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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rosoft Windows 8 이 출시되었다.

나름 오랜 경험으로, 출시 이후 서비스팩이 나올 때까지는 참고용으로만 사용한다.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반드시 ‘버그’라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서 스텝이 꼬였다.

 

아키(AHCI) 모드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냐!

 

하드디스크의 성능을 올려주는 achi 모드라는 것이 있다.

메인보드가 지원을 하면 그 성능을 켜주는 것이 좋다는 글을 읽고, 아무 생각 없이 작업을 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갑자기 재부팅이 되더니, 하드 디스크에 파일 에러가 무지 생겼다.

나중에 찬찬히 살펴 보았더니, 이것이 하드 디스크의 파일 시스템에 변화를 주기 때문에, 모드를 변환한 다음에는 하드 디스크를 새로 포맷하고 사용해야 안전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파일복구를 하기는 했지만, 이미 Windows 7 이 정상이 아닌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마음을 비우고 새로 시스템을 구성하기로 했다.

어차피 얼마 전에 저렴하게 Windows 8 Pro 버전을 구매했기 때문에, 업그레이드를 결심했다.

 

스크린샷(4)

 

화려하다, 윈도우 8

 

빠른 부팅, 타블렛에 최적화된 타일 메뉴, 애니메이션 등은 유혹적이다.

수 십 년 동안 익숙했던 ‘아이콘’이라는 개념에서 ‘타일’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분명히 적절한 발전인 것 같다.

결과적으로 모바일에서도 이쁜 아이콘 대신에 ‘타일’이 새로운 인터페이스에 미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그 동안 윈도우즈 하면 상대적으로 맥(Mac)에 비하여 디자인성이 떨어지고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너무 다양해서 불편하며 통일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사실 애플이 ‘고품질’을 표방할 때에 윈도우즈는 ‘용량’으로 승부했다. 더 많은 하드와 더 많은 메모리, 더 다양한 액세서리가 윈도우즈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이번 윈도우 8 에서는 좀 달라 보인다. 일단 모든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메뉴 구성과 사용이 통일 되었고, 디자인성이 매우 많이 달라졌다. 사용자가 하나씩 색을 골라 자기 화면을 구성해야 했던 ‘노동’의 방식에서 다양한 ‘세트’를 제공하고, 간단한 선택과 조정으로 더 예쁜 인터페이스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예로, 바탕화면을 하늘이 찍힌 사진으로 선택하면 자동적으로 모든 윈도우즈 레이아웃이 푸른 계열로 세팅된다. 노란 단풍 사진으로 배경화면을 바꾸면 레이아웃이 옐로  계열로 자동적으로 따라간다.

또한 프로그램을 가동하거나 인터넷 주소를 연결하는 위의 타일에 자신이 원하는 사진을 입힐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윈도우의 처음 화면이 다른 프로그램을 가동하기 위한 정거장 개념에서, 보다 개인적인 취향을 담아낼 수 있는 ‘책상(desktop)’ 개념으로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역시 아직은 불안하다

 

얼리 어답터들을 중심으로 베타판부터 윈도우 8 에 대한 평가는 뜨겁다.

좋다는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싫다는 사람들은 이게 도대체 뭐냐고 한다. 이를테면, 비스타(Vista)처럼 사용자들에게 외면을 받는 운영체제가 될 것이라는 주장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기존 윈도우의 개념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인터페이스의 개념의 전환을 시도하는 이번 윈도우 8 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직은 드라이버 지원이나 여러 가지 프로그램의 호환성에 잡음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개인적으로는 그 동안 애플의 뒤에서만 좇아왔던 마이크로소프트가 이번에는 확실히 애플 보다 나은 혁신을 보여 주었다는 생각이다.

