원했다.

각자 개성은 다르고, 신앙의 차이도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험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우리’의 공동체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깨닫고,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며, 자기를 낮추어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를 규정하는 색깔과 의미를 찾아내는 교회를 원했다.

마음 아픈 갈등도 있었을 것이다. 힘겨운 신앙적 싸움도 있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섬겨 믿고, 카인의 길이 아니라 아벨의 길을 걸으려고 노력하며 여기까지 왔다.

나는 지금 우리가 육신의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까워져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교성이 좋고 서로 호감을 가질 정도로 유사한 기질의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동경드림교회는 오직 하나의 신앙적 색깔로 인하여 하나가 되어 왔다. 그 하나의 신앙적 노선을 목사로서 일관성 있게 나름 잘 가꾸어 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을 우리의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성경적 신앙 안에서 건강한 자극을 주었고, 교회에 대한 선한 이미지를 심었으며, 각자의 비전과 소명을 위해 기도했고, 사람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해 왔다. 손해를 감수했고, 억울함을 참았으며, 신앙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며 여기까지 왔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그런 교회를 거의 찾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마다 교회에 대한 염증과 싸우며, 의미 없는 공허함에 대하여 불평하는 소리를 들어보라.

동경드림교회는 참 소중한 교회이다. 적어도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그렇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오늘 아침, 마음은 비장한 각오와 꿈으로 다시 빛나고 있다.

Posted by makarios
, |

2009-11-29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교의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이다. 

무쏘 혹은 무소는 코뿔소(犀:서)를 의미한다. 야생의 소가 대부분 군집 생활을 하는 것에 비하여 코뿔소는 혼자서 생활한다고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뿐인 그 뿔은 ‘고독’과 ‘굳셈’을 의미한다. 

이 강력한 상징을 통하여, 부처는 구도자의 길이 어떠함을 제자들에게 설명한 것이다.

부처의 말이라고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따르기 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가 확신하는 바에 의지하여 진리만을 추구하라는 가르침이다.

결국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길은 고독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타인의 견해와 주변적인 영향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며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내면적인 굳셈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다.

고린도후서 3:12~15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말세의 시대적 특징으로 속고 속이는 혼돈을 예상했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서 구원의 길, 진리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확신으로 무장해야만 한다. 이러한 기독교 믿음의 근간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이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어려서부터 가까이 했던 바로 그 성경에 근거하여 확신하는 바에 든든하게 서라고 말씀하고 있다. 

악하고 혼돈스러운 세상 가운데서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것이다.

확신을 잃어버린 시대이기에 사람들은 귀가 얇다. 절대적 진리라고 믿었던 과학의 이론들조차 상대적인 것으로 변모하고 있다. 과거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거듭되는 현실에서, 오히려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기적과 같다. 

그런 세상에서 목회자의 길을 간다는 것은 고독한 일이다. 더구나 일본에서의 사역은 더욱 고립감을 크게 한다. 정말 손에 남은 것은 성경책 하나뿐인 느낌이다.

강해져야 한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 내면적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에서도 더욱 단단해지지 않으면 나는 나의 사명을 성취할 수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기서 살아남아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절박감이 나를 재촉하고 있다. 

강한 줄로만 알았던 내가, 아직은 더 많이 연단되어야 할 무른 쇠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며 마음으로 다시 무장하고 있다. 

광야에서 자란 세례요한처럼, 이 고독은 결국 나를 강하게 할 것이다. 그것을 믿고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리라…

눅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Posted by makarios
, |

2009-11-22 진정 응답을 기대하는가?



<투명인간>으로 유명한 작가, H.G. 웰스의 단편소설 중에 <어느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작품이 있다.

어느 성당에 기도를 잘 한다는 대주교가 있었다. 그는 젊은 날에 사제로 성당에 부임한 이후로 3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만큼의 기도를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는 결코 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음식을 먹고 체해서 자리에 누웠을 때에는, 사람들이 오늘이야말로 이 기록이 깨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도시간에 아픈 몸을 이끌고 기도의 자리에 나타난 대주교를 보면서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 대주교의 30년 기록은 아무도 깨지 못할, 자랑스러운 기록이었다. 사람들은 대주교를 존경하며, 부러워하고, 칭찬했다.

