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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럭시 S4로 촬영했습니다.
장소는 히까리가오까코엔. 장소에 대한 GPS 정보가 몇 장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날짜는 2014년2월 8일과 9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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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카잘스를 기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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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의 12월,

급성 골수 백혈병으로 힘겨운 싸움을 하는 소녀가 있었다.
8살의 Delaney Brown...


그녀는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 속에서도 페이스북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다.
그녀가 페이스북을 통해 응원해주는 사람들과 채팅을 하다가 우연히 말을 했다.



"케롤이 듣고 싶어요"



소녀의 목소리는 인터넷을 타고 퍼져갔다.

그리고 얼마 후에 기적이 일어났다.

4000명이 넘는 시민들, 한 번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꺼져가는 생명의 소녀를 응원하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촛불을 들었고 그녀의 집앞에 함께 모였다.

그리고 마음을 모아 성탄절 케롤을 합창했다.



소녀는 페이스북을 통해 말했다.

"지금 여러분의 노래가 들려요. 사랑해요, 여러분!"

"I can hear you now!!!  Love you!"

21일, 토요일의 멋진 밤이었다.




소녀와 사람들의 사랑은 2013년의 크리스마스를 따뜻하게 했다.

그리고 성탄절, 아침.... 소녀는 따뜻한 추억을 가슴에 담고서 하늘나라로 떠났다.


8살 소녀의 죽음... 침울하고 아프기만 했을뻔한 이 불행이 사람들의 사랑으로 인하여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변했다. 


사람이 위대한 것은 높고 거대한 건축물을 남기거나 달나라에 가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위대한 것은 진실로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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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는 연설했다.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물으라."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그러나 이분들의 역사 앞에서, 과연 조국은 무엇을 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치가들의 입에 '애국심'이라는 말이 오르내리는 동안, 우리는 그 말의 무게를 잃고 말았던것 같다.
언제나 그러하지만, 정말 조국을 어머니처럼 사랑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은 유력하고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이름도 없이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이런 분들이다.
이런 분들의 눈물과 한숨과 뜨거운 피 속에서 오늘날의 조국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나도 내 조국을 더 사랑해야겠다...

--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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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기를,
기업의 목표는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올리는 것이라고 한다.
틀린 말이다. 매우 삐뚤어진 생각이다.

기업의 목표는 사람에게 삶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기업이 사람을 다 죽이고나면 결국 기업도 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을 살게 하는 일이야말로 기업이 장수하는 비결이며, 번영하는 비전이다.
사람을 비참하게 하는 기업은, 황금알을 빨리 꺼내기 위해서 거위의 배를 가르는 미련한 도살자와 같다.

또 하나의 가족이, 요즘 영화로 시끄럽다.
나 같은 사람은, 세계일류기업보다 이류라도 좋으니 사람을 사람답게 여기는 기업이 되면 좋겠다.

송창근 회장님, 멋지다!

--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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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아름답다. 아름답다.
그리고 신기하다...

--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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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많이 배우지 못해서 못 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분의 삶의 자세에서, 난 누구보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보게 된다.
명품은 이분의 떡이 아니라 이분의 인생이다.

-- by mAkaRios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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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와서 외부의 교회를 다니다 보니, 교회마다 반듯해 보이는 성도들이 있다. 

그런 성도들을 보는 것은 기쁨이고 감사이다. 또한 나의 마음에 부러움도 슬쩍 일어난다. 왜 우리 교회에는 저런 성도가 없을까? 하는 생각에 슬퍼지기까지 한다.

목사에게 성도는 그야말로 애증의 대상이다. 깊이 사랑하지만 끊임없이 아파하게 되는 이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그것과 비슷하다. 잘 되면 계속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불안하고, 못 되면 그 못 되는 것이 자기 탓인 것만 같아서 아프다.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마음에는 늘 뭔가 아쉬움이 끓어 넘치는 것도 사실이다.


‘엄친아’라는 말이 있지 않나. 엄마의 친구 아들은 슈퍼맨이란다. 

공부도 잘 하고 말도 잘 듣고 거기다가 잘 생기고 운동도 잘한다. 심지어는 돈도 잘 벌고 결혼도 잘 한다. 