잡스가 없어서 그렇지, 늘 다른 회사의 제품에 대하여 독설을 퍼부었던 그가 윈도우 8 에 대하여는 뭐라고 했을지 몹시 궁금하다. 하지만 이번의 변화는 분명 의미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몇 가지 유의미한 사실을 찾았다. 일단 나의 구형 웹캠이 거부 당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타일에 나오는 윈도우즈 앱 중에서 Skype 앱이 있다. 그런데 나의 구형 웹캠은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윈도우즈용 Skype 를 다운받아 설치하면, 그 안에서는 잘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아직까지 하드웨어에 대한 지원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어 입력기 버그

 

또한, 일본어 입력기를 설치했는데, 버그가 나타났다.

일본어 입력은 로마자 입력방식과 일본어 직접 입력방식이 있는데, 도무지 마우스 클릭을 통해서는 로마자 입력방식으로 전환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좀 당혹스러웠다. 일본에 사는데, 일본어 입력이 불가능하다면, 이 컴퓨터를 어떻게 쓰란 말인가?

다행히도 키보드 단축키는 작동을 했다.

침착하게 Ctrl + Shift + Caps Lock 키를 누르면 된다. 세 키를 동시에 눌러주는 것이다.

일본어 입력모드에서 이렇게 단축키를 누르면, 로마자 입력방식이 된다.

참고로,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는 왼편의 Ctrl + Caps Lock 과 Alt + Caps Lock 으로 바꿀 수 있다.

숫자는 Shift + Caps Lock 이다.

 

스크린샷(8)

 

블로그 포스팅이 안돼! (Windows Live Writer 2012)

 

블로그 포스팅을 위해서 주로 라이브 라이터를 사용한다. 설치까지는 무난히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버그가 나왔다.

본문을 입력하려고 하니, 영어에서 한글로 바뀌지를 않는 것이다.

일본어 입력은 되는데, 한글만 입력이 되지를 않는다. 심지어 화면 오른쪽 아래에 한글 입력기를 나타내는 [한]이라는 단추는 [X]로 나타나고 있다. 프로그램을 포기해야 하는가 망설였다.

이것은 아주 초보적인 버그로 보인다. 왜냐하면 해법 자체가 아주 우습기 때문이다.

 

라이브 라이터에서 본문을 직접 입력하지 말고, 일단 제목 부분을 클릭한다.

그 부분에서 입력모드를 한글로 바꾸면 전환된다. 그 이후에는 본문을 쓰는 부분을 클릭해도 역시 한글로 입력이 가능하다.

예전에 익스플로러에서 흔히 나타났던 버그가 생각났다. 갑자기 한글 입력이 되지 않을 때에, 주소 입력창에서 한글로 전환하면 역시나 풀리는 버그가 있었는데, 이번 것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나는 돌아갈 수 있는 다리를 이미 불태웠다!

 

대부분의 경우, 안정화에 들어서기까지 “구관이 명관이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하여 남들보다 먼저 새놈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

좋은 점도 있고, 그 만큼 불편하고 불안한 점도 있다.

일단, 부팅부터 라이브 계정으로 로그인을 하도록 되어 있으니 좀 감시 당하는 느낌도 있는데, 그래도 아이 클라우드 서비스처럼 사용자의 대부분의 데이터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스카이드라이브에 백업되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다. 최소한의 보장, 최소한의 백업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다.

 

하드디스크에 데이터가 많다. 쓴 글과 사진, 교회자료를 합하면, 내 인생의 20년이 담겨 있는 셈이다.

그걸 담보로 위험을 감수할 수 없기 때문에, 눈을 딱 감고 윈도우 7 이 깔려 있던 자리를 포맷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윈도우 8 과 친해보려고 노력중이다.

편하면서도 까다로운 이 놈이 앞으로 어떤 경험을 줄 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괜찮다는 첫 인상이다.

도전해 보고 싶은 분들은, 마이크로소프트의 프로모션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싸게 구입해서 한 번 경험해 보기를 바란다…

 

아 참, 방금 옥션에서 결재 시도하다가 포기했다. 엑티브엑스와 드디어 이별이라고 하더니, 도무지 깔리지를 않는다.

