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쉬운 길로 가지 마라! makarios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896)
목회 (632)
인생 (179)
동경in일본 (35)
혼자말 (50)
추천 (0)
09-11 03:01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1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2006-04-30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흑인은 누구일까요? 

대개의 사람들은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가 선정되었습니다.

카버는 ‘땅콩 박사’라는 별명을 가진 분입니다. 남부 농장의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카버 박사는 공부하고 싶다는 한 가지 열망으로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이겨낸 분입니다. 다른 흑인에 비하여 먼저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카버 박사는 노예 해방 이후에 몰락한 남부의 목화농장에서 땅콩을 재배하면 땅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땅콩을 재배하면서 땅콩의 가격이 폭락하여 수많은 흑인농민들의 원성을 사게 됩니다. 그 때 카버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 밤하늘의 별은 무엇을 위해 만드셨습니까?”

“저 넓은 우주의 끝은 어디입니까?”

그 때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얘야, 넌 너에게 너무 어려운 것을 묻고 있구나. 그런 것은 가르쳐 주어도 네가 이해할 수 없단다.”

한 참을 다시 생각하던 카버가 버려진 땅콩을 손에 들고 새롭게 물었습니다.

“하나님, 그렇다면 땅콩은 무엇을 위해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을 들고 너의 연구실로 들어가라!”

카버 박사는 이후로 땅콩을 이용한 각종 발명품을 만들게 됩니다. 카버 박사의 이러한 노력은 결국 소비의 길을 찾지 못했던 흑인 농민들의 땅콩에 활로를 찾아 주었고, 이로 인하여 흑인들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에 조력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흑인의 자유와 평등이 법적으로는 링컨에 의하여, 경제적으로는 카버에 의하여,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마틴 루터 킹 목사에 의하여 얻어지게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볼품없이 보이는 것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발견할 때에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샬롬~



'목회 > 목양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6-05-14 사랑의 지경을 확장하라  (0) 2014.04.29
2006-05-07 꽃주일  (0) 2014.04.29
2006-04-23 나그네를 대접하라  (0) 2014.04.29
2006-04-16 부활의 소망  (0) 2014.04.29
2006-04-09 자족하기를 배우라  (0) 2014.04.29
Posted by makarios
, |

2006-04-23


집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돈은 적고 가족은 많고 외국인에다가 되도록 교회와 가까운 곳을 찾으니 찾는 집이 만만할 리가 없었습니다. 부동산에 들어가 상담서를 써내면 30분은 뒤적여서야 겨우 우리가 찾는 조건에 비슷한 집을 찾아주었습니다. 

처음 대하는 다다미에서는 냄새가 역했습니다. 그렇게 본 집에 대해서도 여전히 까다로운 조건이 남아 있었습니다. 일본인 보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보증인의 세금납부 증명서를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렵사리 집을 하나 골랐는데, 그 집도 막상 계약하려고 하는 순간에 집주인의 마음이 변해서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황당하고 막막한 마음을 뒤로 하고 새로 집을 찾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날씨는 흐리고 바람이 불었고, 일본어는 빈곤했으며, 도와줄 이도 많지 않았습니다.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많이 느꼈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 (출 23:9)


가족에게 제일 미안했습니다. 내가 또 고달픈 현장으로 가족을 이끌고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 13년, 지난 세월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풍성했지만,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나의 역할은 과연 무엇을 하였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를 만난 이후로 나는 나와 내 가족의 편안함을 위하여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생각의 초점은 ‘주님이 이 길을 원하시는가?’였지, ‘이 길에 무엇이 있는가?’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훌륭한 인격을 가진 청렴한 목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원래 게으르고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이후로 내 삶이 변했습니다. 언제나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그분이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나는 내 주관대로 살지 못하고 믿음대로 사는지도 모릅니다.

