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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만화와는 달리,
세월호의 선장은 헬기로 구조된 것이 아니라
유유히 배를 타고 나왔지요.
마치 자신이 승객인것처럼 가장하고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왜 이런 파렴치한 무책임이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역사의 교훈'이 없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무책임한 사람은 나중이라도 명명백백하게 그 사실이 드러나고 수치를 당해야 하는데
우리의 역사는 그걸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시끄러운 당장만 버티고 벗어나면 없던 일이 될 것이라는 인식이
사회에 만연하면서... 책임은 미련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리고
영리한 사람들은 슬쩍 비껴가거나 서로 미루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람마다 공(供)도 있고 과(過)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이 있다고 하여서 그 과가 사라져서는 발전을 할 수 없습니다.
공으로 과를 덮어 용서를 하더라도 실체는 드러내야 하고 
사실은 알려져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나쁜 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행태입니다.
언론은 본래 사실을 가지고 권력을 비판하는 기능을 해야 하는데
이제 그 소리가 시끄럽고 귀찮다 하여서 
전부 재갈 먹여 홍보의 수단으로 바꾸려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실체'는 없고 알리고 싶은 '의도'만 서로 난무하는 사회가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을 듣지 못하고
진실을 모르니 오해를 하고, 오해가 자라니 결국 분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장담하면서
상대방을 천하에 몹쓸 버러지로 여기는 손가락질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살아야 하는 이웃인데, 동포인데, 형제인데 말입니다.


이런 짓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유불리를 떠나 사실에 천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아무리 불리하고 아프더라도, 그 사실을 발판으로 삼아
공동체를 한 걸음 앞으로 나가게 하려는 결연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내 편이라도 무책임한 사람은 버려야 합니다.
그 무책임에 대하여 응당 책임을 지게 하고, 수치를 당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책임하고 속임수를 쓰는 사람이 다시는 얼굴을 들 수 없게 해야만
비로소 미래에 있을 무책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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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핸드폰도 입맛대로 골라먹는(?) 재미가 있겠습니다.


우리집에도 지난 전화기가 몇 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음악 플레이, 사진, 간단한 어플 등의 기능은 쓸만하거든요. 이걸 버려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아까와서, 그리고 구입할 때의 고가도 자꾸 생각나서 간직하고 있지요.


그런데 구글의 이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이제 떨어지는 기능만 부품으로 구입해서 조립하면 계속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핸폰의 수명이 혁신적으로 늘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대로 기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매주 새로운 부품을 구입할지도 모르지만요...

아무튼 구글에서 조립 핸폰, 일명 '아라'에 대한 로드맵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을 공유합니다.


1.일정: 아직 개발 초기이며, 첫 모델이 2015년경 나올 것이다.


2.가격: 구글은 저가 엔트리 모델을 만드는데 50불 정도 들기를 바라고 있다. 시장 가격은 파트너들에 의해 정해질 것이다. 구글은 원가 500불짜리 고가 모델도 계획하고 있다.


3.크기: 구글은 오늘 중간 크기의 모델을 보여주었고, 대략 아이폰이나 갤럭시S5와 비슷하다. 미니 사이즈와 갤럭시 노트급의 큰 사이즈도 로드맵상에 있다.


4.모듈: 모듈로 불리는 기능 부품들은 Endo라 불리는 폰의 골격에 전자영구자석을 통해 달라붙는다. 이 자석은 전기 신호를 통해 on/off시킬 수 있고, 자석 성질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전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카메라, 안테나, 배터리, 프로세서 등 어떤 부품도 모듈화 가능하다. 모듈의 외장은 3D 프린터를 통해 원하는 디자인으로 제작 가능하다.


5.모듈 구매: 구글은 플레이 스토어처럼 모듈을 사고파는 사이트를 운영할 것이다. 앱을 구매하는 것처럼 모듈을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있다. 데모 앱, 친구의 폰, 혹은 키오스크를 통해 구매 전에 모듈을 시험해 볼 수 있다.


6.안드로이드 지원: 현재 안드로이드는 모듈 시스템을 지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2015년 초까지 이를 지원하도록 업데이트될 것이다.


7.프로토타입: 올해 9월에 프로토타입이 발표될 것이다. 현 이벤트에서 보여준 프로토타입은 전자영구자석이 작동하지 않고,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다. 파워 버스도 아직 작업 중이다. 더구나 스크린도 깨졌다. (구글은 이런 경우 스크린만을 교체할 수 있다고 재치있게 말했다.)


8.다중기능 모듈: 모듈 하나에 여러 기능을 끼워넣을 수 있다. 물리적인 제한 안에만 들어온다면 문제가 없다.


9.소비자 장점: 아라 폰은 5,6년의 수명을 예상하고 있다. 2년마다 폰을 갈아치우는 대신, 꼭 필요한 최신 모듈로 갈아끼우기만 하면 된다. 목표는 새로운 프로세서나 고화질의 카메라가 아라 사용자들이 사서 쓸 수 있는 모듈 형태로 제공되는 것이다.