인터넷 쇼핑은 윈도우 7이 깔려 있는 노트북으로만 해야 하는가 보다.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구매하라는 뜻인지도 모르지, 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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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8 주일설교

제목 : 바울이 전하는 행복

빌립보서 4:6~7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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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8.z01


2012-11-18.z02


2012-11-18.z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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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6~7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근심은 인생의 부분이다.

그것은 세상이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처음에 자연과 경쟁을 했다. 상대적으로 연약한 인간이 자연의 꼭대기에 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자연을 정복하고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간 자신이 인간의 경쟁자가 되었다.

뱀과 사자, 추위와 더위는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사는 도시의 저 밖으로 모두 추방을 당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가 안전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고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같은 사람이다. 사람이 자연보다 백 배, 천 배 더 무섭다. 그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늘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역사는 비정형이다. 불규칙하다. 그것을 한 마디로 정의 하거나, 하나의 원리로 풀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그걸 억지로 한다고 하더라도 의미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정의는 너무 많은 예외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가진 하나의 방향성은 있다.

그것은 행복이다. 많이 익숙한 단어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위해 움직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생각이 다르고, 더러는 서로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모여서 도시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좀 더 행복할 가능성이 확장되고, 기회가 많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심지어 더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품고 살아가는가?

사는 것이 쉬운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의 삶이 쉽게 보이고 더 행복해 보이는 것은 일종의 착시 현상이다. 인간의 마음에, 항상 남의 자리를 탐내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진짜 자리를 바꾸면 알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이 나보다 덜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인간은 이처럼 고민이 많은 존재이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말이 하나의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행복이야말로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잡을 수 없는 무지개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무지개를 잡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깨달음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아주 피상적이고 관조적인 가르침을 전파하기도 한다. 원래부터 무지개는 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그래서 행복도 생각의 방식일 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마음의 기대를 내려놓는 것을 훈련한다. 이를테면, 마음에서 ‘행복’이라는 네임을 지우는 것이다. 그래야 그 행복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착각도 마음에서 몰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다. 아주 사소할 수도 있지만, 아주 중요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행복과 불행을 모두 마음에서 지우고 나면, 과연 우리 마음에 무엇이 남느냐? 우리 인생에서 이제 행복 대신에 무엇을 추구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이 공허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냥 비우기만 하면 끝나는 것인가?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가? 정말 행복은 없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가문이 훌륭했다.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난 바울의 원래 히브리 이름은 ‘사훌’이었다.

알다시피, 사훌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다. 물론 다윗의 등장과 함께 그의 가문은 몰락했지만, 그러나 사훌이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물론 유다의 자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다는 예언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훌은 버려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사훌이 당신의 조상이라도 그렇게 생각할까?

분명한 사실은 베냐민 지파에게 특별한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가문에서 ‘사훌’은 매우 의미가 깊은 이름이다. 그 이름을 그에게 붙였다는 것은 기대가 컸던 자식이었다는 의미이다.

유대인은 가정교육부터 엄격하다. 말을 배움과 동시에 신명기 암송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 아들은 특히 총명했다. 배우는 것에 막힘이 없었고, 그래서 가족은 더욱 그를 기대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는, 어린 그가 바리새파에 입문하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바리새파에 대한 거부감을 안고 있다.

그것은 외식적이고 허영에 싸인 ‘독사의 자식들’을 연상시키는 이름으로 읽힌다.

그러나 성경이 쓰여지던 당시의 사회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그 이름은 명예로운 이름이었다.

많은 학자와 종교적 지도자들이 ‘바리새파’임을 자랑스럽게 과시했다.

그 중에서도 가말리엘은, 성경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는 걸출한 랍비이다.

그의 학문과 지혜는 이스라엘을 넘어 로마의 제국에서까지 명성을 얻게 했다.

그리고 ‘사훌’이라는 청년은 이 가말리엘의 직전(직접 가르치는) 제자였다.

