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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1 목양칼럼

 

2006년 2월4일, 그 전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지금 보관하고 있는 목양칼럼은 거기서부터다. 교회 홈페이지에 333번 칼럼이 걸려 있다. 그게 2012년1월8일이다. 그 후로도 매주 빠짐없이 이 글을 썼다. 더러는 주중에 몇 번 호외를 날리기도 했으니, 대충 400여편의 목양칼럼을 써온 것 같다.

분량은 워드 문서로 좀 빡빡하게 A4 한 장이다. 그것을 폰트크기와 문단간격을 조절하여 주보의 한 페이지에 앉힌다. 이전에는 글이 길어진 적이 많았는데, 요즘은 가독성을 생각해서 길면 잘라낸다. 그리고 잘리지 않은 원본은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다.

기쁨도 많았다. 어떤 분은 검색엔진을 통해 들어왔다가 목양칼럼의 애독자가 되었다는 분도 있었고, 오랜 시간 동안 의문을 품었던 신앙의 문제에 대하여 답을 찾았다는 분도 있었다. 친구 목사는 이것을 묶어 책을 만들어 보라고 지금도 권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다 부수적이다.

이 칼럼이야말로 내가 목양하는 내 교회의 양무리들을 위한 나의 충성이었다. 그 만큼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시의적절한 글을 쓰려고 노력했으며,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어하는 말씀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목양칼럼만 읽어서도 목사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철학과 신앙의 내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글은 쓰는 사람의 생각으로 낳는 자식과 같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써 온 400편의 글을 헌사 받은, 나의 양무리들(물론 주님의 양무리지만 그분의 심부름꾼으로 내가 섬기는)은 이 목양칼럼을 통해서 어떤 은혜를 받았을까? 그들의 신앙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데오필로스에게 헌사했다. 그 정중한 헌사로 인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데오필로스를 로마의 황족이나 유력한 귀족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 이름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굳이 높은 사람을 찾지 않아도 모든 신자가, 특별히 누가가 목회했을 양무리가 모두 데오필로스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두 권의 책은, 몇몇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무수한 그리스도인을, 그리고 교회를 전율하게 했다. 그 안에 담겨진 신앙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는 복음의 능력 때문에 여전히 지금도 나 같은 말단의 목사를 울게 한다.

감히 누가의 글에 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진 정서는 같은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양무리를 향한 애틋한 사랑과 그들이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부디, 이 모든 글을 신문 귀퉁이의 일상적인 잔소리처럼 여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신앙을 배우고, 목회자의 심정을 이해하는 성숙함이 자라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한다.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목사가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하면 주님의 나라에 가서라도 반드시 깨달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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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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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Mt. Fuji)이 잘 보이는 뷰 포인트(View Point)를 찾았다.
오늘, 날이 맑아서 아침에 후지산을 촬영할 수 있었다.
좀 용량이 되지만, 촬영한 원본 파일을 올린다… (클릭하면 새창에서 열린다)

 

 