물론 엄마의 모든 친구의 아들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항상 자기 아들을 비교하는 대상으로 여러 사람 중에서 최상의 장점들만을 가져오기 때문에 생겨나는 모순이다. 

모든 것을 잘하고 모든 면에서 탁월한 사람은 있을 수 없는데, 자기 자식에게는 그 불가능한 소망조차 무모하게 품는 것이 부모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부모 마음에는 자식이 흰 머리가 생겨도 항상 ‘어린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곧잘 하는 성도라도 목양하는 목사의 눈에는 부족함이 보인다. 

이 부분만 좀 고치고 달라지면 참 좋겠다는 소망이 있다. 이것이 목사의 욕심이라면 욕심이고, 소망이라면 소망이다.

이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성도에게 참 유익하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성도를 망치는 이유가 된다. 목사의 기대를 통해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심하고, 분노하고, 망가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참 어려운 것이 목회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만 하는 것이 목회자의 처신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이미 알거니와, 모든 그리스도인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살다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게 되어 있다. 밖에 있는 성도들이 매너 좋고 훌륭해 보여도 막상 같이 한 두 해 신앙생활을 해보면 성깔 죽은 사람이 드물고, 언행에 모순이 없는 사람이 없다. 그것은 목사들도 마찬가지다. 가끔 보는 관계 속에서는 다 멋지고 훌륭해 보이지만, 겉옷을 벗고 속살을 마주하면 인간은 다 특유의 자기 냄새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한 가지 결론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옳으시다. 그분이 만나게 하신 섭리에 실수가 없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부족함이 없는 법이다. 당장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그 사람도, 내게 보내시지 않고 거기 두신 것은 거기가 가장 적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지금 만족하지 못하는 그 사람들이라도, 그들을 내게 보내신 것은 그들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야기는 성경으로만 들려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가장 확실한 은혜의 통로인 것은 확실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온 세상에 가득 차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환경과 만남을 통해서도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고 골방에서 신비한 체험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주신 현실을 지혜롭게 잘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면 거기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 감히 말하건데, 정말 늘 그러하다.


하나님을 믿어드린 후에, 내게는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조차 답답해 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이해하려고 안달하는 것조차 잊어가고 있다. 

어차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과 뜻은 내 적은 머리와 마음으로 다 담을 수 없다. 그분은 광대하시다. 그뿐만 아니라 선하시다. 나보다 훨씬 나를 잘 아시는 그분이 선하시다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선한 것이다. 그것은 이해의 차원에서 나오는 결론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에서 나오는 결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러울 것도 없고, 안타까울 것도 없다. 안 주신 것에도 이유가 있고, 주실 것이라면 반드시 때에 적절하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기다림이라는 것이 그렇다. 기다린다고 마음을 먹고 기다리면 너무 지루하고 힘들다. 제일 잘 기다리는 방법은 기다린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마음 한편에 갈무리하고 다른 일에 우선 몰두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기다림의 시간에 제일 적당한 선물이 고난이다. 고난을 만나면 사람은 기다림을 잊는다. 고난과 싸우는 것에 몰두하여 세월을 훌쩍 보낸다. 

그러는 동안에 약속과 소망을 잊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잊어도 잊지 않는 분이 계시다.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약속은 신실하며 언제나 적당하다. 가장 빛나는 타이밍에 가장 선한 방법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고난은 놀라운 은총이다. 하나는 기다림을 채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시간을 통해 내적인 성장을 돕는 것이다. 하여,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저주가 아님이 분명하다.


남의 인생을, 남의 목회를, 남의 형편을 부러워하지 말라. 

가까이 보면 다 거기서 거기에 불과하다. 소망의 대상은 환경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오직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만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신다.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고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다른 모든 것은 부수적이다. 

그래서 시편기자의 이 외침은 우리를 뭉클하게 한다...


(시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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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고통을 몰아내주지 못한다면
철학은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

-- 에피쿠로스의 경구 --


꼭 실용적인 입장이 아니라도, 실용성에서 완전히 이탈된 지식이란 그 가치를 인정하기 힘든 법이다.
성경에서 '알다(know)'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심지어 '성관계'를 암시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만큼 지식과 체험은 그 경계를 명확하게 단정하기 힘든 공통의 무엇이다.

