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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4


플로리다의 한 시골에 청년 우체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황량한 시골길을 걸어 날마다 편지를 배달하는 자신의 일을 지겨워했습니다. 언제고 기회가 생긴다면 직업을 바꾸어 이 지긋지긋한 시골을 벗어나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신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신 삶의 자리에 분명 의미가 있다고 믿고, 그 자리를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변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머니에 꽃씨를 넣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황량한 시골길을 걸으며 그는 조금씩 자기의 주머니에서 꽃씨를 꺼내 길에 뿌리기도 하고, 어떤 것은 손수 심기도 하였습니다.

무려 30년 지나도록 그는 그 일을 꾸준히 했습니다. 

이제 그가 다니던 길에는 무수한 꽃이 피어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하였습니다. 그 지역의 명소가 되어 사람들이 찾아왔고, 꽃에 취하던 사람들은 한 우체부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다시 한 번 감동하였습니다.

사람이 앉았다가 일어난 자리에 쓰레기만 남는 사람이 있고 인격의 향기가 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큰 일, 큰 비전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모든 인간의 일이 오히려 작은 일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며, 성실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먼 미래의 성공이 아니라 바로 지금 현실에서 우리가 믿음에 합당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무한 삶의 자리에 여러분도 꽃씨를 좀 뿌려 보십시오. 남을 잠시 웃게 하는 유머일수도 있고, 같이 나누는 커피 한 잔의 여유일수도 있고, 힘을 잃은 지체를 위한 격려의 쪽지일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누구처럼 꾸준히 해나가다보면 그것으로 인해 내 주변이 꽃밭으로 변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신자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격의 향기가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일을 믿음과 성실함으로 행할 때에 세상은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려운 현실을 방치하지 말고, 사람을 귀히 여기십시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삶을 보여주십시오. 여러분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 자리에 파송되었습니다. 이 신분과 사명을 절대로 잊지 말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동경드림교회의 지체들에게 주께서 능력 주시기를 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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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7


예수님은 다양한 신분과 직업의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셀롯 당원 시몬은 당시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여 무장혁명을 주장하던 사람이었지만, 세리 마태는 로마의 준 관료로 자기 백성으로부터 개 취급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의 집안은 괜찮았고, 나다나엘은 경건했지만, 베드로는 성격이 급했고, 빌립과 도마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뜯어보면 어떻게 이 열둘이 하나의 팀을 이룰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화목하게 하셨고 오히려 그들의 연합으로부터 폭발적인 능력을 이끌어내셨습니다.

우리가 ‘화목’이라는 말을 성경에서 찾아볼 때에, 그 말은 성향과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말은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뭔가 불편하고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가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시를 누군가 끌어안고 용서해 주기 때문에 일어나는 평화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화목’인 것입니다.

저는 교회의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러한 ‘화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향이 맞아서 하나된 사람들이 아니라, 신앙이 같아서 하나된 사람들의 모입니다. 때문에 언제나 충돌과 경쟁, 시기와 같은 불편한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12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불현듯 누군가 자기들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설명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언가를 느끼는 순간, 그들과 동행하던 바로 그 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동행이 우리들의 교회에도 계속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둘이지만 사실은 셋입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화목을 배우고 누군가의 가시를 끌어안아 용서하고 관용합니다. 그 은혜의 용납 속에서 교회는 교회로서 ‘화목’의 특징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겸손의 마음이며 또한 화목의 마음입니다. 그분이 스스로 낮아지셨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의 화목뿐 아니라 우리끼리의 화목이 가능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동경드림교회는 품이 넓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틀을 버리고 예수의 품에 안겨서 함께 행복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기 내어줌은 결코 우리의 자존심과 이기심 안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 안에서 ‘화목’을 깨우쳐 갑시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을 버리고 서로 은혜로 세우는 공동체가 되도록 합시다. 그래서 동경드림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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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30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좋은 교회란 사람이 많이 모이기도 해야 하지만, 모인 사람들이 제대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양편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그래도 중심은 ‘많다’ 보다는 ‘변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교회가 거대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성장에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지역의 특성과 시대의 필요성, 그리고 그 교회가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역량들이 함께 작용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마치 기업의 생리처럼 작은 교회가 무조건 큰 교회를 벤치마킹 하려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런 노력은 성경이 말해주는 교회의 존재목적에 부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시기까지 기다려야 하며, 그 기다림의 가정을 어떤 비전과 기도로 준비할 것이냐가 보다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저는 목회에서 사람을 중시합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주어진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돋보기를 통해 태양의 광선이 하나의 초점에 모아질 때 불이 붙는 것처럼 사람도 관심과 애정의 초점을 통해서만 변화된다고 믿습니다. 