히까리가오까에서 바라본 후지산 (4912 X 3264, 4.6MB) 55mm  f/9  1/500초  ISO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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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파노라마사진 (8192 X 1856, 4.3MB) 55mm  f/14  1/400초  ISO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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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본 모습 (4912 X 3264, 6.5MB)  18mm  f/7.1  1/500초  ISO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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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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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敎會)’는 가르침의 무리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국어사전의 의미는 사실,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교회는 좀 더 독특하고 특별한 것이니까요.
일본에 와서 보니, 교회라는 이름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체 인구의 0.3%에 불과한 그리스도인들이 무슨 부정적인 과오를 많이 저질러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교회’(교우카이, 教会)라는 이름을 온갖 종교에서 모두 공용하기 때문에 생겨난 불행이었습니다.
대신할 다른 이름도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단과 사이비 종교집단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교회를 말할 때에는 언제나 ‘그리스도 교회(기리스도 교우카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교회라는 이름의 정체성에 대하여 좀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구약에서 교회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히브리어 단어는 ‘카할(kahal)’과 ‘에다(edhah)’가 있습니다.
‘카할’은 거룩을 나타내는 ‘카도쉬’와도 어근이 같은데, 부르심(calling)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신약에서 교회를 나타내는 ‘에클레시아’와 쌍을 이룹니다.
새삼 그 이름의 의미를 해석한다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거룩하게 하신 사람들의 무리’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에다’는 집회와 회중을 나타내는 단어였는데, 후에는 장소와 건물에 대하여 폭넓게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기를 겪는 동안,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유대인은 ‘에다(성전)’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중대한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제사 중심에서 율법 중심으로 유대교 신앙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시절, 유대인들은 열방에 흩어졌고, 그곳에서나마 유대인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하여 '디아스포라’라는 유대인타운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유대인은 유대인과만 결혼하고 특별히 율법을 집중적으로 아이들에게 교육했습니다. 이것을 위해 정비된 시스템이 회당과 랍비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 3~4세대는 히브리어를 습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게 됩니다.
당시의 세계는 헬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현실적 생활을 위해서는 이 언어가 필요했고, 고대어인 히브리어로 율법을 학습할 만큼 원숙하게 익히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결국 랍비들은 현실적인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히브리어라는 모국어와 율법이라는 신앙 중에서 율법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을 통하여 생겨나게 된 것이 70인경이라는 헬라어 성경입니다.
그 이름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70여 명의 유명한 랍비들이 모여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원숙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에서 ‘에다’는 ‘쉬나고게’로 번역됩니다. 쉬나고게는 회당을 의미합니다.
(이는 잃어버린 예루살렘성전을 회당으로 대치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이 번역으로부터 회중이 건물로 변하고, 종교행위를 위한 건물에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본래 ‘에다’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특별히 어떤 목적을 위하여 ‘선택된 자들’이라는 의미가 그 바탕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교회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앞에 잠깐 언급을 한 것처럼, 일단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에크’는 ‘밖으로’라는 의미의 접두사이고, ‘레시아’는 ‘부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밖으로 불러냈다’는 의미로 이것은 히브리어 ‘카할’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코이노니아’가 있습니다. 이것은 ‘친교’를 의미합니다.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초대교회가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주님과 몸과 피가 신자에게 들어와 하나가 된다고 해설했던 것이 주요합니다.
성찬예식이 예배의 가장 중심이 되었던 초대교회로서는 ‘교회’의 정체성 역시 그 ‘연합’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신자간의 연합입니다. 요즘은 이것만 강조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코이노니아라고 하면, 다들 서로 친교를 하고 노는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신자간의 친교는 부수적인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선행되고, 그 결과로서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른 교회의 원리입니다.


영어에서는 교회를 처치(church)라고 부릅니다.
에클레시아도, 코이노니아도 아닌 새로운 이름이 탄생한 것이지요.
이 이름은 종교개혁에서 그 유래를 찾게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라는 이름으로 온갖 불법을 저지르던 당시의 카톨릭교회 상황으로부터 새로운 개혁교회를 구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적당한 이름을 찾기 위해, 성경을 뚫어져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단어를 찾아냅니다.
’퀴리아코스’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주님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단어였지요.
결국 이 단어를 선택하여 교회를 나타내게 되고, 이 말이 독일에서는 ‘키르케(kirche)’, 스웨덴에서는 ‘쿠리카(kurika)’, 영국에서는 ‘처치(church)’가 되면서, 바로 오늘날까지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상의 탐구를 통해, 교회의 정체성을 정리한다면…
1) 교회는 사람이다.
2) 선택과 부르심(은혜)이 전제되어야 한다.
3) 거룩함이 특징이다.
4)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필수적이다.
5) 다른 신자들과도 교제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퀴리아코스’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오늘도 ‘주님의 사람들’로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잘 감당하는 멋진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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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그 석양을 배경으로는 모든 장면이 극적이고 아름답다고 하여서 그 10여분의 시간을 Golden Time 이라고 부르지요.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것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담고 보면 참 풍부한 감성을 얻게 되지요.
오늘 산책길의 선물입니다. 석양을 놓치고 사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보시고 감동하세요...^^
어떤 일이 오늘 하루 동안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하루가 축복이고 아름다운 날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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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재미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선언입니다.


