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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다 ]


종교개혁자들의 이 말은, 교회가 건전한 신학과 신앙으로 신자들을 훈육하여 자라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하고 실현하는 주요한 수단이며 은혜의 통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교회가 불완전하고 수많은 약함을 가진 경우에도 그러할까? 

교회를 통해 건전한 신앙의 훈육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의 상처가 늘어나며,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커져간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교회를 떠나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하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는 현실을 단지 잘못된 선택이라고만 매도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사람'이 필요하듯이, 교회를 통해 생겨난 신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역시 다른 무엇이 아니라 좋은 '교회'가 필요하다. 

건강한 교회만이 왜곡된 신앙의 물줄기를 바로잡고 신자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어머니가 아닌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아닌 교회들이 많아진 현실이다. 비유를 하자면 도박에 찌들고, 술에 인박히고, 심지어 집을 나간 어머니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결손가정'을 체험하고 있다.

시대적인 비극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고 헌신해야 할 사명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목사가 중요하다. 목사는 교회의 어른[長]이 아니라, 교회의 문지기다. 교회의 파수꾼이다. 교회의 건전함을 위해 부름 받은 종[slave]이다. 그래서 교회의 문제와 목사는 절대로 다른 몸일 수가 없다. 

설사 교회가 '암'에 걸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목사의 암이다. 남의 일처럼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가나안 성도'는 들어봤어도 '가나안 목사'는 들어봤는가? 

말 자체가 모순이고 코미디다. 가끔 목사라는 감투를 좋아해서, 도피와 세탁을 위해 '목사'가 되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야 그야말로 별종이고,  목사는 교회와 함께 태어나고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크고 부유한 교회가 아니라, '좋은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목적으로 하는 교회들이 함께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래야 이 땅에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래야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영광이 회복될 것이고, 교회의 주인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춤 추실 것이다. 그 사명을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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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평을 불평하다 ]


'불평'이라는 말은 아니불(不), 평평할 평(平)을 쓴다.

직역을 하면 평평하지 않다는 뜻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사전에서는 세 가지 뜻을 찾아볼 수 있다.


「1」마음에 들지 아니하여 못마땅하게 여김. 또는 못마땅한 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냄.

「2」마음이 편하지 아니함.

「3」병으로 몸이 불편함


결국 평평하지 않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소리다. 그 소리가 표정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이 불평이다. 그래서 그 불평의 뿌리는 환경이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결국 자기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평은 미숙함의 열매이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미성숙의 결과다. 그래서 사람이 책임감이 없고, 사려가 깊지 못하며, 남의 탓을 잘 하는 '어린' 수준에서 불평은 흔하게 발현된다.

반대로 자기 감정을 잘 갈무리하고 깊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불평을 사라지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한글 성경에는 '불평'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개역개정판에서 6회 등장하는데(아직 원어로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 3번이 시편37편이다. 그리고 그 세 번 모두가 "악한 자(의 형통)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시 37:1, 개정)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시 37:7, 개정)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 37:8, 개정)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의인은 의인의 길을 소신껏 걸어가면 그뿐인데, 그러지 못하고 자꾸 눈을 돌려 악인의 형통과 자기를 비교할 때에, 그만 연약한 마음의 올무에 걸려서 스스로 비참하게 되고, 그 병든 심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불평'의 정체인 셈이다.

결국 불평하는 자신을 불평해야 마땅하다. 누구라도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불평할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상황에서도 성숙한 사람은 불평하지 않고 감사를 꽃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불평'이 흔한 것은 그만큼 조급하고 저열한 신앙의 수준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더 깊은 인격과 신앙으로 자라가려는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나이를 먹고 머리털이 희어져도 불평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불평에 대한 진지한 불평이 필요해 보인다. 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기도할 제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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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아이가 있고, 가족이 함께 웃고, 사랑이 보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그곳이 예배의 자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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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블레이즈델 중령 (군목)

6.25의 참담한 전쟁 속에서 한 사람이 상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고아 1,069명을 제주도로 탈출시켰다.

그는 감찰관의 조사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대답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아무도 하지 않는 세상이 될 때에, 세상은 어둠에 잠긴다.

그 일을 남의 일이라 미루지 말고, 내가 손해를 감수하면서라도 감당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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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정적 경건은 오히려 위험하다 ]

입에 은혜로운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말을 하든지 "할렐루야" "주여" "아버지" "성령님"을 연발한다. 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이런 사람들의 실체도 과연 경건할까?

말이 화려한 사람들일수록 '난독증'이 흔하다. 우선 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 잘 읽지 않는다는 말은, 성경을 읽어도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자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흔하여서 전혀 경건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한 신앙에 도움이 되는 도서와 글을 읽는 것에도 게으르다. 어쩌면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교만함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말을 많이 하는 사람 치고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논리의 모순을 간파하지 못한다. 이미 스스로 그 논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극이 필요하다. 독서와 묵상은 가장 훌륭한 자극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착각'을 일으키지 않도록 우리는 이런 자극을 지속적으로 필요로 한다.