또한 대주교의 기도솜씨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그가 두 손을 들고, 애절한 목소리로 기도할 때에 듣는 사람들은 감동했고, 그 깊이에 놀랐다. 대주교의 기도하는 모습은 마치 모세나, 엘리야나, 예수님의 그것과 같았다. 그런 기도를 구경하기 위해서 먼 곳에서 순례자들이 찾아올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대주교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것도 기도 시간에 죽었다.

그날도 거룩한 복장을 하고 예배당의 기도자리에서 “오, 거룩하신 하나님!”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자 “오냐, 왜 그러느냐?”라는 음성이 하늘에서 들렸던 것이다. 평생 처음 들어보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놀라서 대주교는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결국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초등학교 시절, 시험문제 중에서 서로 상관 있는 것끼리 줄로 이으라는 문제가 나왔다. 문제의 의도를 알지 못하면 엉뚱한 것이 서로 이어진다. 그러나 문제의 의도를 아는 사람은 아주 쉽게 서로 짝을 이루는 것을 찾는다. 그냥 따로 떼어놓고 볼 때에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았던 것들이 서로 선을 긋고 함께 생각하면 분명한 의도와 함께 조화를 보여준다.

우리는 기도하며 산다. 그것을 쉽게 설명하면 우리의 소원과 하나님의 응답을 줄로 잇는 과정이다.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환경이 변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의 대부분은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둘의 충돌 속에서, 우리가 바른 정답을 찾아내는 과정이 바로 기도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예민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공중에서 들리는 음성으로 우리에게 해답을 주시는 경우는 아주 드물지만, 환경과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를 해답으로 인도하시는 경우는 아주 많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중에 일어나는 사고, 기도하는 중에 생겨나는 다툼, 기도하는 중에 겪게 되는 어려움은 모두 응답의 과정이다. 그 안에 깊이 음미하고 우리가 깨달아야 할 의미가 숨어 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이 종종 너무 무디고 미련하다는 것을 경험한다.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기도하고는 그 사실을 모두 잊어 버린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그저 억울해하고, 흥분하고, 낙심하는 것을 보면, 과연 하나님을 믿고 응답을 구하는 사람인가 의구심이 생기곤 한다.

믿음이 없으면 30년을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 기도가 사람들에게 자랑은 될지언정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친밀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결국 그의 기도는 경건의 모양만 있고 그 능력이 없는 허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을 기대하라. 응답을 기대한다면, 삶의 순간순간을 민감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어디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놀라지 말고 순종할 수 있도록, 온 맘과 귀를 그분께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응답 받는 기도의 조건이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09-11-15 기도하는 자의 하나님



야이로 기도회를 11월 한 달로 잡은 이유는, 단지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실은 지난 여름부터 이 기도회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밖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혜에 대한 기도에 개인적으로 헌신하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 즈음일 것이다. 

다만 목양을 하는 목사로서 우리 교회가 가진 영적 수준을 가늠했다. 

한결같은 기도는 지구력과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 기도를 시작하면 기도를 방해하는 많은 일상들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로부터 오는 실망, 분주하게 만드는 문제들, 육체적 피로,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무력감까지 찾아온다. 그 모든 것을 이겨내며 싸워가는 과정이 바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이른 것과 같이 끈질기게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영적 성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절대로 못하는 일이다. 

당번을 정하기는 했지만, 모두가 매일 기도하기를 원했다. 그럴 만큼 절실한 문제요, 또한 우리가 함께 풀어가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주가 지난 지금,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빠짐없이 기도하고 있을까?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라는 말이 있다. 시기를 놓치면 아무리 훌륭한 약방문이라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기도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물론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하지만, 솔직히 우리는 그렇게 실천할 만큼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때를 분별하고 집중하여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약점을 조금은 커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야이로 기도회’는 소중한 기회이다. 평소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못했던 우리 자신에게 마지막 찬스를 주고 있는 셈이다. 