 

결혼도 하지 않은 사훌이 대제사장을 상대하여, 그의 친서를 들고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향했다는 것은 많은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사훌이 회심한 후에 총독 벨릭스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총독은 그의 학문이 많아서 그를 미치게 하였다고 판단했다. 어떻게 로마 제국의 총독이 사훌을 알고 있을까? 그것도 그가 학문이 많은 사람임을 어떻게 알까?

빌립보 감옥에 재판 없이 투옥 되었을 때에, 사도 바울은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 ‘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중대한 사실인데, 만약 이것이 허풍이었다면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도 있었다.

사람마다 왕년을 자랑한다. 한 때는 자신이 출세했던 사람이라는 자랑이다.

사도 바울이 정말 그랬다. 그가 세상에 ‘사훌’로 알려졌던 푸른 날들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는 시절이었다. 젊은 그를 세상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학문과 연설에 있어 오만했고, 인맥에 있어 매력적이었다.

 

그랬던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은 이후, 완전히 다른 인생이 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자랑에서 유대인들의 암살 대상으로 변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으며, 어쩌면 그가 자신을 ‘바울’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

가는 곳마다 동네에서 매를 맞고, 심지어는 집단구타를 당하고 기절한 것을 사람들이 동네 쓰레기장에 가져다 버리기까지 했다. 그가 가는 헬라의 도시마다 평화를 깨뜨리고 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라고 재판에 회부하였으며, 이유 없는 부당한 매를 맞아야 했다.

그는 미친 들개였다. 집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자유인이면서 노예와 어울리고, 다른 사람들의 병을 무수하게 고치면서도 자신의 병을 고치진 못했다.

 

그가 오늘 빌립보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거기 말한다.

 

 

[ 빌립보서 3:4~9 ]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는 세상에서 잘 나가던 시절에 행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알고, 만나고, 그 예수를 위해 죽고자 했을 때에 그는 행복했다.

그래서 잘 나가던 ‘사훌’은 그에게 배설물(똥)이다. 그리고 지금 미친 들개 취급을 받는 ‘바울’은 그에게 있어 가장 고상한 자신이다.

 

이 파라독스를 이해하지 못하면, 빌립보서는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그저 문자가 전달하는 의미 만으로는 부족하다. 빌립보서에 실려 있는 것은, 한 인간의 실존이다. 그리고 그 실존으로부터 우러나는 간증이다. 그것은 추측이나 가정이 아니라, 철저하게 경험에서 나오는 외침이다.

비유하자면, 소고기맛 라면국물이 아니라 사골을 일주일 동안 우려낸 설렁탕이다.

 

바울은 이 편지의 결론에서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던진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염려로부터 탈출하고 싶다. 염려하고 싶어서 염려하는 사람이 있는가? 나도 염려하고 싶지 않은데 염려가 된다. 어쩌란 말이냐? 놀리는 거냐?”

화내지 말고 들으라.

여태까지 사훌의 자리에서 행복을 찾아온 것이 아닐까?

염려로부터 해방되는 탈출구를 혹시라도, 모든 염려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에서 찾았다면,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상은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고, 그래서 문제는 끝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당신은 염려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멋진 이성을 만나도, 높은 자리에 올라도, 인맥을 넓게 가져도, 최고의 명예를 얻어도 소용 없다. 무덤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시끄러운 일들이 당신을 좇아 다니며 계속 괴롭힐 것이다.

그건 답이 아닌 것이다.

 

내가 답을 못 찾는다고 답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억측이다. 굳이 행복과 불행을 마음에서 지우고, 공허하게 비우는 것을 목표 삼을 필요는 없다. 성경은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있다고 말할 뿐이 아니라, 그 행복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렇다면 이제 성경이 약속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응, 내 이럴 줄 알았다. 결국 기도하라는 것이구나. 그렇지 뭐. 대충 다 교회에서 하는 말들이 비슷한 거 아닌가… 기도하면 된다. 되기는 뭐가 돼! 기도하면 밥이 나와?”

역시 틀렸다.