저는 동경드림교회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성장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그 과정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이냐의 문제는 지금 우리의 반응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이미 결정된 길이었지만, 다만 그들의 믿음과 반응에 따라 그 시일은 단축되기도, 지연되기도 하였습니다.

애굽에서의 습성을 고치고, 마음의 패역을 버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갈 때에 이스라엘은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에 있어 가나안땅의 축복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것을 위해 존재합니다. 때문에 남이 아니라 바로 내가 문제입니다. 핑계만 일삼고 정작 믿음이 없어 기도하지 못하는 나, 설교를 듣고 이해는 하지만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 감동이 내려오지 못하는 나, 남을 판단하되 자신을 고치지 못하는 내가 문제입니다.

교회만 커지면 뭐합니까? 내가 고쳐지지 않으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 바른 목적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의 열매는 저절로 맺어질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의 일에 집중하고, 성도는 성도의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교회요, 큰 교회요, 바른 교회입니다. 동경드림교회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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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3


미국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헌법에 의거, 1849년 3월4일 대통령에 취임해야 되는데 그날이 주일이라 취임을 거부하여 에치슨 상원의장이 24시간 대통령 임무를 대신했습니다.   

주일성수는 대통령 취임식보다 우선하는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1924년 프랑스 파리 올림픽 당시 100m 세계 신기록 보유자 영국 에릭 리들(Eric Liddel) 선수는 100m 결승전 경주가 주일에 열리자 경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높여주셨습니다. 

400M경주에 출전하는 다른 선수가 갑자기 뛸 수 없게 되어 그가 대신 뛰었습니다. 그는 한번도 400m 경주를 해본 적이 없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47.6초의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는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서 1945년 병사할 때까지 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마도 천국에서 받은 그의 상급은 올림픽 금메달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죤 길모어 목사가 하루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작은 마을에 일력거로 주방용품을 팔고 있는 노인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서로 인사하며 안부를 묻고, 장사는 요즘 어떤지, 경기는 어떤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목사님은 할아버지께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믿는다고 대답하자 죤 길모어 목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인 것 같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때 할아버지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이 있지요. 그건 나를 구원해 준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랍니다." 

그 순간 길모어 목사는 '아! 나는 목회자로서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도 좋지만 항상 나와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든든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모습들을 알게 됩니다. 도전과 신뢰와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나보다 조금 부족해 보이더라도 옆에 있는 지체와 대화를 나눠 보세요. 당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가르쳐줄 사람입니다. 

주일입니다. 온전히 주일을 성수하시고 예배를 통하여 은혜로 충만케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일은 육신의 빵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멈추고 영적인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는 날입니다. 이 날의 은혜가 우리의 일주일을 지배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오늘은 누구를 통해 내게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설교를 주의하여 들으십시오. 그러나 목사만이 아니라 모든 지체들을 통하여 주님이 말씀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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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6


독일계 신학자로서 미국에서 활약하였던 폴 틸리히(Paul Tillich,1886-1965)란 분이 있다. 틸리히 교수가 한 말 중에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용기에 대한 말이다.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보다 덜 중요한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용기이다!”

옳은 말이다. 인생은 어차피 모든 것을 다 누릴 수가 없고 다 가질 수가 없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가장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보다 덜 중요한 것은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좇기 위해서는 배와 그물을 버려야 한다. 심지어 어떤 청년은 모든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초대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과는 반대로 부자였던 청년은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다.