부탁이다! 제발 기도하라. 빠지지 말고 기도하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기도하라. 기도만이 우리의 딸을 살리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모두 잘 되는 길이다.

기도할 때에는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삶이 기도를 중심으로 재편 되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기도하지 않을 때와 똑같이 산다는 것은 자기 기도를 훼손하는 일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조심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이 도미노를 쌓는 과정을 본 적이 있는가? 10개를 세웠을 때에는 별로 부담감이 없다. 그러나 100개가 세워지고, 1000개가 세워져서 완성에 가까울수록 얼마나 많은 부담을 느끼며 정성을 기울이게 되는가? 

사소한 문제로 은혜를 쏟으면 기도가 막힌다. 기도가 막힌다는 것은 그간에 쌓아왔던 기도의 제단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아이를 잉태한 여인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돌봐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동경드림교회가 자라기를 원하신다. 

빈 자리가 가득 차게 해달라고 기도해 왔다. 지난 주에 처음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앞으로는 흘러 넘쳐서 이 동경을 비옥하게 하는 교회가 되야 한다. 에스겔의 환상처럼 성전의 문지방에서 샘이 흘러 나와 온 세상을 적시는 비전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길은 기도하는 자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한 달이 1년이 되고, 1년이 10년이 되고, 마침내 평생을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의 뒤를 좇을 때에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부흥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09-11-01

 

사람에게 있어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소홀히 여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육체가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위한 삶은 결과적으로 허무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근본적인 만족을 줄 수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입에 달콤한 음식을 즐기면 이가 썩는다. 건강에도 이로울 리가 없다. 하물며 인생 자체에서 육체가 원하는 삶을 사는데 진정한 만족과 행복이 올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육체는 관리해야 한다. 몸무게만이 아니라 모든 소욕에 대하여 적절한 제한과 조절이 필요하다. 좋은 것도 지나치면 좋지 않다[過猶不及]. 모든 것에 과도한 욕심을 경계하고 우리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해야 한다.

3D 직종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기피하고 꺼리는 직업을 분류하니 어렵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ous)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직업군을 3D 직종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비록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나는 목사야말로 3D 중의 3D 직종이라고 생각한다.

목사가 사명이지 직업이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엄연한 현실이 그 일로 가족을 부양하고 먹고 살아가니 직업이 분명하다. 하지만 고생을 하되 알아주는 사람이 적고, 옷은 더러워지지 않아도 기분을 더럽힐 때가 많으며, 때로는 몸뿐 아니라 그 정신까지 걸고 위험한 승부를 해야 하니 분명히 3D 직종이 맞다.

자기를 혹사하는 것에 비하여 말도 되지 않는 이익을 취하지만, 그럼에도 그 길을 가는 것은 그것이 직업만이 아니라 사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것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목사는 목사만이 아는 뭔가가 있기에 그 길을 가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목사도 가끔은 피곤하다. 푸념이 아니라 사실이다.

진짜 피곤함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몸의 피곤함이 아니다. 영혼의 피곤함이다. 몸의 피곤함은 아무리 피곤해도 그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영혼의 피곤함은 그 끝과 깊이를 모르겠다.

한 주일을, 한 달을, 3년을 위하여 기도하며 복음을 뿌렸다. 그 기다림의 세월이 쉽지 않았다. 피붙이도 아니지만 형제보다 더 가까이 품고 기다렸다. 그런데도 묵묵부답(黙黙不答)이다. 도무지 기대했던 믿음의 싹이 보이지를 않는다. 말하는 것은 육체적인 것에만 빠져 있고, 살아가는 것은 게으름의 전형이다.

이제는 맘을 접어야 할까? 솔직히 그러고 싶다. 하지만 아직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는가 보다. 다른 양을 붙여주시지 않고 계속 그 양을 내 앞에 두시니 말이다.

그래도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왜 그것을 모르는가? 은혜 받을 때에 은혜를 받지 못하면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 참담한 말이지만 그것이 성경이다. 은혜와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만하면 언젠가는 자기가 그 대가를 치른다. 정말 조심할 일이다.