천 년은 장구한 세월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이기도 합니다.
물론 숫자적으로 천 년의 세월도 무척 긴 시간이지만, 이를 넘어서 천 년은 그 이상의 세월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숫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 년은 숫자 천(1000)이 아니라 무수한 세월로 대치될 수도 있습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루는 아주 사소한 일상의 시간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하루’라고 나타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시간의 단위는 무척 현실적인 실존의 시간입니다. 즉, 사람의 시간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시계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시간이 어떻게 존재했을까요?
네, 천문을 통해 존재했습니다. 보다 쉽게 말하면, 해와 달이 하루를 이루고, 여기에 별자리가 호응하며 일 년과 계절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은 아주 고대로 올라가도 세계의 모든 곳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떠했을까요?
이를테면, 해와 달이 생겨나기 이전에, 별이 탄생하기 이전에 시간은 존재했을까요?


물론 우주적인 발견을 통해, 그 어떤 ‘다른 시계(other clock)’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나타난 것은 반드시 그 기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시간이란, 그 기원의 바탕이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존재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은 보다 근원적인 존재로 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드셨을까요?
네, 창세기의 서술로 보면 이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해와 달과 별의 조화를 통해 일자와 절기를 이루도록 명령하시는 장면이 분명히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창조의 시작부터 ‘시간’의 개념이 이미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이러한 디자인으로부터 시간이 탄생했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여러 번 확인하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전쟁 중에 정오의 해를 멈추도록 기도했던 사실이나, 히스기야왕이 기도를 통해 해시계의 그림자를 뒤로 물러서게(시간이 꺼꾸로 흐르게) 했다는 기록은, ‘시간’이 곧 하나님의 통제 가운데 있으며 순종한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이제 눈치를 채셨습니까?
하나님께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선언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거나 하루에도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다는 단순한 구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간’의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드셨고, 통치하시기 때문에, 그 시간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므두셀라입니다. 그의 연수는 성경에 969세로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창조 과학자들은, 노아 홍수 이전에 주로 사람들이 오래 살았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본래 지구의 성층권에 물이 한 겹을 덮고 있어서 대부분의 자외선과 우주광선을 차단했는데, 노아의 홍수와 함께 하늘의 창문들이 열리면서 이 모든 물이 비로 쏟아져 사라졌고, 그래서 이후로는 자외선과 우주광선이 그대로 지구에 쏟아져 노화가 촉진되고 사람들의 수명이 극히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나름 설득력도 있고, 과학적이어서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사람들의 수명이 줄어든 이후에도,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성경에는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모세는 80세에 출애굽을 시작했고, 120세가 되도록 건강해서 엄청난 공무를 수행하고 시력에 지장이 없었습니다. 갈렙 역시 80세에 전쟁을 수행할 건강과 체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세월이 빗겨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저 단지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건강한 정도의 체력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층권의 물이 사라져서 자외선과 우주광선이 지구에 들어와 수명이 단축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일도 하나님의 결정에서 벗어남이 없습니다.
하물며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것이 우연히 대충 만들어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신비한 경륜과 능력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간섭하시고, 마침내 그 끝에 대해서도 결정하시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장수’를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장수는 길게 산다는 뜻 보다는 의미 있게 산다는 뜻이 훨씬 강합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서른 즈음의 나이에 십자가에 죽으셨고, 초대 교회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축복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달력의 시간으로는 그들의 일생이 짧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이룬 의미의 시간으로 보았을 때에, 그들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진들이 천 년의 세월을 살았던 것보다 훨씬 값진 인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바탕에는, 모든 시간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타이밍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을 압축하셔서 더 치밀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시간을 더디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주장인지 알게 됩니다. 