신앙은 서럽게 가는 길입니다. 주님은 장밋빛 핑크로드를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힘들어서 남이 가지 않는 길을 우리가 신앙으로 선택하고 걸어갔을 때에, 그 종말에는 상(賞)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편안하려는 자신과의 긴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야 비로소 믿음의 길이 보입니다. 샬롬~



'목회 > 목양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6-05-07 꽃주일  (0) 2014.04.29
2006-04-30 땅콩박사 이야기  (0) 2014.04.29
2006-04-16 부활의 소망  (0) 2014.04.29
2006-04-09 자족하기를 배우라  (0) 2014.04.29
2006-04-02 과유불급(過猶不及)  (0) 2014.04.29
Posted by makarios
, |

2006-04-16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

바울은 부활이 없으면 우리 신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소녀가 병으로 인하여 손을 절단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의 손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손아,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너로 인하여 바느질도 배울 수 있었고 그림도 그렸지만, 이제 다시는 그런 것을 하지 못하겠구나...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부활의 아침에는 내가 다시 너를 찾을 것이다. 그 때까지만 기다리는 것이다.”

이 소녀의 말은 정녕 사실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아침에 모든 약점을 벗어버리고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다시 아픈 것과 약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될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 소망 가운데서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참을 수 있으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풍성한 은혜의 영광을 바랄 수 있습니다. 애벌레의 짧은 다리로는 절대로 넘을 수 없었던 바위라 할지라도, 나비의 날개를 달고 나면 아주 사소한 장애물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생각하는 것은 현재의 삶을 위한 유익이 있습니다. 현실성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요, 무력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자기만을 보는 것은 틀림없이 ‘낙심’을 불러옵니다. 때문에 신앙인은 현실과 아울러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미래의 궁극적인 승리가 바로 ‘부활’이라는 말로 함축됩니다. 죽음을 정복한다면 더 겁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현재의 삶에 낙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부활을 자신의 소망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불안의 그늘을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06-04-09


우리는 가난합니다. 

내 집이 없어 남의 집에 세를 살고, 내 차가 없어 대중교통을 타며, 여유자금이 없어 빌려주지 못하고, 남들보다 싼 음식점에서 외식을 하기 때문입니다. 내 아이들은 다른 집 아이들처럼 학원에 다니거나 특별한 레슨을 받지 못하고, 내 아내는 성형외과에서 쌍꺼풀 수술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가난’은 정작 우리의 삶에 본질적인 결핍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없어서 행복하지 못하다고 착각하지만, 실상 그것은 교묘한 거짓말일 뿐입니다.

유학생 생활이 힘들다고요? 아닙니다. 유학생 생활이 힘든 것이 아니라 인생의 뚜렷한 목표를 상실한 내 자신의 혼돈이 힘든 것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래도 우리는 끼니를 먹고 문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 중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가난은 생존을 위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존의 위협을 받을 만큼 어려운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상대적 박탈감, 혹은 상대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물질의 빈곤이기 보다는 정신과 영혼의 빈곤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평생을 돈 버는 것에만 헌신하면, 그 사람 인생의 결과는 ‘허무’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족하는 지혜를 예수님께 배우십시오. 그리고 이미 주어진 것을 소중히 여기고 그 안에서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 되십시오. 자기의 행복을 믿음 안에서 가꾸어갈 때에, 우리는 누구나 ‘천국의 시민’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채워갈 수 있습니다.

  

“만일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몸에는 옷을 걸쳤고, 머리 위에는 지붕이 있는 데다 잘 곳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이 세상 75퍼센트의 사람들보다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김혜자, 「꽃으로로 때리지 마라」중에서...)


Posted by makarios
, |

2006-04-02


정서적으로 풍성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남자보다 여자가 더 감성적으로 풍부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지만, 세밀하게 가족들의 필요를 챙기고 돌봐주는 어머니의 역할로부터 생겨나는 열매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화초를 돌보거나, 동물을 키우는 것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나치게 비싼 것을 수집하는 ‘욕심’이 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당한 시간을 들여, 적당한 관계를 가지는 것은 사람의 사람다움을 회복하고 가꾸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나의 돌봄을 통해 살아가는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보게 하고, 또한 삶의 의지를 가지게 하는 귀한 이유입니다.