그가 율법을 준행하고 선을 행하였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소유에 대한 애착이 더 컸던 까닭이다.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영성이다. 특히 세상에서 귀히 여기는 것을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포기할 수 있을 때 신자의 영성은 무르익는다. 이러한 버림은 억지로 아깝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은혜의 깨달음 속에서 일어난다. 바울이 세상의 모든 지식과 명예를 배설물로 여겼던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중국 사람들이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있다. 원숭이가 땅콩을 좋아하기에 원숭이가 다니는 숲속 길목에 땅콩이 든 옹기 항아리를 하나 묶어 둔다. 그 항아리의 주둥이는 겨우 원숭이의 편 손이 들어갈 만한 크기로 되어있다. 땅콩 냄새를 맡은 원숭이는 항아리 속에 손을 넣어 땅콩을 한 움큼 잡는다. 그리고 손을 빼려한다. 그러나 손에 든 땅콩 때문에 손이 빠지지 않는다. 그때 가서 원숭이를 잡는다.

원숭이가 살려면 손바닥 안에 든 땅콩을 버리면 손이 빠져나와 살게 되지만 원숭이는 땅콩이 아까워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잡혀 죽게 된다. 원숭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도 이와 같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살게 하시기 위하여 버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의심하고 조롱한다. 버려야 비로소 더 좋은 것을 주실 터인데 끝까지 자기 몫을 스스로 지키겠다고 고집하고 아우성친다. 

지금 우리에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그것을 붙잡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것이라도 포기할 용기가 있는가? 부족하다면 은혜의 깨달음과 용기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일이다. 버려야 할 때에 버리지 못하면 인생은 변하지 않는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용기 있는 자만이 승리를 차지한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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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9


일본을 강타한 태풍으로 인하여 며칠간 떠들썩하였습니다. 태풍이 막 지나가고 있던 금요일에는 지체들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 “목사님, 내일 야유회 가는 겁니까?” 묻기도 했습니다.

금요일 새벽에는 교회로 오다가 자전거 탄 채로 바람에 날려갈뻔 했기 때문에 저도 내심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렵게 결정하고 준비한 교회행사를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감을 실어 “물론이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금요일 밤에 교회로 퇴근을 해서 이것저것 준비를 하는 지체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피곤한 모습이 역력했던 이선경 권찰과 두레양이 제일 수고를 했습니다. 최동현 집사님은 12시가 넘어 퇴근을 했다 하고, 장수호권찰은 자기에게 제일 중요한 수업이 갑자기 토요일 오후로 변경되어 갈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먼저 생각하기로 하고 하루 종일 운전하는 일에 자기를 헌신했습니다. 김선연권찰은 회사일이 밀려들어 힘든데도 시간을 내기 위해 사흘은 해야 할 일을 하루에 해치웠다고 합니다. 박성윤 형제는 무거운 물품들을 구입하는 일에 수고했습니다.

그렇게 떠난 야유회인데,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태풍으로 인하여 폐장이랍니다. 주변의 계곡은 전부 물이 불어나 입장이 금지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밥 먹을 장소도 찾기가 막막했습니다.

차를 돌려 우선은 드라이브를 하기로 하고, 길을 떠나며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날씨도 주셨으니 좋은 장소도 주실거야. 그래,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려고 여기를 막으신 거야...”

그렇게 길을 가다가 [아메리칸 캠프장]이라는 곳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하루를 보내며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계곡도 적당했고, 주변의 숲도 너무 좋아서 모두가 스모 선수처럼 먹고 어린 아이처럼 놀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저는 40여년을 신앙생활 했는데도 제 믿음에 불만이 많습니다. 안 믿어질 때가 많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속으로 의심할 때가 많습니다. 목사이니까 드러내지 못할 뿐이지 사실은 내 안에 너무나도 믿음 없는 나의 모습을 숨기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압니다. 기도와 말씀을 누리고 맞이하는 하루와 그렇지 못한 하루가 다르다는 것 말입니다. 기도와 말씀을 충분히 섭취하면 내 안의 믿음 없는 자아가 줄어들고, 믿음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을 쉬면 믿음 없는 자아가 마치 고삐 풀린 못된 송아지처럼 나를 흔들고 무너뜨립니다.