그래서 바울의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면, 빌립보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훌도 무수히 기도했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기도라는 행위나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께 말하는 관계, 그냥 그 분 앞에 앉기만 해도 감사함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계… 그 관계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과연 ‘기도’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 없이 기도했음에도 여전히 응답이 없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기도하는 대상이 실제로는 없거나(우상에게 드리는 기도의 경우와 같이), 다른 하나는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주소를 잘못 쓰면 우편물이 엉뚱한 곳으로 가듯이, 전화번호를 누르다가 하나쯤 엉뚱한 번호를 눌렀다고 해서 옆 사람에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에게 연결되듯이, 어쩌면 그 기도 자체가 틀려먹은 것은 아닐까?

 

사훌로 살았던 동안, 그는 자기 인생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예수님은 콧대 높았던 사훌을 길바닥에 꼬꾸라지게 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친히 물으셨다.

자기가 잘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확신은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그거야말로 껍데기요, 진정한 행복을 가로 막는 장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허울 좋은 바리새인의 옷을 벗어야 한다. 남에게 보여주는 신앙생활에서 나와야 한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의 척도가 여기 있다. 그것은 사회적 성공이 아니다. 남들의 평판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의 위안이나 연민도 아니다.

그것은 감사이다.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이다.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려는 강함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부탁 드리는 약함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에게 나의 문제를 맡길 수 있다면, 분명히 그 믿음에서는 감사가 우러날 것이다.

 

하나님은 이상한 분이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동안, 하나님은 절대로 거들지 않으신다. 그분은 언제나 그렇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여야 만족하신다. 우리 마음의 90% 지분을 드려도 하나님은 꿈쩍도 안 하신다. 오히려 우리가 드리지 않은 10%를 조명하시고, 왜 이것은 내게 가져오지 않느냐고 물으신다. 그게 하나님이시다.

결국 100%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순종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안아 주신다.

우리를 위해 기쁨으로 일하신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경험했다. 처절하게 경험했다. 그의 인생이 바로 그 원리의 증거였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다. 그리고 비로소 행복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가 없는 세상이 있다.

그것은 샬롬, 하나님의 평강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 평강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다. 아주 예민하다. 모든 것을 깊이 살펴서 놓치는 것이 없다.

마치 아기의 필요를 살피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이해하고, 사랑으로 예비하는 평강이다.

그 샬롬이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

히브리적 표현으로 볼 때에, 마음과 생각은 같은 대상을 다른 단어로 반복하여 강조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생각을 이성의 영역으로, 마음을 보다 깊은 영혼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샬롬이 깊이 침투하고 철저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존재, 그것이 이성이든, 영혼이든, 혹은 생각이든, 마음이든… 무엇이라고 이름하든지간에 상관없이 그 평강은 우리의 전 존재에 스미고 채워진다.

그리고 우리를 강하게 하며 지켜준다.

 

바울은 이 편지를 서술하는 동안, 감옥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놀랍지 않은가! 어떻게 그토록 근심과 어울리는 장소에 앉아 이토록 평안한 편지를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복음은 인간의 해결이다. 끊어졌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켜서, 어떤 문제 속에 앉아서도 그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복음은 행복의 재정의(再定義)이다. 행복을 환경이라는 바깥에서 찾아서도 찾을 수 없었고, 마음이라는 안에서 찾아서도 찾을 수 없었던 인간을 향하여, 바로 행복이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이제 우리는 그 손가락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에필로그

 

하루 종일 앉아서 생각하고, 글을 쓰고, 책을 본다.

나는 행복한가?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연다. 밤공기가 차다. 허파를 지나면서 한기(寒氣)는 소름으로 돋는다.

처음에는 상쾌했던 느낌이 점점 추위로 변한다. 급히 문을 닫는다. 답답했던 실내의 공기가 차라리 다행스럽다. 추위가 슬그머니 퇴장한다.

행복도 이런 것일까 두려웠다. 가지고 싶은 열망으로 추구하지만, 결국 손에 잡히는 순간 또 다른 칼날을 드러내는 두 얼굴의 무엇… 행복의 배신이 두려웠다.