지난 3월 초에 화분 몇 개를 사왔습니다. 봄을 봄답게 꽃으로 장식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이런 거 몇 개를 돌봄으로 소일하는 것이 저에게도 개인적으로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꽃이라는 것은 까다로워서 빛, 수분, 온도, 양분 중에 하나만 맞지 않아도 금새 지고 맙니다. 특히 교회는 일조시간이 짧았습니다. 밖에 내놓자니 아직은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날씨가 걱정되었고, 안에다 두자니 햇볕이 모자라 점점 힘을 잃어갔습니다.

거의 꽃이 다 떨어질 무렵, 이제는 3월도 끝나가니 온도도 견딜만 할 것이라고 여겨져서 시들은 화분을 바깥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힘을 얻는가 하더니 며칠 지나서 보자 전부 쓰러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새벽 무렵의 찬 공기가 버거웠던지, 아니면 갑자기 늘어난 일조량을 견딜 수 없었던지... 

생명은 무리하지 않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많이 먹인다고 다 키로 가고, 꽃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많이 먹인 것이 오히려 화가 되어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저는 화초를 통해서 목회의 원리, 양육의 원리를 많이 생각합니다. 성도나, 자식이나 목회자의 욕심대로만 몰아부쳐서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도 적당히 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받아들일 만큼 헤아려서 돌볼 때에 그 돌봄은 ‘욕심’이 아닌 ‘섬김’이 되기 때문입니다. 화초는 죽으면 새로 사다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좋습니다만, 어떤 대상은 그렇지 않으니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목회 > 목양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6-04-16 부활의 소망  (0) 2014.04.29
2006-04-09 자족하기를 배우라  (0) 2014.04.29
2006-03-26 신앙을 추구하는 올바른 방법  (0) 2014.04.29
2006-03-19 한국인의 힘  (0) 2014.04.29
2006-03-12 내 침대 밑의 악어  (0) 2014.04.29
Posted by makarios
, |

2006-03-26


마호메트의 일화입니다.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사람들을 이끌고 그는 큰 산 앞에 섰습니다. 산을 가까이 불러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는 아침부터 하루 종일 산을 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해질녘이 되어 말했습니다.

“오늘은 산이 움직이길 원치 않으니 내일 다시 오십시오.”

모여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내일은 꼭 기적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다음날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마호메트는 같은 말을 했습니다. 사흘째 날이 저물어갈 때에, 사람들은 이미 많이 흩어지고 소수의 사람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산을 응시하던 마호메트가 드디어 말을 했습니다.

“산이 내게 오지 않으니 내가 산에게 가야겠구나!”

그리고 그는 산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고 합니다.

하나의 해프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 자체가 함축적인 마호메트의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산이 자기에게 오기만을 바라고 스스로 산을 향하여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스스로 자기를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호메트는 산을 향하여 걸어가는 실천을 통하여 구도자의 바른 자세를, 신앙을 추구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먼저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르심 이후의 삶에 대하여도 우리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대하곤 합니다. 

성경을 살피면 이런 우리의 기대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건 없이 우리를 선택하고 불러주신 하나님은 이후의 삶에 대하여는 우리가 스스로 신앙적인 결정을 내리고 힘써 영적 성숙을 이루어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영적인 열심 없이 살며 하나님의 은혜만 강조하는 것은 분명 신앙의 잘못입니다. 기도생활, 말씀생활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게으름이고, 교만입니다. 자신의 무능을 안다면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목회 > 목양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6-04-09 자족하기를 배우라  (0) 2014.04.29
2006-04-02 과유불급(過猶不及)  (0) 2014.04.29
2006-03-19 한국인의 힘  (0) 2014.04.29
2006-03-12 내 침대 밑의 악어  (0) 2014.04.29
2006-03-05 고생(苦生)은 없다!  (0) 2014.04.29
Posted by makarios
, |

2006-03-19


WBC대회에서 한국이 선전하여 야구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을 꺾고, 일본을 연속하여 이기는 결과를 내어서 온 국민이 흥분하고 있습니다. 마치 월드컵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더욱이 이치로라는 일본의 메이저 선수가 일본 야구를 아시아의 정상으로 자부하며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야구가 적어도 30년은 따라올 수 없다는 오만한 발언을 했었기에 이 승리에 대한 국민적 성원이 더욱 커진 것 같습니다.