저는 이번 야유회를 통해서도 개인적으로 주님의 선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의 행복한 모습은 바로 제가 기도했던 바로 그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행복을 지켜보며 저도 너무 행복했습니다. 들어주신 주님과 행복의 이유가 되어준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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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2


정신이 산만하고 생각이 복잡할 때에 꼭 적당한 일이 ‘청소’가 아닌가 합니다.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말끔하게 주변을 정리하는 것에 몰두하면 한 동안 마음의 근심을 잊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정돈된 후에는 깨끗한 환경에서 우울한 근심으로 궁상을 떤다는 것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9월입니다. 더위에 지쳤던 여름이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한기를 느끼게  됩니다. 조금만 지나면 光が丘公園에는 노란 단풍이 그림처럼 길을 물들이겠지요. 올해에도 기대가 됩니다.

동경의 여름은 참 힘든 계절입니다. 낮에는 각기 직장에서 에어컨과 보내겠지만, 밤이면 아무리 에어컨을 켜두고 잠이 들어도 두어 시간 간격으로 잠을 설치기 일쑤입니다. 간혹 형편으로 인하여 에어컨이 없이 여름을 보내는 분들은 그야말로 낮과 밤이 다 습도와 열기로 곤혹(困惑)을 치르게 됩니다. 그렇게 긴 여름이 지나간 것입니다.

불볕으로 끓어오르던 아스팔트가 단단해 졌습니다. 아침과 저녁은 책을 읽고 산책을 하기에 정말 좋은 계절입니다. 그래서 여름 동안에 몸에 배였던 게으름을 털어내고 이제는 다시 건강한 삶의 리듬과 탄력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청소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요? 유리창도 닦고, 책상과 책장도 정리하고, 각자의 서랍도 한 번 뒤집어 정리하도록 합시다.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고, 필요한 것들을 재충전하고, 남은 2007년도를 열심히 살기로 스스로 다짐하고 또 결심하도록 합시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야유회 다녀와서는 멈췄던 큐티도 다시 시작하고, 기도생활에도 열심을 가지도록 합시다. 교회에 나오셔도 좋고, 집에서 골방의 기도를 해도 좋습니다. 다만 의지가 약해서 결심한 것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다면 함께 교회에 모여서 서로 격려하며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향한 성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의 제일 되는 의무는 자기를 지키고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스스로 건강해야 섬길 수 있고, 싸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름 동안에 느슨해졌던 우리 자신의 정서를 이 정도 즈음에서 다시 점검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시오. 특히 마음을 다잡아 신앙을 단정히 합시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도 말씀의 질서가 생겨서 혼돈이 없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각자의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책임을 감당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변의 사람들을 섬기고 돌보는 것에도 노력합시다. 적당한 운동도 시작합시다. 맘이 움직이면 몸도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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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6


건망증이 심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분은 마음이 좋아서 주변에 친구가 많았습니다. 하루는 다른 교회의 목사님이 사정이 생겨서 대신 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이 목사님은 먼 길이지만 마다하지 않고 가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을 가는데, 검표원이 앞에서부터 표를 검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도 표를 찾았지만, 도통 찾을 수가 없었고 어디에 표를 넣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검표원이 그 앞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당황하는 목사님께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표정만 봐도 표를 사신 분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천천히 찾아보십시오. 기다려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여전히 난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차표를 꼭 찾아야 합니다.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잊어버렸거든요.” 

“……”

잃어버린 차표와 잊어버린 목적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표면적으로 사람들의 인기와 사랑이지만, 실상 그 내면에는 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상실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신자를 신자답게 하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것도, 세상을 섬기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은혜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인데, 그 사실을 잊으니 남은 것은 알맹이가 빠진 사람들의 껍데기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시대에 다른 교회를 걱정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걱정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목적을 제대로 알고 신앙생활 하고 있는지, 그 목적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성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사람들인데 그 은혜로 주신 믿음 안에서 감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지면 천사 같았던 사람도 추락하고, 천국 같았던 교회도 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판이 어떠하든지 간에 주님의 나라는 승리합니다. 문제는 그 승리에 우리가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낙오할 것인가 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세우고자 하는 목표가 확실하다면 우리는 주님의 승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어디에서든지 은혜 없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자기를 돌보도록 합시다. 무익한 말은 입 밖에 꺼내지 말고 마음에서 삭히도록 합시다. 그리고 은혜에 소용되는 말과 행동으로 우리의 믿음을 훈련해 가도록 합시다. 주님이 가까우시기 때문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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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9


어떤 사람이 냇가에서 금을 찾고 있습니다.