그러다가 빌립보서를 통해 사도 바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나를 설레게 했다.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사도는 곳곳에서 빛나는 언어로 행복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말이 아니라, 행복 자체의 느낌이었다.

나는 사도가 말씀하는 것이, 바로 지금 내가 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 받고 안도한다.

틀리지 않았다.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 길이 맞는다. 그래.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복음, 예수 그리스도, 기도, 감사… 바로 이것이 나를 하나님의 평강[샬롬]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영원한 쉼을 얻을 것이다.

이 소망을 품고 살아갈 또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

당신도 틀리지 않았다. 세상이 비웃어도, 아직 그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용기를 가지라. 그리고 그 길에 진력(盡力)하라. 곧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넓은 품에 우리를 안아 주시기 위하여 두 팔을 크게 벌리시고 있다.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염려 없는 세상에서 우리 만나자!

마라나타, 그리고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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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책

인생/사진이야기 / 2012. 11. 1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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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사모드에 의해 뒤편에서 일그러진 빛이 수채화 같은 느낌을 준다. (식수대의 수도 꼭지 안에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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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길. 히까리가오까의 봄이 벚꽃과 함께 온다면 가을은 은행나무와 함께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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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공원관리소에서 저 낙엽을 치운다. 좀 그냥 두었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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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는 동경생활에서 필수이다. 저렇게 어린 아이부터 자전거를 탄다. 물론 안전장비도 잘 갖추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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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와 낙엽, 그리고 길.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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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낙엽. 쓸쓸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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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서 날씨가 좋으면 여객기가 흔히 보인다. 이건 구도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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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과 여객기. 가로등에 비취는 풍경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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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광사진이다. 역광은 피사체를 어둡게 하지만, 그래서 더 강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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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속으로. 빠져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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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달려 있는 잎이 곧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이것도 구도가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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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 잎이 불가사리처럼 뒹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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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가을 즐기기. 나도 같이 하고 싶었다. (나이를 어디로 먹은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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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을 산처럼 쌓아 올리는 아이들. 던지는 장면이 생동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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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들의 놀이를 다가가서 물끄러미 보는 여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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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벤치에 앉아서 가을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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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8 목양칼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상식에 묶이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언제나 기적이다. ‘기적’이라는 말은 우리의 눈높이에서 하나님의 일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눈높이로 보면 기적이 곧 상식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처럼 일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어 드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차근히 읽어보자. 하나님께서 노아의 믿음을 지극히 칭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크게 놀라며 감동하신다. 다윗의 순수한 믿음에 대하여 춤추듯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찾고 찾으셨던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리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을 믿어 드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의 믿음에 하나님의 거룩한 기름을 부어 세상을 불사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 믿음은 하나님을 절대로 믿어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율법주의는 믿음을 선행(善行)으로 대신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인간의 행위는 아무리 탁월해도 기적을 만들지 못한다. 기적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믿음이 바로 이 하나님의 행동에 원인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실행하시는 신실하신 분이라고 믿어 드릴 때에, 하나님은 행동하셔야만 한다. 이것은 강제가 아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기쁨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영화롭게 생각하시는 영광의 의미이다.

하나님을 믿어 드리는 일이 쉬운가? 그렇지 않다. 더구나 지금과 같이 불신의 영이 역사하는 시대에서는 더욱 어렵다. 성경의 가르침을 훼방하는 과학, 철학, 상식이 얼마나 유행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의심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널리 만연하고 있는가?