10.개발자 장점: 모듈 시스템은 개발자가 폰에 직접 연결되는 기기를 제작할 수 있는 방법이다. 디자인이나  블루투스 등 연결 방식에 신경쓰지 않게 해 준다. 특이한 기능들을 통해 자기 폰을 특화하는 소비자들을 위한 니치 마켓이 생겨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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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이렇게 보내면...
내가 아는 상식과 이해에서는 결코 대한(大韓)도 아니고 민국(民國)도 아니다.
부실과 무책임의 나라일 뿐이다.
그게 뼈아픈 현실이라면... 그래, 아프지만 그걸 인정하는 바탕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걸 부정하고 변명하려는 욕구는 결국 병을 더 깊게 만들 뿐이다.

배와 회사의 책임, 사회적 시스템의 책임, 국가의 책임...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으면 한다. 손가락질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은 먼저 남겨진 가족들을 끌어안고, 구조와 후처리에 지혜를 모으고, 또 다른 다음을 생각해야 할 때이다. 아프지만 그래야 한다. 




하나님,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한 명이라도 더 살아 돌아올 수 있도록 '요나의 표적'을 베풀어 주세요.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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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친남을 아십니까? ]


'엄친아'는 '엄마 친구 아들'의 줄임말이다. 

이 녀석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잘 생기기까지 했다.

그래서 엄친아 때문에 세상의 아들들은 힘들고 불행하다.


그런데 요즘 엄친아를 추월하는 새로운 사람이 등장했다.

이름하여 '와친남'이다. 

이게 뭐냐고? ㅋㅋ 시대에 뒤떨어지셨군. 이것도 모르다니...

'와친남'는 '와이프 친구 남편'의 줄임말이다.

이 사람은 돈도 잘 벌고, 가사노동도 잘 도와주며, 성격도 좋고, 얼굴도 잘 생기고, 심지어 몸매가 섹시하기까지 하다.

엄친아가 그래도 미성년의 불완전체라면, 와친남은 그야말로 사람으로서는 더이상을 상상할 수 없는 완전체이다. 말하자면 성자이고, 슈퍼맨이며, 도민준이다.

세상의 모든 남편들은 이 와친남 때문에 시달린다. 심지어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며, 부부가 파경에 이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엄친아와 와친남은 모두 '비교'라는 부조리한 의식의 산물이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속담처럼, 다른 사람의 가정은 더 행복해 보이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인생은 왜소하게 여겨지는, 극단적 비교의식에서 생겨나는 부정적 자기 비하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하신 일은 실수가 없으시다. 모든 것은 가장 적당하며, 그 안에 숨겨진 고유한 가치와 목적이 있다. 나의 아들도 나에게 가장 적당하고, 나의 남편도 나에게 가장 적당하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면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한 번 뿐인 인생을 어찌 허비하려 드는가? 남과 비교하고, 스스로 좌절하고, 자기 식구를 비하하는 자학을 계속할 필요가 무에 그리 있겠는가... 엄친아보다 내 아들을 귀히 여기고, 와친남보다 내 남편을 귀히 여기며 사는 것이 더 행복할뿐 아니라 옳은 길이 아니겠는가. 


은혜는 단지 종교적 열심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더 격이 높은 차원으로 성장하게 하는 생명이다. 은혜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황금이 아니라 내 안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행복의 원인이다. 은혜는 자부심이며, 담대함이고, 아름다움이다. 그러니 어찌 이 은혜를 우리가 사모하지 않을 수 있으랴!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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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것이 동경에서 보는 올해 벚꽃의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이제는 나무마다 푸른 싹이 돋아서... 꽃과 초록이 어우러지고, 조그만 바람이 불어도 꽃비가 내린다.
새들도 꽃이 지는 것이 아쉬운지, 꽃나무 속에서 가지를 오고가며 소리를 지른다.
돌아오는 길에는 붉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떨어진 나무를 보았다. 
붉은 조각들이 어지러이 떨어져 있는 나무의 모습은 무언가 숙연한 느낌이 들게 했다.

햇살과 꽃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꽃은 초록의 배경에도 좋지만, 파란 하늘색 배경에도 참 좋다.
아직은 순한 초록이라... 눈도 편하고 마음도 느슨하다. 그래서 바람도 성기게 부는가보다...


-- by mAkaRios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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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다 ]


종교개혁자들의 이 말은, 교회가 건전한 신학과 신앙으로 신자들을 훈육하여 자라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하고 실현하는 주요한 수단이며 은혜의 통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교회가 불완전하고 수많은 약함을 가진 경우에도 그러할까? 

교회를 통해 건전한 신앙의 훈육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의 상처가 늘어나며,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커져간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교회를 떠나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하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는 현실을 단지 잘못된 선택이라고만 매도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사람'이 필요하듯이, 교회를 통해 생겨난 신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역시 다른 무엇이 아니라 좋은 '교회'가 필요하다. 