선지자가 '하나님을 알자!'라고 외쳤을 때에, 그것은 당연히 머리와 지식의 권면만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옳다. 그것은 다분히 경험적이다.


신앙이 현실을 지배하고 해결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것이 한 가지 이유라고 감히 주장한다. 그것은 신앙이 가지는 변곡점, 그러니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경험하는 것의 전환점을 지나지 못한 까닭이다.

물론 이렇게 신앙의 차원이 달라진다고 하여서 항상 기적이 일어나고 바라는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램프의 요정, 지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곡점을 지나서 하나님을 경험한 신앙은, 적어도 무력하지 않다.
일단 이 전과 후로 사람이 변한다. 옛날의 소원이 더이상 소원이 아닌 것이 되고, 옛날에는 결코 바란 적이 없는 것을 너무도 간절히 바라는 변화가 생겨난다.

그리고 소원의 변화는 응답과 직결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소원을 가지는 자는, 간단하게 말해 하나님의 동업자이다. 하나님과 동업하는 자의 사업이 망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라는 자의 소원이 실패할 수 있겠는가?


많은 경우에 있어, 신앙의 문제는 교활함이다.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그 실체는 자기의 욕망에 뿌리 내려 있는 소원이 사람을 주장할 때에, 강렬한 소원이 심지어 하나님마저 압도하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거룩해 보이는 소원과 상관 없이 그 사람의 내면은 전혀 변화하지 않으며, 변하고 성장해야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저 자기의 소원이 거룩하기 때문에 자기도 거룩하고, 그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맹목적인 주장이 신앙의 모든 과정을 집어 삼키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소원을 가졌다고 그 사람의 실체가 거룩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런 신앙의 당연한 결과는, 아무 것도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우상'이라는 말의 어원은 '헛되고 허무하다'라는 의미이다. 없는 신을 향해 빌고 정성을 드렸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없는 것이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모양은 거룩하지만 전혀 거룩함이 없는 소원이 심지어 신앙과 하나님을 지나쳐서 질주했을 때에, 그 결과가 유의미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주여', '거룩', '교회', '사명' 등의 이름을 가진 우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 하나의 '철학'은 될 수 있어도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아닌 것이다.


참된 신앙은 다르다. 하나님을 경험한 신앙은 현실의 변화 이전에 자신의 변화를 겪으며, 또한 변화된 자신을 통해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것이 반드시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밖에 없는 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사람의 소원은 실로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원인이며, 이미 잉태된 미래이다. 어떤 역경과 방해가 있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이는 하나님의 열정이 바로 그것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언할 수 있다. 무력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사람과 현실 사이에 상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반드시 현실로 나타나는 '능력'으로 신앙은 증명되게 되어 있다. 잔잔한 수면에 돌이 떨어지면서 파장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늘의 신앙이 현실에 들어오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무력한 신앙, 변화 없는 신앙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열렬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을 때에, 그 원인을 고요히 말씀 속에서 진단하고 자기를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 마땅한데,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이미 무력한 신앙에 길들여져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수용은 절대로 믿음이 아니다. 물론 어떤 소원은 포기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신앙이 우리로 소원을 포기하게 할 때에는 오히려 더 열렬한 감동을 준다. 하나님께서 '포기'를 인도하실 때에, 그 포기의 과정은 더 깊은 깨달음과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케 한다. 냉소적이고 무력해지는 결과는 절대로 은혜가 아니다.


신앙을 오해하고, 오해한 신앙에 길들여진 신자들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들은 정말 우상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긴다. 열정은 간혹 보지만, 감동도 없고 보람도 없다. 왜 그렇게 믿는지 모르겠다. 나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신데...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오해하는 일이 너무 화나고 때로는 슬프다.

익숙한 광고카피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무엇을 기대하였든지간에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정말 우리의 신앙에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고 기대하였든지간에, 하나님은 언제나 그 이상이시다. 그분이 주는 위로와 평강, 은혜는 말로 형언할 수 없고, 그분 안에 있는 응답은 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한다. 때문에 신앙은 현실이다. 경험이다. 능력이다. 
이것에 아직 동의할 수 없다면, 이제라도 신앙을 찾아 나서시라. 진실로 열심을 가져 보시라. 진심으로 하나님께 묻고 대답을 기대해 보시라. 마음의 밑바닥부터 신앙을 다시 시작해 보시라. 무엇보다 성경을 진심으로 펴고 민낯으로 말씀 앞에 서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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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에르치노 /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왕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만....