이런 시대에서는 성경이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믿음에 대하여 말하는 것조차 굉장히 어렵다. 믿음이 저절로 숨이 막힌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생활은 지속하되 믿음은 버린다. 더 이상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의 인생을, 목숨을 거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은 변한다. 역사가 언제나 그랬다. 한 사람으로도 충분했다. 세상이 아무리 폭풍으로 뛰놀아도 한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을 위해 거대한 폭풍을 잠잠하게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는가? 쉽고 간단한 일은 하나님의 손을 빌리지 말고 스스로 하라. 하나님을 시시하게 만들지 말라. 거대한 것을 구하라. 감히 아무도 바랄 수 없는 것을 꿈꾸라. 믿음은 바로 그 꿈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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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드린 사랑

목회/설교 / 2012. 11. 16. 20:08



2012-11-11 주일설교


제목 : 자신을 드린 사랑

요한복음 12:1~8

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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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까리가오까의 가을이 깊었습니다.
예년보다 좀 늦은 것 같습니다. 날이 아직까지도 온화하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을은 이렇게 흐드러집니다.

그리워 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 산책길에 장면을 좀 담아다가 올립니다.
뒤편에는 낙엽을 모아 산처럼 쌓고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서서 한참을 구경했습니다...^^

여러분도 가을과 아름다운 추억 많이 만들고 작별하시기를 바랍니다.
2012년도의 가을은 지금 한 번 뿐입니다.
부디 무엇보다 세월이, 인생이 귀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기를 바랍니다.
인생 자체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어리석게 살지 않는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샬롬~

****

배경 음악은 Jacky Terrasson의 "Tennessee Waltz"

I was dancing with my darling
To the Tennessee Waltz
When an old friend I happened to see
I introduced her to my loved one
And while they were dancing
My friend stole my sweetheart from me

I remember the night
And the Tennessee Waltz
Now I know
just how much I have lost
Yes, I lost my little darling
The night they were playing
The beautiful Tennessee Waltz

* repeat

I was dancing with my darling
To the Tennessee Waltz
When an old friend I happened to see
I introduced her to my loved one
And while they were dancing
My friend stole my sweetheart from me

I remember the night
And the Tennessee Waltz
Now I know 
just how much I have lost
Yes, I lost my little darling
The night they were playing
The beautiful Tennessee Wal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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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는 즉시 적극적으로 나서 정신대(위안부, 전쟁성노예)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아울러 일본 정부 역시 더 이상 역사를 왜곡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기를 촉구합니다.

얼마 시간이 없습니다. 다시 이분들을 한(恨) 속에서 죽게 할 작정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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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폐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장교가 말했다.
하루 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임신. ‘아직 쓸 만한데’하는 생각에 자궁째 태아를 들어냈다.

“일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그 해 8월27일, 칼을 찬 군인이
‘군인 10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하고 물었다.
그때 손을 들지 않은 15명의 여성은
다른 여성에 대한 본보기로 죽였다.
발가벗긴 여성을 군인이 머리와 발을 잡아 못박은 판자 위에 굴렸다.
분수처럼 피가 솟고 살덩이가 못판에 너덜거렸다.
그때의 기분을 “하늘과 땅이 온통 뒤집어진 것 같았다”고
정씨는 표현했다.
그 다음 군인들은 못판 위에서 죽은 한 여성의 목을 쳐 떨어뜨렸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본 중대장은
“위안부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 운다”고 했다.
군인들은 죽은 여성의 머리를 가마에 넣어 삶았다.
그리고 나무칼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억지로 마시도록 했다.
1933년 12월1일에는 한 여성이
장교가 철봉을 자궁에 꽂아 죽어버렸다.
다음해 2월4일에는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피살되었다.
일본군이 벌겋게 달군 철막대를 자궁에 넣었고 여자는 즉사했다.
뽑아낸 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달려 있었다.
문신은 온몸에 걸쳐 새겨졌다.
군인들은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여성들에게 문신을 했다.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들에 팽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중국인 남자가 일본인이 사라진 뒤,
숨이 남아 있던 여자 두명을 옮겨 약 두달간 간호해줬다.
정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하며 의자에 앉아 있는 내 팔을 꽉 쥐며 울부짖듯 소리질렀다.
눈앞에 있는 일본인이 자신을 극한까지 학대한 일본 병사와
겹쳐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문신한 자국을 보여줬다.
정씨가 손가락으로 뒤집어보인 입술 안쪽엔
선명한 짙은 보라색 반점이 있었다.
좀 흐릿했지만 혓바닥에도 푸르스름한 반점이 몇군데 있었다.
수많은 바늘로 혀를 찔렀기 때문에 그뒤로는 말하기도 곤란해졌으며
지금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고 했다.
등 아래쪽은 척추를 따라 둥근 반점이
염주처럼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가슴과 복부 문신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 낙서 같은 무늬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정녕 그 잔인한 행위를 즐기면서 했음이 분명했다.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지배하고 있던 조선에서
일본은 젊은 여성들을 납치해 버러지처럼 짓뭉갰다.
정씨의 몸에 깊숙이 새겨진 문신은
그 어떤 많은 얘기를 듣는 것보다도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지배의 실태와
천황의 군대의 악랄한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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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회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끊임 없는 듣는다.