냇물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황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흙을 꺼내 고운 채 위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물 밖으로 나온 흙은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볼품없는 진흙과 돌처럼 보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채를 물가에서 흔들어 잔돌을 골라냅니다. 그리고 흙은 다시 쟁반에 담아 물위에서 가만히 부드럽게 휘저어 줍니다. 가벼운 흙은 물에 쓸려 나가지만, 무거운 황금은 거기 남을 것입니다. 그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고르고 또 고르면 결국에는 반짝이는 진짜 금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냇가에서 금을 찾는 일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사랑을 위해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모래와 황금이 섞인 그런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결정할 때에, 그것은 ‘난 이 모래 속에 분명히 황금이 있다고 확신해!’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인내하며 고르고 또 고르는 것입니다.

고통의 잔돌을 골라내고, 실망의 흙을 세월의 물에 흘려보내면,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반짝이는 사랑이 금처럼 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믿음이고, 믿음은 소망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고, 믿기 때문에 소망하는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은 흙뿐이지만, 그러나 그 안의 어딘가에 금이 있다고 믿을 때에 우리는 소망을 품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희귀할뿐더러 사랑하기를 겁내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인스턴트 식품처럼 끓는 물에 넣고 3분만 기다리면 완성되는 사랑을 찾다가 상처를 입고 마음이 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흙은 필요 없으니 내 앞에 당장 번쩍이는 황금을 가져다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텔레비전 드라마에나 나오는 환상일 뿐입니다. 사랑은 눈물을 먹고 자라고, 한숨으로 영글며, 가슴 아픔을 통하여 익어갑니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지고 쉽지 않게 성숙하기 때문에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그분의 사랑은 가슴 아파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편지처럼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진정한 사랑은 ‘오래참음’으로 시작해서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위해 인내를 배우도록 합시다. 잘 참고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합시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사랑이란 그야말로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분명하게 깨달아집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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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2


1990년대는 한국교회가 찬양의 부흥을 경험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이전까지 교회는 ‘준비찬양’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는 예배를 앞두고 미리 마음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찬양이 사용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서브 아이템은 예배 본래의 것과는 구분되었고, 그래서 찬양은 젊은 아이들이나 좋아하는 뭔가 덜 신령하고 조금은 경박한 그런 것으로 이해될 때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사탄인 루시퍼가 음악을 담당하던 천사였기 때문에 모든 ‘음악’에는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그토록 많은 찬양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찬양을 잃어버린’ 시간을 오래 겪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경배와 찬양’이 소개되고, 예배의 부흥에 찬양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배우고, 하나님께서 교회의 찬양을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배워가면서 구습의 껍질을 깨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찬양이 교회에 차고 넘쳐서 세상을 향하는 물결이 되었으니, 새로운 장르로 자리매김한 CCM은 바로 그러한 기독교 문화 콘텐츠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과거보다 훨씬 풍성한 찬양의 열매를 오늘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생각해야 할 문제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찬양이 유행의 대상이 되어 새로운 찬양에만 매력을 느끼고, 화려한 연주와 빼어난 음악적 기교에 열광하는 것은 찬양의 본질을 흐리는 잘못된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찬양은 음악으로 표현되지만, 그 본질은 마음입니다. 투박하고 소탈하더라도 진심이 담겼을 때에 찬양이 찬양되는 것이지, 만약 그 중심에 마음이 담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찬양일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적으로 불어난 오늘의 찬양이 과연 과거의 척박한 시대보다 더 성숙한 마음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동경드림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으로 사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에 이바지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찬양은 무엇입니까? 변화된 사람의 노래입니다. 은혜를 경험하고 변화되지 못하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새로운 곡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음악적으로 더 아름다운 멜로디라기보다는 새로운 마음의 곡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성숙한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노래인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자리를 회복하십시오. 그래야 찬양이 찬양답게 드려질 수 있습니다. 새 노래보다 새 마음을 추구하십시오. 일본의 메마른 영혼들을 촉촉하기 적시기 위하여 오늘 우리교회에 필요한 것은 성령의 은혜로 변화된 사람들의 찬양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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