이번 대회를 통하여 선수들의 선전도 선전이지만, 김인식 감독이라는 명장의 지휘도 큰 화제(話題)가 되고 있습니다. 기업에서는 벌써 김인식 감독의 리더십을 벤치마킹 하자는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노장(老壯)의 리더십은 소위 ‘인간적 리더십’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김인식 감독은 명령보다는 조언을 하는 감독이라고 합니다. 선수의 부족한 부분이 발견되었을 때에 “다 좋은데, 이건 이렇게 하면 어떨까?”라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는 일본을 연속으로 이긴 후에도 결코 한국 야구가 일본을 앞선 것은 아니라는 겸손한 인터뷰를 한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감독의 영향 때문일까요. 한국 대표팀의 요즘 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박찬호 선수는 사비를 들여 동료 가족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기도 하고, 팀이 승리한 후에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답니다. 이종범과 구대성 같은 선배들이 정말 헌신적이고 한국적인(!) 역할로 경기를 살리고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띄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대회를 지켜보며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히딩크 감독에서도 느꼈던 바이지만, ‘리더’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재발견입니다. 그 한 사람이 팀의 색깔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리더’란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른 하나는, 역시 한국 사람의 파워는 한국적인 분위기 속에서 폭발한다는 것입니다. 사비를 털어 동료들의 가족을 먹이고, 스스로 신이 나서 그 일에 매진할 때 한국 사람의 피 속에는 분명히 폭발하는 어떤 능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건 한국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 즐겨야 합니다. 소위 ‘신나는’ 한국적 정서가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구성원 하나하나가 신앙생활 가운데 기쁨을 체험하고 '신이 나서' 스스로 열심을 내는 교회가 되어 한국사람으로서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들이 주님의 일을 위하여 전폭적으로 발휘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06-03-12


스페인 작가, 마리아순 란다의 책 중에 「내 침대 밑의 악어」라는 글이 있습니다. 주인공 JJ는 평범한 회사원의 독신남입니다. 매일 힘든 일과를 마치고 아파트에 돌아오면 넥타이를 풀며 신발을 침대 밑으로 차 넣었다가 아침에는 그 신발을 다시 찾아 신고 출근을 합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신발을 꺼내기 위하여 엎드렸다가 자기 침대 밑에 커다란 악어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악어를 배고프게 하지 않기 위하여 매일 싸구려 신발을 사다가 침대 밑에 던져 줍니다. 그리고 자신은 침대를 버리고 거실의 소파에서 새우잠을 잡니다. 이상한 것은 이 악어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정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의사를 찾아갑니다. 

의사는 그의 정직한 고백을 듣자마자 그에게 크로커다일 알약과 물약, 그리고 연고를 처방합니다. 말 많은 약사의 말을 빌리면 그는 ‘크로커다일병’에 걸린 것입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하여 현대인의 가장 큰 병이 바로 ‘고독’이라고 진단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눈에만 보이는 침대 밑의 악어처럼 우리는 남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는, 그렇게 하면 비웃음을 당하거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황당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더욱 외롭게 하며 지치게 합니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서 지혜로운 엘레나가 JJ의 병을 순식간에 고치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레나는 JJ가 직장에서 오랫동안 짝사랑 하던 동료인데 그녀가 그의 독신 아파트로 병문안을 온 것입니다.

그리고 JJ가 자신의 침대 밑 악어에 대하여 털어놓았을 때에 그녀는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위로하여 자신도 이미 오래 전에 그렇게 악어와 동거한 적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녀의 위로 속에 용기를 낸 JJ가 그녀와 함께 자신의 악어를 보기 위해 침대 밑으로 엎드렸을 때에, JJ의 악어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수북히 쌓인 구두만이 보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침대 밑에도 악어가 있습니까? 그 악어를 함께 볼 수 있는 사랑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크로커다일 병도 고침 받을 것입니다. 벚꽃의 도시 동경에서 올봄에는 여러분의 옆에 좋은 동행이 생기기를 기도합니다. 전도하기 힘들다면 결혼이라도 합시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06-03-05


다니엘 웹스터(D. Webster 1782~1812 미국의 정치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사였다. 그가 하루는 시골길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반대편에서 허름한 차림의 소년이 다가왔다. 그러자 그는 정중하게 보자를 벗고 소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것을 지켜보고 곁에 있던 동행이 물었다.