그러나 이처럼 난감한 질문도 없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좋은 교회라는 말인가?

물론 성경적인 좋은 교회의 조건들을 나열하고 그러한 내용에 상응하는 교회를 탐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백인백색이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교회에 만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아무리 좋은 교회라도 자기와 맞지 않으면 정착하기 힘들다.

 

더구나 좋은 교회를 찾아 떠도는 신앙적 유목민들은 귀만 커지고 눈만 높아진다.

이들이 찾는 좋은 교회의 조건들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지극히 이상적이다.

마치 천상에 있는 교회를 지상에서 찾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또한, 그렇게 좋은 교회에는 당연히 신앙적 부담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대부분은 그럼 부담을 피하려고 한다.

신자들을 부담 없이 만들어주는 교회야말로 가장 실력 없는 교회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통해 주님과 세상을 섬기고, 그 십자가의 보상으로 주님의 나라에서 상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부담스럽지 않은 신앙생활을 원한다니…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인가?

 

나이를 먹으면서 되돌아 생각을 하니, 교회란 참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스스로 세우지 않으면 결국에는 남의 교회이더라.

꼭 개척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모든 교회는 완전하지 않으며 때문에 세워지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누군가의 헌신을 필요로 한다. 그 헌신이 곧 교회를 세우는 충성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헌신한 만큼 내 교회가 되는 것이다.

눈물과 땀을 쏟고 애정을 기울여 사랑한 만큼 교회는 남의 교회가 아니라 나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다. 거기는 벌레가 먹거나 녹이 쓸어 무용지물이 되는 일이 없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보물을 좋아한다. 보물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황금은 보도블록에 불과하다. 결국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마음’인 것이다.

보물은 그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그걸 아끼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보물은 하나의 돌에 지나지 않는다.

때때로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다.

돈에 대한 욕심이 거의 없는 사람, 자기 것을 아낌 없이 남에게 주는 사람 말이다.

희귀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에게 보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황금이 아닐 뿐이지, 이런 사람들도 자존심, 명예, 자식, 인기와 같은 자기들만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

 

결국 원리는 같다. 그 아끼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헛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이 주신 제단이 교회이다.

구약적 제사제도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되었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교회를 통해 상속되었다.

대속을 위해 우리가 치를 대가는 더 이상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완성이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모든 교회는 불완전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완성될 수 없다.

그 불완전함이 고통의 이유이다.

하지만 역시 이 불완전함이 바로 은혜이다.

만약 교회가 완성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참여할 길이 사라질 것이다. 역설적으로 완성된 교회에는 당신의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흔들리고, 흔들리는 교회이기에 우리가 충성할 자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기도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감사하라.

거기 문제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다. 신앙은 문제를 이겨내는 과정이지, 문제가 없는 낙원이 아니다.

문제와 열심히 싸우다 보면, 성령께서 힘과 용기도 주시고, 위로와 안식도 주실 것이다.

그 과정을 누리고 원리를 깨달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하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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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혁이가 검도심사에서 2단을 통과했습니다.

어제 공인증을 받아 왔네요. ^^

중학교 과정에서 딸 수 있는 최고 등급까지 통과한 것입니다.

대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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