목회자를 영적으로 피곤하게 하지 말라. 내 말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제발 주의 깊게 새겨 들으라.

 

히 13:17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Posted by makarios
, |

2009-10-25 믿음은 그런 것이다


믿음은 미래를 선취(先取)하는 것이다.

한 마을에서 가뭄이 계속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께 비를 구하는 연합 기도회를 드리기로 했다. 사람들은 빠짐없이 모였고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자 기적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장대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예배당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 때, 한 아이가 장화를 신고, 우산을 쓰고 즐겁게 현관을 나섰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보면서 뭔가 머쓱함을 느껴야 했다.

얼마 전에 누군가에게 스티븐 잡스와 오프리 윈프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비전을 격려했다. 그랬더니 그의 말이, “나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닌데요!”였다.

물론 그것은 현재에 사실이다. 그러나 미래에는? 스티븐 잡스나 오프라 윈프리는 처음부터 세계적인 명사가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고 하던가? 오히려 우리보다 더 불운한 삶의 과정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긍정하며 비전을 품었기에 오늘날의 그들이 된 것이 아닌가?

결국 인생은 믿음의 문제이다. 하나님도 믿지 못하고, 자기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이 나오겠는가? 어떻게 가치 있고 감동적인 인생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겠는가?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특히나 유감인 부분이 그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가난해도 아이는 꿈이 컸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운명처럼 지긋지긋한 가난을 극복해 보겠다는 강단(剛斷) 있는 아이들, 젊은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코피를 쏟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물로 배를 채우고도 하늘을 가슴에 품었다.

그러나 요즘은 너무 쉽게 운명을 받아들인다. 오히려 요즘이 더 미신(迷信)적인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다만 무당과 점쟁이가 아니라, 학벌과 재산에 대한 과도한 맹신(盲信)이 시대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는 내가 기도를 하다가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목회는 힘들고, 사람들은 변하지 않고, 미래는 불투명했다. 불안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입으로 토하며, 나 자신에 대하여 연민에 가득 찼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쌍했다!

한참을 그렇게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님의 음성이 조용히 마음에 들려왔다. 

”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재에 고생을 해도 긍정적인 미래가 보이면 불행하지는 않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약함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절망스럽게만 보는 것은 약함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악함이다.

무지는 약함(弱)이지 악함(惡)은 아니다. 그러나 그 무지가 반드시 불행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찰 필요는 없다. 여기서부터는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악함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기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그 대답을 듣고 염려를 하고, 걱정을 해도 늦지 않는다. 너무 빨리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높인 나머지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스스로 다 결정하는 것은 결코 바른 믿음의 태도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열 가지 못하는 무능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하는 한 가지가 중요하다. 그것을 내게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것에 미쳐서 10년만 살아보라!

실패보다 나쁜 것은 실패만 생각하는 정신이고, 실패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처럼 나약한가? 왜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폄하하는 생각을 멈추지 않는가?

스스로 불쌍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런 우리의 태도로 인하여 가장 많이 슬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모든 말은 내가 혼자 했다. 그 말을 믿고 사는 내가 불쌍할 뿐이다.

하지만 기도와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준다. 그 안에서 우리는 꿈을 품고, 자기를 기대하게 된다. 현실은 평범하지만, 나도 위대한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살게 한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09-10-18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



교회마다 청년의 가뭄이다. 몇몇 교회들은 청년사역이라는 특성으로 알려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청년들이 귀해졌다. 베이비붐 시대가 지나면서 출산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사회의 노령화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인 노령화보다 더 급하게 교회의 노령화가 진척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별로 자각이 없는 것 같다.

교회는 왜 청년들을 잃게 되었을까? 사실 나는 이 점에 대하여 할 말이 많다. 지난 반 평생, 20여 년을 사역했다. 교육부서를 맡아 주일학교와 청년들을 담당했던 시간만도 십 수년은 되는 것 같다. 그 안에서 나는 참 많이 감동했고 또 절망했다.