더디다, 빠르다는 것은 순전히 자기들의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느리고 빠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적당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시간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복종하는데, 빠르고 더딘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 이야기를 쓰는 것은, 시간에 대한 강박증이 매우 심한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시작하면 처음 몇 개월 안에 결과가 나타나야 하고, 결혼을 하면 초장에 기선을 제압해야 하며, 심지어 사역에 대해서도 어떤 시한 안에서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조금 심한 말로 하면, 지금의 시대에는 ‘시간의 노예들’이 많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어 돌아옵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능히 이루실 것을 사도는 확신합니다.
실체적 기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에, 시간의 개념은 중요하게 거론하지 않는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여기서 시간은 종(slave)일 뿐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120년 동안 만들었습니다.
처음 만들 때에 120년 동안 만들 것을 계획하고 시작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려주신 설계도를 따라, 산 위에 방주를 만들다 보니 세월이 흘러 120년이 지난 것입니다.
노아는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 하루가 모여 120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120년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계획된 타이밍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의 믿음에 있어, 이 시간에 대한 믿음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이제는 시간이 없다!
누가 그럽니까? 죽을 날을 알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설사 내가 다 끝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설사 내가 심기만 하고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역하는 인생을 살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결과야 천국에 가서 본다고 하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조급함이 찾아온 것은, 아마도 죽음의 경험 이후였을 것입니다.
창조의 때에는 시간이 내 편이었는데, 죄를 짓고 추방된 이후에는 비로소 시간이 내 편이 아니라 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항상 초조하고, 그 초조함 속에서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 많은 도시를 건설하고 땅을 정복하며 헛된 욕망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땅을 정복하고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이 영웅이 되어 삶의 모델로 등장하면서, 모든 인간은 바쁘게 살아가는 것을 하나의 미덕으로 신봉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이고,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면 시간이 우리에게 복종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내 아이가 대학을 못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내 아이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이, 내 아이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살아가는 것이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내 아이가 하나님의 시간 안에 있다면, 조금 더디 보여도 결국에는 시간이 내 아이를 섬길 것이며, 마침내 축복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판단을 버려야 합니다.
그저 나는 하루에 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하루를 천 년의 조각으로 맞추어 가십니다. 그 매일매일의 삶에 중요한 원칙은, 내가 과연 하나님께 순종하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조급하지 마십시오. 조급함은 내 시간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시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시간은 적당합니다. 그야말로 적시(good timing)입니다.
하나님은 버릴 시간을 만드시지 않습니다. 시간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시간을 지배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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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책을 보고 강의를 정리하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거의 7시가 되어 침실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8시 반 정도에 큰 아들이 나를 깨웠습니다. 늦어도 8시10분에는 집에서 출발을 해야 학교에 늦지 않기 때문에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등교를 하다가 집 근처에서 자전거 추돌사고가 났던 모양입니다.

자전거가 망가져서 탈 수 없게 되어 집으로 다시 끌어다 놓고 잠시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잠결에 사소하게 생각하고, 차비를 챙겨서 학교로 보냈습니다. 거의 9시가 되어서 나섰으니 많이 지각을 했겠지만, 그래도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생각했지요.

 

당장 학교를 다니려면, 자전거가 꼭 필요했기 때문에, 한 숨을 자고 일어나 연장을 챙겨 자전거 주차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전거가 조금 다친 것이 아니라, 앞 바퀴가 완전히 찌그러져서 못 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전거의 상태로만 봐서는, 자동차와 충돌한 것 같았습니다.

잠결에 아이를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차비만 챙겨서 학교로 보낸 것을 후회했습니다.

속으로 걱정을 하며, 여분의 가지고 있던 부품으로 큰 아들의 앞 바퀴를 교체했고, 내친김에 작은 아들의 앞 바퀴도 수리를 했습니다.