불행한 사실은, 자기모순에 빠진 사람일수록 이런 자극을 멀리 한다는 사실이다. 거의 맹목적인 신념은 그렇게 탄생한다. 그리고 그 신념 속에서 신앙을 말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ego)'의 포장일 뿐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고, 시냇가의 심은 나무가 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듣기 좋은 말로 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고전 4:20, 개정)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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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에서 자유하기 ]


실패는 엄연히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은 실패를 통해 더 완성되고 성숙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두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실패하면 고생해야 하니까, 또한 남들이 무시하는 시선으로 볼까 봐, 그리고 한 번의 실패가 거듭 반복되어 인생 자체를 망가뜨리게 될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도 무시할 내용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인생을 살고 불행에 빠지는 사람들도 현실에는 적지 않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은 이익보다 손해가 많습니다.

인생을 소극적이게 하고,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행복은 성공의 마지막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의 과정 속에서도 마땅히 찾아져야 하는 것인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그 과정을 행복하지 못하게 흔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의 한 구석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면, 나중에는 아무 것에도 도전하지 못하는 무력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제일 불행한 인생은 실패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한 채 끝나는 사람의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도전하고 실험을 반복하고, 자기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 자기를 바꾸고 목표에 이를 수 있다면, 실패 또한 아름다운 과정의 한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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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old)한 전자제품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돈이 드는 시대입니다.
특별히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돈이 듭니다. 세탁기 하나에 5천엔(약 5만원) 정도 듭니다. 공짜로 가져가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정말 괜찮은 물건이라야 리싸이클샵 등을 통해 공짜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환경부에서 전자제품에 대한 무료수거를 실시하고 있군요. 잘 이용하면 좋을 것 같아서 이 블로그를 통해 공유합니다... 

--- by mAkaRios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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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에 

전동훈, 최지은 집사님 가정이 이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적지 않은 시간을 출산으로 남편과 아내, 딸이 떨어져 지냈는데

이제 이렇게 함께 지내는 것을 보니 너무 흐뭇합니다.

태어난 공주님 이름이 "전하라"입니다.

엄청 복음적인 이름이지요... ^^

꼭 그 이름답게 키울 것이라 믿고 응원합니다.

정성들여 준비한 음식 정갈하고, 맛있고, 웰빙이었습니다.

이제 예배 후에, 그 집에 평강이 임하고

항상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전해드린 말씀처럼,

향유 내음 가득한 집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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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내낼 수 없는 것들 ]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가 있다.

두 엄마가 비슷한 시기에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아기가 죽고 말았다. 두 엄마는 서로 살아있는 아기가 자신의 아기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난감한 이 사건은 결국 솔로몬의 재판장에까지 이르렀다.

왕은 고민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판결을 내렸다. 즉시로 아기를 둘로 갈라서 두 엄마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라는 것이다. 병사는 칼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두 엄마가 각각 뛰어나오며 외쳤다.


“제가 포기하겠습니다. 아기를 살려 주세요.”

“아닙니다. 왕의 현명하신 판결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엄마’와 ‘엄마노릇’은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르다.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도 있고, 품에 안아 잠을 재울 수도 있다. 더한 것도 흉내는 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다. 사랑은 결코 흉내로 되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 가지 영원한 것을 찬양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세 가지는 늘 의심의 구름에 덮여 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 가지를 흉내 내며 자기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비루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무례하며 폭력적인가? 또한 소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욕망은 우리 가운데 얼마나 흔한가? 믿음이라고 주장되는 미신과 독선은 이미 바닷가의 모래처럼 세상에 가득하다.


그렇다고 가짜가 진짜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솔로몬의 재판을 통해 보여지는 바와 같이, 진짜와 가짜는 결정적 순간의 선택을 통하여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흉내로 되지 않는 것이다.

대충 비슷하게 모양이나 흉내 내면서 살다가는 언젠가 반드시 큰 코 다칠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무는 그 열매로 자기를 증명하는 법이다. 믿음을 말하고, 소망을 설계하고, 사랑을 주장할 수 있어도 그런 것만으로 열매는 결실하지 못한다.


나는 내가 궁금하다. 나는 과연 진짜일까? 하나님의 재판장에 올라갔을 때에, 나는 과연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내 열매는 비슷한 것이 아니라 진짜일 수 있을까?

무수한 말들 속에서 고민한다. 주장과 지식이 실체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 속에서 깊은 갈등을 반복한다. 내가 바라보았던 것을 과연 손에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진실로 내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발견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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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ntina Lisitsa - 발렌티나 리시차


유튜브에 자신의 연주 동영상을 올려 클래식 음악계에서 세계적 스타가 된 우크라이나 출신의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화려한 기교와 힘, 집중력으로 폭풍처럼 몰아치는 연주를 보여주는 리시차는 피아노의 검투사라 불리기도 한다. 고난도의 곡을 엄청난 힘과 무서운 속도로 몰아치며 연주하여 듣는 이를 압도하고 현란한 손동작에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든다.

그녀의 신작앨범 : 
일본의 아마존에 검색하니, 2014-04-08 발매예정으로 나온다.
http://goo.gl/iZ6gmj

아이튠에서도 디지털음반으로 만나볼 수 있다.
http://goo.gl/JAxGv2





들어보니, 클래식 음반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뉴에이지 정도 되는거 같다.
대중성을 생각한 것일까... 전체 런닝 타임은 1시간17분54초. 모두 25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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