“선생님, 저런 코흘리개에게 그렇게 정중한 인사를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혹시 잘 아시는 소년입니까?”

웹스터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저 소년 안에 숨어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네. 그가 장차 성장하여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인지를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 것이라네.”

사람과 짐승의 소중한 차이점 중에 하나는 사람에게만 미래를 보는 희망의 시야가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짐승은 현재의 배부름을 위하여 실컷 먹고 내일은 굶어죽지만, 인간은 오늘의 배고픔을 참고 견디면서도 내일의 추수를 위하여 땅에 곡식을 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희망의 고통은 인간만의 특권이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라는 말의 의미는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다’라는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무조건 잘 참는 것이 인내가 아니라, 참는 과정을 통하여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성경적인 ‘인내’의 의미인 것이다.

미래를 보는 시야가 열려 있는가? 왜 지금 고생하는가? 

나는 목회자로 헌신하는 동안에 낙심하지 않는 법을 배웠는데, 그것은 내가 섬기는 사람들의 현재만 보지 말고 그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될 모습, 미래의 모습을 그려가며 기대하는 맘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러한 밑그림이 있을 때에 현재의 고통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참아야만 하는 인내의 목적을 확실히 인식하게 된다.

무조건 참지 말라. 그것은 비겁함이지 인내가 아니다. 인내란 미래를 잉태한 자의 품성이다. 움츠리지 말라. 지금의 고생은 그야말로 과정이지 종착역이 아니지 않는가! 나 자신의 가능성을 꿈꾸고 곁에 있는 지체들의 가능성을 꿈꾸라. 교회의 미래를 꿈꾸고, 내게 주실 하나님의 축복을 꿈꾸라! 우리 하나님은 꿈이 있는 자를 소중히 여기시는 ‘꿈의 공급자’이시기 때문이다. 꿈이 있는가? 그렇다면 고생(苦生)은 없다! 



Posted by makarios
, |

2006-02-26


프랑스의 화가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1875)는 노르망디의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는 지붕에 구멍이 많이 뚫린 집에서 살았는데 건강이 나빴고, 땔나무도 없었다. 그가 얼마나 어렵게 살았던지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고도 갈 여비가 없어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용기를 내었으며, 이 모든 가난의 환경을 그의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씨 뿌리는 사람>, <추수하는 사람>, <이삭 줍기>, <만종> 등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그의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다. 가난하지만 양심적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석양의 무렵에 조용히 일하던 손을 멈추고 잠시 기도하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따뜻하게 할뿐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지 않는가?

효율적인 교육과 빠른 변화로 인하여 세상이 점점 젊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40대가 사회를 주관했고, 20대는 ‘철없는 아이’로 일컬어졌는데, 이제는 소비의 중심이 10대가 되었으며, 유망한 기업들의 동력은 20대에서 나오고 있다. 그래서 인류의 발전을 이끄는 인물들에게 수여되는 노벨상의 수상자를 보아도, 모든 분야의 수상자들이 점점 젊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유독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상관없는 분야가 있단다. 바로 노벨 문학상이다. 다른 모든 업적의 분야에서는 젊은이의 약진이 두드러지지만, 아무래도 문학만큼은 연배와 경험을 넘어설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미래가 그리 절망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기근과 자연의 재해를 극복하고 서서히 더 부유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바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과연 물질적 환경의 풍요가 인간의 정서적 공허함까지 채워줄 수 있을까? 성경을 빌려와 증언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이미 보고 있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참으로 밝은 미래, 풍요로운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사람다운 사람에게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고난을 이겨낸 강인한 정신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밀레 같은 화가가, 베토벤 같은 음악가가,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문학가가 인류의 정서적 공허함을 채우고 정신을 먹여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신앙을 그림으로, 음악으로, 문학으로, 연극으로, 영화로, 뮤지컬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젊은이를 만나고 싶다. 그게 정말 신앙이다!



Posted by makario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