 

수업이 끝날 때쯤 되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큰 아들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는 거야?"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그제서야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두통이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내가 많이 놀란 모양입니다.

 

하교하는 길에 전철에서 내린 아들은, 저녁에 가족이 함께 먹을 디저트를 사왔습니다.

도너츠 4개, 4명의 식구들을 위한 스위트.

그걸 손에 들고 환한 표정으로 현관에 들어서는 아이를 보니, 비로소 편안한 숨이 나왔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느 아저씨가 전속력으로 자전거를 달려와서 그대로 충돌을 했답니다.

아들은 자전거와 함께 나가 떨어졌는데, 다행스럽게도 풀이 있는 쪽에 쓰러져서 하나도 다치지 않았답니다.

엿가락처럼 휘어버린 앞 바퀴를 보면 얼마나 세게 충돌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더 확실히 보였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지 않으심을 느낍니다.

그래서 지금은 모두 평안합니다.


공부 열심히 해라, 말 좀 잘 들어라... 아이를 향한 주문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아침에 현관을 나선 아이가 무사히 저녁에 들어오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것만으로도 진정으로 기뻐하며, 고마워 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어쩌면 우리는 날마나 기적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구인들, 자신의 하루를 알겠습니까? 세상에서는 오늘도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 모든 불행 속에서, 평안과 건강이 있다는 사실은, 평범해 보여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은혜입니다.

그것을 다시 배운 하루였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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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 집에 3세대가 있지만 본래는 자전거가 4대 있었다.

집이 역에서 멀었던 시절, 생활을 위해서는 자전거가 식구 수 대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본에 처음 왔을 무렵에는 교통비를 아끼겠다고 집에서 교회까지 30~40분씩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남자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다 보니 다루는 것이 험했다. 큰 녀석과 작은 녀석이 9년 동안 모두 2대의 자전거를 폐차하고 지금은 3번째 자전거를 타고 있다. 물론 전부 새 차는 아니었고, 공교롭게도 지금 타는 것들은 모두 교회식구들에게서 받은 중고차이다.


얼마 전에는 모두 뒷바퀴를 통째로 교환했는데, 간혹 펑크도 자주 난다.

신기한 것이 펑크가 나기 시작하면, 다른 차까지 연속해서 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럴 때면 정신 없이 수리해야 한다.

일본스럽게, 자전거 수리비도 만만치 않다. 처음에 펑크를 수리하려고 했더니 앞 바퀴는 1000엔이고, 뒷바퀴는 3000엔이라고 했다.

자전거 가격이 1만 엔인데, 펑크 서 너 번이면 자전거를 한 대 사겠더라…

 

그래서 직접 수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게 단순해 보여도 막상 하려고 하면 쉽지 않다.

분해와 조립에도 순서가 있고, 최종적으로 바퀴를 좌우 쏠림 없이 조정해야 하고, 브레이크와 자전거를 세우는 받침대 등의 고정에도 어려움이 따랐다. 그걸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하며 배우려니 속이 터질 뻔한 적이 많았다.

 

이제는 숙달되어 뒷바퀴의 수리에도 30분 정도면 모두 끝낼 수 있다.

혼자 하다가 큰 아들을 가르쳤다.

작은 녀석은 요리조리 피하며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큰 녀석이 곰처럼 옆에서 해보더니 자신을 얻었는가 보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매일 20~30분의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하려니 자전거가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아무튼 이제는 혼자 분해를 하고 수리를 한다.

어제 처음 할 수 있다고 해서 혼자 시켰더니, 낮에 2시쯤 나가서 5시가 되도록 끙끙거렸다.

 

결국에는 내가 가서 해결해 주었지만, 해놓은 것을 보니 이제는 정말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다.

많이 컸다. 그런 아들을 보는 마음이 뭔가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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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4 :: 목양칼럼

 

인생에 있어 가장 크고 소중한 재산은 자기 자신이다.