건강한 교회만이 왜곡된 신앙의 물줄기를 바로잡고 신자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어머니가 아닌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아닌 교회들이 많아진 현실이다. 비유를 하자면 도박에 찌들고, 술에 인박히고, 심지어 집을 나간 어머니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결손가정'을 체험하고 있다.

시대적인 비극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고 헌신해야 할 사명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목사가 중요하다. 목사는 교회의 어른[長]이 아니라, 교회의 문지기다. 교회의 파수꾼이다. 교회의 건전함을 위해 부름 받은 종[slave]이다. 그래서 교회의 문제와 목사는 절대로 다른 몸일 수가 없다. 

설사 교회가 '암'에 걸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목사의 암이다. 남의 일처럼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가나안 성도'는 들어봤어도 '가나안 목사'는 들어봤는가? 

말 자체가 모순이고 코미디다. 가끔 목사라는 감투를 좋아해서, 도피와 세탁을 위해 '목사'가 되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야 그야말로 별종이고,  목사는 교회와 함께 태어나고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크고 부유한 교회가 아니라, '좋은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목적으로 하는 교회들이 함께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래야 이 땅에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래야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영광이 회복될 것이고, 교회의 주인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춤 추실 것이다. 그 사명을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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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평을 불평하다 ]


'불평'이라는 말은 아니불(不), 평평할 평(平)을 쓴다.

직역을 하면 평평하지 않다는 뜻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사전에서는 세 가지 뜻을 찾아볼 수 있다.


「1」마음에 들지 아니하여 못마땅하게 여김. 또는 못마땅한 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냄.

「2」마음이 편하지 아니함.

「3」병으로 몸이 불편함


결국 평평하지 않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소리다. 그 소리가 표정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이 불평이다. 그래서 그 불평의 뿌리는 환경이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결국 자기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평은 미숙함의 열매이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미성숙의 결과다. 그래서 사람이 책임감이 없고, 사려가 깊지 못하며, 남의 탓을 잘 하는 '어린' 수준에서 불평은 흔하게 발현된다.

반대로 자기 감정을 잘 갈무리하고 깊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불평을 사라지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한글 성경에는 '불평'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개역개정판에서 6회 등장하는데(아직 원어로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 3번이 시편37편이다. 그리고 그 세 번 모두가 "악한 자(의 형통)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시 37:1, 개정)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시 37:7, 개정)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 37:8, 개정)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의인은 의인의 길을 소신껏 걸어가면 그뿐인데, 그러지 못하고 자꾸 눈을 돌려 악인의 형통과 자기를 비교할 때에, 그만 연약한 마음의 올무에 걸려서 스스로 비참하게 되고, 그 병든 심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불평'의 정체인 셈이다.

결국 불평하는 자신을 불평해야 마땅하다. 누구라도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불평할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상황에서도 성숙한 사람은 불평하지 않고 감사를 꽃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불평'이 흔한 것은 그만큼 조급하고 저열한 신앙의 수준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더 깊은 인격과 신앙으로 자라가려는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나이를 먹고 머리털이 희어져도 불평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불평에 대한 진지한 불평이 필요해 보인다. 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기도할 제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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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아이가 있고, 가족이 함께 웃고, 사랑이 보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그곳이 예배의 자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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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블레이즈델 중령 (군목)

6.25의 참담한 전쟁 속에서 한 사람이 상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고아 1,069명을 제주도로 탈출시켰다.

그는 감찰관의 조사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대답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아무도 하지 않는 세상이 될 때에, 세상은 어둠에 잠긴다.

그 일을 남의 일이라 미루지 말고, 내가 손해를 감수하면서라도 감당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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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정적 경건은 오히려 위험하다 ]

입에 은혜로운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말을 하든지 "할렐루야" "주여" "아버지" "성령님"을 연발한다. 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이런 사람들의 실체도 과연 경건할까?

말이 화려한 사람들일수록 '난독증'이 흔하다. 우선 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 잘 읽지 않는다는 말은, 성경을 읽어도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자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흔하여서 전혀 경건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한 신앙에 도움이 되는 도서와 글을 읽는 것에도 게으르다. 어쩌면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교만함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말을 많이 하는 사람 치고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논리의 모순을 간파하지 못한다. 이미 스스로 그 논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극이 필요하다. 독서와 묵상은 가장 훌륭한 자극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착각'을 일으키지 않도록 우리는 이런 자극을 지속적으로 필요로 한다.

불행한 사실은, 자기모순에 빠진 사람일수록 이런 자극을 멀리 한다는 사실이다. 거의 맹목적인 신념은 그렇게 탄생한다. 그리고 그 신념 속에서 신앙을 말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ego)'의 포장일 뿐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고, 시냇가의 심은 나무가 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듣기 좋은 말로 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고전 4:20, 개정)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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