성령의 감동이 일시적일 때에, 그것은 전혀 신앙의 성숙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속담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삼상 10:12) 사울 왕이 한 때는 성령의 감동으로 가득 차서 선지자들처럼 예언을 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충만함을 순종과 경건으로 지속하지 못했고, 결국 과거의 경험만 붙들고 살아가는, '나도 한 때는 그랬었지'라는 추억의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성경이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것은, 심지어 그는 악신(惡神)이 들려 고뇌하며 정상을 벗어나는 반미치광이로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제 정신이었을 때는 너무나 인격적이고, 따뜻하고, 신실한 것 같았던 그는, 악신의 충동과 지배 하에서는 폭력적이고, 비열하며, 교만한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입니다.

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12: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 본문을 가지고, 귀신론에 입각하여 귀신의 성품을 논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본래 초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45절에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악한 세대'의 결론에 대한 예고입니다. 여기서 세대는 곧 '사람'입니다.


밥을 하다 실패하면 삼층밥이 됩니다. 밑에는 타고, 중간은 익고, 위는 설익거나 생쌀이 그대로 있는 것이 삼층밥입니다. 쌀도 아니고 밥도 아닌 이것은, 먹자니 탈이 나고 버리자니 아까운 '무엇'입니다. 소위 계륵(鷄肋)이라고나 할까요...


신앙도 삼층밥 신자, 혹은 계륵신자가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울왕입니다. 그는 믿었으나 믿다가 말았습니다. 성령을 경험했지만, 악신도 경험했습니다. 

말하자면, 성령의 감동 속에서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죄를 멀리하며, 신랑을 위해 준비하는 신부처럼 살아야 할 신자가 악한 충동에 넘어져서 자기의 포악한 성질을 내지르고 욕망을 좇았을 때에, 악한 사탄은 그 기회를 틈타 그의 마음과 인격을 지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그릇된 신앙생활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의 특징은, 가책은 있으나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런 날들이 더 오래 지속되면, 바리새인들처럼 양심마저 굳어져서 그 '가책'마저도 사라지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며 거짓을 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던 산헤드린 회의이고, 대제사장이고,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던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가장 신앙적인 외양 속에 가장 추악한 죄가 역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정거장이 아니라 집입니다.

'벧엘(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이 그런 의미이고,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로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 '보헤사(위로자, 돕는 분)'을 보내신 것은, 사울 왕처럼 잠시 신비로운 경험을 가지게 하심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중심은 역시, 방언도 아니고 병 고치는 은사도 아니고, 경건의 지식도 아니고, 오랜 경륜은 더더욱 아닙니다. 

신앙의 중심은 냉혹하게도 '현실'입니다.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느냐? 하는 바로 그 질문과 대답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살피고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모르는 신앙인이 너무 많습니다. 큰일입니다. 여전히 자기가 살아서 활어(活魚)처럼 퍼득거리면서, 심지어 자신이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까지 합니다. 

돈도 좋고 하나님도 좋습니다. 그럴 수 없다고 분명하게 못 박은 예수님의 말씀 쯤은 들리지도 않습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말씀도 들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화내는 것은 '정의'이며, 당연한 것이며,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약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말씀 앞에 굴복하지 않는 이런 신자의 모습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미신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호와 축복을 빨아 먹으려는 '진딧물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하는 것은, 가족의 개념이 아니라 기생(寄生)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항상 하나님이 불편하고, 섭섭하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병든 신앙에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의 가족이 되십시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마음의 분노를 성령의 지배 아래 굴복시키십시오. 사랑을 좇아 행하고, 자기를 돌아보아 겸손하십시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마음을 버리지 마십시오. 가난한 마음이 복된 마음입니다. 신앙은 자기에 대한 연민과 갈망이 없어지면 쉽게 타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눈물이 마른 신자는 건강한 신자가 절대로 아닙니다. 

기도의 골방에서 자기를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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