아무리 요란한 풍랑도 자신을 날려버리지는 못한다. 죽지 않는 이상, 자신은 남을 것이고, 그렇다면 거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인생에는, 오직 자신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몇 번은 오기 마련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자기와 깊게 만난다. 만약 자신을 잃고 살아왔다면, 그 순간에 가장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지키고 가꾸며 살아왔다면, 그 순간에 자부심을 얻게 될 것이다.

신앙은 자기를 버리는 길이다. 그러나 그 버림은, 쓰레기처럼 그저 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앙 안에서의 버림은 진정한 자기를 얻기 위한 과정이다. 욕망과 습성에 갇힌 자기를 버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자기를 얻으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해방자로 오셨다는 말이 무엇인가? 그분은 노예나 여성을 해방시키는 일을 위해 칼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의 순간에 칼을 잡는 제자를 향해, 칼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칼로 망하게 될 것이라 경고하셨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해방자가 분명하다. 그분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여 우리 맘대로 섬기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를 되찾게 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信者)는 신자(神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자신을 깊이 만나는 일이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는가? 왜 그렇게 가지고 싶은 것이 많은지?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목마른 '나'에 대하여 깊이 허전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이 야생마 같은 나를 길들여서,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 가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찾지 않는 것은 제일 어리석은 일이다. 아무리 많은 기도를 하고, 아무리 열심히 성경을 읽어도, 그것을 자기와 묶지 못하면 신앙은 실패한다. 그것은 바리새인의 습관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하자. 시끄럽기만 하다. 이제 정중하게 앉아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신앙과 인격에 대하여 말해 보라. 자기를 정직하게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게 허전하고 부실하기 때문에, 늘 인생이 불안하고 신앙은 허약하며 꿈이 연기처럼 그저 흩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혹시 지금은 아니라도, 인생에는 반드시 모든 겉옷을 벗고 벌거벗은 자기와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 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부디 그 날에 당신은, 성경이 말하는 복 있는 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기만 넘어지지 않는다면, 자기만 확실하다면, 우리가 넘지 못할 산은 없고, 우리가 이기지 못할 시련도 없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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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 아이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 고만한 녀석들이니 아마도 친구들일 게다. 한 녀석은 손에 나뭇가지도 들고... 무엇에인지 머리를 맞대고 열중해 있어서 셔터를 눌러도 신경도 안 쓴다.
그래... 아이들은 저렇게 커야 한다. 놀이터에서 해가 떨어지도록 뛰어 놀고, 친구들과 어울려 하루 종일 상상의 날개를 달고 날아올라 땅을 밟지 말아야 한다.

 

한국에 가면, 이런 풍경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

아이들조차 모두 어른들의 세상으로 끌어내어... 서로 경쟁하고 피곤하게 하루를 산다.
오늘 가슴 아픈 뉴스를 보았다.

부산에서 16,17,19살의 소녀 3명이 15층 아파트에서 함께 뛰어내렸다고 한다.

무엇이 이 미친 세상을 만들었을까? 무엇이 아직 피지도 못한 꽃들을 저리 맥 없이 떨어지게 만들고 있을까?

이제는 사십이 훌쩍 넘어버린 내가, 과연 이 세상의 문제를 남의 탓처럼 한탄할 수 있을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무엇이라도 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만, 내 자식만 그 세상에서 한 발 물러서 산다고 충분하지 않다고.

미쳐버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나서야 하고, 무언가 해야 한다고.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이,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수많은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고.

 

 

고민이 많다. 그래서 더 간절하다. 그리고 간절하기 때문에 기도하게 된다.

지금의 시간들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나를 또 다른 길로 부르시는 손짓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들… 내가 아파하고,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나의 남은 인생은 싸워야 하는 치열한 삶이 기다릴지도 모르겠다.

 

 

2012년, 가을이 깊어 간다. 내 인생의 가을도…

그리고 나에게는 점점 더 많은 꿈들이 가슴에 쌓여가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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