사람들은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의 특징을 찬양과 훈련으로 요약한다. 물론 이 점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기존의 조직과 틀을 가지고서는 새술과 같은 청년들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청년목회의 가장 중요한 색깔은 ‘감성’이다. 청년들은 감동을 찾고, 감동을 통해 힘을 얻으며, 감동할 때 헌신한다. 장년과 같이 의무감이나, 직분,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 보다는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그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기성세대의 장년들에게는 무책임하게 보여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비난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교회적 특성을 가다듬으면 청년들은 지금이라도 교회 안에서 정착하고 자라갈 수 있다.

그런데 이 감성을 일깨우는 감동이 다만 ‘헐리웃 액션’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늘 하는 말이지만, 강아지도 자기를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가족을 알아본다. 하물며 사람이고, 그토록 감수성이 뛰어난 청년들이 어찌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그 무엇을 느끼지 못하겠는가?

그래서 교회가 청년들을 잃고 있는 것은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은 헌금을 많이 하지 못한다. 청년들은 연애문제를 일으킨다. 청년들은 힘 쓰고, 귀찮은 일을 시키기에는 좋지만,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에는 아직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청년들은 그저 간식을 주고, 밥을 사 먹이면 좋아한다. 청년들은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쓰레기를 만든다.

솔직하게 대답해 보자. 이런 생각들이 기본에 깔려 있다면 아무리 청년부 예산을 많이 집행하고, 훌륭한 프로그램과 전임 사역자를 둔다고 하더라도 과연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나겠는가?

 

나는 동경드림교회에 부임하고 장년들을 독려해 왔다. 모든 궂은 일을 장년들에게 요구했다. 청년들을 심부름꾼처럼 여기거나 종처럼 시키려고 하는 태도를 경계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청년들을 내 자식처럼 여기는 마음을 교회에 심기 위해서였다.

물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하고 섬겨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나이가 많기 때문에 당연히 누려야 하는 위세는 아니다. 오히려 나이 먹은 사람은 나이 먹은 값을 해야 하고, 존경의 몸짓 만이 아니라 존경의 마음을 품도록 만들어야 하는 더 큰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 ‘어른 되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청년들은 자기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장년을 존경한다. 그리고 그런 장년이 있는 교회는 청년들이 부흥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청년의 시기야말로 사랑에 가장 민감하고 목마른 시기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옷에 맞추어야 하는가? 옷이 아이에게 맞추어야 하는가?

물론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는 배내옷을 준비한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면 그 옷을 손질하여 아이에게 맞추어 입힌다. 조직과 프로그램, 찬양과 훈련 등은 청년들을 교회 안에서 입히는 옷과 같다. 그것은 청년들이 많이 모이면 저절로 해결되어간다.

청년들 중에서 좋은 리더가 나와 조직을 정비하고, 그들 스스로 연습하여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훈련 또한 그리 어렵지 않다. 일단 모이기 시작하면 말이다.

우리 교회가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성에 차지는 않는다. 청년들을 부모로서의 시각으로 봐야 하는데, 동경그림교회의 장년들이 아직 너무 젊어서 그런 시각을 쉽게 가지지 못한다. 형과 누이의 시각으로 보니, 아직도 품고 사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훈련된 청년은 교회 안에서 심부름이나 잘하는 청년이 아니다. 훈련된 청년은 신앙 안에서 진로를 결정하고, 배우자를 선택하며, 신앙적 삶을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청년이다. 그런 청년은 조직과 훈련이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만남과 감동이 세운다.

목회자가 감동스러워야 하고, 장년들이 그러해야 한다. 그러면 청년들은 그 모습을 보고 꼭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뒤를 따르는 것이다. 때문에 청년을 훈련하고 싶다면 당연히 장년을 먼저 훈련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가르침이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청년들이 필요하다. 우리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이 시대의 교회들이 헌신된 청년들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원한다. 1년 워킹비자로 왔다 가면 어떠한가? 그들이 어디서든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으로 서 준다면, 함께 살아가고 늙는다는 사실 만으로도 기쁘지 않겠는가?  

Posted by makario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